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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在間島 總領事代理領事 堺與三吉 / 수신자 外務大臣 子爵 內田康哉
:발신자 在間島 總領事代理領事 堺與三吉 / 수신자 外務大臣 子爵 內田康哉
:復命書 : 大正九年七月三日 在間島局子街分館主任警察署 外務省警部 和久井吉之助 / 在局子街 分館主任 川南省一 殿
:復命書 : 大正九年七月三日 在間島局子街分館主任警察署 外務省警部 和久井吉之助 / 在局子街 分館主任 川南省一 殿
* 중국 연길보위단 제1대대장 서육린(徐毓麟)이 1920년 6월 14일 상부에 보고한 보고서  "汪淸縣呈報韓亂事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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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22일 (일) 15:44 판

1922년 1월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한 당시에 찍은 봉오동 전투의 두 주역 홍범도(洪範圖)와 최진동(崔振東)의 사진. '홍범도 일기'에 따르면 홍범도 장군은 소련 최고지도자 레닌을 접견하고 권총 1자루와 금화 100루블, 레닌이 친필 서명한 '조선군 대장' 증명서 등을 선물 받았다.[1][2][3]

봉오동 전투(1920년 6월 6일 ~ 6월 7일)는 만주 봉오동에서 독립군 부대가 일본 정규군과 싸워 대패시킨 전투이다.

개요

삼둔자 전투에서의 패전 이후 일본군 제19사단은 간도 내의 독립군단 토벌에 나섰다.

이에 만주에 주둔 중이던 홍범도(洪範圖), 최진동(崔振東), 안무(安武)등이 이끄는 대한군북로독군부의 독립군 연합부대와 신민단 예하 이흥수, 한경세의 신민단 독립군 1개 중대가 연합하여 중국 지린성 화룡현 봉오동에서 일본군 제19사단과 전투를 벌였다.

결과

교전 당시 대한북로독군부 소속 독립군은 1천 3백여명이었고 일분군은 500여명이었다. 전투 결과 일본군은 전사 157명, 중상 200여명이 발생하였고, 독립군은 전사 4명, 중상 2명이 발생하였다.

일본군을 대패시킨 봉오동전투는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높였으며 병력보강과 군비확충에 활력을 주었다. 한편 조선총독부와 일본은 독립군의 병력을 새로이 평가하고 대토벌을 계획하게 되었다.

이후 일본군의 대대적인 탄압을 받게 된 북로독군부군은 청산리로 옮겨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연합하여 청산리 전투를 전개해 나갔다.

전투 쌍방 피해에 대한 당시의 기록

봉오동 전투에서의 쌍방 피해는 당시 일본측 기록과 임시정부측 기록이 판이하게 달라서 논란이 되고 있다. 관련된 여러 기록들을 미디어워치가 정리한 기사가 있어 참고가 된다.

일본군 전사자, 상세전투보고서 포함 다양한 일본 측 사료에 단 1명뿐...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만 52명, 60명, 120명, 150명, 157여명 등 매번 다르게 기록하며 ‘과장선전’

국내 신문에 보도된 쌍방 피해 규모

동아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 등 당시 국내 신무에 보도된 쌍방 피해는 일본측 기록과 거의 유사하다.

일본측 : 전사 보병 이등졸 호리이 시게쿠니(堀井茂邦) (흉부 관통 총상)
부상 일등졸 카지우라 긴지로(梶浦銀次郞) 외 순사 1명

조선인 측 : 유기시체 34구, 부상자 다수, 포로 8명

조선인의 사체를 쌓아놓고 사진을 찍어 상해 가정부(上海 假政府)로 보내어 선전에 이용함.

국내 신문의 전투 경과 보도

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추기(追記) 매일신보[每日申報] 1920년 06월 21일 3면 7단
排日軍(배일군)의組織內容(조직내용) 군긔는최신식규률은엄정 동아일보 1920-06-20 3면

임시정부측 기록

我軍江陽洞進擊 독립신문 제85호 1920-06-22
死者 百二十(正誤) 독립신문 제86호 1920-06-24
北墾島에 在한 我獨立軍의 戰鬪情報 : 十一月十二日 軍務部發表

