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NEAJUA, Northeast Anti-Japanese United Army)은 1932년 3월 만주국(滿洲國)이 수립되자 만주 각지에서 소규모의 항일 유격대가 만들어지면서, 이들이 연합하여 만든 중국공산당 만주성위 산하 항일 무장 조직이다.

개요

1936년 2월 20일 발표한 「동북항일연군 통일군대 건제선언(東北抗日聯軍 統一軍隊 建制宣言)」. 중공당 본부가 1935년 8월 1일자로 발표한 이른바 「8·1선언」을 따라[1][2] 중공당 만주성위는 하부 당에 동북항일연군 조직에 관한 지령을 내리고, 이에따라 발표된 선언이다.

1920년대 만주를 지배하던 군벌 장작림(張作霖, 1873~1928)이 1928년 폭사하였는데, 배후는 일본으로 추정된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2년 3월 만주국을 수립했다. 이후 만주 각지에는 장작림 세력의 군대, 마적단, 공산 유격대 등 잡다한 성격의 각종 항일 무장단체들이 생겨나는데, 이들이 합종연횡하여 1군(軍) ~ 11군(軍)까지 만들어졌다. 이들이 다시 연합하여 1935년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이 되었다가 좀더 많은 세력들을 모으기 위해 공산주의 색채가 배어 있는 이름을 무색무취한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으로 바꾸지만, 내용적으로는 중공당 만주성위의 지배 구조가 오히려 더 강화되었다.

중공당 본부가 1935년 8월 1일자로 발표한 이른바 「8·1선언」을 따라[1][2] 중공당 만주성위는 하부 당에 동북항일연군 조직에 관한 지령을 내리고, 이에따라 1936년 2월 20일 여러 무장단 대표 명의로 「동북항일연군 통일군대 건제선언(東北抗日聯軍 統一軍隊 建制宣言)」을 발표한다.[3] 이어 지휘 편제를 3개 로군(路軍)으로 조직하는데, 11개군 중 남만주에서 활동하던 제1, 2군이 1로군, 동만주의 제4, 5, 7, 8, 10군이 2로군, 북만주의 3, 6, 9, 11군이 3로군으로 편성된다.[2] 각 로군의 총사령(總司令)은 1로군이 양정우(楊靖宇, 1905~1940), 2로군이 주보중(周保中, 1902-1964)이었으며, 3로군은 조상지(趙尙志,1908~1942)였으나 나중에 이조린(李兆麟, 일명 張壽籛, 1910~1946)으로 교체되었다. 북한 김일성은 양정우 휘하의 1로군 소속이었다.

항일연군은 중공당 만주성위 산하 군대이지만 연안(延安)의 중공당 중앙과는 연락이 두절되어 소련의 코민테른(국제당, 國際黨) 극동지부의 지휘를 받았다.[2][4][5] 아래와 같은 당시 신문기사도 항일연군이 소련의 지령과 지원을 받았던 사실을 보여준다.

満洲攪乱の魔手 / 「鉄の指令」をうけて入満 / 密行中の巨魁捕る 오사카 아사히신문(大阪朝日新聞) 1936.8.3 (昭和11)


항일연군은 1930년대 중반에 각지에서 맹렬한 항일전을 벌였으나, 일제와 만주군의 집중적인 토벌로 다수의 전사자, 도망자, 귀순자들이 발생하면서 세력이 점점 약화되어 1941~2년 무렵 완전히 소멸한다. 그 잔존 세력이 소련으로 도피하자 소련은 제88독립저격여단(第88獨立狙撃旅團)을 만들어 이들을 수용한다.

항일연군에는 김일성, 최용건, 김책 등 해방 후 북한 요인이 된 사람들을 위시한 다수의 만주 조선인들이 포함되어 있기는 했으나, 중국공산당원이었던 이들의 투쟁을 과연 조선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볼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한국독립운동의 역사』에는 항일연군의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6][2]

동북인민혁명군은 1935년 11월 코민테른에서 채택한 “인민전선·전술”과 이에 따른 중공당의 “8·1지시”에 의거하여[1][2] 다른 계열의 항일 무력과 연합하여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으로 개편하게 되었다. 그런데 인민혁명군의 강령이나 항일연군의 조직 조례에는 “항일반만(抗日反滿), 동북실지의 회복(東北失地의 回復), 중화조국의 옹호(中華祖國의 擁護)”가 기본 목표로 제시되어 있을 뿐 한국독립이나 한민족 해방에 대해서는 언급된 바가 없었다.

