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1월 30일 일본군에 투항한 직후의 전광(全光) 즉 오성륜(吳成崙).[1]

오성륜(吳成崙, 1900 ~ 1947 ?)은 공산주의 계열의 항일투사이다. 중국명은 마천일(馬天一)[2]이며,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할 때는 전광(全光)이라는 가명을 썼다. 항일연군에서는 1로군 군수처장과 비서처장을 지냈으며, 같은 1로군 소속이었던 6사장 김일성이나, 북한 김일성의 상관이었다. 1941년 1월 30일 일본군에 투항했다.

생애

행적

  • 1922년 3월 28일 상해에서 김익상(金益相)과 함께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1864~1929)에게 폭탄을 투척했다 실패 후 체포됨.[3]
  • 1922년 5월 6일 탈옥하여 도주함.
  • 그 후 독일 등지를 거쳐 소련으로 가서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졸업.
  • 중국으로 귀환하여 한동안 김원봉의 의열단에서 활동
  • 1930년대 중반부터 전광(全光)이라는 가명으로 만주의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
  • 1936년 재만한인조국광복회 발기인
  • 일본군의 토벌에 쫓기다 1941년 1월 30일 투항, 귀순함.
  • 귀순 후 그의 말년 행적은 분명치 않다.
1922-04-07 매일신보(每日申報)에 보도된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1864~1929) 대장에게 폭탄을 투척한 오성륜(吳成崙, 1900 ~ 1947 ?)과 김익상(金益相).[4]

기사

脫獄 田村의 自白, 오성륜과는 항주에서 길을 나눠 매일신보 [每日申報] 1922년 05월 23일
571 (1922년 3월) 30일 상해에서 전중대장(田中大將)에게 폭탄을 투(投)하다.
607 (1922년 5월) 6일 전중대장(田中大將) 저격범 吳成崙(오성륜)은上海(상해)에셔破獄逃躲(파옥도타)하다
그곳에서 만난 한국사람으로는 独立鬪士(독립투사)였다는 吳成崙(오성륜)(中国名(중국명) 馬天一(마천일)),金炯斗(김형두),趙(조)훈등으로 모두 共産大學生(공산대학생)이었는데
(吳成崙(오성륜))과함께불원에비률빈(比律賓(비율빈))으로부터도라오는길에상해에상륙할 륙군대장 뎐중의일(陸軍大將田中義一)... (吳成崙(오성륜))등이모히여동년안으로조선안에서폭탄과권총으로써관뎡을파...
各國人環列(각국인환열)한上海埠頭(상해부두) 田中大將(전중대장)을爆擊(폭격) 1926.11.11 조선일보 2면
(강비호돌))과 오성륜(吳成崙(오성륜))등의 권유로의렬단에입단하야 최하청(崔河淸(최하청))진공목(陳公木(진공목))등으로더불어선전출판부의 책임을지고활동하다가조선민족의해방을 엇기위하야는 민족운..

일본군 투항 당시의 사진

함께 보기

각주

  1. 1.0 1.1 1.2 《アルバム 謎の金日成 写真で捉えたその正体》, 東アジア問題研究会編 / 編著者 代表 李命英, (成甲書房, 1978) pp.120~121
  2. 모스크바 滯留(체류) 45日(일) 1970.03.05 조선일보 22면
  3. 公開(공개)된爆彈事件(폭탄사건)의眞相(진상) 少毫(소호)도隱諱(은휘)업시明快(명쾌)히陳述(진술) 1922.07.02 동아일보 3면
  4. 사진: 상해에서 전중 대장에게 폭탄던진 조선인, (右) 吳成崙(23), (左) 金益相(29) 매일신보 [每日申報] 1922년 04월 07일 3면 9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