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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의 공명심 비극적 죽음 자초 허약한 김규식은 스스로 무너져
::여운형의 공명심 비극적 죽음 자초 허약한 김규식은 스스로 무너져
{{인용문|이런 상황에서 좌익을 다루는 공작을 맡은 사람이 하지의 정치 고문인 버치(Leonard M. Bertsch) 중위였다. 미 오하이오주 애크론(Akron) 출신으로서 1946년 초에 소위로 부임한 그는 비록 계급은 낮았으나 군정청 안에서 가장 우수한 정치군인이었다. 그는 하버드대학 법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매사추세츠의 홀리크로스(Holy Cross)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기억력이 비상했고 문필에 뛰어났으며 형세 판단이 빨랐다. 버치는 자신이 한 신생국가의 창설 과정에서 ‘미국의 세기(American Century)’에 태어난 마키아벨리(N. Machiavelli)인 것처럼 여기고 있었다. 1973년에 커밍스(B. Cumings)가 그를 만났을 때 “나는 세계에서 가장 높이 올라간 중위(the highest ranking first lieutenant in the world)”라고 그는 말했다. 겸손이라는 것과는 담을 쌓은 사람이었다. 교만은 천천히 자살하는 독약임을 그는 몰랐다. 정병준 교수(이화여대)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한국에서 자동차도 많지 않던 그 시절, 1년 동안에 교통법규를 여덟 번이나 위반했다. 한국을 그만큼 우습게 보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는 귀국해서는 변호사 자격마저 정지당한 채 한국에서의 수많은 정치 공작을 가슴에 묻고 평범한 시민으로 삶을 마감했다. 그는 ‘재주는 넘쳤으나 덕이 부족(才勝薄德)한 사람으로 그릇에 넘치게 물을 담으려 했다. 한국의 원로 정객들은 1910년생인, 아들 또래의 그를 보며 시큰둥했다.}}
{{인용문|이런 상황에서 좌익을 다루는 공작을 맡은 사람이 하지의 정치 고문인 버치(Leonard M. Bertsch) 중위였다. 미 오하이오주 애크론(Akron) 출신으로서 1946년 초에 소위로 부임한 그는 비록 계급은 낮았으나 군정청 안에서 가장 우수한 정치군인이었다. 그는 하버드대학 법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매사추세츠의 홀리크로스(Holy Cross)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기억력이 비상했고 문필에 뛰어났으며 형세 판단이 빨랐다. 버치는 자신이 한 신생국가의 창설 과정에서 ‘미국의 세기(American Century)’에 태어난 마키아벨리(N. Machiavelli)인 것처럼 여기고 있었다. 1973년에 커밍스(B. Cumings)가 그를 만났을 때 “나는 세계에서 가장 높이 올라간 중위(the highest ranking first lieutenant in the world)”라고 그는 말했다. 겸손이라는 것과는 담을 쌓은 사람이었다. 교만은 천천히 자살하는 독약임을 그는 몰랐다. 정병준 교수(이화여대)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한국에서 자동차도 많지 않던 그 시절, 1년 동안에 교통법규를 여덟 번이나 위반했다. 한국을 그만큼 우습게 보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는 귀국해서는 변호사 자격마저 정지당한 채 한국에서의 수많은 정치 공작을 가슴에 묻고 평범한 시민으로 삶을 마감했다. 그는 ‘재주는 넘쳤으나 덕이 부족(才勝薄德)한 사람으로 그릇에 넘치게 물을 담으려 했다. 한국의 원로 정객들은 1910년생인, 아들 또래의 그를 보며 시큰둥했다.}}
* [https://www.joongang.co.kr/article/24101702#home 미·소 해방군·점령군 논쟁 어떻게 볼까 : 신복룡] 중앙일보 2021.07.09
{{인용문|그와 달리 미군은 소련군에 필적할 만한 정치 장교를 갖추지 못했다. 하지 사령관은 미국 육군사에서 ‘군인 중의 군인’이라는 칭호를 들었을 정도로 거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 사령관 밑에 조력자가 필요하자 미국은 1946년 초 뒤늦게 레너드 버치 중위를 하지의 정치고문으로 임명했다. 그의 나이는 불과 35세였다.<br>
하버드대 출신인 버치 중위는 자신이 마치 신생국 창설의 주역인 것처럼 행세하며 “나는 세상에서 가장 출세한 중위”라고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연해주 관구 사령관 메레츠코프 대장의 군사위원으로 경험을 쌓은 스티코프 상장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미국과 소련의 대한 정책의 본질을 설명하자면 어느 쪽의 선악 문제가 아니라, 소련의 노회함과 미국의 서툰 대결에서 미국이 비본질적인 결함으로 인해 상처를 입은 것으로 봐야 한다.}}
*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1/10/18/E6RCMGTZNJB7NC5SFSKBXUT7GE/ <nowiki>[조용헌 살롱] [1319]</nowiki> 신복룡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조선일보 2021.10.18.
*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1/10/18/E6RCMGTZNJB7NC5SFSKBXUT7GE/ <nowiki>[조용헌 살롱] [1319]</nowiki> 신복룡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조선일보 2021.10.18.
* [https://www.joongang.co.kr/article/24101702#home 미·소 해방군·점령군 논쟁 어떻게 볼까 : 신복룡] 중앙일보 2021.07.09


