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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在間島 總領事代理領事 堺與三吉 / 수신자 外務大臣 子爵 內田康哉 / 발신일 1920년 07월 21일 / 수신일 1920년 07월 29일
::발신자 在間島 總領事代理領事 堺與三吉 / 수신자 外務大臣 子爵 內田康哉 / 발신일 1920년 07월 21일 / 수신일 1920년 07월 29일
::復命書 : 大正九年七月三日 在間島局子街分館主任警察署 外務省警部 와쿠이 키치노수케(和久井吉之助) / 在局子街 分館主任 川南省一 殿
::復命書 : 大正九年七月三日 在間島局子街分館主任警察署 外務省警部 와쿠이 키치노수케(和久井吉之助) / 在局子街 分館主任 川南省一 殿
{{인용문|“봉오동에서  我軍의  死  병졸  壹名  부상  5명  7명 혹은  十數名이라고  한다”}}


===국내 신문에 보도된 쌍방 피해 규모===
===국내 신문에 보도된 쌍방 피해 규모===

2021년 8월 27일 (금) 07:43 판

1922년 1월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한 당시에 찍은 봉오동 전투의 두 주역 홍범도(洪範圖)와 최진동(崔振東)의 사진. '홍범도 일기'에 따르면 홍범도 장군은 소련 최고지도자 레닌을 접견하고 권총 1자루와 금화 100루블, 레닌이 친필 서명한 '조선군 대장' 증명서 등을 선물 받았다.[1][2][3]
함경북도의 청진 인근 나남(羅南)[4]에 있었던 19사단[5] 사령부. 봉오동 전투에 참여한 야스카와 추격대(安川追擊隊) 등은 그 예하에 속했다. 당시 사단장은 高島友武 中将:1918年(大正7年)7月24日 - 1921年(大正10年)7月20日

봉오동 전투(1920년 6월 6일 ~ 6월 7일)는 만주 봉오동에서 독립군 부대가 일본 정규군과 싸워 대패시킨 전투이다.

개요

삼둔자 전투에서의 패전 이후 일본군 제19사단은 간도 내의 독립군단 토벌에 나섰다.

이에 만주에 주둔 중이던 홍범도(洪範圖), 최진동(崔振東), 안무(安武)등이 이끄는 대한군북로독군부의 독립군 연합부대와 신민단 예하 이흥수, 한경세의 신민단 독립군 1개 중대가 연합하여 중국 지린성 화룡현 봉오동에서 일본군 제19사단과 전투를 벌였다.

결과

교전 당시 대한북로독군부 소속 독립군은 1천 3백여명이었고 일분군은 500여명이었다. 전투 결과 일본군은 전사 157명, 중상 200여명이 발생하였고, 독립군은 전사 4명, 중상 2명이 발생하였다.

일본군을 대패시킨 봉오동전투는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높였으며 병력보강과 군비확충에 활력을 주었다. 한편 조선총독부와 일본은 독립군의 병력을 새로이 평가하고 대토벌을 계획하게 되었다.

이후 일본군의 대대적인 탄압을 받게 된 북로독군부군은 청산리로 옮겨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연합하여 청산리 전투를 전개해 나갔다.

전투 쌍방 피해에 대한 당시의 기록

봉오동 전투에서의 쌍방 피해는 당시 일본측 기록과 임시정부측 기록이 판이하게 달라서 논란이 되고 있다. 관련된 여러 기록들을 미디어워치가 정리한 기사가 있어 참고가 된다.

일본군 전사자, 상세전투보고서 포함 다양한 일본 측 사료에 단 1명뿐...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만 52명, 60명, 120명, 150명, 157여명 등 매번 다르게 기록하며 ‘과장선전’
여러 기록들에 나오는 봉오동 전투 당시 쌍방의 인명 피해에 관한 기록들을 정리한 표.[6] 일본측은 간도국민회가 배포한 호외나 <지명서(指明書)>의 내용을 보고하면서 허위라고 하였다.[7][8][9][10]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내용도 간도국민회 문건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위 표에서 누락된 당시 국내 신문들에 보도된 전투 쌍방의 인명 피해이다.

