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4월 만선일보(滿鮮日報)에 5회에 걸쳐 연재된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생장기(生長記)》 전문 이미지.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생장기(生長記)》만주국에서 간행되던 한국어 신문 만선일보(滿鮮日報)[1]에 1940년 4월 5회에 걸쳐 연재된 북한 김일성의 출생부터 당시까지의 일대기이다. 당시 김일성은 만주의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 중일 때이며, 그 해 10월 23일 일본군의 토벌에 쫓겨 소련으로 도주했다.

이 기사는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거의 알려지지 않았는데, 국립중앙도서관의 고신문 DB에서 검색해서 열람할 수 있다. 종전에는 신문 이미지 상태가 극히 나빠서 판독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으나 최근 선명한 이미지로 바꾸어 올려놓아 전문을 완전히 판독할 수 있게 되었다. 아래에 연재 5회 전문을 소개한다.

이 연재기사에서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그가 전사한 유명한 간도(間島)의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이름을 물려받아 썼기 때문에(襲名) 그를 간도의 유명한 비수로 잘못아는 사람이 많다고 한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그가 보천보 사건의 주역인 전사한 6사장 김일성의 이름을 따라 쓴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어쨌던 그가 죽은 유명한 남의 이름을 물려받아 썼기 때문에 일제시대 당시에도 그를 유명한 죽은 사람과 동일인으로 잘못아는 사람이 많았다는 중요한 증거이다.

또 그는 일제가 귀순공작에 투입한 왕년의 상관 이종락(李鐘洛, 1907~1940)의 권유에 따라 귀순을 결심하고 협상 중에 동북항일연군 1로군 총사령 양정우(楊靖宇)에게 보고가 들어가 그의 제지로 귀순에 실패했다고 하였다. 이종락은 1940년 1월 양정우에게 총살당하며, 양정우도 그 한달 뒤인 1940년 2월 23일 전사한다. 이 기사가 실리기 직전의 일들이다.

1회 : 1940년 4월 16일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생장기(生長記) (一)

중학시대(中學時代)부터 적화(赤化)
○○운동(運動)의 父를 따라 백두산록(白頭山麓)을 전전(轉々)

만주사변이 발발된 이래로 통화성(通化省) 방면에 근거를 두고 다년간 각지 부락을 습격하야 주민의 금품과 식량을 략탈하야 통화성 오지 방면 주민을 괴롭게 하던 양정우(楊靖宇) 김일성(金日成) 최현(崔賢) 등 비적은 통화성 방면에서 일만군경(日滿軍警)의 철저한 토벌을 피하야 무송현(撫松縣) 방면으로부터 작년 四月 七일 밤에 길림성 화전현 대포시하(吉林省 樺甸縣 大蒲柴河) 조선인 집단 부락을 습격하고 다수한 금품을 략탈한 다음 동八일에 남하하야 간도성내안도현(間島省內安圖縣)으로 들어서 이래 금품 식량 의복 등을 약탈하야 오지 방면의 농민들을 괴롭게 하고 잇던 중 지난달에 이 여러 부대를 총지휘하고 잇던 총사령 양정우는 통화성 관하에 잠복중 정신대(挺身隊)인 최주봉부대(崔周奉部隊) ○○○명의 급격한 추격을 받아 전사하였다함은 기보한 바와 갓거니와 목하 백두산(白頭山) 후록에 근거를 두고 간도성내 각현 오지에 흩어져 있는 비적부대를 총지휘하고 잇는 김일성(金日成)(二九)의 가정과 그의 과거에 대하야 여러가지 풍설도 만헛스나 아직까지 여기에 대하야 자세한 것을 아지 못하야 누구나 궁금하여하는 문제이니만큼 기자도 수년동안 게속하야 각방면으로 조사중이던바 근일에야 비로소 자세한 것을 알게 되엿는데 대략 다음과 갓다.

