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천보사건(普天堡事件)은 1937년 6월 4일 밤 11시 30분 만주 동북항일연군 산하의 김일성(金日成)과 최현(崔賢) 등이 인솔한 100여명의 부대가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전리(북한 행정구역으로 현 량강도 보천군 보천읍)를 습격하여 보천보주재소, 우체국, 영림서 등의 시설에 방화하고, 2세 여아 포함 일본인 민간인 2명을 살해한 후 퇴각한 사건을 말한다. 북한은 이 사건을 김일성 우상화 교육에 이용하고 있고, 남한 학계 대다수도 이 사건은 북한 김일성이 주도했다고 주장하나, 실제로는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고, 북한 김일성은 남의 공을 가로챈 것이다.

사건의 경과

보천보 사건 당시 신문 기사

보천보 마을의 사정

당시 보천보에는 일본인 26호에 50명, 조선인이 280호에 1천 323명, 중국인이 2호에 10명 등 총 308호에 1천 383명이 거주하고 있었고 무장인원으로는 5명의 경찰관이 주재소에 상주하고 있었다.

6월 4일 밤 상황 (북한 용어 : 보천보 전투)

사전에 현지답사를 통해 지형 정찰까지했던 소위 김일성 부대는 1937년 6월 4일 밤 밤 11시 30분경에 우선 전화선을 절단한 후 경찰주재소부터 공격했다. 먼 거리에서부터 기관총 사격을 하며 들어가는 바람에 총소리에 놀란 5명의 경찰관들은 모두 피신하고 주재소에 없어 교전상황은 발생하지도 않았다. 이는 2년전인 1935년 2월 평북 후창군 동흥읍을 습격하여 47명의 경찰관이 있는 경찰서를 향해 대담하게 기관총 사격까지 가했던 이홍광(李紅光, 1910~1935) 부대의 동흥습격사건(東興襲擊事件)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경찰주재소 습격약탈사건으로 전과(戰果)로 따지면 일본 경찰관(순사)의 두 살 난 딸과 일본인 음식점 주인 등 2명이 총탄에 맞아 사망했고, 1시간만에 퇴각할 정도로 미미한 사건이다. 일본 경찰주재소를 습격하고 조선인 상가를 약탈한 사건을 대형 전투로 치켜세우고 김일성을 영웅으로 만든 것은 당시 동아일보 보도였다. 북한에서도 김일성이 보천보전투를 지휘했다는 근거자료로 동아일보 보도를 인용하고 있는 상황이다.

6월 5일의 추격전 (북한 용어 : 구시산 전투)

김일성부대는 퇴각하는 과정에서 6월 5일 일본경찰추격대와 충돌해 25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부상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고, 일본측 경찰은 7명이 전사했다. 북한은 이 추격전에서 큰 승리를 거둔 것처럼 말하나, 실제로는 김일성 부대가 일본 경찰측보다 훨씬 더 큰 인명 피해를 입었다.[1]

보천보 습격의 목적

일본군 부대도 없고, 경찰관도 5명 밖에 없어 대단한 전투가 벌어질 가능성도 없는 조그만 국경 마을을 기습적으로 습격한 것은 항일투쟁의 일환이라기보다 보급투쟁(식량 등 약탈)의 목적이었다.[2]

습격 사건의 여파

사건 직후 연루된 지하조직이 적발되어 1938년까지 일대 검거 선풍이 불어 총 739명이 검거되고, 이중 188명이 기소되었다. 이를 혜산사건(惠山事件)이라 한다. 또 이 사건을 계기로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일만군(日滿軍)의 토벌이 강화되어 항일연군 세력은 큰 타격을 입고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약화되어, 잔존세력은 끝내 소련으로 도주하게 된다.[3]

북한의 보천보 사건 침소봉대

북한이 보잘것 없는 보천보 사건을 김일성의 가장 중요한 항일업적으로 미화 선전하는 이유는 조선 땅과 직접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공산당을 위해 투쟁한 것을 감추고, 조선독립운동을 했다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나아가 학생들과 주민들을 동원하여 현지답사를 시키므로서 김일성을 항일영웅으로 우상화하는데 이용하기 용이한 것도 있을 것이다. 자신은 주로 만주에서 활동했지만 만주에 있는 지역은 국민들을 동원하여 현지답사하도록 하기는 힘든 것도 작용했을 것이다.

