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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search.i815.or.kr/contents/newsPaper/detail.do?isTotalSearch=Y&newsPaperId=DR192012250401&sortNo=8 北墾島에 在한 我獨立軍의 戰鬪情報] 독립신문 제88호1920-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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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十一月十二日 軍務部發表<br>
{{인용문|'''十一月十二日 軍務部發表'''<br>
鳳梧洞附近의 戰<br>
'''鳳梧洞附近의 戰'''<br>
一. 戰鬪前 彼我의 形勢<br>
'''一. 戰鬪前 彼我의 形勢'''<br>
:敵은 鳳梧洞을 我軍의 策源地라 하야 包圍攻擊을 하려 하고 敵의 步兵 約一大隊는 步兵을 先頭로 하야 高麗嶺方面으로 前進中이며 따라 我軍은 作戰計劃을 如左히 하다
:敵은 鳳梧洞을 我軍의 策源地라 하야 包圍攻擊을 하려 하고 敵의 步兵 約一大隊는 步兵을 先頭로 하야 高麗嶺方面으로 前進中이며 따라 我軍은 作戰計劃을 如左히 하다
:第一聯隊를 鳳梧洞 上村 附近에 在한 練兵場에 集合하고 作戰命令을 下하야 各部隊의 戰鬪區域 及其 任務를 定할새 第一中隊長 李千五는 部下中隊를 引率하고 鳳梧洞 上村 西北端에 第二中隊長 姜尙模는 東山에 第三中隊長 姜時範은 北山에 第四中隊長 曹權植은 西山南端에 聯隊長 洪範圖는 二個中隊를 引率하고 西山中北端에 占位하고 各其 嚴密한 戰備를 하엿다가 敵이 來到할 時에 其前衛를 洞口에 通過케 한 後에 敵의 本隊가 我軍의 潛伏한 包圍中에 入할 際에 號令에 依하야 射擊케 하고 聯隊附將校 李園은 本部及殘餘中隊를 領率하고 西北山間에 占位하야 兵員增援과 彈藥補充糧餉給養에 任케 하고 特히 第二中隊 三小隊 第一分隊長 李化日로 其部下 一分隊를 引率하고 高麗嶺北便 約一千二百米突되는 高地와 其東北便村落前端에 若干兵員을 分하야 潛伏하엿다가 敵이 來到하거던 ●●하야 前進을 >滯케 하다가 鳳梧洞方面으로 佯敗退却케 하고 司令官 崔振東 副官 安武는 東北山西間最高峯獨立樹下에 在하야 指揮케 하다<br>
:第一聯隊를 鳳梧洞 上村 附近에 在한 練兵場에 集合하고 作戰命令을 下하야 各部隊의 戰鬪區域 及其 任務를 定할새 第一中隊長 李千五는 部下中隊를 引率하고 鳳梧洞 上村 西北端에 第二中隊長 姜尙模는 東山에 第三中隊長 姜時範은 北山에 第四中隊長 曹權植은 西山南端에 聯隊長 洪範圖는 二個中隊를 引率하고 西山中北端에 占位하고 各其 嚴密한 戰備를 하엿다가 敵이 來到할 時에 其前衛를 洞口에 通過케 한 後에 敵의 本隊가 我軍의 潛伏한 包圍中에 入할 際에 號令에 依하야 射擊케 하고 聯隊附將校 李園은 本部及殘餘中隊를 領率하고 西北山間에 占位하야 兵員增援과 彈藥補充糧餉給養에 任케 하고 特히 第二中隊 三小隊 第一分隊長 李化日로 其部下 一分隊를 引率하고 高麗嶺北便 約一千二百米突되는 高地와 其東北便村落前端에 若干兵員을 分하야 潛伏하엿다가 敵이 來到하거던 ●●하야 前進을 >滯케 하다가 鳳梧洞方面으로 佯敗退却케 하고 司令官 崔振東 副官 安武는 東北山西間最高峯獨立樹下에 在하야 指揮케 하다<br>
二. 戰鬪의 狀況<br>
'''二. 戰鬪의 狀況'''<br>
