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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사태
최근 수정 : 2019년 6월 5일 (수) 11:39

(5.18 광주 사태에서 넘어옴)

5.18 광주사태는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시민과 전라남도민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사건으로 광주민중항쟁, 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불리기도 한다.

명칭

광주사태는 5·18, 광주항쟁(光州抗爭), 광주학살(光州虐殺), 광주사태(光州事態), 광주민중봉기(光州民衆蜂起), 광주시민항쟁(光州市民抗爭)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광주사태에 대한 명칭은 사건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80년 5월 21일에 계엄사령관 이희성이 "광주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나고 있다."라고 군부 발표에서 언급한 것이 처음으로, 이후 신군부와 관변 언론 등에 의해 '광주소요사태' 또는 '광주사태' 등으로 보도되면서 일반화되었다. 이는 광주사태를 "불순분자들이 체제 전복을 기도한 사태"로 판단한 신군부의 주장에 근거한 호칭으로 제5공화국 기간 내내 사용됐으며, 현재는 당시 호칭에 익숙한 노년층이나 신군부를 지지하는 일부 우파 인사들이 사용하고 있다. 현재의 명칭인 정부의 공식 명칭인'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1988년 이후로 정부 산하 민주화합추진위원회가 사건을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하면서 나왔고, 이후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의 공식 언급에서도 이 명칭이 사용됨으로써 공식 명칭이 되었다. 한편, 신군부의 군사독재와 폭력에 맞선 민중항쟁을 광주 민중들이 주도했다는 사실을 강조한 '광주민중항쟁' 또는 '광주항쟁'도 지역 사회와 5월 단체 등이 중심으로서 1980년대부터 사용됐다. 사건이 일어난 날짜를 딴 '5·18'도 널리 통용되는 명칭이다.

문제점

화려한 휴가? 화려한 사기

북한 공작원들로 추정되는 괴한들이 전남 광주의 동네 양아치들을 꼬드겨서 무기를 쥐여주고, 4시간 만에 전남 지방의 38개소의 무기고를 털고, 자동차 공장을 턴 사건. 나무위키에서는 광주 시내의 군필자들이 시위에 참여했다고 하나, 계엄군에게 붙잡힌 사람들의 명단을 살펴보면 군대를 면제받거나, 방위 출신이거나, 미성년인 경우가 상당했다. 체포된 사람들의 직업도 무직자, 날품팔이, 학생, 구두닦이, 철공, 목공 등등이 대부분이다.

  • 첫째, 시민군이라는 것도 서로 일면식도 없었던 점.
  • 둘째, 강경파니 온건파니 나뉘어서 말싸움만 한 점.
  • 셋째, 총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은 1,2 명 정도만 있었고 모두가 오합지졸이었던 점.

등을 보면 상기했 듯 4시간만에 전남지방 38개소 무기고를 탈취했다는 점이 설명되기 어렵다.

한편, 도청 지하실에 깔려있던 TNT를 전남대생 김창길(22)이 계엄군에 제보하여 도청을 사수했다.