북한 전문가 이현웅도 이런 점을 비판한다.[4]

항일무장투쟁은 1940년에서 1945년 해방되기 전 5년 간의 활동이 매우 중요한데 김일성은 이 기간에 소련으로 도망쳐 극동군사령부 소속 ‘88여단’에서 만주 등 국경지역 침투 및 정보수집을 위한 간첩교육을 받았을 뿐 이렇다 할 업적이 없다. 이런 약점들을 덮기 위해 ‘보천보전투’를 신화적 수준으로 날조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북한은 보천보 지역에 보천보혁명박물관(普天堡革命博物館)과 김일성 동상 등을 세우고 항일혁명성지로 조성하여 김일성 우상화 교육에 이용하고 있다.

남한 학계의 김일성 미화 부화뇌동

한국의 학계나 언론계는 보천보 사건과 관련한 북한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김일성 미화에 열심이다. 아마도 보천보 사건을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만들고싶어 안달인 것으로 보인다.

  • 한국의 일부 지역이 일제로부터 일시적으로 해방되었다는 의미가 있다.
1930년대에 만주로부터의 무장단체의 침입은 셀 수 없이 많았는데[5][6][7], 그때마다 그 지역이 일시적으로 해방되었다는 주장인가?
동아일보사가 1998년 평양을 방문할 때 순금으로 제작해 김정일에게 선물했던 1937년 6월 5일자 동아일보 호외. 김일성(金一成) 이름도 소제목으로나 나오는데, 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하루 아침에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동아일보는 일제시대에 호외를 여러 차례 간행했는데 거기에 이름 실린 사람은 모두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는가?
  • 독립군 최초의 국내진공이다.
각종 만주 무장단체의 국내 진입은 무수히 많았고[5][6][7], 1935년 2월에는 보천보 사건보다 더 큰 동흥습격사건(東興襲擊事件)도 있었으므로 이런 주장은 넌센스이다. 더구나 동북항일연군은 만주적화를 위한 중국공산당 만주성위 산하 무장조직으로 코민테른의 지휘를 받았으며, 조선 독립운동과는 별 관계가 없는 조직이다.
  • 무장투쟁이 끊어진 줄 아는 국민들에게 독립의 희망을 주었다.
실제는 보천보와 인근 지역 주민들이 공포에 떨며 피난가기 바빴다.[8]
  • 동아일보의 보천보 사건 호외가 김일성 이름을 전국에 알렸다.
이것은 북한 김일성이 진짜라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김일성 장군의 이름은 훨씬 이전인 1920년 무렵부터 유명했으며, 보천보 사건으로 김일성이라는 이름이 비로소 유명해진 것이 아니다. 일제시대에는 문맹률이 90%에 육박하고 신문 구독자수도 제한적이라 신문에 이름이 난다고 하루 아침에 전국적으로 유명해지던 때가 아니다. 더구나 동아일보는 9개월간의 장기 정간 끝에 6월 3일에 복간한 다음 날 사건이 발생하여 흩어진 독자망이 재구축되지도 않았을 시점이라 그 기사를 본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동아일보는 일제시대에 호외를 여러 차례 간행했는데 거기에 이름 실린 사람은 모두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는가?
  • 동아일보사는 1998년에 김일성(金一成)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사건 당시 호외의 금판을 떠서 김정일에게 선물하였다.[9] 동아일보 1937년 11월 18일자에도 보천보 김일성이 피살되었다는 기사가 실렸는데도[10] 정말 모르고 그런 선물을 한 것일까?
  • 남한 교과서도 보천보 사건을 중요하게 다루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실체적 진실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金日成)은 1937년 11월 전사

무엇보다도 중요한 진실은 보천보사건의 주역인 동북항일연군 2군 6사(師)의 사장(師長) 김일성(金日成)은 1937년 11월 13일 만주군 토벌대에 의해 사살되었고, 북한 김일성(金日成)과 다른 인물이라는 것이다. 북한 김일성은 그의 전사 후 같은 이름을 쓰며 선배 지휘관의 공을 가로챘다.

6사장 김일성의 신원이나 전사를 기록한 당시 문건은 20여건이 넘는데,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나온 인텔리라거나, 나이 35~6세 가량의 함경남도 출신이라고 하여 북한 김일성과 전혀 다른 인물이다. 북한 김일성이 아니라는 후대의 증언도 많다.

