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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과 김일성 일족 - 백두혈통 신화==
==백두산과 김일성 일족 - 백두혈통 신화==
북한은 해방 직후부터 [[김일성]]이 백두산에서 항일투쟁을 한 것처럼 선전해 왔다. 북한에서 애국가처럼 불리는 이찬이 작사한 김일성 장군의 노래(1946)도 "장백산 줄기 줄기 피어린 자국"으로 시작한다. 1947년에 간행된 [[조기천]]의 서사시 "백두산"은 김일성의 혁혁한 항일전공이라며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보천보 사건|보천보 전투]]를 다룬 것이다.
북한은 해방 직후부터 [[김일성]]이 백두산에서 항일투쟁을 한 것처럼 선전해 왔다. 북한에서 애국가처럼 불리는 이찬이 작사한 김일성 장군의 노래(1946)도 "장백산 줄기 줄기 피어린 자국"으로 시작한다. 1947년에 간행된 [[조기천]]의 서사시 "백두산"은 김일성의 혁혁한 항일전공이라며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보천보사건|보천보 전투]]를 다룬 것이다.


이는 김일성을 항일영웅으로 부각시키는데 백두산이 민족의 영산이라는 이미지를 이용한 것이다.  
이는 김일성을 항일영웅으로 부각시키는데 백두산이 민족의 영산이라는 이미지를 이용한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 일족을 백두혈통이라고까지 칭하는 것은 [[김정일]]을 후계자로 결정하고 나서부터이다. 북한은 1984년부터 김정일이 백두산 밀영에서 태어났다고 조작하여 주장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날조된 백두혈통 신화의 시작이다.
그러나 김일성 일족을 백두혈통이라고까지 칭하는 것은 [[김정일]]을 후계자로 결정하고 나서부터이다. 북한은 1984년부터 김정일이 [[백두산 밀영]]에서 태어났다고 조작하여 주장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날조된 백두혈통 신화의 시작이다. 김일성이 [[동북항일연군]] 시절 만주의 백두산 인근 지역에서 활동한 적은 있으나, 백두산에 밀영을 꾸린적은 없다. 항일투쟁한다는 사람들이 인적도 없는 깊은 산속에 밀영을 마련할 리도 없다. 식량과 보급품 조달에 애로가 클 뿐만 아니라, 일본군의 코끝도 볼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곳은 숨어사는 은자들이나 살 곳이지 항일투사들이 머물 장소는 되지 못한다.
[[김정일 생가|김정일이 실제로 태어난 곳]]은 김일성이 소련으로 도주한 직후 머물던 남야영이 있던 우수리스크 인근 라즈돌노예 마을이다.
 
북한은 또 김정일이 태어났다는 백두산 밀영 근처 뿐만 아니라 북한 도처에서 김일성, 김정숙과 김정일의 출생을 찬양하는 문구가 새겨진 구호나무가 발견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근거없는 조작이다.
 
* [[백두산 구호 나무]]
* [[백두산 구호 나무]]
: 구호나무의 문구에는 김일성, 김정숙, 김정일이 주로 등장하나, 김일성이 김정숙과 결혼한 것은 1940년 10월 23일 소만 국경너머로 도주하기 직전이므로, 이런 것들은 다 후대의 조작이다. 또 김일성 장군이라고 수도없이 나오지만, 김일성이 해방 전에 동료들 사이에서도 장군으로 불린 적은 단 한번도 없었고, 해방 후부터 자칭 장군이 되었을 뿐이다.
: 구호나무의 문구에는 김일성, 김정숙, 김정일이 주로 등장하나, 김일성이 김정숙과 결혼한 것은 1940년 10월 23일 소만 국경너머로 도주하기 직전이므로, 이런 것들은 다 후대의 조작이다. 또 김일성 장군이라고 수도없이 나오지만, 김일성이 해방 전에 동료들 사이에서도 장군으로 불린 적은 단 한번도 없었고, 해방 후부터 자칭 장군이 되었을 뿐이다.


==남한 사람들의 백두산에 대한 인식==
==남한 사람들의 백두산에 대한 인식==

2019년 8월 2일 (금) 16:5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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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은 단군신화의 무대인가?

단군신화(檀君神話)를 기록한 가장 오랜 문헌은 일연(一然, 1206~1289)삼국유사(三國遺事)이승휴(李承休, 1224~1300)제왕운기(帝王韻紀)이다. 여기에 나오는 신화의 무대는 (太伯山)인데, 일연은 태백산(太伯山)이 묘향산(妙香山)이라고 했다.

또한 단군이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했다고 하였으니 백두산과 어떤 관련도 찾아보기 어렵다. 북한도 평양 인근 강동군에서 단군릉(檀君陵)을 발굴하고 재단장했다고 주장하므로 백두산을 단군의 연고지로 보지는 않는다.

