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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순천에서 발생한 남로당 소속 군인들의 반란 사건.
'''여수·순천 10.19 반란사건''' 또는 '''여수·순천 사건'''(麗水順天事件) 또는 '''여순사건'''(麗順事件)은 [[전라남도]] [[여수]]·[[순천]] 지역에서 국군 제14연대 소속이자 [[남조선로동당]] 소속의 좌익 군인인 [[김지회]]·[[지창수]]가 주동하여 일어난 군사반란과 여기에 호응한 좌익계열 시민들이 가담한 사건이다.


"전라남도 려수 주둔 남조선 괴뢰군 제14련대 군인들이 미제의 식민지 파쑈 통치를 반대하고 민주주의와 조국의 통일 독립을 지향하여 일으킨 대중적 무장 폭동이다.
==개요==
8. 15후 남조선 인민들은 날로 혹심해지는 미제침략자들의 식민지 파쑈 테로 통치와 야수적 학살 만행을 반대하여 줄기차게 투쟁하였다.
1948년 10월 19일부터 10월 27일까지 전라남도 여수, 순천에서 발생한 [[남로당]] 소속 군인들의 반란 사건이다.
인민들의 이러한 애국 투쟁의 불길은 괴뢰군 장병들에게도 미치였다.


미제와 리승만 괴뢰 도당은 1948년 10월 19일 려수 주둔 괴뢰군 제14련대 군인들에게 제주도 인민들의 애국 투쟁을 진압하라는 《동원령》을 내리였다.  
여수에 주둔 중이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의 1개 대대를 [[제주4.3사건|제주 4·3 사건]]을 진압하기 위하여 파견하기로 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이에 격분한 려수 군인들은 원쑤들의 출동 명령을 단호히 거부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 군인들은 10월 20일 악질 장교들을 처단한 후 무기고를 점령하고 무장을 강화하면서 순식간에 려수 시가를 점령하였다. 여기에 또한 려수 시민들과 대구 주둔 괴뢰군 제6련대와 라주 주둔 괴뢰군 제5련대의 병사들까지 합세함으로써 폭동은 대중적 규모로 확대되였다.
이 반란은 군이 일으켰다는 점에서 신생국가였던 [[대한민국]] 정부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며 국군 내 존재하던 좌익 세력을 제거하는 계기가 되었다.
폭동 군인들과 인민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 《미군 나가라!》, 《남조선단독정부를 반대한다!》 등의 구호를 웨치면서 괴뢰 정부의 통치 기관들을 까부시고 려수, 순천을 비롯한 여러 지방을 해방하였다.
해방된 지역에서는 인민위원회가 복구되였으며 민주주의 단체들이 합법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인민위원회는 해방 지역의 치안을 유지하는 한편 민족반역자들을 인민재판에 넘기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인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인민위원회는 또한 토지 개혁 준비사업을 하는 등 일련의 인민적 시책을 실시하면서 대중을 항쟁에로 조직 동원하였다.


이에 당황한 미제와 그 앞잡이들은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폭동 진압에 날뛰였다.  
==전개==
===진압===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국방부 장관]]인 [[이범석]]10월 22일
{{인용문|1. 제군은 동지와 상의하여 단체로든지 또는 개인 단독으로든지 제군의 양심이 허용치 않는 현재 반란의 지휘자를 즉시 총살하고 부대에 백기를 달아 귀순의 意(의)를 표하라.


폭동 군인들과 무장한 인민들은 비행기, 포병, 장갑차 부대까지 동원하여 공격해오는 미군과 괴뢰군, 무장 경찰대들을 맞받아 용감히 싸웠다.


애국적 인민들과 군인들의 영웅적 항쟁에도 불구하고 폭동은 미제와 그 주구들의 야만적인 탄압과 박헌영 간첩 도당의 간악한 파괴, 와해 책동으로 말미암아 결정적인 승리를 이룩하지 못하였다.  
2. 전기가 부득이한 시에는 반군의 폭행이 이용되는 총기, 화약탄 및 기타 군용품을 즉시 파괴한 후, 탈주하여 토벌 국군에 투항하라.}}
그러나 폭동은 남조선 인민들이 미제의 식민지 예속화 정책과 국내 반동들의 매국 행위를 강력히 반대하며 민주주의 제도의 수립과 조국의 통일독립을 견결히 요구하고 있다는것을 보여주었으며 인민대중의 혁명성과 그 위력을 크게 시위하였다.  
와 같은 내용의 포고문을 반란군에 살포<ref>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prevPage=0&prevLimit=&itemId=dh&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dh_008_1948_10_22_0080&position=0</ref>하였다. 또한 이날 채병덕 참모총장이 반란군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ref>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prevPage=0&prevLimit=&itemId=dh&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dh_008_1948_10_22_0110&position=0</ref>하였다. 이어 김백일 중령이 지휘하는 육군 제5여단이 27일 여수를 점령<ref>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prevPage=0&prevLimit=&itemId=dh&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dh_008_1948_10_27_0070&position=0</ref>함으로써 반란은 막을 내렸다. 진압에 있어서 어려웠던 점은 반란군과 양민의 구분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일례로 여수 진압 시 검문소에서 여학생이 권총으로 검문하던 초병을 사살하고 도주<ref>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prevPage=0&prevLimit=&itemId=dh&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dh_008_1948_10_27_0070&position=0</ref>한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화처럼 겉보기에 순진해 보이는 여중생, 여고생이 반란군으로 돌변하는 일이 적잖이 있었기에 국군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폭동은 오직 전인민적인 항쟁으로써 미제국주의자들과 그 앞잡이들을 철저히 때려부실 때에만 비로소 자유와 해방을 쟁취할수 있다는 교훈을 남기였다."
 
