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이승만은 부정선거로 당선됐다는데?
  • 일시 : 2015년 6월 11일 (목) 오후 2시
  • 장소 : 자유경제원 5층 회의실
  • 발제 : 조우석 (문화평론가)
  • 토론
권혁철 (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 소장)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김학은 (연세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남정욱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류석춘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 원장)


발제문: 이승만은 3.15 부정선거의 원흉?

-이기붕의 자유당 강경파가 1차 책임...막지 못한 건 뼈아픈 잘못

조우석 문화평론가
“대한민국에서는 도둑이 될 수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거지가 될 수 있다
/거지의 자유
/도둑의 자유야말로 자유였다
/바야흐로/바야흐로
/바야흐로
/세상은 자유당의 것
/사사오입으로
/3선 개헌 완료하고
/ 백주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라 우국충정이었다
/대한민국에서는
/전쟁으로 죽어갈 자유와
/전쟁으로 벼락부자가 될 자유가 있다”
― (고은의 시집 <만인보> 17권 수록시)

10여 년 전에 출간된 이 시집에 실렸던 작품은 이승만과 그의 시대에 대한 가장 노골적이고 맹랑한 조롱이다. 1950년대 큰 화제를 낳았던 몇몇 소재를 악의적으로 재구성 했는데, 신생 대한민국엔 거지나 도둑이 될 자유만이 있다는 구절은 작가 이범선의 소 설 ‘오발탄’을 패러디한 것이다. 1959년 말 <현대문학>에 발표됐던 ‘오발탄’은 가난에 찌들어 살던 삼팔따라지들을 그렸는데, 발표 즉시 문제작으로 떠올랐다. 실성한 어머니를 붙잡은 주인공 철호가 “그래도 남한은 이렇게 자유롭지 않아요?”라고 했던 말을 고은[3][4]이 그대로 살렸는데, 그건 예나 지금이나 이승만 체제에 대한 가장 지독한 냉소다.

‘오발탄’의 분위기나 등장인물도 마찬가지였다. 실성한 어머니, 임신중독에 걸린 아내는 물론 은행 강도하다가 총에 맞아 죽는 남동생, 양공주 누이들에 이르기까지 온통 비관적이고, 평균 이하의 사람들로 가득하다. 작품 이름 오발탄은 조물주의 실수 혹은 실패작이란 뜻인데, 이승만의 자유당 시절 전체가 잘못된 설계요 실패한 시대에 불과하다는 뉘앙스로 번진다. 이 작품은 4.19 직후 영화감독 유현목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 지면서 자유당 시절에 대한 ‘나쁜 기억’을 또 한 번 환기시키는 효과를 낳았고, 영화계 에서는 영화사에 남을 리얼리즘 영화로 떠받든다.

눈여겨 볼 대목은 이승만을 공격하는 고은 시가 이승만 정부의 아킬레스건인 1960년 3.15선거를 전후한 부정선거 고발로 온통 채워진다는 점이다. ‘이승만=부정선거의 원흉’라는 대중적 이미지가 그만큼 강력하다는 뜻이다. 일테면 “백주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는 대목은 3.15선거 당시 내무장관 최인규의 악명 높았던 발언에 대한 야유다. 야당의 선거유세를 방해하기 위해 관권이 개입된 각종 테러를 사람들이 항의하자 그가 던졌다는 말이다. 고은은 “바야흐로/세상은 자유당의 것/사사오입으로/3선 개헌 완료하고”란 말도 잊지 않았는데, 그건 1954년의 일이다. (총 30권 분량인 <만인보> 연작시집에는 사사오입 논리는 제공했던 교수의 이름을 딴 별도의 시 ‘서울대 수학과 교수 최윤석’를 포함해 현대사를 비아냥거리는 작품으로 넘쳐난다.)

고은을 포함해 현대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에 따르면,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영구 집권과 종신 대통령을 꿈꿨던 독재자 중의 독재자이다. 그래서 중임(重任)제한 철폐등으로 헌정을 어지럽혔으며, 그 결과 3.15 정-부통령 선거라는 ‘악의 꽃’을 만들어냈 다. 3.15에는 아예 ‘부정선거’란 꼬리표가 따라 붙는 게 상식이 됐고, 3.15는 부정부패와 탐악의 대명사다. 3.15와 4.19를 전후한 그 당시에 벌써 그러했다. 일테면 시인 김수영의 시 작품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의 경우 선거부정의 몸통인 이승만에 대한 극대치의 증오와 분노를 터트린 작품이다. 하야 성명을 듣자마자 김수영이 환호작약하며 삽시간에 완성했다는 이 작품은 자유당 시절과 우남 이승만에 대한 가장 지독하고 격렬한 공격이다.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그 지긋지긋한 놈의
/대한민국사진을 떼어서
/조용히 개굴창에 넣고
/썩어진 어제와 결별하자
/그놈의 동상이 선 곳에는
/민주주의의 첫 기둥을 세우고
/쓰러진 성스러운 학생들의 웅장한
/기념탑을 세우자
/이제야 말로 아무 두려움 없이
/그놈의 사진을 태워도 좋다
/협잡과 아부와 무수한 악독의 상징인
/지긋지긋한 그놈의 미소하는 사진을
(하략)”

참담한 인격살인 그리고 파괴-저주의 미학이 춤을 춘다.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측면도 있어서 현대문학의 잣대론 성공한 작품이란 걸 부인할 순 없다.

문제는 균형 잡힌 역사적 평가에 앞서 정서에 불을 지르는 측면이다. 그게 너무 커서 골칫덩이다. 건국 대통령은 “협잡과 아부와 무수한 악독의 상징”이며, 그의 주도로 이뤄진 1948년 건국이란 것도 결별해야 할“썩어진 어제”일뿐이라는 일면적 인식을 이 작품은 강요한다. 김수영의 이 시 등장 이후 대통령의 사진을 화장실 용도나 개굴창에 내다 버리고, 동상을 허물어버리는 행위야말로 되찾은 시민적 자유와 해방감을 만끽하는 인증이 되어버렸다. 곤혹스럽다.

우리의 건국 대통령은 말년의 부정선거이란 누명, 그리고 4.19로 인해 불명예스럽게 하야한 지도자란 나쁜 이미지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현실에서, 하필 일급의 시인 김수영을 저격수로 만나는 불운까지 겪은 셈일까? 그런 대중적이고 속화된 인식이란 게 어디까지가 맞는 얘기이고, 어디에서부터 과장된 것일까를 점검해야 할 시점인데, 이게 만만한 게 아니다. 그에게 씌워진 7개의 누명 중 가장 정면돌파가 힘들 수도 있다. 때문에 이 글은 우남의 과오에 대한 ‘부분적인 시인’을 기꺼이 하려 한다. 그와 별 도로 부정선거에서 이기붕 등 자유당 강경파의 책임이 어디까지이고, 우남의 역할은 과연 어디까지인가를 따져 묻는 작업을 병행한다.

그래야 1공화국이 “억압과 폭정”으로 점철됐다는 속단, 그 시대를 지휘한 건국 대통령은 “부정선거를 지휘한 원흉”이라는 김수영 식의 마구잡이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상식이지만 1공 당시 대통령 선거는 모두 네 차례 이뤄졌다. 첫 번째는 건국 직전인 1948년 7월 국회가 간선(間選)방식으로 뽑았다. 당시 제헌의원 198명 중 대통령에 이승만이 압도적인 180명의 표를, 이시영이 133표를 각각 얻었으니 절차에서 문제 없었으며 부정선거 혐의로부터도 완전히 자유롭다.

두 번째인 1952년 8월의 제2대 대통령 선거의 경우 처음으로 기존의 대통령 간선제를 직선제로 바꿔 실시했다. 그것도 전시(戰時)상황에서 이뤄졌다. 어쨌거나 그건 2공화국 때 잠시 내각제로 돌아선 것을 빼고 3공화국에서 지금까지 이어지는 권력구조의 전통을 창출한 계기로 평가해야 옳다. 직선제로 바꾸는 것을 골자로 한 발췌개헌과,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의 우여곡절을 거친 것도 사실이다.(이 사안을 두고 독재자 이승만에 의한 헌정 중단이라는 대중적 견해가 다수이지만, 그게 당시의 한미관계 그리고 대통령과 국회 사이의 권력관계를 무시한 짧은 소견이라는 점도 이제 의미 있는 문제제기로 자리 잡았다.) 그렇게 마련된 새 헌법에 따라 대통령에는 이승만이 유권자의 74.6%를, 부통령에는 함태영이 각각 당선됐으니 이것도 절차상으로 문제될 게 없다.

문제는 56년 5월 정부통령 선거인데, 이때부터 조짐이 썩 안 좋았다. 결과로만 보면 당시 이승만은 55.7% 지지를 얻어 당선된 게 사실이나 진보당 소속 조봉암은 예상치를 훌쩍 뛰어넘는 23.8%를 얻었다. 놀랍게도 선거운동 기간 중 급서했던 신익희에 대한 추모표(무효표)가 무려 20.5%나 쏟아져 나왔다. 건국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높은 피로도가 이런 방식으로 표출이 됐고, 자유당의 1차 위기가 그때 찾아왔다. (당시 조봉암은 개표과정에서 부정이 있었다며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고 항변했다. 그럴 개연성이 없지 않으나, 일방적 주장이라는 게 대세다.)