김일성의 조부(祖父) 김봉현(金鳳賢)(七○)과 조모(祖母) 리반석(李盤石)(六七)의 사이에는 장남 형직(亨稷) 차남 형권(亨權) 三남 형록(亨祿)외 一녀를 두엇는데 김일성의 조부모는 지금도 생존중으로 三남 형록을 다리고 평남 대동군 고평면 금남리(平南 大同郡 古平面 今南里)에서 농업을 하야 근근이 호구를 이어가는 중이다. 그런데 김일성의 부친인 형직은 十三세 때에 평양(平壤)서 ○○소학교를 졸업한 다음 숭실중학(崇實中學)에서 공부하다가 대정 八년 만세사건에 가담하야 중도 퇴학하고 랴(당?)국의 검거망을 피하야 만주로 건너와서 통화성림강현(通化省臨江縣)에 거주하며 약종상(藥種商)을 경영하야 생업을 계속하여가며 一방으로는 동지를 규합하야 ○○단을 조직하야 맹렬한 활동을 계속하엿섯다.

그러는 동안은 형직의 아우인 형권(亨權)도 형을 따라 림강현에 들어와서 형과 협력활동하엿고 모친 리반석도 아들을 따라 드러왔다. 그들의 운동이 표면화됨에따라서 중화민국 관헌들은 검거하랴하므로 이곳을 떠나서 장백현팔도구(長白縣八道溝)로 옴기여 약종상을 경영하며 또 그와가튼 운동을 계속하엿든 것입니다. 얼마되지 한어 이곳 관헌의 주목이 심하여지며 또다시 무송현왈랑진(撫松縣曰朗鎭)에 옴기여 역시운동을 게속하다가 몸이 극도로 쇠약하야 병그대로 사망하엿다.

김일성의 본명은 성주(誠柱)이엇는데 十三세 때에 무송에서 소학교를 졸업하엿다. 그 학교는 선만인(조선인과 만주인) 공학하는 학교이엇슴으로 만주인 부호 가정의 학생을 친하여 가지고 돈을 어더서는 학용품 가튼 것을 사서 학생들에게 난호어(나누어) 주는 것을 일삼아 왔고 공부에 그리 열심하는 편은 아니엇스나 두뇌가 명석하고 총명하야 한 번 스처본 교과서라거나 책은 그 후에 력력히 기억하얏슴으로 졸업 당시의 성적도 우수하엿다 한다.
그 소학교를 졸업하고는 길림(吉林)으로 와서 여러 중학교에 전교하다가 나중에는 영문중학교(毓文中學校)에 통학하엿는데 四학년 때에 담임교원이 중국공산당의 책임자이엇슴으로 그의 선전으로 말미아마 적화하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일성이 삼촌 형권은 자기의 어머니인 리반석과 가티 안도현소사하(安圖縣小沙河)로 이주하야 동지인 박단석(朴旦石) 최효일(崔孝日) 성근학(成槿學)외 一명과 가티 권총을 휴대하고 함북지방에 나갓다가 검거되어 서대문감옥(西大門監獄)에서 성근학 외一명은 도주하고 김형권은 병사하엿스며 최효일은 사형을 밧고 박단석은 만기 출옥하야 현재 모지에서 공작대에 종사하는 중이다. (間島支社 S記者)

2회 : 1940년 4월 18일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생장기(生長記) (二)

비명(匪名)『김일성(金日成)』을 습명(襲名)
중학(中學)을 중퇴(中退)하고 18세(十八歲)부터 녹림생활(綠林生活)

김일성이가 전기한 바와 갓치 중학교 四학년 재학중에 ,,,,,,,으로부터 ,,,,담임선생으로부터 공산주의 선전을 받어 어려서부터 사상적 훈련을 받았고 졸업기를 압흐로 二개월을 남겨두고 그의 三촌 형권이가 서대문 감옥에서 사망하게 됨에 더욱 급격히 사상이 과격해져서 영문학교에서 중도퇴학을 당하고는 자기의 조모인 리반석(李盤石)이가 거주하고 있는 안도현을 거쳐 남만으로 가서 당시 정의부(正義府) 계통인 남만청총(南滿靑總) 간부이었던 리종락(李宗洛), 박근원(朴根源), 신영근(申榮根), 박단석(朴旦石) 등과 손을 맞잡고 결의형제가 되어 활동하고 잇엇스니 김일성의 나이는 그때 十七세 이엇섯다. 이때부터 김일성의 활동 무대는 남만이엇스나 조모가 간도성 안도(安圖)현에 거주하고 잇엇던 관계로 자조 간도에도 왕래하게 되어 간도성의 사정을 다소 알게 되었다.