:敵의 步兵大隊는 步兵을 先頭로 한 縱隊가 七月七日 午前 六時三十分에 高麗嶺西便 約一千五百米突地에 到着되다 時에 李化日分隊는 西面에 潛伏하엿다가 敵의 前衛中隊가 接近하기를 待하야 急射擊으로 敵의 前衛中隊를 全滅하엿스나 其時 地形이 敵의게 大不利함으로 其本隊가 밋처 展開應援치 못함으로 도로혀 我軍의 佯戰小部隊가 意外에 大勝利를 得하고 本隊에 歸合하엿고 敵은 琵琶洞을 經하야 柔遠鎭 封岸으로 退却하야 其隊를 整頓하여가지고 다시 同日 午前 十一時三十分에 同地를 出發하야 鳳梧洞을 向하고 前進할새 同日 午後約一時에 敵의 尖兵은 鳳梧洞上村에 到着됨에 我軍은 더욱 隱蔽하야 潛伏不動하니 敵의 前衛가 通過하고 其後에 敵의 本隊가 我軍潛伏한 三面包圍中에 入하는지라 此際에 司令官의 指揮號令에 依하야 猛烈한 急射擊을 하니 敵은 罔知所措하며 死者 死傷者 倒하며 生者 混亂하야 四散奔走할새 第二中隊長 姜尙模는 其部下를 引率하고 猛烈追擊하야 敵軍 百餘名을 射殺하고 其地點에 部下中隊를 潛伏하엿다가 敵의 應援隊가 來到할 際에 若干發의 射擊을 하다가 巧妙히 潛退하니 兩路로 進하던 敵은 서로 亂射하야 敵火로 敵을 射殺케 하다 大敗한 敵軍若干은 穩城 柔遠鎭 對岸을 向하야 退却하다<br>
:敵의 步兵大隊는 步兵을 先頭로 한 縱隊가 七月七日 午前 六時三十分에 高麗嶺西便 約一千五百米突地에 到着되다 時에 李化日分隊는 西面에 潛伏하엿다가 敵의 前衛中隊가 接近하기를 待하야 急射擊으로 敵의 前衛中隊를 全滅하엿스나 其時 地形이 敵의게 大不利함으로 其本隊가 밋처 展開應援치 못함으로 도로혀 我軍의 佯戰小部隊가 意外에 大勝利를 得하고 本隊에 歸合하엿고 敵은 琵琶洞을 經하야 柔遠鎭 封岸으로 退却하야 其隊를 整頓하여가지고 다시 同日 午前 十一時三十分에 同地를 出發하야 鳳梧洞을 向하고 前進할새 同日 午後約一時에 敵의 尖兵은 鳳梧洞上村에 到着됨에 我軍은 더욱 隱蔽하야 潛伏不動하니 敵의 前衛가 通過하고 其後에 敵의 本隊가 我軍潛伏한 三面包圍中에 入하는지라 此際에 司令官의 指揮號令에 依하야 猛烈한 急射擊을 하니 敵은 罔知所措하며 死者 死傷者 倒하며 生者 混亂하야 四散奔走할새 第二中隊長 姜尙模는 其部下를 引率하고 猛烈追擊하야 敵軍 百餘名을 射殺하고 其地點에 部下中隊를 潛伏하엿다가 敵의 應援隊가 來到할 際에 若干發의 射擊을 하다가 巧妙히 潛退하니 兩路로 進하던 敵은 서로 亂射하야 敵火로 敵을 射殺케 하다 大敗한 敵軍若干은 穩城 柔遠鎭 對岸을 向하야 退却하다<br>
三. 彼我의 損害數<br>
'''三. 彼我의 損害數'''<br>
:敵軍의 死者 百五十七名, 重傷者 二百餘名, 輕傷者 百餘名이오 我軍의 死者將校 一人, 兵員 三人, 重傷者 二人이며 敵의 遺棄物은 多有하나 我軍의 輜重預備馱馬가 無하고 且戰鬪를 目的한 計劃戰이 아니오 不虞戰이 됨으로 此를 獲取키 爲하야 力을 費할 餘地가 無함으로 步兵銃若干梃만 收取하니<br>
:敵軍의 死者 百五十七名, 重傷者 二百餘名, 輕傷者 百餘名이오 我軍의 死者將校 一人, 兵員 三人, 重傷者 二人이며 敵의 遺棄物은 多有하나 我軍의 輜重預備馱馬가 無하고 且戰鬪를 目的한 計劃戰이 아니오 不虞戰이 됨으로 此를 獲取키 爲하야 力을 費할 餘地가 無함으로 步兵銃若干梃만 收取하니<br>
四. 我軍은 目下 戰鬪 하기를 目的치 아니하엿슴으로 安全地로 退却하고 敵은 敗殘軍을 收拾하야 가지고 翌日 에 渡江하야 我國內로 敗退하다}}
'''四. 我軍은 目下 戰鬪''' 하기를 目的치 아니하엿슴으로 安全地로 退却하고 敵은 敗殘軍을 收拾하야 가지고 翌日 에 渡江하야 我國內로 敗退하다}}