그뿐 아니었다. 부통령 선거에서 국내는 물론 미국도 낙관했던 이기붕이 떨어지고, 야당의 장면 후보가 당선됐는데 이게 적지 않은 화근이었다. 당시 이미 여든 살이 넘은 이승만의 유고시엔 권력이 야당으로 넘어갈 판이라서 자유당은 간담이 서늘해졌고 1950년대 중후반 내내 찜찜해 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런 집단심리 속에서 자유당은 4년 뒤의 3.15선거에서 상당한 무리수를 두게 되는데, 사실 1956년 대선도 의외로 치열했다. 야당이“못 살겠다 갈아보자”란, 선거사상 가장 유명한 구호를 들고 나오고, 여당 이 “갈아보니 별 수 없다”로 되받아친 접전의 선거였다.

바탕엔 사사오입 개헌으로 인한 민심이반으로 이승만 정부에 대한 피로감이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시인 고은의 말대로 “바야흐로/세상은 자유당의 것/사사오입으로/3선 개헌 완료”했던 게 대선 2년 전인 1954년의 일이다. 이승만은 장기집권의 길을 열었을지 몰라도 벌써 민심은 싸늘해졌다. 전시통치의 방식이 통하지 않게 된 상황에서 이기붕이 이끄는 자유당이 좀 더 유연하게 움직였어야 했는데, 상황은 정반대로만 흘러갔다. 일부 정권말기 현상을 빚고 있었다. 우선 경무대 주변에서 이승만의 국정 장악력이 느슨해지는 징후와 함께 이기붕 쪽으로 권력의 무게 중심이 옮겨가기 시작했다.

당시 유행했던 말이 ‘비서 정치’인데, 이기붕의 주선으로 경무대에 들어갔던 비서 박찬일과 경무관 곽영주 등 경무대 내 일부 비서들에 의해 국정이 농단되는 일이 벌어졌던 것도 이때 즉 1950년대 중후반이었다. 이들은 자유당 내 강경파들과 보조를 맞췄고, 프란체스카 여사와 박마리아(이기붕 부인)등과 함께 연로한 대통령의 눈과 귀를 막는 결과를 빚었다. 이런 구조 속에서 국가보안법 개정(1958년 말), 경향신문 폐간(1959년), 진보당 조봉암 사형(1959년) 등 1950년대 후반을 장식한 굵직한 현안들이 정부의 강공방식으로 처리됐는데, 이 또한 경직된 정국을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치러진 3.15선거란 당과 내각 그리고 경무대 비서실의 합작이었다. 때문에 뒷부분에서 드러나듯 이승만 대통령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었다. 그럼에도 시인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 당시 선거를 관장하는 주무부처인 내무장관 최인규의 적극적 역할이다. 법무장관 홍진기, 치안국장 이강학 등과 함께 당시 강경파로 분류되는 인물인 그는 이기붕이 이끄는 자유당과 함께 1959년 말부터 투표계획을 세운다. 여기에 악명 높은 4할 사전투표와 공개투표 전략 그리고 투표함 바꿔치기 등의 수법이 모두 들어있었다. 사전투표란 기권이나 고령 등의 이유로 투표를 하지 않을 유권자 비율을 4할로 내다보고 투개표 직전 다양한 방식으로 이승만 찬성표를 무더기로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선거 승리를 위해 무모한 승부는 공개투표에서도 확인된다. 선거의 큰 원칙인 비밀투표를 정면에서 무시한 것인데, 3인조, 5인조 등으로 무리 지어서 기표를 하며 이때 자유당원-경찰 등이 감시자 노릇을 하게 하여 야당 후보에게 표를 찍지 못하게 유도하는 것이다. 관권이 개입해 구비서류 미비를 이유를 대거나, 서류 강탈 등의 수법으로 야당의 후보 등록 자체를 방해하는 졸렬한 방식도 동원됐다. 그 결과 대통령 후보 이승만, 부통령 후보 이기붕이 얻은 표가 총 유권자의 수를 넘치는 사태가 일부지역에서 일어났다. 군대의 경우 이승만 표가 유권자의 120%나 됐다. 당황한 자유당은 이승만 득표율은 80%로, 이기붕 득표율은 70%로 하향조정하라고 행정망을 통해 뒤늦게 지시해야 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최종 공식결과는 이승만 88.7%, 이기붕 79%였다. 투표 당일 오후 4시를 조금 넘겼을 때 야당이 “선거가 아니라 국민주권에 대한 강도행위”라고 선언했다. 실은 최인규의 강공 드라이브는 이미 소문이 났는데, 대선 2~3개월 전부터 전국의시장 군수와 경찰 간부들을 매일 같이 10~20명을 내무부에 불러 교육을 시켰다. “여하한 비합법적인 비상수당을 사용해서라도 이승만 박사와 이기붕 선생이 꼭 당선되도록 하라. 콩밥을 먹어도 내가 먹고 징역을 가도 내가 간다. 국가대업 수행이니 시키는 대로만 하라.”(일월서각 편집부 엮음 <4.19혁명론2>, 1983년)

여기에 투표일 꼭 한 달을 앞두고 야당 후보 조병옥이 신병치료차 떠났던 미국에서 급서를 하면서 분위기마저 뒤숭숭해졌다. 사실상의 선거 지휘탑 역할을 하던 서울신문에 연일 이승만과 이기붕을 찬양하는 소설가 김동리, 김팔봉, 시인 김광섭 등의 글이 실리며 분위기를 잡았고, 영화배우 김승호 등이 자유당 지지 연설에 동원됐지만, 여론 은 썩 좋았던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승만을 가리켜 “세계적 반공지도자”, “영걸(英傑)”, “국부(國父)”등의 찬양을 쏟아냈다. “민족의 태양”이란 찬양이 등장했던 건 1956년 선거에서 대한노총에서 등장한 바도 있다. 어쨌거나 4.19 직후 서울신문에 불을 지르고, 김승호의 집을 불태우며 비극적 결말로 연결된 것도 어느덧 형성된 반 이승만 집단정서의 맥락이다.

아니 투표일 보름도 전인 2월 28일 대구 경북고 학생 800명이 “학교를 정치도구화하지 말라”는 구호와 함께 시위를 벌였는데, 그 중차대한 징후를 제대로 읽고 대응하는데도 이승만 정부는 한참이나 굼떴다. 당시 학생들은 일요일에도 강제로 등교하게 하는 교육부의 꼼수 지시에 비위가 상했고, 그걸 과도한 정치개입으로 규정했다. 일요일 등교란 야당 유세장을 텅텅 비우게 할 요량으로 사람을 미리 빼내려는 꼴이었다. 2.28 대구학생시위를 필두로 대전-수원-서울-원주 등 전국으로 빠르게 확대된 것이 투표 당 일 훨씬 이전까지 벌어지고 있던 심상치 않은 상황 전개였다.

우리는 안다. 그게 비극적인 투표 당일의 마산 시위 폭발로 연결되고 학생은 물론 시민까지 합세한 그날 시위와 경찰의 발포로 9명이 사망했는데, 그 한 명이 마산상고 1학년 김주열 군이다. 그리고 한 달 여 뒤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그의 시신이 낚시꾼에 의해 떠오르면서 상황은 급변한다. 시위군중이 10만 명 내외로 불어나고 관공서 습격과 함께 부정선거 비판의 차원을 넘어 이승만 정부 규탄으로 발전한 것이다. 지방을 중심으로 들끓던 선거 후유증에 따른 소요사태가 수도권으로 옮겨 붙는 상황에서 서울은 1개월 이상 상대적으로 조용했다. 특히 대학교에서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는데 이것도 일촉즉발 상황이었다.

이 시점에서 고려대 등 서울시내 대학 거의 전체가 한꺼번에 시위를 벌인 결정적 분기점이 4.19다. 급속한 여론 악화와 함께 결국 대통령의 하야 성명(26일)라는 충격적 결과를 빚어낸 것이 이후 전개된 상황이다. 기회에 김주열의 시신 발견 그 다음날 열렸던 국무회의 속기록을 훑어볼 필요가 있다. 3.15선거를 전후해 일정한 시간이 흘러 상황 파악이 제법 명료했던 시점에서도 대통령은 부정선거와 관련된 소요사태의 전모와 원인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건 두 가지로 해석된다. 첫째 당시 연로했던 그가 효과적으로 국정 전반을 장악하고 있었는가에 대한 의구심을 피할 수 없다. 이점은 최고통치자로서의 결격사유로 지목되지만, 거꾸로 자유당이 연출했던 선거부정에서 그가 깊숙이 개입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둘째 이기붕이 이끄는 자유당의 문제인데, 그들이 야말로 선거부정을 지휘-연출했던 총본산이었다는 걸 새삼 보여준다. 이점은 대통령도 대선에 훨씬 앞선 2~3년 전부터 이런 사태의 전개 앞에 적극적 제지 등의 역할을 못한 채 끌려 다녔음을 보여주는데, 어떻게 보더라도 그의 정치적 책임을 모두 벗을 순 없다.