==한국전쟁을 보는 시각==
==한국전쟁을 보는 시각==

2023년 10월 24일 (화) 09:53 판

박태균
PYH2019032907200001300_P4.jpg
한국역사연구회 신임 회장에 박태균 서울대 교수[1]
국적태극기.jpg 대한민국
성별남성
출생1966년 12월 31일 (57세)
현직서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
직업교수, 역사학자
성향좌파 학자
학력서울대학교 국사학과 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 석사/박사

박태균은 역사학자이다,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0년부터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2] 미국 하버드대학교 동아시아학과에서 2007년과 2017년 ‘한국현대사’와 ‘한미관계사’로 학부와 대학원 강의를 했으며 계간 역사비평 주간과 서울대 대학신문 주간으로 일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1956~1964년 한국 경제개발계획의 성립과정〉(2000년)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 대학교 옌칭 연구소 방문 연구원(Visiting fellow, 1997년 - 1999년)을 지냈으며, KBS 〈인물현대사〉·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자문연구원(2000년 -), 《역사비평》편집위원(2001년 -),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의 《Pacific Affairs》편집위원(2005년 - )으로 활동 중이다.

-[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대일 협상, 일본의 진정한 사과 거듭 요구해야


저서

  • 《현대사를 베고 쓰러진 거인들》(1994년)
  • 조봉암 연구》(1995년)
  • 《한국현대사강의》(공저, 1998년)
  • 박정희 모델과 신자유주의 사이에서》(공저, 2004년) [3]

미군정 중위 버치의 이승만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답습

레너드 버치(Leonard M. Bertsch, 1910~1976)는 미군정 당시 중위의 낮은 계급이었으나 하버드 로스쿨을 나와 변호사 자격을 가진 탓에 하지 사령관의 정치 고문이 되어 여러 사안에 개입하였다. 미군정이 이승만을 배제하고, 김규식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좌우합작을 추진할 때 핵심역할을 한 인물이다. 좌파적 성향으로 이승만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박태균이 이승만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것도 이러한 버치가 남긴 기록을 중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승만에 대한 그의 부정적 견해를 버치 문서가 뒷받침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버치가 당시 일에 대해 객관적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보기는 어렵다.

여운형의 공명심 비극적 죽음 자초 허약한 김규식은 스스로 무너져
이런 상황에서 좌익을 다루는 공작을 맡은 사람이 하지의 정치 고문인 버치(Leonard M. Bertsch) 중위였다. 미 오하이오주 애크론(Akron) 출신으로서 1946년 초에 소위로 부임한 그는 비록 계급은 낮았으나 군정청 안에서 가장 우수한 정치군인이었다. 그는 하버드대학 법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매사추세츠의 홀리크로스(Holy Cross)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기억력이 비상했고 문필에 뛰어났으며 형세 판단이 빨랐다. 버치는 자신이 한 신생국가의 창설 과정에서 ‘미국의 세기(American Century)’에 태어난 마키아벨리(N. Machiavelli)인 것처럼 여기고 있었다. 1973년에 커밍스(B. Cumings)가 그를 만났을 때 “나는 세계에서 가장 높이 올라간 중위(the highest ranking first lieutenant in the world)”라고 그는 말했다. 겸손이라는 것과는 담을 쌓은 사람이었다. 교만은 천천히 자살하는 독약임을 그는 몰랐다. 정병준 교수(이화여대)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한국에서 자동차도 많지 않던 그 시절, 1년 동안에 교통법규를 여덟 번이나 위반했다. 한국을 그만큼 우습게 보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는 귀국해서는 변호사 자격마저 정지당한 채 한국에서의 수많은 정치 공작을 가슴에 묻고 평범한 시민으로 삶을 마감했다. 그는 ‘재주는 넘쳤으나 덕이 부족(才勝薄德)한 사람으로 그릇에 넘치게 물을 담으려 했다. 한국의 원로 정객들은 1910년생인, 아들 또래의 그를 보며 시큰둥했다.
그와 달리 미군은 소련군에 필적할 만한 정치 장교를 갖추지 못했다. 하지 사령관은 미국 육군사에서 ‘군인 중의 군인’이라는 칭호를 들었을 정도로 거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 사령관 밑에 조력자가 필요하자 미국은 1946년 초 뒤늦게 레너드 버치 중위를 하지의 정치고문으로 임명했다. 그의 나이는 불과 35세였다.
하버드대 출신인 버치 중위는 자신이 마치 신생국 창설의 주역인 것처럼 행세하며 “나는 세상에서 가장 출세한 중위”라고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연해주 관구 사령관 메레츠코프 대장의 군사위원으로 경험을 쌓은 스티코프 상장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미국과 소련의 대한 정책의 본질을 설명하자면 어느 쪽의 선악 문제가 아니라, 소련의 노회함과 미국의 서툰 대결에서 미국이 비본질적인 결함으로 인해 상처를 입은 것으로 봐야 한다.

한국전쟁을 보는 시각

수정주의 한국전쟁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서울대에서 한국전쟁을 이렇게 교육을 하고 있다.

  • 최강1교시 EP.01 한반도 신탁통치에 관한 진실 | 한국전쟁 왜 일어났나?
  • 최강1교시 EP.02 전쟁은 후방에서도 치열하게 벌어졌다 I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
  • 최강1교시 EP3. 한국전쟁, 과연 누가 승리한 전쟁인가? I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