국내 신문명 일자 일본군
전사
일본군
부상
독립군
전사
독립군
부상
기타

매일신보 봉오동전투 기사[11]

20/06/10

사상자 12

24

- -

동아일보 봉오동전투 기사

20/06/20

1

2

34

- -

조선일보 봉오동전투 기사

20/06/20

1

2

34

- -

매일신보 봉오동전투 기사

20/06/21

1

2

34

- -

독립군 측이 아군측 사망자 시신을 쌓아 놓고 일본군 시신인 것처럼 사진을 찍어
상해 임시정부에 보냈다고 함.

당시 일본군은 독립군과 달리 한 국가의 정규 군대이니만큼 말단부대로부터 중앙정부까지 일사불란한 지휘보고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죽은 사람을 살려낼 방법이 없는 이상 150명의 인원 손실이 발생했는데도 1명 전사로 허위 보고할 간 큰 지휘관은 없다고 봐야 한다. 허위보고를 한다고 해도 150명의 인원 손실을 보충할 방법이 없으니 이를 숨길 수 없고 금방 탄로날 수 밖에 없다. 조선군이 당시 전황을 육군성에 보고한 문건은 많이 남아 있지만 어디에도 150명이나 되는 대규모 전사자가 발생했다고 볼만한 것은 없고, 일관되게 전사자는 병졸 1명이다. 말단부대 지휘관이 전사자 수를 150명이나 줄여 허위 보고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엄중한 처벌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당시 일본군 전사자가 1명이라고 보고한 야스카와 지로(安川二郞) 소좌가 허위보고로 처벌 받은 적도 없고, 부대원 대다수에 해당하는 150명 병력을 잃은 참패에 대한 문책도 당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같은 해 10월의 청산리 전투에서도 여전히 일본군 지휘관으로 활동했다.[12][13][14] 그가 만일 봉오동 전투에서 부하가 150명이나 전사했는데도 1명 전사로 허위보고를 했다면 인원보충도 받지 못했을 것이므로 4개월 뒤의 청산리 전투에는 유령들을 데리고 싸웠다는 말이 된다. 또한 일본군 병사들 입장에서 보아도 봉오동 전투에서 150명이나 전사했는데도 상관들의 허위보고로 전사자 예우도 받지 못하고, 유족들에게 아무 보상도 없었다면 그들이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울 마음이 조금이라도 생기겠는가? 이로 보아 야스카와 소좌가 봉오동 전투의 일본군 전사자가 1명이라고 한 보고는 정확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더구나 간도국민회가 호외 또는 지명서를 배포하며 일본군 전사자가 150명 또는 49명이라 허위선전한다고 여러 차례 보고까지 하고 있는데도[7][8][9][10] 이것이 실제 전사자 수가 될 수 있겠는가?

당시의 일본군과 같은 정규 군대에서는 전사자가 발생하면 장례문제, 예우문제, 유족에 대한 통지와 보상문제등이 수반되므로 함부로 전사자 수를 줄여 보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사자 수는 물론 명단까지 정확히 보고할 수 밖에 없다. 또한 150명이 전사했는데도 보고가 되지 않았다면 이들을 위한 보급품, 봉급 등이 계속 내려오게 되는데 이 문제는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누군가가 부정으로 대리 수령을 한다고 해도 언제까지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이미 전사한 사람들을 보고도 하지 않고 언제까지 살아있는 것처럼 위장할 수 있겠는가? 전투에서 상대편에 준 피해는 과장해서 허위보고도 할 수 있겠지만 금방 드러나는 자기 편 인원손실은 속여서 허위 보고한다는 것이 애초에 가능하지 않다. 물론 언론에는 피해를 줄여 허위발표를 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상부에서 결정해서 할 일이고, 말단 전투부대가 상부에 대규모 전사자 발생을 속이고 허위보고할 수는 없다.