제36회 국무회의 (1960년 4월 12일)

<시국안정에 관하여>

李承晩 대통령 : 『정부가 잘못하는 것인지 민간에서 잘못하는 것인지 몰라도 아직도 그대로 싸우고 있으니 본래 선거가 잘못된 것인가?』하시는 하문

洪璡基 내무 : (마산사건의 진상과 경찰의 대비조치를 보고하고) 『사거의 배후는 다음과 같이 추측하고 있다』고 보고. (1)민주당이 타지방의 데모는 선동하고 있으나 금반 마산사건의 직접배후라는 확증을 잡지 못하고 있으며 (2)6.25사변 당시 좌익분자가 노출 정리되지 않은 지역이니 만큼 공산계열의 책동 가능성이 많다고 보며 따라서 군경검의 합동 수사반을 파견하여 두라고 한다.

(중략)

李承晩 대통령 : 『이번 선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겼다. 즉 선거가 없었으면 일이 잘 되어 갔으리라고 생각할 수가 있을 것인가?』하시는 하문에

金貞烈 국방 : 『민주당의 극렬분자의 장난이지만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 있는 우리나라 실정으로는 완전한 페어플레이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의견. 李承晩 대통령 : 『나로서 말하기 부끄러운 말이지만 우리 국민은 아직 민주주의를 하여 나가기까지 한참 더 있어야 할 것이며 정당을 하여 갈 자격이 없다고 본다.

(중략)

어린 아이들을(김주열 군을 언급하는 걸로 추정됨) 죽여서 물에 던져놓고 정당을 말할순 없으니 무슨 방법이 있어야 할 것이다. 李承晩이 대통령을 내놓고 다시 자리를 마련하는 이외는 도리가 없다고 보는데 혹시 선거가 잘못되었다고 들은 일이 없는가?』 하시는 하문.

金貞烈 국방 : 『우리 형편은 안정 요소가 불안정 요소보다 많은 만큼 과히 염려하실 것은 없다고 보며 정부가 너무 유화책을 써온 것이 이 같이 될 이유의 하나이기도 하나 이제는 홍 내무가 지혜 있어 처리하여 가고 있으니 잘될 것』이라는 의견.

廓義榮 체신 : 『국회를 열어놓고 자유당이 손 들어서 하나씩 처리하여 가면 되고, 민주당의 데모도 이젠 문제가 안 되며 다만 공산당의 책동을 막는 방책이 필요하다』는 의견.

宋仁相 재무 : 『정부로서도 이 이상 더 후퇴할 수 없으니 대책을 강구하여 가야 할것』이라는 의견.

속기록이 보여주는 건 동요하는 내각의 모습이다. 대통령도 그렇지만 국무위원들도 정확한 정보 없이 민주당 배후설과 공산책동 가능성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다. 당시 이승만은 당신의 하야 가능성을 비추고 있으니 결집된 의견은 여전히 오리무중인 상황이다. 이후 전개된 상황은 우리가 잘 안다. 사태의 결정적 분기점으로 지목되는 교수단 데모(25일)와 대통령과 학생 대표단의 면담도 진행됐지만, 결국 이승만의 하야는 미국의 메시지에 따른 것임을 무시 못한다. 사태를 주시하던 미국이 한국 정부를 더 이상 지지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반복해서 전한 게 결정적 요인의 하나였다.

3.15선거의 연출자가 이기붕의 자유당이라는 건 상식에 속한다. 그 앞뒤 배경도 이미짚어본 바이다. 56년 5월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55.7% 지지를 얻어 당선이 됐지만, 진보당 소속 조봉암이 약진하고 부통령 선거에서 이기붕이 떨어지면서 자유당의 무리수가 시작된 것이다. 당시 이미 여든 살이 넘은 이승만의 유고시엔 권력이 야당으로 넘어갈 판이라서 자유당은 1950년대 중후반 내내 찜찜해 했고, 이게 3.15 부정선거 기획의 최대원인이었다. 선거를 2개월 앞둔 시점에서 당시 주한 미국대사 월터 다울링은 국무성에 보낸 보고서에서 이렇게 지적하는데, 자유당 발(發) 정치위기의 가능성을 너끈히 내다보고 있었다.

“나는(다울링은) 1960년 선거 내내 야당을 짓밟고 자신들이 권좌에 머무르기 위해 자유당이 비민주적 전술에 호소하면서 빚어질 수 있는 정치위기에 대비해야 한다고 믿는다. 상대적으로 공정한 경쟁에서 선거를 치를 경우 이승만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있는 반면, 이기붕은 너무 어렵다. 때문에 자유당은 선거운동에 광범위하게 간섭하고 투표행위를 뒤엎을 것이다. 이 선거(3.15)는 이승만의 마지막 선거가 될것이 거의 확실하다. 자유당 지도부는 이승만 사후(死後) 정치권력 상속문제를 그 어느때보다도 더 예리하게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1956년 자신들의 부통령 후보 패배의 반복을 막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아끼지 않을 것이다.”

다울링 보고서가 지적하듯 고령에 따른 거의 마지막 선거에서 이승만의 당선은 유력했다. 따라서 그가 부정선거를 직접 지시할 이유는 없었다. 그간의 통치행태나 스타일로 보아 선거부정을 획책할 유형의 정치인도 아니었다. 이기붕은 달랐다. 4년 전 패배 설욕도 별렀지만, 그보다 ‘이승만 이후’를 내다보고 결정적으로 무리를 한 것이 3.15선거다. 어쨌거나 3.15선거에 대한 평가는 4.19 발발과 뒤이은 2공화국의 등장으로 인해 좀 가혹해지고 극화된 느낌이 없지 않지만, 동시에 부인하지 못할 종류의 것이 분명하다. 이틀 뒤 나온 미국 워싱턴 포스트 사설 제목이 “부패한 승리(Rotten Victory)”인 것이 많은 걸 함축한다.

그러나 이승만에게 부정선거의 원흉이란 누명을 씌우는 것은 너무 가혹할뿐더러 일정부분 사실이 아니다. 시의 틀을 빈 고은이나 김수영 식의 문학적 진술이란 대중적 호소력이 높겠지만 그게 바로 이승만의 진실은 아니라는 점도 분명하다. 그걸 새삼 확인시켜주는 증언이 최근 나왔는데, 3.15 선거 이전 이승만의 관심과 통치 스타일을 보여 주는 자료로 유감없다. 1950년대 중반 이후 4.19까지 상공부 장관, 내무부 장관, 교통부장관을 내리 역임하며 이승만을 가까이에서 보필했던 김일환(1914~2001)의 괄목할 만한 증언집 <김일환 회고록>(홍성사 펴냄, 2014년 8월 초판 발행)이 그것이다.

그는 3.15선거 꼭 1년을 앞두고 ‘부정선거의 콘트롤타워’로 꼽히는 최인규가 장관에 오르기 직전의 내무장관이다. 당시 내무부는 경찰력을 지휘하면서 동시에 각종 선거를 치러내야 하는 주무부처였고, 장관은‘선거 장관’으로 통했다. 때문에 집권여당과 교감할 수 있는 인물을 발탁하는 게 관례인데, 대통령은 전혀 비정치적 인물이자, 원칙주의자로 정평 있던 인물 김일환을 그 자리에 앉혔다.

이 뜻밖의 인사는 무얼 뜻하는가? 아무리 소극적으로 해석해도 코앞의 정부통령 선거를 공정하게 관리하고 싶다는 게 이승만의 숨겨진 의지임이 분명하다. 인사권자의 그런 의지를 김일환 자신도 너끈히 가늠했다.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웠던 그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장관에 취임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뜻을 충실히 받들어 선거에는 공명정대를 실천하고자 했다. 그리고 상공부에서 성공한 그대로 내무부를 권위주의적 권력 기관이 아닌 민주주의적인 부처로 만들 작심이었다.”(331쪽) 실제로 “국민이 정부를 믿을 수 있는 선거행정”(350쪽)이 그의 모토였는데, 김일환은 그걸 실천했다. 사례도 있으며, 이를 둘러싼 그와 대통령의 반응도 흥미롭다.

1958년 9월 실시됐던 경북 영일을 재선거 당시 자유당 의원 개표부정과 몰표 당선을 보고 받고 끝내 원칙주의자답게 당선 무효를 선언했다. 적지 않은 번민 그리고 자유당과의 관계까지 두루 고려하다가 나온 결단이었다. 개표 중 전기줄을 끊고 준비된 야당표를 뭉텅이로 바꿔치기 하던 고전적 수법의 선거부정에 눈감아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행태에 당선 무효를 선언한 것은 당시로선 실로 획기적이었고, 자유당을 뒤흔든 사안이었는데, 그는 해낸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김일환은 이 사안을 대통령에게 직보했다. 선거 관련 업무는 자유당 이기붕과 먼저 상의한다는 관례를 무시한 채 경무대에서 무릎을 댄 둘 사이의 음미해볼만한 대화를 회고록은 이렇게 묘사했다.

“대통령은 여러 곳에서 보고를 받고 있었을 것이었겠지만, 나의 (개표 부정 관련) 보고를 편안한 자세로 듣고 있었다. 나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하고 물었다. 나는 서슴치않고 ‘무효로 하겠습니다’하고 대답했다. 대통령은 ‘그래, 그리 하게’하며 좋아하였고, 나의 무릎을 친히 손으로 쳐주었다. 또 이어서 ‘어떻게 할까? 내가 자유당이 부정선거를 했다고 담화를 발표할까?’하고 물었다. 이 어른은 부정을 싫어하는 분이다.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을 장관으로 기용하신 것이다. 나는 ‘안 됩니다’하고 솔직하게 대답을 올렸다.