==논란==
==논란==

2021년 8월 20일 (금) 16:15 판

1922년 1월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한 당시에 찍은 봉오동 전투의 두 주역 홍범도(洪範圖)와 최진동(崔振東)의 사진. '홍범도 일기'에 따르면 홍범도 장군은 소련 최고지도자 레닌을 접견하고 권총 1자루와 금화 100루블, 레닌이 친필 서명한 '조선군 대장' 증명서 등을 선물 받았다.[1][2][3]

봉오동 전투(1920년 6월 6일 ~ 6월 7일)는 만주 봉오동에서 독립군 부대가 일본 정규군과 싸워 대패시킨 전투이다.

개요

삼둔자 전투에서의 패전 이후 일본군 제19사단은 간도 내의 독립군단 토벌에 나섰다.

이에 만주에 주둔 중이던 홍범도(洪範圖), 최진동(崔振東), 안무(安武)등이 이끄는 대한군북로독군부의 독립군 연합부대와 신민단 예하 이흥수, 한경세의 신민단 독립군 1개 중대가 연합하여 중국 지린성 화룡현 봉오동에서 일본군 제19사단과 전투를 벌였다.

결과

교전 당시 대한북로독군부 소속 독립군은 1천 3백여명이었고 일분군은 500여명이었다. 전투 결과 일본군은 전사 157명, 중상 200여명이 발생하였고, 독립군은 전사 4명, 중상 2명이 발생하였다.

일본군을 대패시킨 봉오동전투는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높였으며 병력보강과 군비확충에 활력을 주었다. 한편 조선총독부와 일본은 독립군의 병력을 새로이 평가하고 대토벌을 계획하게 되었다.

이후 일본군의 대대적인 탄압을 받게 된 북로독군부군은 청산리로 옮겨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연합하여 청산리 전투를 전개해 나갔다.

전투 쌍방 피해에 대한 당시의 기록

봉오동 전투에서의 쌍방 피해는 당시 일본측 기록과 임시정부측 기록이 판이하게 달라서 논란이 되고 있다. 관련된 여러 기록들을 미디어워치가 정리한 기사가 있어 참고가 된다.

일본군 전사자, 상세전투보고서 포함 다양한 일본 측 사료에 단 1명뿐...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만 52명, 60명, 120명, 150명, 157여명 등 매번 다르게 기록하며 ‘과장선전’

국내 신문에 보도된 쌍방 피해 규모

일본측 : 전사 보병 이등졸 호리이 시게쿠니(堀井茂邦) (흉부 관통 총상)

부상 일등졸 가지우라 간지로(梶浦甚次浪) 외 순사 1명

조선인 측 : 유기시체 34구, 부상자 다수, 포로 8명

조선인의 사체를 쌓아놓고 사진을 찍어 상해 가정부(上海 假政府)로 보내어 선전에 이용함.

국내 신문의 전투 경과 보도

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추기(追記) 매일신보[每日申報] 1920년 06월 21일 3면 7단
排日軍(배일군)의組織內容(조직내용) 군긔는최신식규률은엄정 동아일보 1920-06-20 3면

임시정부측 기록

我軍江陽洞進擊 독립신문 제85호 1920-06-22
死者 百二十(正誤) 독립신문 제86호 1920-06-24


1920-06-22일자 독립신문에 보도된 봉오동 전투 경과와 쌍방 피해 규모.[4]
十一月十二日 軍務部發表

鳳梧洞附近의 戰
一. 戰鬪前 彼我의 形勢

敵은 鳳梧洞을 我軍의 策源地라 하야 包圍攻擊을 하려 하고 敵의 步兵 約一大隊는 步兵을 先頭로 하야 高麗嶺方面으로 前進中이며 따라 我軍은 作戰計劃을 如左히 하다
第一聯隊를 鳳梧洞 上村 附近에 在한 練兵場에 集合하고 作戰命令을 下하야 各部隊의 戰鬪區域 及其 任務를 定할새 第一中隊長 李千五는 部下中隊를 引率하고 鳳梧洞 上村 西北端에 第二中隊長 姜尙模는 東山에 第三中隊長 姜時範은 北山에 第四中隊長 曹權植은 西山南端에 聯隊長 洪範圖는 二個中隊를 引率하고 西山中北端에 占位하고 各其 嚴密한 戰備를 하엿다가 敵이 來到할 時에 其前衛를 洞口에 通過케 한 後에 敵의 本隊가 我軍의 潛伏한 包圍中에 入할 際에 號令에 依하야 射擊케 하고 聯隊附將校 李園은 本部及殘餘中隊를 領率하고 西北山間에 占位하야 兵員增援과 彈藥補充糧餉給養에 任케 하고 特히 第二中隊 三小隊 第一分隊長 李化日로 其部下 一分隊를 引率하고 高麗嶺北便 約一千二百米突되는 高地와 其東北便村落前端에 若干兵員을 分하야 潛伏하엿다가 敵이 來到하거던 ●●하야 前進을 >滯케 하다가 鳳梧洞方面으로 佯敗退却케 하고 司令官 崔振東 副官 安武는 東北山西間最高峯獨立樹下에 在하야 指揮케 하다

