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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생판 억지였다. 이것이 이른바 약소민족의 벗으로서 그 의사를 존중한다는 쏘련 공산주의자들이 해방자로 자처하면서 이땅에 들어와 정복자로 행세하며 벌여놓은 첫 사업이었다. 그들은 우리나라를 당장 공산화할 야망은 아직도 실현성이 없는만큼 그 두터운 뱃속깊이 감추어두고 우선 공산당이 약간 우세를 차지하게 하는 정도로부터 그 「프로그램」을 발족시키려한 것이다.<br>
이것은 생판 억지였다. 이것이 이른바 약소민족의 벗으로서 그 의사를 존중한다는 쏘련 공산주의자들이 해방자로 자처하면서 이땅에 들어와 정복자로 행세하며 벌여놓은 첫 사업이었다. 그들은 우리나라를 당장 공산화할 야망은 아직도 실현성이 없는만큼 그 두터운 뱃속깊이 감추어두고 우선 공산당이 약간 우세를 차지하게 하는 정도로부터 그 「프로그램」을 발족시키려한 것이다.<br>
그들도 조만식(曺晩植) 선생과 그 주위애 대한 백성들의 신망이 얼마나 크다는 것 를 아는만큼 어떻게해서든지 이를 최대한도로 이용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조(曺)선생을 위원장으로 받들어야 한다는데 대하여는 아무도 이론(異論)을 내놓으려하지 았았다. 「못하였다」 함이 더적절할는지 모른다.<br>
그들도 조만식(曺晩植) 선생과 그 주위애 대한 백성들의 신망이 얼마나 크다는 것 를 아는만큼 어떻게해서든지 이를 최대한도로 이용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조(曺)선생을 위원장으로 받들어야 한다는데 대하여는 아무도 이론(異論)을 내놓으려하지 았았다. 「못하였다」 함이 더적절할는지 모른다.<br>
그러나 갑자기 쏘련상전의 덕분으로 우위를 차지하게된 공산당은 신바람이 나게 되고 그 중에서도 김용범(金鎔範) 박정애(朴正愛) 부부와 장시우(張時雨) 같은 과격분자들은 쏘련상전을 믿고 몹시 덤비게되었다.<br>
그러나 갑자기 쏘련상전의 덕분으로 우위를 차지하게된 공산당은 신바람이 나게 되고 그 중에서도 김용범(金鎔範)ㆍ박정애(朴正愛) 부부와 장시우(張時雨) 같은 과격분자들은 쏘련상전을 믿고 몹시 덤비게되었다.<br>
그러나 그래봐야 그들은 오합지중이었다. 공산측위원중의 근반수인 七명이 「대화숙(大和塾) 동창」이었으며 나머지는 그만정도도 못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아무리 쏘련군정하일 망정 쟁쟁한 민족진영 인사들이 이런 어중이 떠중이 공산당들에게 굴하려할리 만무하였다.
그러나 그래봐야 그들은 오합지중이었다. 공산측위원중의 근반수인 七명이 「대화숙(大和塾) 동창」이었으며 나머지는 그만정도도 못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아무리 쏘련군정하일 망정 쟁쟁한 민족진영 인사들이 이런 어중이 떠중이 공산당들에게 굴하려할리 만무하였다.
이리하여 위원회에서는 사사건건이 양진영이 충돌을 되풀이하고 결국 위원회 자체가 위기에 임하게되었다.}}
이리하여 위원회에서는 사사건건이 양진영이 충돌을 되풀이하고 결국 위원회 자체가 위기에 임하게되었다.}}

2020년 6월 12일 (금) 13:46 판

1945년 8월 26일 평양에 도착한 소련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조만식을 만나 민족계열 위주의 건준에 동수의 공산주의자도 넣어 새로 조직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건준은 민족계열고 공산당측 각 16인으로 구성된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平安南道 人民政治委員會)로 개편된다.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해방 직후 평양에서 조만식과 부친 오윤선(吳胤善)의 일을 돕던 극작가 오영진(吳泳鎭, 1916~1974)은 당시 평양의 공산주의자들의 사정에 대해 "국수집 2층에서 조직된 공산당을 돕기위해 서울에서 현준혁을 파견했는데, 국수집파는 서울서 온 현준혁이 헤게모니를 잡을까봐 경계했다. 이들은 사무소를 대화숙(大和塾)으로 옮겼으나 아무런 계획도 실천도 없었고 시민들도 냉담했다. 8월 26일 소련군이 진주하기 전까지는 그들에게는 머리도, 돈도, 힘도 없었다."고 하였다.[1] 즉 평양 현지의 공산주의자들이 세력도 보잘것 없는데다 서울서 온 인텔리 현준혁이 헤게모니를 잡는 것을 경계했다고 하므로 자기들 간에도 불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하고, 8월 26일 평양에 도착한 소련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는 조만식과 만나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 대신 공산주의자들도 동수로 참석하는 조직을 만들도록 요구한다. 이에따라 평남건준은 8월 27일 민족계열 16명, 공산주의자 16명으로 구성된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平安南道 人民政治委員會)로 개편된다. 위원장은 조만식(曺晩植)이 맡고, 부위원장은 우파의 오윤선(吳胤善), 공산주의자 현준혁(玄俊赫) 두 사람이 맡는다.

인민정치위원의 한 사람이었던 한재덕(韓載德, 1911~1970)은 후일 한국으로 귀순 후에 당시 현준혁은 공산주의자였지만 조만식에 협력했다고 하였다.[2]

아래 한재덕의 글에 평남 인민정치위원회의 구성원 명단이 나온다.