(중략)

나는 ‘제가 이기붕 의장을 만나 자유당이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답변드렸다.”
― (352~353쪽)

의문은 남는다. 김일환 임명이 공명선거에 대한 대통령의 의지가 명백하다면, 왜 대통령은 선거 1년 전의 시점에서 최인규로 교체했는가? 중간에 자유당의 직간접적인 압박에 대통령이 끝내 손을 들고 김일환을 7개월 내무장관에 그치게 한 것인가? 아무리 당시의 그가 연로했다고 해도 다양한 경로의 정보를 취합할 수 있었던 최고통치자답지 않은 처신이 아닐 수 없다. 최인규가 지휘하는 내무부가 선거부정의 기획의 소굴로 변하도록 방치했던 것도 다소 의아한 대목이다. 분명한 것은 김일환 경질과 최인규 임명은 경무대와 자유당 내 강경파가 대통령에게 강력하게 요구했던 카드라는 점이다. 그 기미를 눈치 챈 김일환이 연속 두 차례에 걸쳐 사직 의사를 표명했는데, 그때마다 이승만은 눈도 꿈쩍하지 않았다.

“자유당이 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때마다 “자유당이 잘못했고, 자네는 잘했어. 그만둔다고 해서는 안 돼.”라고 못 박았다는데, 그게 우남의 진면목이라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그러던 대통령은 세 번째 사직 간청에 “그럼 가서 기다려”라며, 겨우 수용의사를 밝혔는데, 그 또한 당시 주변상황에 끌려가던 이승만의 모습이 분명하다. 정부통령 선거를 앞둔 자유당의 압박을 외면할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이런 두 얼굴의 모습이 모두 우남의 통치 스타일이고 사람됨에 대한 많은 정보를 함축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우남에게 부정선거의 원흉이란 누명을 모두 뒤집어씌우는 것은 부적절 하다.

최고통치자인 우남이 이 모든 사안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면할 순 없다고 쳐도 시인 김수영의 삿대질처럼 그가 “협잡과 아부와 무수한 악독의 상징”일 순 없다. 사실 이승만이 이끈1950년대, 실로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가 크게 돌아가던 그 전체 모습을 파악하기란 어렵다. 더구나 너무 가까이에서 들여다 볼 경우 19세기 조선왕조 말과 20세기 초 일제 식민시대의 아픔을 겪고 훗날 1960~70년대의 위대한 개발연대를 예비하던 그 시기의 시대사적 의미가 쉽게 판독 안 된다. 우리의 시야를 가리던 역사의 먼지가 모두 내려앉아 충분한 시야가 확보된 상황에서 편견 없는 시야로 살펴보는 게 필요하다.

그렇게 크게 볼 경우 우남이 연출한 1950년대란 “퇴영, 침체, 좌절의 늪이 아니고 한국이 자유 평등 민주주의 등 보편적 이상을 향해 전진을 계속했던 시기”라는 근현대사 전공자 유영익 교수의 말(박지향 등 엮음 <해방전후사의 재인식>2권 436쪽)이 맞다. 그렇다면 이승만을 부정선거로 당선됐다고 하는 누명은 너무 가혹하거나, 부분적 진실에 불과하다고 봐야 한다. 3.15 부정선거에서 드러난 수많은 과오에도 우리들은 그걸 밑천으로 소중한 민주주의 훈련을 거쳤다는 점도 잊으면 안 된다. 하야 성명서 작성을 지시하면서 “내가 하야하면 사람들이 더 이상 다치지 않겠지?”라고 했던, 착한 권위주의 통치자의 위대한 결단 덕에 대한민국은 지금 민주주의의 토대 위에 서있다.

논란의 여지없이 우남은 건국 대통령이란 이름에 걸맞게 대한민국의 국기(國基)를 다져놓았다. 그가 지휘했던 시대는 공전절후(空前絶後)의 경제기적으로 잉태했던 도약 준비기였다. 최근 들어 “협잡과 아부와 무수한 악독의 상징”이란 김수영 식의 평가는 한물갔다. 그런 근시안적 재단 대신 우리시대 엄정한 학자 유영익 선생의 말대로 우남은 고대 이스라엘의 모세에 비교된다. 그런 우남에게 들씌워졌던 누명은 대부분 근거가 없거나 취약하다. 단 부정선거만은 유감스럽게도 권위주의 통치기간의 실정(失政)으로 평가해야 하며, 이 걸출한 지도자의 흠결(欠缺)로 인정해야 한다. 그럼에도 역사의 저울에 달아볼 경우 우남이 공칠과삼(功七過三) 그 이상의 리더란 판단엔 변함없다.


토론문-권혁철: 이승만은 부정선거로 당선됐다는데?

권혁철 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 소장

이승만 대통령은 총 4차례의 선거를 치렀다. 첫 번째는 건국 직전인 1948년 7월 국회에서 간선(間選)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일이다. 이 당시에는 간선이 되었든 직선이 되었든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될 것이라는 점이 너무나 확실했다. 물론 이승만은 당시에도 대통령 간선제보다는 직선제가 국가 원수를 선출하는 보다 현명한 방법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빨리 정부를 구성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라는 인식에서 직선제를 고집하기 보다는 간선제를 마지못해 수용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정은 이승만 대통령이 국회에 대통령 선출권을 부여하는데 동의하면서 붙인 단서의 내용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한국 국민이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음이 입증되면 반드시 선출 권한을 국민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단서를 붙였던 것이다. 대통령 간선제는 1952년 선거에서는 직선제로 전환되었다. 이것은 국가 원수는 국민들이 직접 선출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라는 그의 평소의 정치적 소신을 달성한 것이기도 하면서, 6.25를 겪으면서 국민들이 공산 침략에 맞서 보여준 불굴의 저항정신이라면 국민들이 국가 원수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국민의 권리와 능력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5]

두 번째인 1952년 8월의 제2대 대통령 선거의 경우도 직선제로 전환하면서 이승만대통령의 당선은 별 걱정이 되지 않았던 선거였다. 대통령 직선제는 이 대통령의 소신이기도 했지만, 국민들의 지지가 확고했고, 이런 사정을 대통령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직선제로 전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거 자체에는 크게 문제될 것이 있을 리 없었다. 다시 말해 자신의 당선을 위해 무리하게 부정선거를 할 이유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이런 정황은 대통령 선거가 있기 2년 전인 1950년 5월 30일 실시된 제2대 총선거를 보면 잘 확인할 수 있다. 4년의 임기를 갖는 210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선거였는데, 당시 “AP통신은 한국을 세계에서 뉴스의 수집과 보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자유를 허용하는 6개국 중 하나로 꼽았다. 선거유세에는 제한이 없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6] 부정선거를 할 이유도 없었고, 부정선거를 하지도 않았다는 이야기다.

다만, 제2대 대통령 선거 시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직선제 개헌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회와의 마찰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6.25 남침으로 정부가 부산으로 내려가 있는 상황이 되자 국회의원들은 나라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책임을 묻겠다고 이승만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제2대 대통령으로 장면을 추대하려고 했다. 미국 역시 6.25전쟁과 관련하여 커다란 이견을 보이는 이승만 대신 온건한 장면을 지지했다. 국회간접 선거로 이승만이 다시 대통령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그래서 그는 국회에서의 대통령 간접선거 방식을 국민들의 직접선거 방식으로의 전환을 추진했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이승만이 진짜 독재자였을까 하는 점이다. 그가 진짜 독재자였다면 아예 선거 자체를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당시는 전쟁이 한창 중인 전시상황이었다. 국가 비상사태를 이유로 얼마든지 선거를 취소하거나 뒤로 미룰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평생 미국 민주주의에 익숙해 온 이승만은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대통령 선거방식을 국회 간접선거에서 국민 직접선거로 바꾸려고 하였다.” [7]

이승만 대통령의 직선제 개헌안은 국회에서 부결되었다. 그러자 이승만은 임시수도 부산과 경남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의원들의 일부를 국제공산당 연루 혐의로 구속하는 등 강공책으로 나갔다. 이른바 ‘부산 정치파동’이 그것이다. 이에 국회는 행정부의 개헌안과 국회 개헌안 가운데서 대통령 직선제 등 필요한 부분만을 골라 절충안을 만들어 국회를 통과시켰다. 이른바 ‘발췌 개헌’이다. 국회가 이승만의 직선제 개헌을 인정한 것은 물론 이승만의 강공에 밀린 부분도 있지만, 간선제보다는 직선제가 자유선거의 명분에 가깝고 또 그것이 국민들의 광범한 지지를 얻고 있다는 점에서 직선제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이루어진 직선제 개헌 국민투표에서 총 유권자의 78.2%가 참가하고 93.1%의 찬성으로 개헌안이 통과되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무리한 방식을 사용함으로써 이승만은 국내외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이와 관련하여 시대적인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매도할 수만은 없다는 견해도 있다. “클린턴 로시터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세 가지 위기로 전쟁, 반란, 경제위기를 꼽았다. 건국 직후 이승만 시대는 민주주의라는 제도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 세 가지 위기가 복합되어 우리에게 강제됐다.” 이런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인권과 자유, 민주화의 미비를 들어 이승만을 독재자로 비판하고 매도하는 것은 정상적인 사고가 아니라는 지적이다. [8]

