박헌영(朴憲永, 1900 ~ 1956)은 일제하 공산주의 운동가로 해방 후 남한에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책임비서가 되어 활동하다 월북하여 북한 부수상을 지내다 숙청, 처형 당했다.


신탁통치 반대에서 찬성으로 돌변

신탁통치에 대한 소식은 1945년 10월부터 간간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여러 정당들은 일찍부터 반대입장을 표명하고 있었다. 10월 26일 각정당행동통일위원회에서는 신탁통치 반대를 결의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데, 조선공산당의 정태식(鄭泰植)김형선(金炯善)도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고 1945년 12월 27일부터 국내언론에 보도되자, 좌우 가릴 것 없이 대다수 정파가 반탁을 표명하고, 반탁운동이 전국적으로 거세게 일어났다. 조선공산당 내에서도 반탁 기류가 상당했으나, 다른 정파와는 달리 공식적인 입장표명은 없었고,[1] 정태식(鄭泰植)이 개인적으로 반탁입장을 밝혔다.[2]

한편 김구와 임정세력이 주도하여 1945년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信託統治反對國民總動員委員會)」에 박헌영도 홍명희(洪命憙) 등과 함께 참여하여 중앙위원이 되었고[3], 이튿날인 31일 상무위원(常務委員)에 선정되었다.[4] 이를 위한 준비모임인 12월 28일 밤의 경교장 모임에 박헌영도 참석했다는 강원룡 목사의 증언이 있다.[5] 중앙위원에는 북한에 있는 조만식(曺晩植), 김두봉(金枓奉), 김무정(金武亭)도 들어 있는데 이들이 실제로 참여했다고 볼 수는 없으므로 박헌영의 이름이 들어있는 것만으로 그의 참여가 사실이라 단정할 수 없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튿날 상무위원에까지 선정되었으므로 그의 이름을 임의로 집어넣은 것으로 보기는 무리이다. 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의 이름이 본인 동의없이 임의로 들어간 것이라면 공산당 측의 거센 항의가 있었을 것이나 그런 흔적은 없다.

조선공산당 서울시 위원회에서는 12월 31일 탁치반대 전단을 살포하였다.[6] 같은 날 반파쇼공동투쟁위원회결성총회에 역시 공산당 서울시 위원회가 참여하였고, 박헌영의 심복인 이현상(李鉉相)이 동회의 취지설명과 결성에 이르기까지의 경과보고를 했다.[7]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는 1846년 1월 1일 오후 2시부터 기자단과 회견하고 탁치안을 절대 배격할 투쟁방침을 선명한 담화를 발표했다.[8]

미군정의 기록에 의하면 하지 장군이 박헌영을 1월 1일에 만났을 때는 강경한 반탁 입장이었으나 1월 3일 다시 만났을 때는 입장이 정반대로 바뀌어 있었다고 하였다.[9][10].

1월 2일 공산당중앙위원회는 모스크바 3상회의 합의사항을 지지(찬탁)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책임비서 박헌영이 주도했을 것이다.[11][12] 공산당은 하루만에 전날의 반탁에서 찬탁으로 입장을 180도 선회하였다.

이날을 기준으로 모든 좌파들이 연말의 반탁에서 찬탁으로 입장을 표변하였다[13]. 1월 3일 예고되었던 좌익들의 반탁집회는[14] 당일날 지도부에 의해 찬탁집회로 변경되어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15][10][16] 좌파들은 입으로만 민주주의니, 인민의 뜻을 받드느니 하며 떠들 뿐, 실제로는 인민들은 자신들의 지시를 무조건 따라야 하는 졸로 여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좌파들이 1월 1일까지 반탁입장을 견지하다 1월 2일부터 갑자기 찬탁으로 돌아선 배경에는 소련의 지시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당시 미군정도 그렇게 보고 있었다.[17].