북한 김일성이 소련군 88여단에 있을 때인 1942년에 여단장 주보중의 지시로 지은 것으로 알려진 항일연군 1로군의 역사를 간단히 기록한 『항련 제1로군 약사(抗聯第一路軍略史)』에도 조선독립이란 말은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다.[7] 김일성은 당시 중공당원으로 중국을 위한 투쟁을 했을 뿐, 조선독립운동을 한다는 의식이 전혀 없었다는 증거이다.


항일연군의 조선인들은 대다수가 만주에서 태어났거나 어릴 때 만주로 가서 성장하여 조선인의 정체성도 희박했고, 해방 후 소련군이 북한으로 데려와 최고 권력을 쥐어준 일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중국의 조선족이 되었다. 조선인 여자대원들도 대부분 중국인과 결혼하였다. 이런 사실을 보아도 항일연군 조선인들의 투쟁사는 중국인인 조선족의 역사이지 한국인들의 역사로 보기는 힘들다.

항일연군 시절 김일성의 수하였던 여영준(呂英俊)은 당시 김일성이 해방이 되면 중국 공산당이 안도현장(安圖縣長) 정도를 시켜주길 원했다고 증언하였다.[8] (여영준 본인은 중국의 조선족이 되었다.) 또한 해방 당시 김일성은 중국어엔 능하나 조선말은 더듬거리며 잘 하지도 못했다.[9][10][11] 이런 사례로 보면 해방 전의 김일성은 조선인 아닌 중국인이나 다름없었다.

해방 후 동북항일연군과 소련군 88여단에 소속됐던 조선인들이 국내에 아무 기반도 없고 지지세력이 전무했음에도 북한의 핵심 권력층이 된 것은 순전히 스탈린과 소련군의 덕분이다. 소련은 자신들이 교육시킨 이들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권력을 잡도록 만들어 한동안 북한에 대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항일연군 1로군의 편성

항일연군의 부대 단위는 10명으로 된 반(班)이 있고, 3개 반이 배(排), 이런 식으로 차례로 련(連), 단(團), 사(師), 군(軍)이 구성되었다. 각 단위 부대의 지휘관을 반장, 배장, 련장, 단장, 사장(師長), 군장(軍長)으로 칭했다. 통상적인 편성상의 인원 수와는 관계없이 항일연군 1개 사(師)는 대략 100 ~ 200명 정도 병력으로 구성되었는데, 100명 이하로 되거나 300명 가량 되는 때도 있었다.

동북항일연군 1로군의 전기 및 후기 편제와 지휘관들은 아래 표와 같다.


동북항일연군 1로군 전기 편제의 지휘관들 (1936년 7월 ~ 1938년 6월)
총사령부(總司令部)군장(軍長)사장(師長)
총사령 양정우(楊靖宇, 1905~1940)
부사령 왕덕태(王德泰, 1907~1936)
1군 군장 양정우1사장 정빈(程斌, 1911~1951)
1938년 6월말 투항
2사장 조국안(曹國安, 1900~1937)
1937년 가을 전사
3사장 왕인재(王仁齋, 1906~1937)
1937년 가을 전사
2군 군장 왕덕태
1936년 10월 말 전사
4사장 안봉학(安鳳學, 1909~1937)
1936.09.30 투항
5사장 사충항(史忠恒, 1906~1936)
1936년 10월 전사
6사장 김일성(金日成, 1901~1937)
1937.11.13 전사



동북항일연군 1로군 후기 편제의 지휘관들 (1938년 7월 ~ 1941년 3월)
총사령부(總司令部)방면군장(方面軍長)

총사령 양정우(楊靖宇, 1905~1940)
1940.02.23 전사

부사령 위증민(魏拯民, 1909~1941)
1941.03.08 전사

제1방면군장 조아범(曹亞範, 1911~1940)
1940.04.08 내분으로 피살
제2방면군장 김일성(金日成, 1912~1994.07.08)

1940.10.23 소련으로 월경 도주[12][13]

제3방면군장 진한장(陳翰章, 1913~1940)
1940.12.08 전사
경위려(警衛旅) 여장(旅長) 박득범(朴得範, 1908~?)
1940.09.30 투항[14]


전기 편제에서 2군의 4, 5, 6사(師)는 원래 1, 2, 3사(師)였으나 1군과 함께 1로군으로 편성되면서 개칭한 것이다.