더구나 1952년 당시는 전쟁이 한창이던 국가위기의 시기였다. 비슷한 국가 위기의 시기에 민주주의가 발달한 미국에서도 유사한 사태는 있었다.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꼽히는 “링컨은 남북전쟁이라는 국가위기에 직면하자 헌법에 보장된 인권을 번번이 무시하고 징집을 기피하거나 반대한 자, 적대세력을 지원하거나 호의적으로 대한 자들을 모두 군사재판에 회부하여 처벌했다. 링컨은 자신의 정책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수천 명을 재판 없이 투옥하고 자신을 비판하는 신문사 발행인들을 체포했다. 군인들을 선거에 개입하게 했고, 야당 의원들을 의회에서 추방했다. 그래서 그는 언론으로부터 독재자 또는 폭군으로 불렸다.” [9]


이후 1954년에는 초대 대통령의 출마 횟수 제한을 없애는 이른바 ‘4사5입’ 개헌의 무리수가 있었고, 1958년에는 국가보안법을 개정하면서 국회와의 충돌이 있었다. 야당이 법안의 통과를 저지시키기 위해 의사당을 점거하자, 정부가 무술경관들을 동원해 국회의원들을 밖으로 끌어낸 다음 자유당 의원들만으로 통과시켜 버렸다. 미국은 이사건에 대한 항의로 다울링 대사를 한 달간 소환하기도 하였다.

이것과 관련해서도 이승만으로서는 할 말이 없지 않다. 현재 대한민국 국회에서는 이른바 ‘국회선진화법’이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대통령이나 여당이 야당의 허락 없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이나 여당이 반드시 관철시켜야 할 일이 있다면 어찌할 것인가? 이와 유사한 상황이 당시에도 벌어지고 있었다. 국회를 중심으로 한 야당 세력은 일체의 타협을 거부한 채 극한투쟁으로 일관했다. 자신들이 마치 정의의 사도인양 행세하며 무조건 반대와 극한투쟁에 호소했던 것이다. 1958년의 국가보안법 파동 당시 야당은 국회 본회의장을 점거하고 일체의 타협을 거부했다. 민주주의를 수호한다고 하면서 민주주의의 핵심인 투표를 못하게 방해했던 것이다. “그러한 야당의 투쟁 특성은 여/야 중재에 나섰던 미국 대사 다울링마저도 개탄하며 지적할 정도였다. 다울링은 특히 민주당 신파의 비타협성에 실망했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정치적 파행은 그 책임을 전적으로 이승만에게만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10]

제3대 대통령 선거였던 1956년의 선거에서도 관권선거, 부정선거의 비난이 나오기는 했어도 자유선거의 원칙이 기본적으로는 지켜졌다고 볼 수 있다. 이 선거에서 야당인 민주당의 장면이 여당인 자유당의 이기붕을 제치고 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사실은 자유선거의 원칙이 지켜졌다는 점을 시사한다.

부정선거와 연계되어 가장 큰 논란이 되는 것은 역시 1960년 3월 15일의 제4대 대통령 선거이다. 앞서의 1956년의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 자리를 야당에 빼앗기고, 이미 여든을 넘긴 대통령이 유고시엔 권력이 야당으로 통째로 넘어갈 수 있다는 위기감이 집권 자유당에 팽배해졌다. 자유당으로서는 무언가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과는 엄청난 부정선거였다. 4할 사전투표와 공개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등 갖가지의 선거부정이 자행되었다. 투표 결과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기붕이 당선되지만, 부정선거에 분노한 국민들의 저항에 부딪혀 대통령의 하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부정선거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논란은 이러한 부정선거를 이승만 대통령 본인이 지시했는지 혹은 인지하고 있었는지의 여부인 것으로 보인다. 여러 가지 정황상 이승만 대통령 본인은 부정선거 자체를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든을 훌쩍넘긴 이승만 대통령의 눈과 귀를 측근들이 막고 제대로 보고를 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이러한 정황은 국민들과 대학생들이 대대적으로 들고 일어나는 사태가 터졌을 당시 이를 바라보고 대처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시각과 행보에서 나타난다. 이승만은 4.19가 일어나기 1주일 전인 4월 12일 부정선거 및 마산의 학생시체 발견에 관한 보고를 받고 분노해서 말한다. “부정선거를 왜 한 거야? 어린애를 죽여 놓고 뭐라고? 공산당짓이라? 그걸로 해결될 것 같아? 대통령이 책임져야 해. 내가 그만 둬야 도리이니 후속대책을 빨리 마련하시오.” 4.19 일주일 전 이미 ‘하야’를 공식 언급했다 [11]

또 4월 19일 경찰의 발포로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태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이승만은 병원으로 달려가서 위문하면서 “불의를 보고도 일어나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지. 젊은이들이 장하다.” “경찰이 백성을 죽이다니? 나라가 어떻게 백성을 죽일 수 있어?”라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리고 돌아와 ‘국민이 원하면 하야한다’고 전국에 방송한다. 그러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오늘은 한 사람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 “내가 그만 두면 사람들은 안 다치겠지?”라며 걱정을 했다. “대통령의 이러한 위대한 결단은 세간의 의혹처럼 누가 권고해서 한 것이 아니고, 대통령 스스로의 판 단에 의한 독자적인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다시 그 때를 회고하면서 이승만 박사가 아니었다면 결코 당시의 상황에서 ‘대통령 하야 성명’이 선포되지 않았으리라고 굳게 믿고 있는 바이다.”는 당시 국무위원이었던 김정렬 장관의 증언이다. [12]

이승만의 이런 결단의 뜻은 퇴임 후 각 국 수반의 위로 편지에 대해 이런 답장을 쓴 것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나를 위로하는 편지는 안 받겠소. 나는 지금 가장 행복하다오. 부정을 보고 궐기하는 백성들이 나라를 지키니 이런 날을 평생 기다렸기 때문이오.” 그는 20대 때 쓴 『독립정신』에서 “무식하고 천하며 약한 형제자매들이 스스로 각성하여 국민정신이 바뀌고 아래로부터 변하여 썩은 데서 싹이 나며 죽은데서 살아나기를 원하고 또 원하는 바이다.”도 했다. 이것이 그가 원하던 것이었는데, 그가 10년 간 교육으로 길러낸 백성, 똑똑한 국민이 되어 있는 백성을 발견하고 주저없이 하야했던 것이다. [13]

여러 가지 정황상 이승만 대통령은 부정선거에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 대사 다울링이 보았듯이 이승만 대통령의 당선은 거의 확실했다. 문제는 부통령후보인 이기붕이었고, 그를 둘러싼 자유당이었다. 물론 당시 국정의 최고책임자인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책임까지 면제될 수는 없지만, 발제문의 표현대로, 부정선거의 원흉이란 누명을 뒤집어씌우는 것은 부적절하다.

이승만 대통령은 철저한 자유민주주의자였다. 전쟁 중에도 헌정이 중단되는 사태, 민주주의 투표가 중단되는 사태가 없었다는 점,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깊게 생각해야 한다. 1952년 8월 2일 전쟁이 한창 치열했던 당시에도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유권자의 88%가 참여한 선거에서 이승만은 74.6%의 지지를 얻어 당선되고, 부통령에는 이승만이 지지했던 무소속의 함태영 목사가 당선되었다. “선거를 참관했던 유엔 선거감시위원단은 경찰의 개입이 있었지만 대세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었다고 평가했다.” [14]

물론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쏟아지는 비판이 모두 틀렸다거나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비판 또한 재검토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이런 저런 흠결을 갖고 이승만 대통령 전체를 부정하는 듯한 비판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건국 대통령으로서의 이승만을 부정하고 폄훼하는 일은 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당시의 상황에서 “자유민주주의 원칙 아래 ‘국민’이 주권자로 설정되는 민주공화국이라는 근대적 정치체계를 수립하였다”는 점은 하나의 기적 같은 일이며, 그 자체가 세계적으로도 지극히 예외적인 일로서 현대사의 혁명적 사건으로 기록될 만한 업적이기 때문이다. [15]

이런 점들을 고려하지 않은 채 부분적인 흠결을 들고 나와 건국 대통령의 업적 전체를 부정하는 것은 흔히들 ‘비판을 위한 비판에 빠지기 쉬운 Nirvana 접근법’에 매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할 일이다. “건국과 같은 혼란기에는 여러 가지 난관으로 인해 ‘부당한 행위’를 하더라도 그것을 비난할 수만은 없다.”는 마키아벨리의 말처럼 일부분만을 볼 것이 아니라 전체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에서 건국 대통령 이승만을 평가해야 할 것이다.


토론문-김용삼: 이승만과 부정선거 문제, 어떻게 볼 것인가?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이승만에 대한 공격 가운데 하나가 부정선거 문제다. 이 사안은 이승만을 공격하는 다른 사안들과는 달리 매우 심각한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 요소를 안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승만은 자신의 재임 시절 자유당 정권의 이름으로 자행된 부정선거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집권기(1948~1960) 동안 네 차례의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48년 국회의 간선에 의한 초대 대통령 선거, 1952년 8·5 대선, 1956년 5·15대선, 그리고 1960년의 3·15 대선이었다.