반면에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기사는 간도국민회에서 배포한 호외나 <지명서(指明書)>에 근거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독립군의 정확한 전과를 기록한 것이라기 보다는 선전물에 가까워 보인다. 간도국민회나 독립군과 임시정부 측은 사기 진작을 위해 또는 원활한 후원금 모금을 위해 독립군의 전과를 부풀려 선전할 필요도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남긴 기록이 정확하다고 믿을만한 근거는 별로 없다. 간도국민회나 임시정부는 일본군에 대한 흑색 선전도 많이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당시는 그런 전략도 필요했겠지만, 후대의 연구자들은 확인없이 이런 것들을 모두 사실로 믿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아래는 위 표에 나오는 쌍방 피해가 기록된 원문 링크이다.

임시정부측 기록

  • 6월 10일 간도국민회 제1남부지방회의 "호외"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6) 間島 不逞鮮人團에 관한 參考書類 [高警 제34318호] : 國民會 南地方會 通告文 (朝鮮總督府 警務局, 1920-10-28) pp.35~37 :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운동사자료집 10 : 독립군전투사자료집 > 조선총독부 보존 문서 > 9. 국민회 남부지방회 통고문 pp.288~289 : 공훈전자사료관[15]
국민회 남지방회의 통고문 : 1920-06-10 일자 호외.[16]

9. 국민회 남부지방회 통고문
국민회 남지방회의 통고문
대한민국 2년 6월 10일 호외
대한 국민 제일 남지방회장 마용하
지회장 좌하
1. 독립전 개시의 건
본부 통신에 따르면 6월 7일 오전 8시경 아군 주둔지 봉오동(鳳梧洞)에서 독립전을 개시하여 적의 전대(前隊) 1백 50명이 전몰하고 아군의 전사자 38명, 전쟁은 계속중, 참전군은 북로독군부(최홍) 신민단 30명, 아군은 대 승리를 획득하였다.
1. 군사 통신의 건
본부 통신에 의하면 군사 통신은 전파를 쓰는 데 위법자는 군법에 의한다.
1. 간호대 파송 요구
본부 통신에 따르면 혈전을 개시하였다.
전지 부근의 남녀는 간호에 좇아도 불충분하므로 귀 지회에서는 경호대를 주로하는 간호대를 조직해 두어 지방부의 통지가 있는 대로 즉시 파송할 것.
1. 고진(膏眞) 경편의 군량 준비 건

본부 통신에 따르면 아군은 대승리를 획득하여 우세를 계속중으로서 고진 경편한 군량이 아니면 불가하므로 먼저 근변(近邊 ; 戰地) 제1, 2북 지방 제2중 지방은 고진 경편하니 양자(粮子)를 화속히 전지로 향하여 수송하였는데 귀 지회에서도 백미 가루 혹은 밀가루를 집집마다 5승씩 준비해 두고 지방부 통지에 의하여 수송한다.
일본 측은 간도국민회의 호외의 내용을 보고하며 허위선전이라 하고있다.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6) [都督府와 國民會의 鳳梧洞戰鬪 선전물 발행] 朝特 제45호 1920-06-15 : 공훈전자사료관
발신 : 宇都宮太郞(朝鮮駐箚軍司令官) / 수신 :田中義一(陸軍大臣) / 사건 :軍務都督府에서 鳳梧洞전투 軍情報新報 號外 발행, 國民會에서 봉오동전투 선전물 제작, 일본군 150명 전사라고 함.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18 > [不逞鮮人團의 승리선전] 8203(暗) 제166호
발신자 堺與三吉(總領事代理) / 수신자 內田康哉(外務大臣) / 발신일 1920년 06월 15일 / 수신일 1920년 06월 16일
일본군 전사자 150명이라고 선전
鳳梧洞 不逞鮮人團이 越江진격대에 대승리했다고 선전|警團隊와 看護隊 派遣 獨立전쟁제1회전|獨立의군
  • 6월 10일 간도국민회 중부지방회 통달문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19 > 國民會가 살포한 통첩문에 관한 건 : 機密 제152호
발신자 堺與三吉(總領事代理) / 수신자 內田康哉(外務大臣) / 발신일 1920년 06월 26일 / 수신일 1920년 07월 03일
p.3에 통첩문 전문의 일본어 번역이 실려 있음.
독립운동사자료집 10 : 독립군전투사자료집 > 조선총독부 보존 문서 > 10. 국민회 중부지방회 통달문 p.289 : 공훈전자사료관[15]
10. 국민회 중부지방회 통달문