근래의 학자들은 태백산이 백두산이라고 하는 사람도 많으나, 근거는 명확하지 않다. 근대까지도 그랬지만 더더구나 추정되는 단군의 시대에는 백두산 일대는 사람의 접근이 지극히 어려운 무인지경에 속했으므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어려운 곳에 있었다. 또 국내에는 단군의 전설이 전하는 지역도 많기 때문에 꼭 백두산이 단군신화의 무대라고 특정지을만한 근거를 찾기도 어렵다.

뿐만아니라 백두산은 고려의 영토 밖에 있었으므로 고려시대 사람들은 그 존재도 알지 못했고, 일연이나 이승휴도 백두산에 대해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따라서 일연이나 이승휴가 고려의 영토내에 있지도 않는 산을 우리 민족의 기원이 된 산으로 파악했을 가능성도 높지 않다.

단군신화의 무대가 백두산이라는 주장의 출현 시기

동아일보사는 1921년에 민태원(閔泰瑗, 1894~1935) 등을, 1926년에 최남선(崔南善, 1890 ~ 1957) 등을 백두산 등정팀으로 파견하는데, 동아일보에 연재된 민태원이나[1] 최남선이[2] 당시 쓴 기행문에 단군신화의 무대가 백두산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특히 최남선의 기행문은 상당히 많이 알려졌는데 이로부터 백두산이 단군신화의 무대로 알려지게 된 것 같다.[3][4]

백두산의 화산 대폭발 : 946년

백두산은 지난 4천년동안 약 10번 정도 크고 작은 폭발이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중일 어느 나라 기록에도 나오지 않으나 근래의 지질학적 연구에 의하면 946년 백두산 화산의 대폭발이 있었다.

천지도 이때 처음 생겨났을 것으로 보인다. - 단군시대부터 있던 호수로 보기 어렵다.

백두산의 화산 폭발이 발해 멸망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발해는 화산 폭발전인 926년에 이미 망했다.[5]

백두산의 조선 영토 편입 : 세종의 4군 6진 개척

백두산은 고구려나 발해의 영역에 속했지만, 그 후로 고려말까지는 우리 영토 밖에 있었다. 백두산은 세종 때인 1430년대에 조선으로 편입되었다. - 우리 민족과 실질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은 이때부터이며, 600년이 채 안되는 기간이므로 민족의 영산이라는 개념이 처음부터 있었을 리도 없다.

조선으로 편입된 후로도 사람들이 접근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먼 곳에 있어 산의 존재가 일반에는 잘 알려지지도 않았다. 삼수, 갑산은 험난한 지형으로 해서 조선시대의 악명높은 귀양지였는데, 백두산은 삼수, 갑산 너머에 있어 그보다 접근이 더 어려워 탐방객이 거의 없었다. 이 때문에 산에 대한 기록도 조선중기 이전 것은 거의 없다.

탐방이 어려운 여러 조건들

  • 기상 변화가 심해 큰비를 만나면 고립되거나 급류에 휩쓸려 익사의 위험이 높았다.
  • 진흙이나 늪지대에 잘못들어서 탈출이 불가능할 수도 있었다.
  • 맹수의 습격을 받을 위험이 높았다.
  • 사찰이나, 휴식 또는 대피시설이 전무했다.
  • 길 안내할 사람을 구하기 쉽지 않았다.
  • 산세가 깊어 등반일정이 길어지므로 식량등의 지참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런 이유로 등반을 하려면 여러 사람이 모여 상당한 준비를 해야만 가능하였다.

백두산 정계비 : 1712년

서산대사는 우리나라의 명산에 대한 평을 하면서

휴정 서산대사의 ‘조선사산평어(朝鮮四山評語)’[6]
‘금강수이부장(金剛秀而不壯), 지리장이불수(智異壯而不秀), 구월불수부장(九月不秀不壯), 묘향역수역장(妙香亦秀亦壯).’
(금강산은 아름답지만 웅장하지는 않고, 지리산은 웅장하지만 아름답지는 않다. 구월산은 아름답지도 웅장하지도 않은데, 묘향산은 아름답고도 웅장하도다)

라고 하였다. 조선 중기까지도 이런 산들의 명성에 눌려 거의 존재감이 없던 백두산이 세간의 주목을 받게되는 것은 청나라와 국경분쟁이 발생하여 논란 끝에 숙종 38년(1712년)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우게 된 후부터이다.

정계비 수립 당시 관계했던 사람들이 남긴 글이 있다.

  • 김지남의 「北征錄(북정록)」 : 당시 통역관으로 일하며 본 일에 대한 기록
白頭山(백두산) 査界(사계)과정 밝힐 「北征錄(북정록)」 1973.04.14 경향신문 5면
홍세태(洪世泰 : 1653~1725)의 문집인 『유하집(柳下集)』권9
북정록의 저자 김지남의 아들 김경문의 이야기를 듣고 쓴 글.