二. 戰鬪의 狀況

敵의 步兵大隊는 步兵을 先頭로 한 縱隊가 七月七日 午前 六時三十分에 高麗嶺西便 約一千五百米突地에 到着되다 時에 李化日分隊는 西面에 潛伏하엿다가 敵의 前衛中隊가 接近하기를 待하야 急射擊으로 敵의 前衛中隊를 全滅하엿스나 其時 地形이 敵의게 大不利함으로 其本隊가 밋처 展開應援치 못함으로 도로혀 我軍의 佯戰小部隊가 意外에 大勝利를 得하고 本隊에 歸合하엿고 敵은 琵琶洞을 經하야 柔遠鎭 封岸으로 退却하야 其隊를 整頓하여가지고 다시 同日 午前 十一時三十分에 同地를 出發하야 鳳梧洞을 向하고 前進할새 同日 午後約一時에 敵의 尖兵은 鳳梧洞上村에 到着됨에 我軍은 더욱 隱蔽하야 潛伏不動하니 敵의 前衛가 通過하고 其後에 敵의 本隊가 我軍潛伏한 三面包圍中에 入하는지라 此際에 司令官의 指揮號令에 依하야 猛烈한 急射擊을 하니 敵은 罔知所措하며 死者 死傷者 倒하며 生者 混亂하야 四散奔走할새 第二中隊長 姜尙模는 其部下를 引率하고 猛烈追擊하야 敵軍 百餘名을 射殺하고 其地點에 部下中隊를 潛伏하엿다가 敵의 應援隊가 來到할 際에 若干發의 射擊을 하다가 巧妙히 潛退하니 兩路로 進하던 敵은 서로 亂射하야 敵火로 敵을 射殺케 하다 大敗한 敵軍若干은 穩城 柔遠鎭 對岸을 向하야 退却하다

三. 彼我의 損害數

敵軍의 死者 百五十七名, 重傷者 二百餘名, 輕傷者 百餘名이오 我軍의 死者將校 一人, 兵員 三人, 重傷者 二人이며 敵의 遺棄物은 多有하나 我軍의 輜重預備馱馬가 無하고 且戰鬪를 目的한 計劃戰이 아니오 不虞戰이 됨으로 此를 獲取키 爲하야 力을 費할 餘地가 無함으로 步兵銃若干梃만 收取하니
四. 我軍은 目下 戰鬪 하기를 目的치 아니하엿슴으로 安全地로 退却하고 敵은 敗殘軍을 收拾하야 가지고 翌日 에 渡江하야 我國內로 敗退하다

논란

홍범도가 벌였다는 봉오동·청산리전투는 알고보면 대승·대첩이 아니라 잘해야 무승부였다. 사상적 동지였던 이동휘의 감언이설에 속아 자유시로 이동해서는 동료 독립군을 몰살하는 편에 섰던 사람이 홍범도다. 레닌으로부터 소비에트 적군 편입을 거부하는 한국 독립군을 청소해줘 고맙다고 격려금과 권총까지 선물받고, 소련공산당에 입당하여 당원이 된 사람이다. 홍범도가 과연 대한민국 건국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기에 문재인 대통령은 그를 “최고의 예우로 보답”하려는 것이며, 1등급 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려는 것일까?
항일 의병장 유인석, “상놈 주제에 양반에게 대든” 죄목으로 의병 선봉장 김백선의 목을 베다.
항일무장투쟁의 영웅 김좌진은 독립 군자금 마련 위해 무장 강도 행각 벌여.
독립 군자금 강제 징수하다 연해주 한인 교포들에게 맞아죽은 독립군 대장 최영호.
자유시에서는 소련 적군과 손잡은 한인 무장부대가 동료 대원 수백 명을 사살·체포.
홍범도, 자유시 참변 당시 가해자 편에 서서 한인 독립군 몰살 후 레닌에게 군복·권총 선물받아

함께 보기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