1935년 동흥(東興) 습격사건이 보천보사건보다 더 큰 규모

  • 보천보 습격 사건보다는 1935년 2월 13일 동북인민혁명군 1군 제1사장 이홍광(李紅光, 1910~1935)이 이끄는 부대가 경찰관 47명이 상주하는 경찰서가 있는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을 습격한 동흥습격사건(東興襲擊事件)이 훨씬 더 대담하고 일본에 준 타격도 더 크다. 보천보 사건을 당시 언론들은 제2동흥사건(第二東興事件)이라 칭하기도 했다.[11][12] 그러나 오늘날 보천보 사건은 김일성이 지휘했다는 이유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이홍광이나 동흥사건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 북한의 과대한 미화 선전과, 이를 그대로 따르는 종북화된 남한 학계의 부화뇌동이 아니었더라면 보천보 사건도 동흥습격사건처럼 오늘날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이 잊혀졌을 사건에 불과했다. 잊혀졌을 사건이 김일성 우상화를 위한 북한의 대대적 선전 때문에 엄청나게 중요한 사건으로 둔갑해 있다.
  • 1930년대에 만주의 각종 무장집단이 국경너머 조선으로 침입해온 크고 작은 사건은 일일이 셀 수도 없이 많았는데[5][6][7], 그 중 가장 큰 것이 동흥습격사건, 두번째가 보천보 사건이다. 그러나 보천보 사건도 수많은 침입 사건중의 하나였을 뿐 동흥사건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 남을만큼 중요한 사건이 못된다.

보천보 사건 관련 김일성 우상화물

함께 보기

각주

  1. 공비 최현 및 김일성 일당의 선내 침입사건 : 1937년 경찰청 경무국 제73회 제국의회 설명자료 (조선총독부 기록물) : 원문 바로 보기 : 맨 뒤에 양측 피해 상황이 나옴.
  2. 食糧缺乏(식량결핍)으로 來襲(내습) 1937.06.14 동아일보 2면
  3. 서재진,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의 신화화 연구』 통일연구원 연구총서 2006-11 / 2006-12-26 (국립중앙도서관 원문 보기) pp.202~203 : 사실은 보천보 전투가 국내진공이라 는 선전효과는 거두었지만 전투의 실질적 결과는 매우 파괴적이다. 동북항일연군이 궤멸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보천보 전투 이후 일본 관헌측은 필사적으로 토벌을 전개하였다. 장백현의 조국광복회 조직은 739명이 체포되어 거의 궤멸되었고, 김일성부대는 일본군의 집요한 추격을 당하여 ‘고난의 행군’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4. 4.0 4.1 “보천보전투, 조작된 항일무장투쟁 신화” 자유아시아방송 2017-06-07
  5. 5.0 5.1 5.2 1920년~1936년간 국경 3도 비적 누년 상황표 (國境三道 匪賊 累年 狀況表) (대정9년 -소화11년) 조선총독부 경무국 경무과 (원문 바로보기)
  6. 6.0 6.1 6.2 국경지방에서의 치안 상황 : 제73회 제국의회(帝國議會) 설명자료 昭和12年(1937년) 조선총독부 경찰청 경무국 : (원문 바로 보기) - p.6 : 1932년~1937년 9월 기간 대안비적 선내침입누년표(對岸匪賊 鮮內侵入 累年表) / p.7 : 압록강·두만강 대안 마비적(馬匪賊) 출몰 누년표 (1932~1937.9)
  7. 7.0 7.1 7.2 이명영(李命英, 1928~2000), (26) 眞僞 金日成 列傳 | 이홍광과 동흥사건 중앙일보 1974.06.05 종합 3면
  8. 피습(被襲)된 보천보(普天堡) : 재습(再襲)의 공포에 떠는 주민 남부여대(男負女戴)로 피난 동아일보 1937-06-09 석간 2면 1단
  9. 김일성 보천보전투 다룬 신문 순금으로 원판 떠 김정일에 선물 : 동아일보 방북 취재단 1998년에 OhMyNews 2001.08.23
  10. 김일성피살(金日成被殺)? 1937년 11월 18일자 동아일보
  11. 함남 국경에 제2동흥사건 매일신보 1937년 6월 6일 2면 1단
  12. "장백밀림(長白密林)을 근거(根據)로 국경선(國境線)에 출몰(出沒)" 1937년 6월 8일자 동아일보
  13. 보천보에 세워진 김일성 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