조선 후기 백두산 등정 기행문

18세기 중반 이후 백두산 기행문이 많이 나오기 시작한다. 서울에 살던 사람이 일부러 백두산까지 유람간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고, 대개 백두산 인근의 지방관을 맡아서 간 사람들이나, 삼수 갑산 등 백두산 인근으로 유배간 사람들이 남긴 등정기 또는 유람기이다.

  • 이의철李宜哲 <와유록臥遊錄>‘백두산기白頭山記’: 1751년(영조 27) 갑산부사 재임시절 백두산 등정
  • 박종(朴琮), <백두산유록白頭山遊錄>, 1764년 백두산 등정
  • 서명응(徐命膺: 1716~1787), 유백두산기 문화콘텐츠닷컴
보만재집(保晩齋集)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다 갑산甲山으로 유배시 1766년 6월 10일부터 6월 17일까지 백두산에 올랐다.
동행 조엄, 갑산부사 민원閔源과 삼수부사 조한기趙漢紀

조선 유신들의 백두산관

이승만 TV의 이영훈 교수 강연에 백두산을 등정한 조선 선비들의 백두산관이 정리되어 있다. 조선 유신들이 남긴 백두산 기행문에는 민족의 영산(靈山)이라든가 하는 말은 없고, 백두산이 곤륜산의 적장자라든가 하는 소중화 의식이 묻어난다.

함께 보기: 이승만 TV의 "백두산 신화의 내막"

백두산 기행문 : 20세기

조선말 백두산을 다녀온 사람들의 기행문이 누적되면서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백두산을 가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좀 늘어나게 된 것 같다. 1920년 무렵 조선인이 간행하는 한글 신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창간되면서 초기에 단군과 백두산을 널리 알리는 사업을 벌이게 된다.[3][4]

동아일보는 1921년에 기자로 있던 민태원(閔泰瑗, 1894~1935) 등을 백두산에 파견한 후 「白頭山行(백두산행)」이라는 기행문을 17회에 걸쳐 실었다.[1]

권덕규(權悳奎, 1890~1950)[7][8]도 이어서 같은 해에 백두산에 관한 글을 6회에 걸쳐 연재했다.[9]

조선일보는 1930년 안재홍(安在鴻)의 백두산등척기(白頭山登陟記)를 34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1930년 8월 11일부터 9월 15일까지 『조선일보』에 34회에 걸쳐 연재되었고, 1931년 6월 유성사(流星社)에서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최남선의 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

동아일보는 1926년에 최남선(崔南善, 1890 ~ 1957)과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 1870∼1948) 스님 등의 팀을 파견하여 백두산을 등정하게 하고[10], 최남선의 기행문 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를 7월 28일부터 이듬해 1월 23일까지 총 89회에 걸쳐 연재하였다.[2] 이 기행문은 1927년 한성도서주식회사(漢城圖書株式會社)에서 단행본으로 간행하였다.[11]

이어 노산(蘆山) 이은상(李殷相, 1903∼1982)은 최남선의 기행문을 읽은 소감을 동아일보에 5회에 걸쳐 연재하기도 했다.[12]

최남선의 백두산근참기는 역대 백두산 기행문 중 가장 많이 읽힌 것으로, 백두산이 민족의 영산(靈山)이라는 인상을 갖도록 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이고, 당시 사람들의 백두산에 대한 인식에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민족의 영산으로 여겨지게 되는 배경

백두산이 민족의 영산으로 여겨지게 되는 배경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산이 아닌데다, 그 풍광이 등정한 사람들이 경외감을 느낄만하고, 산세가 높고 큰데다 산정에 큰 호수가 있어 신비감을 주는 것 등일 것이다. 최남선 등이 백두산을 등정하고 감격스럽게 끈 기행문이 사람들에게 백두산에 대한 경외감을 일으키고 민족의 영산으로 여기도록 유도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최남선은 백두산이 단군신화의 무대인 것처럼 말했으나 이는 근거가 부족한 확대 해석이다.

백두산과 김일성 일족 - 백두혈통 신화

북한은 해방 직후부터 김일성이 백두산에서 항일투쟁을 한 것처럼 선전해 왔다. 북한에서 애국가처럼 불리는 이찬이 작사한 김일성 장군의 노래(1946)도 "장백산 줄기 줄기 피어린 자국"으로 시작한다. 1947년에 간행된 조기천의 서사시 "백두산"은 김일성의 혁혁한 항일전공이라며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보천보 전투를 다룬 것이다.