초대 대통령선거는 1948년 7월 20일 국회의원들의 간접선거에 의해 이승만 후보는 180표(91.8%)를 얻어 제1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득표순위를 보면 김구 13표(6.63%), 안재홍 2표(1.02%) 순이었다. 국회에서 간선으로 선출했으니 부정선거 운운할 만한 시비 요인은 애당초 없었다.

2대 대통령 선거는 1952년 8월 5일 실시되었다. 이때부터 개헌에 의해 국회에서의 간선제가 폐지되고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해 선출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제헌헌법이 대통령 선출을 국회 간선제로 규정한 것을 ‘부산 정치파동’이라 명명된 일련의 사건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을 하는 과정에서 정치 폭력을 행사했다는 점이 이승만을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되고 있다.


휴전 둘러싼 이승만과 미국의 대결

그러나 부산 정치파동은 이승만의 독재를 부각시키는 차원의 문제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심오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임기는 1952년까지였다. 미국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한반도에서 군사적 승리가 어렵다는 판단을 내리고 1951년 4월 10일 맥아더를 해임했으며, 한반도에서 명분 있는 휴전을 하고, 일본을 재무장시켜 중공과 소련에 대한 견제 세력으로 이용하는 전략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미 국무성과 주한 미국대사관은 1951년 후반기부터 이승만을 대체할 인물로 장면, 장택상, 김성수, 조병옥 등을 후보에 올려놓고 있었다. 미국은 1952년 한국의 대통령 선거를 이용해 북진통일을 고집하는 이승만을 패배시키고 미국 측 의견에 잘 따르는 유화적 인물을 당선시켜 휴전협정을 맺고 철군을 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무초 주한 미국대사 무초는 1952년 2월 15일자 전문에서 차기 대통령으로는 장면이 최선이라고 보고했다. 무초 대사가 보낸 아래 전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국은 한국이 내각제를 운영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내각제 개헌은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다른 두 후보인 이범석과 신익희는 우리가 볼 때 격이 좀 떨어진다. 최선의 두 후보는 장면과 허정인데, 그들은 추종자가 적고 좀 허약하다. 내각제를 도입하면서 이승만을 재선시키는 방법도 있다. 그것은 다른 강력한 후보자가 없는 상태에서 이승만의 영향력을 제한시키는 한 가지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이승만이 원치 않을 것이고, 내가 보기에도 그것은 프라이팬에서 나와 불로 뛰어드는 격이다. 왜냐하면 한국인들은 내각제를 운영할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국회에서 대통령을 뽑을 때 장면이 당선되는 것이 우리의 최선의 희망이다.’

대통령 직선 문제는 1948년 7월 제헌헌법 제정 당시에도 논란이 됐었다. 이승만은 건국을 지연시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초대 대통령의 국회 선출에 동의했다. 이승만은 국회가 대통령 선거권을 가지도록 동의하면서 “한국 국민이 그럴 만한 능력을 보여주게 될 때에는 그 권리를 국민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단서를 붙였다.

이승만이 대통령 직선제를 공개석상에서 밝힌 것은 1950년 3월 24일이다. 이날 이승만은 기자회견에서 “1952년 대통령 선거는 국회보다 국민이 선거권을 가지도록 헌법이 개정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부산 정치파동의 숨겨진 의미

1951년부터 이승만은 정치적 반대파들로 인해 국회 내에서의 입지가 불안했다. 이런 상태에서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할 경우 이승만은 패배가 거의 확실했다. 1951년 가을 한국을 방문한 로버트 올리버는 이승만에게 “국회의원들이 박사님을 재선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설이 널리 퍼져 있는데, 이에 동의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이 질문에 이승만은 이렇게 답했다.

“아마 그 사람들의 말이 맞을 거요. 그 이유를 아시오? 일본인과 미국인들은 모두가 자기들 나름의 이유로 대통령이 바뀌기를 원하고 있소. 국회는 한국 국민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외국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뇌물도 받고 압력마저 받고 있는 중이오. 한 마디로 말해 현행 헌법 하의 선거는 한국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우리나라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압력에 의한 것이 될 것이오.”

미국 입장에서 볼 때 휴전을 반대하는 이승만은 자신들의 세계전략에 있어 걸림돌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입장은 확고했다. “38도선을 철폐하고 북한 지역을 수복하기 위해 필요한 투쟁을 나 말고 누가 끝까지 해 내겠는가?” 이런 사명감에 불타는 이승만이 택한 돌파구는 대통령 선출을 국회가 아니라 국민의 손으로 넘기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헌법 개정이 필요했다. 이승만은 부산을 비롯한 전남북, 경남의 23개 시군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의원 체포, 정치 깡패를 동원하여 폭력을 행사하는 등의 초강수를 두어가며 직선제 개헌을 추진했다. 정국이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으로 치닫자 미국은 도쿄 극동군사령부의 클라크 장군에게 ‘유엔군사령부에 한국 육군 중장을 앞세운 쿠데타 계획을 수립하라’는 긴급 전문을 발송했다. 클라크 장군은 이 지시에 따라 이승만 제거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이승만 제거 전략을 바꿔 이승만을 계속 유지시키기로 입장을 정리했다. 애치슨 미 국무장관은 주한 미국대사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한국 정부에는 어느 정도의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 만약 이승만이 약간 통제되고 부드러워질 수 있다면, 이러한 리더십을 가장 잘 제공할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대통령 직선제와 대통령에 대한 의회의 통제권을 높이는 방향으로 개헌을 하는 것이 현재의 위기를 타개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은 한국에서 내각제를 실시하는 것은 시기상조이고, 야당 인사 중에서도 이승만을 대체할 만한 리더십을 보유한 인물이 없다는 점에서 이승만 이외에는 대안이 없음을 현실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정부 측 개헌안과 국회 측 개헌안을 절충한 발췌개 헌안이 7월 4일 밤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당시 이승만은 6․25를 휴전으로 봉인하고 철군하려는 미국과 사사건건 마찰을 빚고 있었다. 미국 정부는 고집불통의 노인에게 사사건건 끌려 다니면서 인명피해가 늘어나는 것에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이승만은 대통령 선거를 통해 야당이 미국의 지원하에 자신을 제거하려 한다고 판단했다.

이처럼 절박한 상황에 처한 이승만은 “미국과 야당이 나를 제거하려 한다면, 나도 방법이 있다”면서 승부수를 던진다. 그는 직선제 개헌을 쟁취하기 위해 물리력을 동원하고 관제 가두시위로 국회를 몰아붙였으며, 계엄령을 선포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끝에 정치적 승리를 거두었다.

부산 정치파동은 단순히 권력을 둘러싼 투쟁만이 아니라 한국에 적합한 권력구조가 무엇인가를 둘러싼 대립, 전쟁 정책을 둘러싼 한미 간의 갈등이 중첩되어 있었다. 당시 한국은 전쟁 속에서 국가를 형성해 가고 있었으며, 정당정치는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과연 내각제가 한국에 적합했을까. 미국도 이 점을 잘 알았기 때문에 이승만을 대체하는 대신 ‘순화’시키기로 마음을 바꾼 것이다.

개정된 헌법에 의해 8월 5일 실시된 대통령 직선제 선거에서 후보로는 현직 대통령인 이승만을 비롯하여 무소속의 조봉암, 이시영, 신흥우 네 명이 출마했다. 이승만은 투표자의 74.6%인 523만 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됐다. 6·25가 한창이던 전시(戰時)에, 그것도 역사상 최초로 실시된 대통령 직접선거에 의해 이승만이 당선되었지만, 그는 대통령 재선을 쟁취한 대신 ‘독재자’란 비판에 시달려야 했다.


국민의 하야 요구에 순순히 물러난 독재자

1954년 총선에서 자유당이 원내 절대 다수당을 차지하자 대통령의 3선 제한을 철폐하는 개헌에 돌입했다. 당시 헌법은 대통령의 임기가 중임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은 재선 임기를 마치면 물러나게 되어 있었다.

자유당은 1954년 11월 27일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철폐하여 사실상 종신 대통령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민주주의 원칙에도 위배되고, 서구 민주주의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기는 행위였다. 그런데 시각을 바꿔 다른 측면에서 보면 사사오입 개헌에 저항하기 위해 민주당이 결성되어 우리나라도 양당제의 골격을 갖추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사사오입 개헌으로 인해 양당제 시스템이 만들어지면서 민주주의가 한 단계씩 성장해 간 셈이다.