일만군(日満軍)의 항일연군 토벌

일본 관동군(関東軍)은 1936년 4월부터 1939년 3월까지 3년간 '만주국 치안숙정 3개년 계획(満洲国治安粛正三箇年計画)'을 수립하고 이에 따른 항일연군에 대한 집중적인 토벌로[15] 위 표에서와 같이 1로군 전기 편제의 지휘관들은 총사령 양정우만 살아 남고, 부사령 왕덕태와 휘하 6개사의 사장들은 모두 전사하거나 투항해버렸다. 보천보사건을 주도한 6사장 김일성도 1937년 11월 13일 전사하였다. 그가 전사하자 김성주가 전사한 김일성의 이름을 쓰며 자신이 6사장이었던 것처럼 행세하여 보천보 전공을 가로챈 것으로 판단된다. 자세한 것은 김일성 가짜설을 참고하라.

오사카 마이니치신문(大阪毎日新聞) 1938년 2월 25일자는 1937년 1년간 일만군(日満軍)이 항일연군을 포함한 만주 무장단체들과 벌인 전투 결과를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16]

비적 9천으로 격감(匪賊九千に激減) / 만주국 치안 완성(満洲国治安完成へ) / 来月一日・建国六周年[16]
오사카 마이니치신문(大阪毎日新聞) 1938.2.25 (3월 1일이 만주국 건국 6주년임)
 しかして日満軍は昨年中戦闘を交えること一千七百四十一回、匪首を仆すこと金日成以下五十九、逮捕した匪首王鳳閣以下二十八名、匪の遺棄死体一万千八百八十一、捕虜二千十六、獲得した小銃五千二百十七という著しい成果を挙げた、これに対し日満側は戦死日軍二百八十九名、満軍二百九十八名、計五百八十七名、負傷者日軍四百七十一名満軍五百二十八名、計九百九十九名の貴い犠牲を払った
일만군(日満軍)이 작년중에 벌인 전투회수가 1,741회이고, 비수(匪首)를 죽인 것이 김일성(金日成) 이하 59명, 체포한 비수가 왕봉각(王鳳閣, 1897-1937) 이하 28명, 비적들의 유기 사체(遺棄 死体)가 11,881 구, 포로 2,016명, 획득한 소총이 5,217정이다. 일만군 전사자는 일본군 289명, 만주군 298명으로 계 587명, 부상자는 일본군 471명, 만주군 528명 계 999명이다. 이러한 토벌 결과로 항일연군을 포함한 비적(항일 무장단체) 인원은 9,000 여명으로 급감하였다.

일제의 집중적 토벌로 대다수 지휘관과 수많은 병력을 잃은 1로군은 1938년 7월에 위의 후기 편제표와 같이 편제를 축소 개편한다. 이 후기 편제의 지휘관들도 일만군경이 합동작전으로 1939년 10월부터 1941년 3월까지 벌인 동남3성 (東南3省 = 吉林 通化 間島) 치안숙정공작 (治安肅正工作)으로[17] 간신히 살아남았던 총사령 양정우를 포함한 지휘관들이 모두 전사하거나 투항하고, 제2방면군장이었던 북한 김일성만 결사 항전 중인 상관과 동료, 부하들을 버리고 몰래 소련으로 도주하여 살아남았다.

항일연군은 일만군의 집중적인 토벌로 다수의 전사자, 도망자, 귀순자들이 발생하면서 세력이 점점 약화되어 1941~2년 무렵 완전히 소멸하고, 잔존 세력은 소련으로 도피하여 제88독립저격여단(第88獨立狙撃旅團)에 수용되었다가 일본 패전 후 본국으로 귀환한다.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은 88여단의 조선인들을 북한으로 데려와 김일성을 자신들의 대리인으로 내세워 이들을 최고 권력집단으로 만들어 준다.