이는 김일성을 항일영웅으로 부각시키는데 백두산이 민족의 영산이라는 이미지를 이용한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 일족을 백두혈통이라고까지 칭하는 것은 김정일을 후계자로 결정하고 나서부터이다. 북한은 1984년부터 김정일이 백두산 밀영에서 태어났다고 조작하여 주장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날조된 백두혈통 신화의 시작이다. 김일성이 동북항일연군 시절 만주의 백두산 인근 지역에서 활동한 적은 있으나, 백두산에 밀영을 꾸린적은 없다. 항일투쟁한다는 사람들이 인적도 없는 깊은 산속에 밀영을 마련할 리도 없다. 식량과 보급품 조달에 애로가 클 뿐만 아니라, 일본군의 코끝도 볼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곳은 숨어사는 은자들이나 살 곳이지 항일투사들이 머물 장소는 되지 못한다. 김정일이 실제로 태어난 곳은 김일성이 소련으로 도주한 직후 머물던 남야영이 있던 우수리스크 인근 라즈돌노예 마을이다.

북한은 또 김정일이 태어났다는 백두산 밀영 근처 뿐만 아니라 북한 도처에서 김일성, 김정숙과 김정일의 출생을 찬양하는 문구가 새겨진 구호나무가 발견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근거없는 조작이다.

구호나무의 문구에는 김일성, 김정숙, 김정일이 주로 등장하나, 김일성이 김정숙과 결혼한 것은 1940년 10월 23일 소만 국경너머로 도주하기 직전이므로, 이런 것들은 다 후대의 조작이다. 또 김일성 장군이라고 수도없이 나오지만, 김일성이 해방 전에 동료들 사이에서도 장군으로 불린 적은 단 한번도 없었고, 해방 후부터 자칭 장군이 되었을 뿐이다.

남한 사람들의 백두산에 대한 인식

  • 우리의 맹세 -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날리고 통일을 완수하자
  • 지리 :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산, 칼데라호 천지
  • 접근 불가능해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던 산
  • 1990년대 들어 남한사람들의 중국을 통한 백두산 탐방

참고 자료


함께 보기

각주

  1. 1.0 1.1 민태원(閔泰瑗), 白頭山行(백두산행) : 1회 동아일보 1921-08-21 1면
    白頭山行(백두산행) : 2회 1921.08.22 동아일보 1면
    白頭山行(백두산행) : 최종(17회) 1921.09.08 동아일보 1면
  2. 2.0 2.1 최남선(崔南善), 白頭山覲叅(백두산근참)(一(일)) 1926.07.28 동아일보 1면
    白頭山覲叅(백두산근참) (八十八(팔십팔)) 1927.01.22 동아일보 4면
    白頭山覲叅(백두산근참) (八九(팔구)) : 최종 동아일보 1927-01-23 4면
  3. 3.0 3.1 횡설수설 1990.04.01 동아일보 1면
  4. 4.0 4.1 최남선(崔南善, 1890 ~ 1957)의 [단군론] 77회 연재
    壇君論(단군론) (一(일)) 1926.03.03 동아일보 1면
    壇君論(단군론) (二(이)) 1926.03.04 동아일보 1면
    壇君論(단군론) (七十七(칠십칠)) 동아일보 1926-07-25 1면
  5. 발해(渤海, 698년 ~ 926년) - 위키백과
  6. 묘향산, 묘한 향기에 산도 사람도 취하다 한겨레신문 2005-10-26
  7. 한글보급에 앞장선 한글학자이자 민족의식을 일깨운 역사학자, 권덕규(權悳奎) 국립중앙도서관 > 역사 > 한국의위대한인물
  8. 권덕규(權悳奎, 1890~195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9. 권덕규(權悳奎), <白頭山記行(백두산기행)이끗나 고納凉會(납량회)가마추임> (一(일)) 1921.10.03동아일보 1면
    <白頭山記行(백두산기행)이끗나 고納凉會(납량회)가마추임> (三(삼)) 1921.10.05 동아일보 1면
    <白頭山記行(백두산기행)이 끗나고 納凉會(납량회)가 마추임> (六(육)) 1921.10.08 동아일보 1면
  10. 消息(소식) : 최남선, 박한영과 동행, 24일 밤 백두산으로 출발 동아일보 1926-07-25 1면
  11. 六堂崔南善著(육당최남선저) 白頭山覲參記(백두산근참기) 1927.07.21 동아일보 5면 광고 : 漢城圖書株式會社(한성도서주식회사) / 白頭山覲參記(백두산근참기)
  12. 『六堂(육당)의 近業(근업) 白頭山記(백두산기)』를 닑고 (一(일)) 1927.09.08 동아일보 3면: 六堂(육당)의 近業(근업)[白頭山記(백두산기)]를 닑고 (五(오) : 최종) 1927.09.12 동아일보 3면
  13. [박정진의청심청담] ‘주인 지식인’ 없는 대한민국의 슬픈 자화상 세계일보 2019-0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