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준석(高峻石, 1910.11.15[1] ~ 1994)는 제주도 출신으로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에서 수학했고,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1938년 1월 마르크스주의의 연구 실천과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기도하다가 동경형사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의 형을 받았다.[1] 1944년 5월 서울로 와서 조선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京城日報) 기자를 지냈다. 해방 후 조선공산당에 가입했고, 남로당 당원이면서 북로당 노선을 지지했다. 1948년 남북협상 당시 북한을 방문했으나 서울로 돌아왔다. 6.25 전쟁 통에 아내가 사망하자 일본으로 밀항했다. 이후 일본에 거주하며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고영민이라는 가명을 쓰기도 했다.

고준석(高峻石, 1910 ~ 1994)

약력

  • 1910년 전라남도 제주도 구좌면 행원리 790번지(全羅南道 濟州島 舊左面 杏源里 790番地) 줄생[2]
  • 1935년 4월 제2 와세다(早稻田) 고등학원 입학.[2]
  • 1937년 4월 와세다(早稻田) 대학 정치경제학부 경제학과 진학.[2]
  • 1938년 8월 15일 2학년에 재학중 공산주의 운동을 하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도쿄 경시청에 체포됨.[3]
  • 1939년 10월 30일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선고받음.[1]
  • 1944년 5월 서울로 와서 조선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京城日報) 정경부 기자로 활동하다 해방을 맞음.[3]
  • 1945년 9월 조선공산당에 입당.[3]
  • 1947년 5월 서울에서 북로당(北勞黨)을 지지해 『우리 신문』[4] 주필 겸 정치부장이 되어 북로당을 대변하다 투옥됨.
  • 1948년 4월 남북협상 취재 차 월북, 남노당 당원이면서 북조선 노동당에 가입, 북로당 노선에 동조.[3]
  • 1948년 8월 북한 해주에서 열린 남한지역 대의원 선거에 참여하기 위해 비밀리에 다시 월북했다가 서울로 돌아옴.[5]


그가 철저한 공산주의자였음에도 북한으로 가지 않고 남한에 남은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공산주의자였던 탓에 좌익 폭동이나 6.25 전쟁을 거치며 자주 구금되기도 하고 어려움도 겪다가 일본으로 밀항했다. 남한이 공산주의자들 생리에 맞을 수가 없었던 것은 당연하지만 왜 북한이 아닌 원수의 나라 일본에 가서 사는 길을 택했는지도 의문이다. 그가 일본어로 남긴 많은 저서들에 미군정이나 이승만과 남한 정부에 대한 비판만 가득할 뿐 공산주의자들 때문에 북한 주민들과 한국인들이 겪은 엄청난 고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이 철저히 외면하고있다.

생애

  빈농의 아들로 항일운동…‘어느 혁명가의 수기’ 등 집필 : 제주일보 2018.08.06

고준석, 日서 ‘혁명사의 증언’ 등 저술.

일본 도쿄에서 와세다(早稻田)대학 사회사정연구회의 항일 활동.

고준석의 가명은 고영민. 구좌읍 행원리<어등-개>에서 태어났다.

그는 빈농의 아버지와 해녀의 장남으로 태어나 1925년 여름부터 오사카 등지에서 8년 간 노동 생활로 야간에 학업을 이었다.

서울로 돌아와서 선만경제연구소(鮮滿經濟硏究所)의 기자와 경성일보사 정경부의 기자로 근무했다.

앞서 1937년 교포 학생들이 와세다대학에서 ‘우리 동창회’를 조직했는데 민족주의 계열인 이상돈(李相敦, 전북 출신·훗날 국회의원)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이에 대학 정경학부 2학년 고준석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 계열은 세력을 확대, 동년 11월 회장에 취임하고 새로 선출된 위원 권중돈(權仲敦, 경북 출신·훗날 국회의원) 외 11명의 위원을 소개했다.

다음 회장의 안내로 회원 55명을 인솔해 도쿄의 일일(日日)신문[6]과 전기장려관 및 조일(朝日) 신문사를 견학했다.

1938년 1월 마르크스주의의 연구 실천과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기도하던 중 1938년 8월 15일 도쿄경시청(東京警視廳)에 체포됐다.

1939년 10월 30일 도쿄형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에 집행 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학업은 중단되고 오도리<小鳥>경제연구소, 노다<野田>경제연구소의 직원으로 잠시 활동 후 도쿄에서 중외(中外)상업신문(일본 경제신문의 전신)의 정치부 기자로 언론계에 투신했다.

고향 친구 임해(任海)[7][8][9]와 항일 운동에 투신하기로 맹세, 일본인으로 귀화했다.

1944년 5월 서울로 들어와 경성(京城)일보 정경부 기자로 활동하던 중 조국광복이 되었다.

1945년 9월 이관술(李觀述:울산), 강문석(姜文錫, 제주)의 보증으로 조선공산당에 입당, 당 규약의 초안 작성을 의뢰받았다. 제주도 출신 공산주의자는 강창보(姜昌輔), 김문준(金文準), 김시용(金時容) 등 세 사람 정도였다.

강문석의 사위인 김달삼(金達三)에게 바톤을 넘기니 제주 4·3 사건의 주모자로 이어졌다.

고준석은 1947년 5월 서울에서 북로당(北勞黨)을 지지해 ‘우리 신문’ 주필 겸 정치부장이 되어 북로당의 대변을 한 관계로 투옥되고 신문은 1948년 5월 26일 폐간 당했다.