1956년 대선에서는 바뀐 헌법에 의해 대통령과 부통령을 함께 선출했는데, 자유당은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기붕 후보를 내세웠고, 야당인 민주당은 대통령 신익희, 부통령 장면 후보를 내세웠다. 조봉암은 무소속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민주당의 슬로건은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것이었다. 선거 열기도 뜨거웠으나 대선 열흘을 앞두고 신익희 후보가 호남 지방 유세를 위해 5월 5일 새벽 호남선 열차를 타고 내려가던 중 열차 안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강력한 야당 후보가 사망하는 바람에 이승만 후보는 504만 표, 조봉암 후보는 216만 표를 얻어 이승만 대통령이 무난하게 당선되었다. 당시 선거 결과를 보면 서울시에서 사망한 신익희 후보가 28만표를 얻었고, 이승만 후보 20만 표, 조봉암이 11만 표를 얻어 사망한 후보가 당선자 보다 더 많은 득표를 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1960년 3월 15일 대통령과 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가 열렸다. 자유당에서는 이승만과 이기붕, 민주당에서는 조병옥과 장면이 출마했다. 그런데 조병옥 후보가 지병으로 미국에서 치료를 받던 중 사망함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이 단독 출마한 상황이 되었다. 이로써 대선을 지배한 관심은 ‘누가 대통령에 당선되는가’ 보다 ‘누가 부통령에 당선될 것인가’였다.

3·15 선거는 이승만 입장에서 볼 때 무리수를 둬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선거였다. 그러나 부통령 후보 이기붕은 연로한 이승만 대통령이 무슨 일을 당하면 부통령이 권한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열망으로 사력을 다해 당선되려고 했다. 결국 자유당의 광범위한 부정선거는 이기붕의 당선을 위한 것이었지 이승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여당인 자유당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부정선거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발제자께서 지적한 바와 같이 1공화국 국무회의록을 보면 인(人)의 장막에 가려 있던 이승만 대통령은 사태의 진상을 제대로 보고받지 못했으며, 뒤늦게서야 진상을 제대로 파악한 4월 21일 부정선거로 당선된 이기붕에게 사퇴를 요청했다. 그리고 4월 22일, 시위 중 부상당한 학생들이 입원해 있는 서울대병원을 방문하여 “부정을 왜 해?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은 백성은 죽은 백성이다. 젊은 학생들이 참으로 장하다”고 말했다. 그는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도 물러나야 한다. 그게 민주주의다”라면서 하야했다. 국민이 하야하란다고 해서 그 말을 듣고 순순히 물러나는 독재자를 본 적이 있는가?


국가를 건설한다는 것의 의미

여기서 우리가 짚어야 할 현실적이고도 심각한 문제가 등장한다. 이승만이 처했던 시대적 현실은 이상적인 민주주의를 거론하기에는 빈곤과 혼란이 너무 극심했다. 정부는 형식뿐이었고 경험 있는 인재와 예산의 부족으로 주어진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기가 불가능했다. 게다가 한국에는 민주적 전통도, 정당다운 정당도 없었으며, 민주적시민을 육성할 시간적 여유나 기회도 없었다.

이승만은 공산당의 남침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내고, 국민들 굶어죽지 않도록 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기에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당분간 유보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마키아벨리도 “건국과 같은 혼란기에는 여러 가지 난관으로 인해 ‘부당한 행위’를 하더라도 그것을 비난할 수만은 없다”고 말할 정도로 세계사적으로 봐도 건국은 험난한 과정이었다.

클린턴 로시터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세 가지 위기로 전쟁, 반란, 그리고 경제위기를 꼽는다. 건국 직후 이승만 시대는 국민 대다수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 세 가지 위기가 복합된 형태로 우리에게 들이닥쳤다. 이런 시대 상황을 무시하고 오늘날의 기준으로 인권과 자유, 민주화의 미비를 들어 이승만을 독재자로 비판 매도하는 것은 올바른 사고가 아니다. 미국 역사에서도 전쟁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는 대통령의 권한을 확대 행사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꼽히는 링컨도 남북전쟁이라는 국가위기에 직면하자 헌법에 보장된 인권을 번번이 무시하고 징집을 기피하거나 반대한자, 적대세력을 지원했거나 호의적이었던 자들을 법관의 영장 없이 구속해 모조리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링컨은 자신의 정책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수천 명을 재판 없이 투옥하고 자신을 비판하는 신문사 발행인들을 체포했다. 군인들을 선거에 개입하게 했고, 야당 의원들을 의회에서 추방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언론은 링컨을 독재자, 또는 폭군이라고 비판했다. 국가 유사시 자유와 인권을 제약한 사례는 링컨 시대의 미국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서구 선진국에서도 비슷하게 벌어졌다.

이승만이 젊은 시절부터 꿈꾸던 것이 민주국가였지만, 자신의 재임 중 여러 차례 민주주의를 이탈했다. 특히 1950년대 후반에는 ‘인의 장막’에 갇혀 민주주의는 더욱 후퇴했고, 결국 3·15 부정선거의 여파로 인해 결국 하야하게 된다. 이 때문에 이승만은 반민주적 독재자라는 비난을 받아왔다. 그러나 한국의 객관적 조건은 이런 비판을 무색케 한다. 민주주의가 뿌리내릴 수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니었으니 누가 집권자가 되었더라도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의 시대정신은 ‘민주주의’보다는 개인이나 국가나 모두 생존이었다. 6·25 때 종군기자로 활약하며 여성 언론인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마거릿히긴스 기자는 자신의 저서 <자유를 위한 희생>(War in Korea)에서 이렇게 말했다.

“국민이 굶어 죽는 곳에서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될 수 없다. 기아는 절망을 낳고, 절망은 폭력을 낳고, 폭력은 경찰국가를 낳는다.”

이승만 시절은 민주주의의 실천보다 국민들 굶어 죽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 시급한 국가적 과제였다. 정치 평론가인 파리드 자카리아는 대한민국처럼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등장한 신생 민족국가들이 민주주의 제도를 채택하여 발전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이 국가들이 처음부터 민주주의를 채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파리드 자카리아는 한국이 독재로부터 자유주의 독재(liberalizing autocracy) 단계를거쳐 민주주의로 진화했다고 주장한다. 자유주의 독재란, 형태는 독재 정권이지만 경제발전을 추진하고 국내 질서를 유지하며 종교와 여행의 권리를 허용했던 정권을 지칭한다.

이승만 정부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지만 나라를 지키고 국가안보의 튼튼한 기반을 구축하는 등 국가건설의 1단계 과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며, 이런 바탕 위에서 대한민국은 국가발전의 다음 단계 목표를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누가 뭐래도 이 부분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야 마땅하다고 나는 주장한다. “국민이 굶어 죽는 곳에서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될 수 없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탄생한 140여 개의 신생 국가들 중 약 30개 국가에 개입하여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제공했다. 그런데 이 많은 나라들 중 미국이 처음부터 이루고자 했던 목표, 즉 지속적인 경제 성장과 안정된 민주주의를 모두 달성한 곳은 대한민국과 대만 정도였다. 이승만은 독재라는 오명에도 불구하고 세 차례의 헌법 제정과 개정을 통해 미국식 대통령 중심제를 이 땅에 뿌리내렸다. 그 결과 1961년 이후 대통령에 오른 대통령들은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신생 대한민국을 세계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고도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이승만은 헌법 개정을 통해 집권 연장이라는 무리수를 두었고, 그 때문에 결국 시민봉기를 촉발시켜 하야했다. 그러나 이승만 시대에 농지개혁, 의무교육, 징병제 등을 통해 한국은 명실상부한 사민평등 사회로 탈바꿈했고, 고등교육의 확대로 양질의 노동력이 풍부하게 배출되는 토대를 마련함으로써 1960년대 이후 세계 경제사상 유례 없는 압축형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승만의 여러 가지 공과(功過) 중 과(過)의 부분만을 확대재생산하지 말고 공(功)의 부분도 인정하면서 균형 잡힌 역사관을 회복하기를 기대하며 토론을 마친다.


토론문:김학은

김학은 연세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1. 이 누명은 문학적 접근보다 법률적인 차원에서 살피는 것이 역사에서 더 중요하다. 이승만은 한 번도 부정선거의 책임으로 법 앞에 선 적이 없다. 소환된 적도 없다. 증언을 요청받은 적도 없다. 그를 하와이로 보낸 결정은 합법적인 정부였던 허정 과도 내각이었다. 그가 자원해서 간 것도 아니다. 도망간 것도 아니다. 하와이로 추방한 것도 아니다. 귀양도 아니다. 이것을 법률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지금까지 아무도 이러한 차원에서 접근한 적이 없다.

2. 비교가 어렵지만 귀양간 나폴레옹을 역사는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를 상기할 수 있다. 당시의 글이나 시는 현재 무시되고 있다.

3. 정권이 교체된 여러 나라에서 전임 대통령이나 수상을 재판정에 세우는 것과 비교해 보면 이승만은 현재까지 법률적으로 무죄이다.