鳳梧洞附近의 戰
三. 彼我의 損害數

敵軍의 死者 百五十七名, 重傷者 二百餘名, 輕傷者 百餘名이오 我軍의 死者將校 一人, 兵員 三人, 重傷者 二人이며 敵의 遺棄物은 多有하나 我軍의 輜重預備馱馬가 無하고 且戰鬪를 目的한 計劃戰이 아니오 不虞戰이 됨으로 此를 獲取키 爲하야 力을 費할 餘地가 無함으로 步兵銃若干梃만 收取하다.
三. 我獨立軍의 戰鬪
元年年末부터 北墾島에 駐屯한 我獨立軍이 敵兵으로 더부러 屢次 交戰이 間有하던바 六月七日에는 洪範圖 崔明錄 兩將軍이 七百의 義軍을 率하야 三屯子에셔 倭兵 一百五十七名을 擊殺하고 二百餘名을 重傷한 後 小춍 一百六十餘挺, 機關총 三門, 手춍 여러슬 獲得하다
秋七月에 聯隊長 洪範圖, 金佐鎭, 崔振東이 部下兵을 率하고 鳳梧洞에셔 倭兵 百五十七名을 殲滅하다
冬十月에 琿春事件으로 敵이 多衆의 軍隊를 北墾島에 出하야 靑山里附近으로 來하는지라 洪範圖, 金佐鎭, 崔振東 三將軍이 邀戰하야 倭兵 六百餘名을 射殺하다
최명록(崔明錄)과 최진동(崔振東)은 동일인이나 서로 다른 사람으로 안 듯하다.

일본측 기록

  • 陸軍大臣(田中義一)宛 朝鮮軍司令官(宇都宮太郞) 電報
大正9年6月9日 電報 朝特33 : C06031201500
大正9年6月9日 電報 朝特34 : C06031201300
大正9年6月9日 電報 朝特35 : C06031201400 : 電報 六月八日 午後六時十分発 午前一時五十八分着
발신자 堺與三吉(總領事代理) / 수신자 內田康哉(外務大臣) / 발신일 1920년 06월 09일 / 수신일 1920년 06월 10일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을 통틀어 가장 상세한 사료가 야스카와 지로(安川二郞) 소좌의 추격대(이른바 ‘안천추격대’)가 작성한 『봉오동부근전투상보(鳳梧洞附近戰鬪詳報)』다. 이 문건은 전투 중이던 6월 4~7일에 걸쳐 각 부문 지휘관들의 보고를 총지휘관이던 야스카와 소좌가 작성해 다시 상부에 보고한 62쪽짜리 보고서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봉오동 전투 당시 일본군의 피해는 병졸 1명 사망, 2명 부상(병졸 1명, 순사 1명)이라고 기록돼 있다.
발신자 在間島 總領事代理領事 堺與三吉 / 수신자 外務大臣 子爵 內田康哉
復命書 : 大正九年七月三日 在間島局子街分館主任警察署 外務省警部 和久井吉之助 / 在局子街 分館主任 川南省一 殿
  • 중국 연길보위단 제1대대장 서육린(徐毓麟)이 1920년 6월 14일 상부에 보고한 보고서 "汪淸縣呈報韓亂事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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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 : 宇都宮太郞(朝鮮駐箚軍司令官) / 수신 :田中義一(陸軍大臣) / 사건 :江陽洞 전투 / 지명 :咸鏡北道 穩城 江陽洞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6) [江陽洞 전투의 진행 상황 朝特 제31호] 1920-06-06 : 공훈전자사료관
발신 : 宇都宮太郞(朝鮮駐箚軍司令官) / 수신 :田中義一(陸軍大臣) / 사건 :獨立軍의 穩城 襲擊, 江陽洞 戰鬪 / 지명 :咸鏡北道 穩城, 江陽洞
발신 : 宇都宮太郞(朝鮮駐箚軍司令官) / 수신 :原敬(내각총리대신) 외 / 사건 :東崗子지역의 독립군 증가 보고 / 인명 :安川二郞(少佐)
발신 : 宇都宮太郞(朝鮮駐箚軍司令官) / 수신 :原敬(내각총리대신) 외 / 사건 :軍務都督府에서 鳳梧洞전투 軍情報新報 號外 발행, 國民會에서 봉오동전투 선전물 제작, 일본군 150명 전사라고 함.
발신 : 宇都宮太郞(朝鮮駐箚軍司令官) / 수신 :田中義一(陸軍大臣) / 사건 :中村討伐隊와 安川追擊隊의 歸還 / 인명 :中村, 安川二郞(少佐) / 지명 :咸鏡北道 穩城
密第102号其1003 陸軍大臣宛朝鮮軍司令官よりの電報 大正9年6月 23日 : jacar
수신 :宇都宮太郞(朝鮮駐箚軍司令官)사건 :鳳梧洞 부근 독립단의 정식군대 體式 제정, 鳳梧洞 전투인명 :지명 :豆滿江, 鳳梧洞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6031086700、大正8年乃至同10年共7冊其1 朝鮮騒擾事件関書類(密受号其他) 陸軍省(防衛省防衛研究所)」
不逞鮮人団取締に関する件 大正9年6月16日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6031177400、大正8年乃至同10年共7冊其6 朝鮮騒擾事件関係書類(密受第102号情報共3内其3) 陸軍省(防衛省防衛研究所)」
密第102号其1066 1.仮政府の虚報発表に関する件 2.上海在留朝鮮人に対する注意書の件 大正9年8月6日
堺與三吉(總領事代理) / 內田康哉(外務大臣)
咸鏡北道 穩城군|汪淸縣 空洞山|高麗嶺南溝|草帽項子|嘎呀河 川南省一(局子街分館主任)|張世銓(延吉道尹)|孟(團長)|崔明祿|安川(少佐)|丁(琿春工兵營長)|吳(琿春步兵營長)|熊(琿春縣知事) 日本군대 越境문제에 대한 훈령|崔明祿 가택搜査|朝鮮人2명 총살 4명부상 45명 逮捕|道尹과 교섭 朝鮮人決死隊|부녀의 사상
堺與三吉(總領事代理) / 內田康哉(外務大臣)
鳳梧洞 金貞(國民會第二北地方會長)|黃河白(조선전사자)|朱澤烈(조선전사자) 國民會 日本군 추격사건에 대한 선전활동|적의 대대장 중대장 각 1명과 병졸 49명 즉사 조선군의 대첩
堺與三吉(總領事代理) / 內田康哉(外務大臣)
局子街|鳳梧洞 姜九禹(國民會제2中部會長) 局子街分館|大韓國民會 國民會의 통첩문 살포|鳳梧洞 승리 선전|日中合同搜査|支會 內 민가에 통지하여 輕便 군량준비 국민의무금
발신자 堺與三吉(總領事代理) / 수신자 內田康哉(外務大臣) / 발신일 1920년 06월 15일 / 수신일 1920년 06월 16일
일본군 전사자 150명이라고 선전
鳳梧洞 不逞鮮人團이 越江진격대에 대승리했다고 선전|警團隊와 看護隊 派遣 獨立전쟁제1회전|獨立의군
발신자 堺與三吉(總領事代理) / 수신자 內田康哉(外務大臣) / 발신일 1920년 06월 16일 / 수신일 1920년 06월 17일
鳳梧洞 교전 시 총탄에 맞은 촌민 사체 사진촬영,日本군의 학살로 선전,日本군이 국제공법 무시하고 支那영토 侵入
발신자 堺與三吉(總領事代理) / 수신자 內田康哉(外務大臣) / 발신일 1920년 07월 05일 / 수신일 1920년 07월 06일
不逞鮮人 수색,日本군 越江 추격 시 양민 사망자 男女小兒 17명,부상자4명,不逞鮮人 侵入으로 가옥 피해
和久井光之助(警部)
양민사상자 조사,총계 24명,鳳梧洞의 사망자 16명,부상자 2명, 警部(和久井光之助)는 각지에서 조선민 집합시키고 日本군대가 不逞鮮人 추격 상 불가피했음을 설명,피해자 유족의 항의,중국군경이 日本경찰 감시