참고 자료

함께 보기

각주

  1. 1.0 1.1 1.2 為抗日救國告全體同胞書 : 中國共產黨中央委員會 1935年 8月 1日 : 維基文庫
  2. 2.0 2.1 2.2 2.3 2.4 2.5 이명영(李命英, 1928~2000), 진위 김일성 열전 (28) 동북 항일 연군 6사장 중앙일보 1974.06.10 종합 3면
  3. 「동북항일연군 통일군대 건제선언(東北抗日聯軍 統一軍隊 建制宣言)」
  4.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13081260200、第六十八議会用調書 別冊(最近支那及満州ニ於ケル共産運動概況)(議TA-10)(外務省外交史料館)」 2、満州ニ於ケル共産運動近況 昭和 10년 (1935년) 12월 p.6 : 만주공산운동 주도 기관인 중공당 만주성위는 코민테른(국제당, 國際黨) 블라디보스톡(포조, 浦潮) 지부의 지도를 받음.
  5. 서재진,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의 신화화 연구』 (통일연구원 연구총서 2006-11, 2006-12-26) pp.52~53
  6.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31권 여성운동 - 제7장 여성들의 의열무장활동과 여자광복군 3. 사회주의계 항일여성 무장투쟁 pp.295~296 (독립기념관)
  7. 金日成, 抗联第一路军略史 (抗聯第一路軍略史), 东北抗日联军 史料(下), 东北抗日联军 史料 编写组, 中国共産党史 资料出版社, 1987, pp.665~679
    자료발굴 1942년에 김일성이 육필로 쓴 항일연군 제1로군 약사 (번역) 역사비평 1992년 여름호(통권 19호), 1992.5, pp.403-414
    (다시쓰는 한국현대사 7) 東北항일聯군 활동기 金日成 자필 보고서 중앙일보 1995.02.20 종합 8면
  8. 유순호, 김일성 평전 (상) (지원출판사 2017.01.25) p.224
    해방되면 안도현장이 꿈이던 김일성 자유아시아 방송 (RFA) 2017-04-14
  9. 金日成(김일성) 政權(정권)수립앞서「ML 주의」학습 / 당시 김일성大(대) 부총장 朴一(박일)씨가「교육」 동아일보 1991.08.14. 4면
  10. 金日成, 정권수립 앞서 ML주의 교육받아 연합뉴스 1991-08-14
  11. 김재순(金在淳, 1923~2016) 전 국회의장의 증언 : 南北(남북)의 對话(대화) (13) 老革命家(노혁명가)들의 꿈과 좌절 (13) 南北協商(남북협상)과 나 (上) 1971.10.30 동아일보 4면 / "曺圭河, 李庚文, 姜聲才, 남북의 대화 (서울, 고려원 1987), 초간은 (한얼문고, 1972)
  12. 동북항련 제1로군 월경인원 통계표(东北抗联 第一路军 越境人员 统计表), 《동북지구혁명역사문건회집(东北地区革命历史文件汇集) 1942年 - 1945年7月》 甲65卷, p.117 ;
  13. (다시쓰는한국현대사) 38.만주서 소련으로 金日成의 越境 중앙일보 1995.08.01 / 종합 10면
  14. 항일군 3인 왜 일왕에 충성맹세 했나 오마이뉴스 2007.09.13
  15. 満洲国治安粛正計画大綱案 昭和11.4~14.3 (1936.4~1939.3) C14030524200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第一、東亜局第二課関係/第六章 満州国治安状況 (1936/12/01)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2130132300、執務報告 昭和十一年度東亜局第二課及第三課(東亜-21)(外務省外交史料館)」
  16. 16.0 16.1 비적 9천으로 격감(匪賊九千に激減) / 만주국 치안 완성(満洲国治安完成へ) / 来月一日・建国六周年 오사카 마이니치신문(大阪毎日新聞) 1938.2.25 (昭和13)
  17. 吉林、間島、通化 三省治安粛正の大要 昭和14年10月~16年3月 (1939.10~1941.3) C13071217500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吉林、間島、通化 三省治安粛正の大要 昭和14年10月~16年3月 (1939.10~1941.3) C13071218500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