박헌영이 이 무렵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하고 소련의 지령을 받아왔다고 증언한 사람이 많이 있으나, 사람마다 방북했다는 날자가 제각각이고, 명백한 문헌근거는 없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알기 어렵다. 전 노동당 간부 박병엽(朴炳燁, 1922 ~ 1998)은 박헌영이 신탁통치에 대한 소련의 뜻을 파악하려고 12월 28일 밤 비밀리에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가서 지침을 받고, 신년 행사에 참석한 후 1월 1일 밤 3.8선을 넘어 1월 2일 서울로 귀환했다고 증언했다.[18][19] 하지만 이 기간은 위에 언급한 다른 기록들과 상충하는 점이 많다. 이 일에 관해서는 당시 서울의 소련 부영사였던 아나톨리 샤브신의 부인이자 영사관 도서관장이었던 샤브시나(쿨리코바)의 증언도 있고[20], 전 북한 외무성 부상 박길용(朴吉用, 1920 ~1997)과 소련 군정 핵심 인사 레베데프 소장, 메클레르 중좌의 증언도 있지만, 박헌영이 방북했다는 시기는 제각각이다.[21]


박헌영 본인이 공개적으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한다면서 찬탁 입장을 밝힌 것은 1월 5일 11시에 열린 내외신 기자회견에서이다. 이 회견에서의 발언 때문에 큰 논란이 벌어지고, 공산당 지도자로서의 그의 위상도 큰 타격을 받는다.

소련이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선택한 것이 명백해진 1946년 이른 봄에는 남한에서도 김일성의 영향력이 박헌영을 뛰어넘게 된다.[16][10]


정판사 위폐사건

박헌영은 1946년 3월말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참석차 서울에 온 소련대표 스티코프에게 상당한 액수의 자금 지원을 요청하였다. 조선공산당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국내에서 소련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에 지나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위 서한들에 의하면 박헌영의 요청이 이오시프 쉬킨(Iosif Shikin, 1906~1973)을 통해 불가닌(Nikolai Bulganin, 1895~1975)을 거쳐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외상) 몰로토프(Vyacheslav Molotov, 1890~1986)에게로 올라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자금 부족 상황이 공산당 불법화를 초래한 정판사 위폐사건의 계기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23]


김일성과 박헌영의 비밀회동

전 노동당 간부 박병엽(朴炳燁, 1922 ~ 1998)의 증언에 의하면 박헌영은 해방 직후 남한에서 정치활동을 하는 동안 6차례 비밀 방북하여 김일성과 회동했다고 한다.[18]

제1차 회동 (1945년 10월 8일~9일)
제2차 회동 (1945년 12월 29일~ 46년 1월 1일)
제3차 회동 (1946년 4월 3일~ 6일)
제4차 회동 (1946년 6월 27일~ 7월 12일경)
제5차 회동 (1946년 7월 16일경~ 22일경)
제6차 회동 (1946년 10월 11일과 그 이후)

1차 회동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를 합의했고, 4차 회동은 김일성과 박헌영이 함께 모스크바로 가서 스탈린에게 지도자 면접 시험을 본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 것이다.[24][25] 5차 회동은 미군정 기록에 7월 22일에 박헌영이 평양을 방문하고 서울로 돌아왔다고 나오므로 확인이 된다.[23] 3차 회동은 다른 기록에서 확인이 되지 않고 있고, 6차 회동은 스티코프 일기(아래 참고)에 박헌영이 남조선을 탈출하여 10월 6일 북조선에 왔다고 했으므로 별 의미가 없다. 2차 회동이 문제인데, 위에서 말한대로 당시 박헌영이 방북하여 소련으로부터 찬탁지시를 받고 왔다는 증언이 많으나 날자가 제각각이고, 박병엽이 주장하는 방북 기간에는 남한에서 활동한 기록이 다수 있어 상충한다.