== 참고 자료 ==
* 여순사건 당시의 사진 :
::[http://images.google.com/hosted/life/bbabf9169661d059.html <nowiki>[Time & Life Pictures]</nowiki> Korea: Yosu/ Sunchon / Date taken: November 1948 / Photographer: Carl Mydans] Google Images
::오른쪽의 섬네일을 클릭하면 여러 이미지들을 볼 수 있음.
 
* [[박갑동|박갑동(朴甲東, 1919 ~ )]], [https://news.joins.com/article/1352562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800)-第31話 : 내가 아는 박헌영 (118)』 : <2·7폭동사건>] 중앙일보 1973.07.19 종합 5면
:남한총선 결정에 남로당서 폭동 / 김구·김규식, 단정 수립안 계속 반대 / 동맹휴교 60교·306명 검거… 하루만에 폭동진압
 
* [[박갑동|박갑동(朴甲東, 1919 ~ )]], [https://news.joins.com/article/1352659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801)-第31話 : 내가 아는 박헌영 (119)』 : <제주도 폭동사건>] 중앙일보 1973.07.20 종합 5면
:2·7투쟁전후 제주에 무장행동 지령 / 중앙당선 당 군사부 책임자까지 파견 / 경비대 소속 남로당원들 경찰서·14개지서 등 습격 / 토벌대장도 피살, 폭동 1년 계속… 여·순 사건으로 비화
 
* [[박갑동|박갑동(朴甲東, 1919 ~ )]], [https://news.joins.com/article/1353153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806)-第31話 : 내가 아는 박헌영 (124)』-여순사건의 저변] 중앙일보 1973.07.26 종합 5면
: 폭동진압 출동에 항거, 14연대가 반란 / 남로당 세포위, 찬반 싸고 심각한 내분 / 군 내부 「푸락치」침투에만 주력했던 박도 예측 못한 우발사고
 
==함께 보기==
* [[제주4.3사건]]
* [[김달삼모가지잘린골]]
 
==각주==
<references/>
[[분류:사건]]
[[분류:남로당]]
[[분류:공산주의자]]
[[분류:대한민국 건국]]
[[분류:이승만]]
[[분류:박헌영]]

2023년 9월 16일 (토) 12:06 기준 최신판

여수·순천 10.19 반란사건 또는 여수·순천 사건(麗水順天事件) 또는 여순사건(麗順事件)은 전라남도 여수·순천 지역에서 국군 제14연대 소속이자 남조선로동당 소속의 좌익 군인인 김지회·지창수가 주동하여 일어난 군사반란과 여기에 호응한 좌익계열 시민들이 가담한 사건이다.

개요

1948년 10월 19일부터 10월 27일까지 전라남도 여수, 순천에서 발생한 남로당 소속 군인들의 반란 사건이다.

여수에 주둔 중이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의 1개 대대를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기 위하여 파견하기로 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이 반란은 군이 일으켰다는 점에서 신생국가였던 대한민국 정부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며 국군 내 존재하던 좌익 세력을 제거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개

진압

국무총리국방부 장관이범석이 10월 22일

1. 제군은 동지와 상의하여 단체로든지 또는 개인 단독으로든지 제군의 양심이 허용치 않는 현재 반란의 지휘자를 즉시 총살하고 부대에 백기를 달아 귀순의 意(의)를 표하라.


2. 전기가 부득이한 시에는 반군의 폭행이 이용되는 총기, 화약탄 및 기타 군용품을 즉시 파괴한 후, 탈주하여 토벌 국군에 투항하라.

와 같은 내용의 포고문을 반란군에 살포[1]하였다. 또한 이날 채병덕 참모총장이 반란군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2]하였다. 이어 김백일 중령이 지휘하는 육군 제5여단이 27일 여수를 점령[3]함으로써 반란은 막을 내렸다. 진압에 있어서 어려웠던 점은 반란군과 양민의 구분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일례로 여수 진압 시 검문소에서 여학생이 권총으로 검문하던 초병을 사살하고 도주[4]한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화처럼 겉보기에 순진해 보이는 여중생, 여고생이 반란군으로 돌변하는 일이 적잖이 있었기에 국군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참고 자료

  • 여순사건 당시의 사진 :
[Time & Life Pictures] Korea: Yosu/ Sunchon / Date taken: November 1948 / Photographer: Carl Mydans Google Images
오른쪽의 섬네일을 클릭하면 여러 이미지들을 볼 수 있음.
남한총선 결정에 남로당서 폭동 / 김구·김규식, 단정 수립안 계속 반대 / 동맹휴교 60교·306명 검거… 하루만에 폭동진압
2·7투쟁전후 제주에 무장행동 지령 / 중앙당선 당 군사부 책임자까지 파견 / 경비대 소속 남로당원들 경찰서·14개지서 등 습격 / 토벌대장도 피살, 폭동 1년 계속… 여·순 사건으로 비화
폭동진압 출동에 항거, 14연대가 반란 / 남로당 세포위, 찬반 싸고 심각한 내분 / 군 내부 「푸락치」침투에만 주력했던 박도 예측 못한 우발사고

함께 보기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