民族陣營主導權(민족진영주도권)박탈 人民政治委員會(인민정치위원회)조직
…蘇軍政(소군정)의첫事業(사업)은大同團結(대동단결)의破壞(파괴)…
<민족 진영 위원>

조만식(曺晩植), 오윤선(吳胤善), 이윤영(李允榮), 김병연(金炳淵), 노진설(盧鎭卨), 김익진(金翼鎭), 이종현(李宗鉉), 김병서(金秉瑞),
한근조(韓根祖), 박현숙(朴賢淑), 조명식(趙明植), 장이욱(張利郁), 정기수(鄭基秀), 최아립(崔亞立), 홍기주(洪箕疇), 김광진(金洸鎭)[3]

<공산당측 위원>
현준혁(玄俊赫), 김용범(金鎔範), 박정애(朴正愛), 이주연(李周淵), 장시우(張時雨), 김유창(金裕昌), 송창렴(宋昌濂), 허의순(許義淳),
장종식(張鐘植), 최윤옥(崔允玉), 이관엽(李貫燁), 문태영(文泰永), 이성진(李聲鎭), 한재덕(韓載德) 외2명(外二名)

그런데 처음에 김광진(金洸鎭)[3]을 민족진영에 넣은것은 민족진영측의 오산이었다. 민족진영에서는 전 보성전문학교 교수요, 당시 모공장의 자본주이기도한 김광진(金洸鎭)을 자기진영 사람으로 타산하였으나 그실 그는 그때 공산당원하고 도경리부장의 중책에 있는 간부당원이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어제까지는 20 대 2의 비율(위원)로도 불평을 못하던 공산당 측은 쏘련상전의 덕분으로 이제는 15대 17로 오히려 우세를 차지하게 되었다. 대세는 역전하였다.
이것은 생판 억지였다. 이것이 이른바 약소민족의 벗으로서 그 의사를 존중한다는 쏘련 공산주의자들이 해방자로 자처하면서 이땅에 들어와 정복자로 행세하며 벌여놓은 첫 사업이었다. 그들은 우리나라를 당장 공산화할 야망은 아직도 실현성이 없는만큼 그 두터운 뱃속깊이 감추어두고 우선 공산당이 약간 우세를 차지하게 하는 정도로부터 그 「프로그램」을 발족시키려한 것이다.
그들도 조만식(曺晩植) 선생과 그 주위애 대한 백성들의 신망이 얼마나 크다는 것 를 아는만큼 어떻게해서든지 이를 최대한도로 이용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조(曺)선생을 위원장으로 받들어야 한다는데 대하여는 아무도 이론(異論)을 내놓으려하지 았았다. 「못하였다」 함이 더적절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갑자기 쏘련상전의 덕분으로 우위를 차지하게된 공산당은 신바람이 나게 되고 그 중에서도 김용범(金鎔範)ㆍ박정애(朴正愛) 부부와 장시우(張時雨) 같은 과격분자들은 쏘련상전을 믿고 몹시 덤비게되었다.
그러나 그래봐야 그들은 오합지중이었다. 공산측위원중의 근반수인 七명이 「대화숙(大和塾) 동창」이었으며 나머지는 그만정도도 못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아무리 쏘련군정하일 망정 쟁쟁한 민족진영 인사들이 이런 어중이 떠중이 공산당들에게 굴하려할리 만무하였다.

이리하여 위원회에서는 사사건건이 양진영이 충돌을 되풀이하고 결국 위원회 자체가 위기에 임하게되었다.


평안남도인민정치위원회
1945년 8월 27일 평안남도인민정치위원회는 소련군의 진주 이후 우익 중심의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가 해소되고 공산주의자와 우익이 동수의 비율로 하여 성립하였다. 평안남도인민정치위원회는 공산주의자와 우익의 연합정권으로 탄생하였으나 구체적인 정책 시행을 둘러싸고 상당한 내부 갈등을 빚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쟁점의 하나는 토지문제의 해결 방안의 차이였다. 평남인민정치위원회에서 발표한 3.7제가 조선공산당 북부조선분국에 의해 공개적으로 비판받는 등 내연하고 있던 갈등은 업무상의 공백을 야기하였다. 이는 11월 11일에 부위원장인 오윤선 김익진 한근조 등 우익인사 일부의 사퇴가 수리되면서 상당한 정도의 조직개편으로 이어졌다. 1945년 말까지 유지되던 연합정권으로서의 평안남도인민정치위원회는 결국 1946년 1월 5일 모스크바결정에 대한 지지문제로 위원장 조만식 등 우익인사 상당수가 사퇴함으로써 사실상 공산주의자들의 주도 아래 놓여지게 되었다.
조만식은 신탁통치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소련군에 의해 1946년 1월 5일 고려호텔에 연금되었으며, 그의 정치활동은 이로서 완전히 끝난다. 이후 계속 감금되어 있다 6.25 때 김일성 집단에 의해 총살 당했다.

함께 보기

각주

  1. 오영진(吳泳鎭, 1916 ~ 1974), ≪소군정하의 북한-하나의 증언 (국민사상지도원, 1952)≫, 복간본 (국토통일원, 1983) p.33
  2.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金日成(김일성) 直屬記者(직속 기자)의 手記(수기)〉 (2) 韩載德(한재덕)) 1962.05.05 동아일보 2면 : 眞正(진정)한 解放(해방) 단지 10日(일) / 不幸(불행)의 씨! 蘇軍進駐(소군진주) /…愛國心(애국심)·自治力誇示(자치력과시)한貴重(귀중)한몇날…
  3. 3.0 3.1 발굴 한국현대사 인물 75 김광진 1991.08.02 한겨레 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