4차 회동 당시 김일성과 박헌영이 스탈린에게 지도자 면접시험을 보게된 것은 김일성이 지도자로 결정된 것에 대해 박헌영 측이 집요하게 이의 제기를 하여 이루어진 것이나, 두 사람을 만나본 스탈린은 김일성을 그대로 지도자로 임명하고, 박헌영에게는 격려의 말만 해 주었다. 애초에 박헌영의 불만을 달ㄹ기 위한 요식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박헌영은 서울에서 입만 열면 남한의 우파 세력은 파시스트라고 비난하고 공산주의자들만 진정한 민주주의자인 것처럼 떠들고 다녔는데, 스탈린에게 지도자 임명을 받는 것이 박헌영이 주장하는 진정한 민주주의인 셈이다.


북한 소련군정 총지휘자 스티코프와의 관계

스티코프는 연해주 군관구 군사위원으로 북한 소련군정 총지휘자였는데, 박헌영 등 남한의 공산주의자들도 수시로 그의 지령을 받고 있었다. 2004년 국사편찬위원회가 간행한 ≪스티코프 일기≫[26] 에 의하면 박헌영은 1946년 10월 7일 관 속에 들어가 북한으로 탈출했고, 수시로 스티코프에게 행동 지침을 내려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도 소련이 자신들의 대리인으로 선택하여 내세운 김일성 못지 않게 소련의 지시를 따르는 사람인 것이 드러난다.

  • 쉬띄꼬프일기 Ⅰ부 1946년 9월 9일
    남조선 정세를 검토하고 [남조선 좌파에 대한] 지원 대책을 강구한다.
    로동당의 당원 수는 약 40만 명이다.(377,000명) 합당이 임시적인 조치라는 말들이 계속되고 있다. 이론적인 문제들에서 명확하지 못한 점들이 많다.
    박헌영은 당이 사회단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1946년 9월 8일자 서울의 라디오방송 보도에 의하면 박헌영과 이주하(공산당 제2비서) 및 이강국(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 사무국장)은 법률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박헌영 등에 대한 체포령을 말함)

  • 쉬띄꼬프 일기 Ⅰ부 > 1946년 10월 7일
    이그나찌예프가 보고하다. 1946년 10월 6일 박헌영이 남조선을 탈출하여 북조선에 도착했다. 박헌영은 9월 29일부터 산악을 헤매며 방황했는데, 그를 관에 넣어 옮겼다. 박헌영이 휴식을 취하게 하라고 지시를 내리다.

  • 쉬띄꼬프 일기 Ⅱ부 > 1946년 12월 25일
    박헌영이 김규식에 대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묻고 있다. 그는 이승만과 김구의 정체를 대중 앞에 폭로한 것처럼 김규식의 정체도 폭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흥분하지 말고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고 지시하다.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그의 옳지 못한 결정들을 근거로 폭로해야 한다고 조언하다.


서울의 소련 부영사 샤브신과의 관계

아나톨리 샤브신과 그의 부인이자 영사관 도서관장이었던 파냐 이사악꼬브나 샤브시나(쿨리코바)

미군정이 기록한 주한미군사에 의하면 샤브신은 그의 한국인 친구에게 박헌영은 자신의 심복(henchman)이라 했다고 한다.[16]



박헌영의 생년과 처형 연도

박헌영의 생몰년에 관해서는 다수의 이설이 있다. 생년은 소련군이 작성한 "박헌영에 대한 평정서"에 1900년 5월 1일[27], 레베데프가 작성한 박헌영 평정서에는[28] 1900년으로 나오므로, 이것이 맞을 것이다. (박헌영 본인에게 직접 확인한 자료일 것임.) 따라서 생년은 1900년이 맞고, 생일이 5월 1일이라 한 것은 양력인지 음력인지가 논란이 될 수 있다.[29] 소련군은 양력이라 생각하고 적었을 것이나, 당시 대부분 조선인들은 생일을 음력으로 쇠고 있을 때이므로 음력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해 음력 5월 1일은 양력 5월 28일이다.