논란

홍범도가 벌였다는 봉오동·청산리전투는 알고보면 대승·대첩이 아니라 잘해야 무승부였다. 사상적 동지였던 이동휘의 감언이설에 속아 자유시로 이동해서는 동료 독립군을 몰살하는 편에 섰던 사람이 홍범도다. 레닌으로부터 소비에트 적군 편입을 거부하는 한국 독립군을 청소해줘 고맙다고 격려금과 권총까지 선물받고, 소련공산당에 입당하여 당원이 된 사람이다. 홍범도가 과연 대한민국 건국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기에 문재인 대통령은 그를 “최고의 예우로 보답”하려는 것이며, 1등급 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려는 것일까?
항일 의병장 유인석, “상놈 주제에 양반에게 대든” 죄목으로 의병 선봉장 김백선의 목을 베다.
항일무장투쟁의 영웅 김좌진은 독립 군자금 마련 위해 무장 강도 행각 벌여.
독립 군자금 강제 징수하다 연해주 한인 교포들에게 맞아죽은 독립군 대장 최영호.
자유시에서는 소련 적군과 손잡은 한인 무장부대가 동료 대원 수백 명을 사살·체포.
홍범도, 자유시 참변 당시 가해자 편에 서서 한인 독립군 몰살 후 레닌에게 군복·권총 선물받아

참고 자료

1920년 6월 중국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 봉오동에서 독립군이 일본군을 참패시킨 전투.
봉오동부근전투상보(鳳梧洞附近戰鬪詳報) 한국역사용어 시소러스 - 국사편찬위
1920년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에서 우리 독립군에게 참패한 일본군 추격대가 패전경위에 대해 그들의 상부에 보고한 문서.
독립전쟁 日 자료 분석… 이해 높여
“조명받지 못했던 역사, 국군의 역사로 편입 계기”

함께 보기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