이때에는 간도성에 비수(匪首)로 유명한 김일성이 있었는데 만주사변 직전에 토벌대에게 사살을 당하자 김일성은 김성주(金成柱)를 곳치니 만주사변이 발발되엇던 그때 즉 十八세 때부터 김일성(金日成)으로 일흠을 곳치엇슴으로 근일에 와서도 간도에 잇던 김일성으로 오해하는 이가 만흔 것이엇섯다. 이때에 정의부의 세력은 점차 쇠퇴하여졋고 남만과 간도 방면에 종종 출몰하던 대도회(大刀會)의 세력이 점점 팽창하여지자 대도회로부터 정의부에 대한 탄압이 점점 심하여감에 따라서 남만청총(南滿靑總)도 자취를 감추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 빠지게 됨에 김일성이는 十八세 되던 해 즉 지금부터 十一년 전 十二월 卄八일에 안도현으로 도라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에 정의부에서는 대도회에서 다소 신임하는 양세봉(梁世鳳)을 부사령으로 임명하야 연락을 취하도록 하엿스나 역시 여의치 못하엿던 것이다. 그리하여 김일성은 압흐로의 의지 관철을 하기 위하야는 의리에 버서난 행동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각오하엿엇다. 그리하여 안도현을 떠나서 그때 정의부 계통으로 심룡준(沈龍俊) 외 二十여 명의 무장대가 통화성 류하현 삼원포(通化省 柳河縣 三源浦)에 주둔하고 있는 것을 습격하고 무기(武器)를 압수하얏스니 이것이 김일성으로서는 처음 무력행동을 개시한 것이엇다. 그 후로는 계속적으로 기회를 엿보아 류하(柳河), 무송(撫松), 장백(長白), 몽강(濛江) 등 각 현에 출몰하야 만군 부대를 습격하고 금품과 무기를 약탈하는 一방 때때로 북선과 평북 방면의 국경 지대에까지 침입하여 민심을 소란케 하였고 점점 一파가 증가되어 十一년이 지난 금일에 이르러서는 그 비적단의 수효가 상당히 다수에 달하게 된 것인데 그가 十二개년동안....록림생활(綠林生活)을 계속하는 동안에 자기의 현재.....또한...한바도 업슬수 업고 ...가 맹서한 사람이.............잇는 생활을 하고 잇다할 지라도 세계대세의.......전혀 살피지 못하엿슬것은 안이다.

그리하야 작년 녀름에는 자기가 남만청총 당시에 갓치 일하고 잇던 리종락(李宗洛) 신영근(申榮根) 박단석(朴旦石) 三인을 당국에서는 멀리 북경(北京) 으로부터 마지하엿고 평북 대동군 고평면 금남리(平北 大同郡 古平面 今南里)로부터 김의 조모인 리반석(李盤石)을 마지하야 귀순공작을 개시하엿던 것이엇다. 제一회 공작으로 박단석군이 간곡한 서신을 김에게 보내엇던바 이와갓튼 서신을 받은 김일성은 글시가 ....못하기는 하나 필적으로서만은 도저히 인증하기 어려우니 사진을 보내라는 화답에 잇섯다. 그리하야 박군이 사진을 보내엇든바 이 사진을 받은 김은 곳 맛나자는 회답이 이섯다.

그리하야 박군이 김의 전초진인 七단을 경유하야 이년여만에 반갑게 맛나게 되엇섯다. 이에 의하야 김은 박의 권유대로 귀순하기로 결정은 하엿다. 김일성이가 안도에서 그 조모를 조선으로 나가라고 강권하여 평북으로 나가게 한 것도 七년전 일이니 七년만에 조모인 리씨의 반가운 안부도 뭇게된 것이엇다.

3회 : 1940년 4월 21일

4회 : 1940년 4월 23일

5회 : 1940년 4월 24일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