미군정이 작성한 박헌영 약력에도 생년은 1900년이다.[30]

박헌영이 처형된 연도에도 여러 가지 이설이 있으나, 주북한 소련대사 이바노프(Ivanov, Vasily Ivanovich)가 1956년 4월 19일 작성한 "MEMORANDUM OF CONVERSATION WITH KIM IL SUNG"에는[31] 사형 선고를 받은 박헌영에 대한 형집행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소련의 의사를 전달하고 있으므로 이 날자까지는 형이 집행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그의 처형 일자까지 정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연도가 1956년인 것은 사실로 볼 수 있다.


박헌영에 대한 평가


박헌영 관련 기록과 증언

1. 구두 정보 보고 1946년 3월 20일
2. 박헌영에 대한 평정서



참고 자료


각주

  1.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7일 > 소련의 조선신탁관리주장에 대해 각계에서 반대견해 피력 동아일보 1945년 12월 28일
  2.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9일 > 조선공산당의 鄭泰植, 개인자격으로 탁치반대를 표명 서울신문 1945년 12월 29일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9일 > 탁치배격각당 각계층 대표자회, 국민운동 실행방법 결의 동아일보 1945년 12월 30일
  3.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30일 >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 선임 서울신문 1946년 01월 01일 (국사편찬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印은 常任委員) ▲洪命憙 ..▲洪南杓 ▲朴憲永 등 포함
  4.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31일 >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파업단행과 상무위원 선정 동아일보 1946년 01월 01일 (국사편찬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洪命憙, ...洪南杓 朴憲永 金若水..
    南北朝鮮, 左右一致, 行動方針을 討議 決定, 反託總動員中央委員會 중앙신문 1946.01.01 상임위원 : 21명중 洪命憙, 朴憲永 있음.
  5.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1부>(17) 삼상회의 보도 동아일보 2004-12-12 : 강목사는 29일 밤이라고 했으나 28일 밤의 착각이라고 한다.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8일 >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信託統治反對國民總動員委員會)」가 설치 동아일보 1945년 12월 30일
  6.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31일 > 조선공산당, 탁치반대전단을 살포 중앙신문 1946년 01월 01일
    元旦의 決意는 託治 排擊!! 共黨서울委員會서 飛檄, 託治는 民族의 恥辱, 戰線 統一하고 走狗輩를 驅逐하자. 중앙신문 1946년 01월 01일
  7.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31일 > 반파쇼공동투쟁위원회결성총회, 신탁안 철폐요구 성명서 발표 서울신문, 조선일보 1946년 01월 01일 - 朝鮮共産黨서울市委員會: 이날 총회는 金台俊의 개회사에 이어 朝共黨 李鉉相으로부터 동회의 취지설명과 결성에 이르기까지의 경과보고.
  8.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6년 1월 1일 > 조선공산당, 탁치문제의 해결방법에 관한 담화발표 조선일보 1946년 01월 01일
    "먼저 민족통일". 공산당 신탁통치반대 방법 闡明 조선일보 1946년 1월 2일
  9. Radio TFGBI #157, Telegram from CG USAFIK to CINCAFPAC 25 Jan. 1946
    Radio TFGBI #157, Telegram from CG USAFIK to CINCAFPAC ; 25 Jan. 1946
  10. 10.0 10.1 10.2 주한미군사 2 > 2부. 4장. 점령 첫 해의 미소관계(American-Soviet Relations, The First Year) > 모스크바 회담과 조선 > 후폭풍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1.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6년 01월 02일 > 조공, 3상회담 결의에 지지 표명 중앙신문 1946년 01월 03일
    反託보다 먼저 戰線 統一, 朝鮮共産黨中央委員會 態度 表明. 중앙신문, 1946.01.03
  12. 託治(탁치)는 國際協力(국제협력) 朝共(조공)의 態度表明(태도표명) : 1월 2일 동아일보 1946-01-05 1면
  13.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6년 01월 02일 > 인공 중앙인민위원회, 3상회의 결정 지지 전문 보냄 조선일보 1946년 01월 04일
