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조선5도행정국(北朝鮮五道行政局)은 1945년 11월 19일 북한 지역 5도 행정의 통일적 지도관리를 위해 구성되었다. 10개부서 국장은 대체로 공산당원을 중심으로 선정하였으나, 위원장은 아직 김일성(金日成)에게 맡길 형편이 되지 않아 조만식(曺晩植)에게 맡아줄 것을 요청했지만 거절 당하고 공석으로 있었다. 중앙정부 형태를 흉내낸 조직이다.

이후 1945년 말 ~ 1946년 초 신탁통치 정국을 거치면서 1946년 1월 5일 조만식을 고려호텔에 연금하고, 2월 8일 김일성이 전면에 나선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로 된다.

출범의 과정

북조선5도행정국(北朝鮮五道行政局)

공업국장 정준택(鄭準澤), 재무국장 이봉수(李鳳洙), 교통국장 한희진(韓熙珍), 교육국장 장종식(張鍾植), 농림국장 이순근(李舜根),
보건국장 윤기녕(尹基寧), 상업국장 한동찬(韓東燦), 사법국장 조송파(趙松波), 체신국장 조영렬(趙永烈), 보안국장 최용건(崔庸健)
(≪정로(正路)≫, 1945년 11월 25일).

소련군사령관의 검사(檢事)감독에 관한 고문관으로 한낙규(韓洛奎), 재판에 관한 고문관으로 양태원(梁台源)이 임명되었다.

(≪정로(正路)≫, 1945년 11월 25일).
  1. ≪정로(正路)≫는 북한 노동신문의 전신으로 1945년 11월 1일 창간되었다.[1][2]
  2. 위의 사람들은 모두 이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북조선인민위원회북한 초대 내각 등에서 요직을 차지한다.
  3. 한낙규(韓洛奎)는 이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북조선인민위원회 사법국장 최용달(崔容達) 아래에서 검사총장을 지내는데, 1939년 만주 고등문관 채용고시에 합격하고 봉천(奉天) 지방법원에서 판사를 했다.[3]
"붉은 紙幣(지폐)"와 "改貨(개화)"
사실 「김일성장군 환영대회」를 치루고난 후의 김일성(金日成)의 위치와 거취는 자못 미묘하였다.

그는 이제 정정당당히 일제시 평양(平壤)에서 가장 큰 잡화도매상으로 일본인 중에서 가장 좋은 「저택」을 가지고 있다는 정평이 있던 광전상회(廣田商會)의 남산정(南山町) 집을 자기 숙사라기 보다 「본부」로 삼아가지고 이곳을 중심으로 하여 「소련」군사령부와 공산당 최고간부들의 밀집소(당시 주로 김용범(金鎔範)ㆍ박정애(朴正愛) 부부(夫婦)가 사는 역시 적산가옥이 이용되었다) 그리고 「평남 인민정치위원회」 사이를 매일 몇번씩이나 불이나게 왕래하였다.

그러나 이때 그는 정식으로 내세우는 직책이 아무것도 없었다. 「볼세비키」 당원이요, 「소련」 군 소좌라는 것은 물론 비밀로 하려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는 이미 10월 10일 「당대표자대회」에서 조직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실질적인 책임자로 되었음에 불구하고 이때는 이것마저 감추고 김용범(金鎔範)이가 책임자인 듯이 위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인민정치위원회」에 있어서도 조만식(曺晩植) 선생이 있는 이상 그 위원장으로 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밑에서 부위원장으로 되려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아무 명색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조직된 후 「소련」 사령부에서는 다음 「프로그램」 대로 「북조선五도대회」를 열고 「북조선五도행정국(行政局)」이란 것을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三八선을 더욱 공고히 하며 그 이북 땅에다 우선 독자적 행정부를 (물론 군정하에서이지만) 조직하였다. 이것이 바로 김일성(金日成)이 자기의 노선인듯 내세운 소위 「북조선민주기지」 창설 정책의 구현이었던 것이며 이것이 바로 오늘의 소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태아(胎兒)였던 것이다. 그런 데그 「五도행정국」의 10개부서 국장은 대체로 공산당원을 중심으로 선정하였으나 그 우두머리 위원장이 문제였다.

공산당측에서는 물론 김일성(金日成)을 내세울려고 하였다. 그러나 「소련」 사람들은 이런 점에서도 훨씬 더 음흉하고 능숙하였다. 그들은 이 「위원장」에는 북한에서 절대신망이 두터운 조만식(曺晩植) 선생을 올려 앉히지 않고서는 다시말하면 이용하지 않고서는 자기들의 군정 목적을 원활히 성취시킬 수 없음을 잘알고 있었다.

그래서 여러번 조(曺)선생에게 위원장 취임을 요청하고 간청하고 나중에는 반위협까지 하려들었으나 조(曺)선생은 "나는 平南(평남)만으로도 힘에 겨웁다"는 한 마디로 간곡히 이것을 거절하였다. 물론 선생으로서는 「소련」 사람들의 하는 일이 못마땅하였던 것이며 그중에도 특히 그들의 북한분할정책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바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자리는 끝내 빈자리로 있었다. 그래도 「소련」 사람들은 이 자리에 아직 김일성(金日成)을 공식적으로 끌어올리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일성(金日成)은 모든 우리나라 사람에 대해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최고실권자로 행세하며 (신바람이나서) 돌아갔다. 오로지 「소련 」 상전의 「대행인」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조만식(曺晩植) 선생의 측근자의 한 사람은 김일성(金日成)이 「소련」 군인과 함께 위원장실에 와서 떠들고 돌아간 후에 조(曺)선생은 「이렇게 상전(上典)이 많아서야---」 하고 개탄하는 것이었다" 고 쓰고있다.

김일성(金日成)이 공개적으로 나타난 후로부터는 「소련」 장군들은 될수록 그를 통하여 자기 침략정책을 실현시키려 하였는데 이 시기에 그들이 가장 주력한 것은 우선 경제적 약탈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파염치한 사기협잡이 서두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붉은지폐」의 남발과 후일의 그 「화폐개혁」이었던 것이다

참고 자료

함께 보기

각주

  1. 정로(正路)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2. 로동신문 - 위키백과
  3. 김두식저, "법률가들 -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탄생" / 북한지역의 초창기 법원과 검찰 (창비 2018-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