  1. 1995년 8월 17일짜, 검찰, 국방부가 공동 작성한 ‘5.18관련사건 수사결과’ 보고서‘(증5) 92-93쪽에 있는 내용
“02:30경 용산을 출발, 고속도로를 경유하여 08:00시경 광주에 도착한 20사단 지휘 차량 인솔대는 광주 공단 입구에서 진로를 차단한 수백 명의 시위대로부터 화염병 공격을 받고 사단장용 지프차(주:레토나) 등 지휘용 지프차 14대를 탈취 당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병1명이 실종되고, 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09:00시경 20사단 지휘 차량(주: 레토나)을 타고 온 시위대 300여 명과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온 시위대300여 명이 아시아 자동차 공장을 점거하고 장갑차 4대와 버스 등 차량 356대를 탈취하여 광주 시내로 진출하였음"
“한편 시위대는 차량을 이용하여 인근 광산, 영광, 함평, 화순, 나주, 영암, 해남, 강진, 완도, 승주, 고창 등지로 진출하여 무기고를 확보, 무장하였는데, 13:00경, 광산 하남 파출소에 시위대 80여명이 차량 3대를 타고 와 칼빈 9정을 탈취하였고, 고속 버스 트럭 등 10여대의 차량에 탑승한 광주 시위대가 함평에 도착하여 군중 시위를 벌이고, 신광지서에서 총기 1백여정. 실탄 2상자를 확보하였고, 13:35경 화순 소재 4개 파출소에서 '총기 460여정과 실탄 1만발을 탈취하였고, 14:00경 나주 남평지서 무기고에서 칼빈 20여정과 실탄 7~8상자를 탈취하고, 광주에서 내려온 시위대와 나주시위대가 합세하여 나주 경찰서에 진입, 군용 레카차로 무기고를 파괴하고 칼빈 5백여정, M1소총 2백여정, 실탄 4만 6천여발을 탈취하였고, 15:35경, 화순광업소에서 칼빈 1,108정, 실탄 17,760발, 화순 동면지서에서 M1 72정, 칼빈 296정, AR 1정, LMG 1정, 실탄 1만4천여발을 탈취하였고, 이날 하루 동안 일신방직, 호남전기, 연초제조창, 영암경찰서, 화순경찰서, 지원동 석산화약고, 한국화약, 강진성전파출소, 등을 급습하여 칼빈, M1. AR. LMG 등 총기 4천9백여정, 실탄 13만여발, TNT 10여상자, 수류탄 2백7십여발을 탈취하였다"
  1. 1985.5. 안기부가 작성한 “광주 사태 상황 일지 및 피해 현황”(증6)의 제40-41쪽에 있는 내용
“5월 18일 14:25, 학생 유동3거리에 학생 300명, 광주공원의 학생 300명이 출현, 15:50, 학생 600여명 도청 방향으로 이동하며 시위, 학생 300명은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 민주 인사 석방하라“는 구호 외치며 동산 파출소에 투석 파괴, 또 다른 300명은 16:40에 지산파출소 파괴하며 시위”

사태 기간 내내 광주의 운동권은 체포돼 있었거나 깊이 숨어있었고, 대학생들과 지각 있는 시민들은 모두 숨어 있었다. 단지 판단력 없는 10대와 사회에 불만을 가진 20대의 넝마주이, 구두닦이, 껌팔이, 석공, 목공 등이 이들 600명의 눈부신 도시게릴라 작전에 부화뇌동했을 뿐이다. 이것이 5.18의 실체다.

이 부화뇌동한 10대와 20대가 5.18의 영웅이 되어 있고, 국가 유공자가 되어 있는 것이다. 심지어 5.18 유공자 명단은 보훈처에서 공개하지 않는다. 2010년 평양에서 찍힌 사진(5.18 기념식)과 1980년 광주에서의 사진을 비교해보면 동일 인물로 추정되는 인물이 등장한다.[1]

나무위키에서는 한사코 북한과 관련이 없다, 사망자들에 대한 명예훼손이다 라고 주장을 한다. 5.18을 뭐라 평가하든 그건 표현의 자유고, 양심의 자유다. 집단적 표시에 대한 명예훼손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조항과 판례가 있다. 5.18을 폭동이라고 칭한다고 해서 그 사망자에게 고소 당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국가 안보, 개인의 권리에 위배되지 않는다면 역사적 사건에 대한 평가가 박해 받을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정부에서 민주화 운동이라고 했으니 그렇게 불러라? 그렇게 해본들 공식 행사, 공문서에만 해당하지 일상 용어까지 강제할 수는 없다.

단계

  • 북한 공작원(괴한)의 작전기간(5.18-21)
각종 시가전, 방화, 파괴, 약탈이 자행되었다. 칼빈, M1. AR. LMG 등 총기 4천9백여정, 실탄 13만여발, TNT 10여상자, 수류탄 2백7십여발을 탈취하였다. 전남 도청을 폭도들이 무단 점령했다.
  • 무기 반납 및 협상 기간, 강온 대립(5.22-25)
강경파와 온건파들이 서로 설전을 벌이다가 온건파가 퇴출되었고, 전남 도청 지하실에 TNT 8t 분량이 조립이 된다. 그것을 전남대생 김창길이 제보하여 해체한다.
  • 소수의 20대 노동자들이 벌인 객기의 기간(5.26-27)
윤상원, 박남선 이런 뜨내기들이 객기를 부리다가 계엄군에 체포되었다. 계엄군이 전남 도청을 탈환하고 사태를 진압함으로써 유혈 사태는 막을 내린다.

같이 보기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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