  14. 신탁통치반대 시민대회. 來 3일 서울운동장서 조선일보 1946년 1월 1일 2면
  15.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6년 01월 05일 > 각정당, 조공과 인공의 2일의 찬탁대회 반박성명서 발표 동아일보 1946년 01월 05일 : 찬탁대회는 2일이 아닌 3일에 있었다.
  16. 16.0 16.1 16.2 주한미군사 2 > 2부. 1장. 한국의 정치와 사람들, 첫 6개월 > 2. 공산당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7. Telegram TFGBI #176 from CG USAFIK to CINCAFPAC 1946-01-30 하지 장군이 맥아더 사령부에 보낸 1946년 1월 30일자 전문.
    미군정청 USAFIK G-2 Weekly Summary #32, 23 Apr. 1946, Incl. #2. 조선공산당이 소련 지시를 받는 문헌적 증거 입수
  18. 18.0 18.1 박병엽 구술; 유영구, 정창현 엮음,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 전 노동당 고위간부가 본 비밀회동》 : (선인출판사, 2010.11.10.) pp. 27~34, 제1장 김일성과 박헌영의 비밀회동
  19. 孫世一의 비교 評傳 (84)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 信託統治反對鬪爭을 ‘새로운 獨立運動’으로 월간조선 2011년 3월호
  20. 박헌영의 정치노선:상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37) 중앙일보 1992.02.06 종합 11면
    박헌영의 정치노선:하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38) 소의 「찬탁」지지에 겉으로만 따르는 척/남쪽 정세 불리하자 김일성 지지 선회“중위세력 손잡고 사회주의로 통일” 중앙일보 1992.02.10 종합 11면
  21. <비록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 20> 신탁통치 소용돌이(1) 평양 다녀온 박헌영 돌연 "찬탁" 중앙일보 1991.11.21 종합 11면
    <비록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 21> 신탁통치 소용돌이(2) 소 군정, 반탁 고수 조만식에 온갖회유·협박 중앙일보 1991.11.28 종합 11면
    <비록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 22> 신탁통치 소용돌이(3) 박헌영 웃고간 평양 울며 떠났다 중앙일보 1991.12.05 종합 11면
    증언에 나오는 서용규는 박병엽(朴炳燁, 1922 ~ 1998)이 남한에 와서 쓰던 가명이다.
  22.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진흥사업 성과포털"의 "[연구과제명] 러시아문서보관소 소장 해방후 한국사회 관련 자료의 수집 번역 및 주해 (1945~1950)"
  23. 23.0 23.1 US-USSR: Communism in South Korea p.176 박헌영이 1946년 7월 22일 평양 갔다가 돌아옴. TFGCG 467 : 1946.08.09
  24. 비록(秘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상, 하 2권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중앙일보사, 1992) - 상권 pp.326~327. 당시 평양의 소련군정은 서울에 있던 박헌영을 비밀리에 평양으로 데려갔고, 소련군정을 총지휘하는 연해주군관구 사령관이었던 메레츠코프(Kirill Meretskov, 1897-1968) 원수가 보로쉴로프(현 우수리스크)에서 비밀리에 비행기로 평양으로 날아와 김일성과 박헌영을 태우고 모스크바로 갔다고 한다.
  25. Gavril Korotkov (1925~ )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동아일보사, 1993) 권1 pp.235~237;
  26. 해외사료총서 10권 쉬띄꼬프 일기 (전현수 번역) 국사편찬위원회, 2004년 12월 30일
  27. 2. 박헌영에 대한 평정서
  28.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수상 겸 외무상, 남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박헌영 평정서 : 니콜라이 레베데프(Н. Лебедев)가 1948년 12월 25일 작성
  29. 박헌영(朴憲永) 위키백과
  30. Information on Korean Leftist, US-USSR p.5 : Biographical sketch of Mr. Pak, Hun Yung - 1946.01.28 / p.6 Park, Hun Young:비망록/Gordon W. Avison, Jr. Special Agent, CIC 발신, 1945.11.16
  31. Ivanov, Vasily Ivanovich, MEMORANDUM OF CONVERSATION WITH KIM IL SUNG : APRIL 19, 1956 Wilson Center Digital Arch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