토론문-남정욱: 후진국 지도자의 난감함.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알기가 쉽지 않다

남정욱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양자였던 이인수가 하와이로 아버지를 뵈러 간 것은 1961년 12월이었다. 큰 절에 함박웃음을 지은 아버지는 곧이어 국내 사정을 물었다. 아들이 “젊은이들이 반공을 하겠다고 하니 잘 되지 않겠습니까?” 대답하자 아버지는 정색하고 이렇게 말했다. “너는 그 잘 돼간다는 말을 믿지 말거라.” 아버지의 그 ‘잘 돼간다’는 말은 아마도 ‘서대문 경무대’를 염두에 둔 회한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먼 이국땅에서 이승만은 실정에 대한 잘못된 정보로 국정을 그르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1960년 3월 대통령 선거를 앞둔 이승만은 85세의 고령이었다. 당시 한국 남성의 평균 수명이 54.9세였으니 상당히 장수한 편이다. 그러나 건강은 별로 좋지 못했다. 노회한 정객은 노쇠한 대통령이 되어 일주일에 한 두 차례 국무회의를 주관하는 게 전부였다. 나머지는 이기붕을 중심으로 주요 장관 몇이 국정을 끌고 나가는 형태였는데 이기붕도 건강이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보행성 운동 실조로 주로 의자에 앉아있어야 했으며 일어날 때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였다. 게다가 심각한 언어 장애를 겪고 있어 의사소통에 문제가 많았다. ‘서대문 경무대’는 이기붕이 아니라 자유당 강경파의 다른 말이었다. 이들이 가장 우려한 것은 대통령의 유고로 정권이 민주당으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당시 민주당은 조병옥과 장면이 당의 주도권을 놓고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두 사람이 공히 원하는 것이 부통령 지명이라는 사실이었다. 직접 선거로 이승만과 맞붙어 이길 자신이 두 사람에게는 없었다. 그들에게 권력 추구는 시간과의 싸움이었고 불확실한 대통령보다 확률 높은(!) 부통령이 더 탐나는 자리였던 것이다. 여당인 자유당이 무리수를 던지게 된 절실한 까닭이다.

80대 중반의 대통령 후보와 60대 중반의 부통령 후보가 출마했다. 민주당에서 조병옥은 장면에게 패배했고 영양가 없는 대통령 지명을 받았다. 실속 있고 생명력 있는 부통령 지명은 장면의 차지였다. 선거에서 이승만은 총투표수의 88.7%를 얻었고 이기붕은 822만 5천표를 얻어 185만 표를 획득한 장면 후보를 눌렀다. 이기붕이 문제였다. 심각한 부정선거였다. 총책임자는 내무장관 최인규로 그는 야당의 유세에 학생들이 참여하지 못하게 일요일에도 등교를 강요하는 등 문제를 키워나갔다. 2월 28일 대구의 경북고등학교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선거 당일은 부정의 절정이었다. 농촌에서는 노골적으로 3인조 공개투표가 이어졌다. 군대의 투표자는 실제 인원의 120%였다. 찍은 사람은 없는데 표는 나왔고 국민들은 납득하지 못했다. 민주당의 텃밭인 마산과 대구에서 이기붕이 압승을 거둔 것은 미숙한 시나리오 작가가 쓴 최악의 설정이었다. 3월 15일 선거 당일 마산에서 항의 시위가 벌어진다. 시위 도중 고등학생 김주열이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다. 경찰은 김주열을 바다에 내다 버렸고 시신이 떠오르면서 시위는 격화되기 시작한다.

이승만은 병원으로 달려가 부상자들을 위로했다. “젊은이들이 분노하지 않으면 젊은이가 아니다.” 학생들의 손을 잡고는 이렇게 말했다. “학생들이 왜 이렇게 되었어? 부정 선거를 왜 해? 부정을 보고 일어나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지. 이 젊은 학생들은 참으로 장하다.” 4월 26일 이승만은 측근인 김정렬의 보고를 듣고 이렇게 물었다.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내가 그만 두면 한 사람도 안 다치겠지?” 김정렬은 눈시울을 붉히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세를 파악하고 민심을 읽은 이승만은 즉각 사임한다.

이승만은 두 개의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똑똑’했던 그는 자신이 대한민국에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기한 없는 영원은 아니었다. 물리적 노화가 그의 마음 속 기한을 한없이 늘려갔다. 루스벨트, 처칠, 아데나워, 드골처럼 그는 자기 자리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휴식이 필요하니 여러 가지 도전과 일의 부담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60년에는 물러나는 게 어떻겠냐는 로버트 올리버의 말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 참 더 바랄 것 없는 이야기구려. 그러나 투쟁은 누가 맡아 해 줄 것이오?” 호놀룰루 공항에 도착한 이승 만을 영접하기 위해 오중정 영사가 트랩을 올라갔다. 노부부는 맨 가운데 좌석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영사가 인사하자 이승만은 반가워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여기좀 쉬러왔어. 한 3주일 쉬고 갈 거야.” 진담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귀국하여 이화장에서 다시 정치 인생을 재개할 계획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대목에서 이승만을 비난해서는 곤란하다. ‘독립선언’과 ‘재팬 인사이드 아웃’을 쓰던 명민함과 현실 감각을 여든의 나이까지 강요하는 건 생물학적으로 타당하지 않은 주문이다.

또 하나의 잘못된 정보는 자유당 강경파들로부터였다. 자유당 강경파들은 민심을 차단하고 정보를 왜곡했다. 듣기 좋은 말에 장사 없는 법이다. 이승만의 귀는 달콤하고 기분 좋은 정보에 익숙해졌다. 이승만이 들은 세상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살기 좋은 곳이었고 국민들은 이승만을 칭찬하고 받드는데 열심이었다. 내무부 장관에 원칙주의자였던 김일환을 발탁한 것은 선거를 공정하게 치루겠다는 이승만의 자신감이자 의지였다. 58년 9월 경북 영일을 재선거를 선거 부정으로 판단, 자유당 당선자를 당선 무효 시킨 김일환의 결정을 이승만은 지지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자유당 강경파들을 경악시켰고 ‘최후에 써먹을 총알’이라는 얘기를 듣던 최인규의 등장을 앞당겼다. 이승만은 자유당 강경파들의 설득과 주장을 끝까지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강경파들은 김일환에게도 압박의 수위를 높였다. 짧은 재임 중 이승만에게 두 차례나 사직서를 제출한 것이 그 반증이다. 꼿꼿한 성품에 이기붕을 제치고 대통령에게 직보를 했던 뚝심의 김일환이 휘청거린 것을 보면 그 수위를 짐작할 수 있다. 마침내 이승만은 자유당 강경파들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각하와 나라를 위해 꼭 필요한 인사입니다.” 이승만의 판단력은 마지막 순간 흔들렸다.

그렇게 43세의 최인규가 내무장관의 자리에 오른다. 최인규는 1919년생으로 경성고등상업학교 그러니까 지금의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졸업하고 당시 일반인들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미국 뉴욕대학교 상과를 졸업한 인텔리였지만 권력 앞에서는 별 수가 없는 모양이다. 그는 지방 자치 단체장들을 모아놓고 “세계 역사상 대통령 선거에서 소송이 제기된 일이 있느냐? 법은 나중이고 일단 당선시키고 봐야 한다. 콩밥을 먹어도 내가 먹고 징역을 가도 내가 간다.”는 무식한 세계관을 피력했다. 그는 그 좋은 머리를 참 단순하고 나쁘게 썼고 기어이 자유당 정권을 몰락시킨다. 이승만은 자신이 더 오랫동안 대통령에 있어야 한다고 믿었고(물론 목표는 통일) 자유당은 그런 이승만을 우산으로 삼아 영원히 권력의 꿀물을 빨아먹고 싶었다. 그 좋지 않은 결합이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에서 독재자라는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빌미가 되었다. 이승만을 독재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는 것은 한 가지로 충분하다. 당시 자유당 정권 시절 언론에 대한 통제가 있었느냐고 되물으면 그만이다. 4.19 당시 언론은 대통령의 말을 실시간으로 반박했고 사진까지 실어가며 자유롭게 자기 목소리를 냈다. 세상에 어떤 독재자가 언론을 놔두고 독재를 실현하는가. 언론 자유가 보장된 독재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 사사오입은 정쟁의 논리였지 민주주의의 훼손은 아니었다. 이승만은 민주주의의 가치를 신봉했고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훼손하지는 않았다. 그 가치에 대한 신봉이 존경으로까지 이어진 건 아니지만.



각주

  1. 선진국
  2. 좌파쪽에 더 많을듯.
  3. 편집자주:고은이 지금까지 어떠한 활동을 해 왔는가는 고은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다.
  4. 편집자주:
    2000년 6월 김대중 방북에 수행한 고은김정일과 함께 축배를 드는 사진.
  5. 올리버, 이승만의 대미투쟁, 하, pp.597-598.
  6. 올리버, 이승만의 대미투쟁, 하, p. 421.
  7. 이주영, 이승만은 근본적으로 자유민주주의자, 인보길 엮음, 이승만 다시 보기, p. 124.
  8. 김용삼, 이승만의 네이션빌딩, p. 451.
  9. 김용삼, 이승만의 네이션빌딩, p.451-452.
  10. 이주영, 이승만은 근본적으로 자유민주주의자, 인보길 엮음, 이승만 다시 보기, p. 127.
  11. 인보길, 이승만은 독재자 아니다! 누명을 벗기자, 김길자 엮음, 건국의 발견, p.192.
  12. 김정렬, “부정을 왜 해? 내가 그만둬야지, 인보길 엮음, 이승만 바로 보기, p.96-100.
  13. 인보길, 이승만은 독재자 아니다! 누명을 벗기자, 김길자 엮음, 건국의 발견, p.194.
  14. 이주영, 이승만 평전, p.116.
  15. 노재봉, 대한민국 건국의 정치적 세계사적 의미, 김길자 엮음, 건국의 발견, p.10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