1948년 4월 남북 협상 취재 차 월북, 남조선 노동당원이면서 북조선 노동당에 가입, 북로당 노선에 동조했다. 평양에 가서 고향 친구 임해(任海)의 부부를 만나게 됐는데, 임해는 북로당 간부로 있다가 북조선인민위원회 기획 부장으로 옮겨 있었다.

임해를 통해 북한의 실상과 북한의 지도상 군상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그는 일본 도쿄에서 집필 활동에 몰두해 ‘조선(1945~1950) 혁명사의 증언’(1972), ‘해방 정국의 증언-어느 혁명가의 수기’(1987) 등 많은 저서를 내놓았으며, 공산주의의 증언적 체험기로 일관되게 서술했다.

※필자의 변 : 고준석의 부인 김사임(金師任, 1923~1951)은 항일운동가다. 본관은 광산이며 강원도 이천군의 갑부 김영석(金永石)의 딸로 일찍이 일본으로 유학, 도쿄의 니홍<日本>여자대학 재학 중 1940년에 결혼했다. 1945년 11월 공산당에 입당, 김철수(金綴洙) 의 당 세포에 소속됐다. 고준석과 함께 1950년 조선노동당 남조선 정치공작위원 사건으로 구속됐으나 출산을 위해 보석됐다. 당시 3남 1녀의 어머니인데 6·25로 전화(戰禍)를 입어 2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제주일보 2018.08.06

저서

다수의 일본어 저서가 있다.

  • 高峻石, 『朝鮮 1945~1950 : 革命史への證言』, 三一書房, 1972
고준석(高峻石)저, 정범구 역, 《해방 1945-1950 - 공산주의 운동사의 증언》 (한겨레, 1989년)
고준석 저, 유영구 역, 『비운의 혁명가 박헌영』 (도서출판 글, 1992)[10]

참고 자료

1939-09-27일자 일본 동경형사지방재판소의 고준석 판결문.[11]
被告人高峻石に対する治安維持法違反事件 予審終結決定 / (東京刑事地方裁判所報告) / (『思想月報』 六十三号昭和十四年九月)
高峻錫(30/全羅南道 濟州島 舊左面 杏源里 790番地, 東京市 中野區 高根町 1番地 本領信治郞 方),
高峻石, 李城佑, 宋君瓚, 黃炳仁
1933년 6월 12일 大阪府에서 전협(全協) 분자 任吉鳳을 검거 송치함.[9] 임길봉(任吉鳳)은 고준석의 친구 임해(任海)의 본명이다.

함께 보기

각주

  1. 1.0 1.1 1.2 고준석(高峻石, 1910 ~ 1994) : 동경형사지방재판소 수형인명부 - 국가기록원
  2. 2.0 2.1 2.2 파일:1939-09 고준석 판결문.pdf
  3. 3.0 3.1 3.2 3.3 빈농의 아들로 항일운동…‘어느 혁명가의 수기’ 등 집필 제주일보 2018.08.06
  4. 「우리신문」은 1947년 2월 10일 노유환이 편집발행 겸 인쇄인으로 창간한 좌익계열 일간지다. 좌익이 미소공동위원회 2차 대회를 앞두고 발간한 신문. 5.10 선거가 종료된 1948년 5월 26일 신문 및 정기간행물 발행법을 위반한 혐의로 폐간됨. 미군정을 비방했다는 혐의로 편집국장 박소붕과 편집인 강노철(姜老轍) 역시 군정에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기도 했다.
  5. 고준석(高峻石)저, 정범구 역, 《해방 1945-1950 - 공산주의 운동사의 증언》 (한겨레, 1989) p. 233.
  6. 지금의 마이니치 신문(毎日新聞)이다.
  7. 김선호, 『조선인민군 : 북한 무력의 형성과 유일체제의 기원』 (한양대학교출판부, 2020년 03월 25일) p.178 각주 143
    해방 이후 북한에서 활동한 인물 중에 “임해" 라는 이름을 쓴 사람은 2명이다. 한명은 일본 출신 임해(任海)로, 본명은 임길봉이다. 그는 북조선로동당에서 농민부 부부장으로 활동하였다. 또 한명은 조선의용군 출신 임해(任海, 林海, 1900~1962)로, 본명은 주춘길(朱春吉)이며, 다른 사람이다. (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 체제성립사』, 서울: 선인 2005, 178쪽).
  8. 國史館論叢 第70輯 > 朝鮮人民黨(1945~1946)의 변혁론과 사상적 지향(鄭秉峻) > Ⅰ. 해방 직후 혁명단계 논쟁과 조선인민당의 변혁노선 > 1. 해방 직후 혁명단계론의 쟁점 한국사데이터베이스
  9. 9.0 9.1 근대사 연표 1933년 06월 12일 : 1933년 06월 12일 大阪府에서 전협 분자 任吉鳳을 검거 송치함.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0. 박헌영에 관한 첫 연구서 [중앙일보 1992.03.01 종합 9면
  11. 재일조선인관계자료집성4(2)권 治安維持法違反事件判決その他 pp.24~25 고준석 사건 : 被告人高峻石に対する治安維持法違反事件 予審終結決定 / (東京刑事地方裁判所報告) / (『思想月報』 六十三号昭和十四年九月) : 高峻錫(30/全羅南道 濟州島 舊左面 杏源里 790番地, 東京市 中野區 高根町 1番地 本領信治郞 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