제2 중부발
대한민국 2년 6월 10일
제2 중부회장 강구우(姜九禹)
지회장 전(前)
독립전쟁 제1차 대승리에 관한 건

수제의 건에 관하여 본부 제104호 공함을 접수한즉 지난 7일 봉오동에서 왜 육군 수백 명과 본 독군부와 교전하여 왜노 1백 20명을 격살하고 기관총 2문 및 소총 약간을 탈취하고 아 독립군에는 한 사람의 사상자도 없어 기쁨을 이기지 못함에 대하여서는 양해하여 주시며 일반에게는 비밀히 하고 알려드리오니 그리 아시옵소서.
  • 6월 13일 간도국민회 제2북부지방회의 <지명서(指明書)>
일본 측은 지명서 내용 전문을 일본어로 번역하여 보고하고, 그 내용이 허위라고 하고 있다. (이것이 전하는 원본임.)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18 國民會가 살포한 指明書에 관한 건 / 機密 제149호 1920-06-23
堺與三吉(總領事代理) / 內田康哉(外務大臣)
鳳梧洞 金貞(國民會第二北地方會長)|黃河白(조선전사자)|朱澤烈(조선전사자) 國民會 日本군 추격사건에 대한 선전활동|적의 대대장 중대장 각 1명과 병졸 49명 즉사 조선군의 대첩
독립운동사자료집 10 : 독립군전투사자료집 > 조선총독부 보존 문서 > 11. 제2북부지방회 지명서(指明書) pp.289~290 : 공훈전자사료관[15]
11. 제2북부지방회 지명서(指明書)

대한민국 2년 6월 13일
제2 북지방회장 김정(金貞)
제2 지회장 귀하
1. 아군 대첩에 관한 건
본월 10일 오후 10시에 발송한 지령을 본일 오전 1시 접수한 바 봉오동에서의 진쟁은 7일 오전 10시부터 개시되어 잠시 계속하였는데 적은 점차 궤주하였으며 그 전말은 다음과 같다.
(ㄱ) 적의 대대장, 중대장, 준사관 각 1명 병졸 49명 즉사함.
(ㄴ) 중경상자는 그 수를 알수 없음.
(ㄷ) 아군의 군의 황하백(黃河白), 군인 주택렬(朱澤烈) 양씨는 순국하고 그 밖에 경상 2명, 피해 부녀·아동 16명, 소 6두, 개 2두
(ㄹ) 전리품은 무기 20정, 기타 잡품 약간이 있음. 이상.
다만 군량, 기타의 물품이 급속히 필요하니 지급 취집하여 둘 것.

[주 : 원본은 1920년 6월 23일 북간도에 있는 국민회가 산포한 지명서를 계여삼길(堺輿三吉)이가 보고한 것인바 구 충독부 문서 중에 포함되어 있음]
我軍江陽洞進擊 독립신문 제85호 1920-06-22 2면
死者 百二十(正誤) 독립신문 제86호 1920-06-24 3면
  • 독립군 승첩 신한민보 1920년 07월 29일 2면 2단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독립군 승첩 신한민보 1920년 07월 29일 2면 2단 : 공훈전자사료관
北墾島에 在한 我獨立軍의 戰鬪情報 : 十一月十二日 軍務部發表

鳳梧洞附近의 戰
三. 彼我의 損害數

敵軍의 死者 百五十七名, 重傷者 二百餘名, 輕傷者 百餘名이오 我軍의 死者將校 一人, 兵員 三人, 重傷者 二人이며 敵의 遺棄物은 多有하나 我軍의 輜重預備馱馬가 無하고 且戰鬪를 目的한 計劃戰이 아니오 不虞戰이 됨으로 此를 獲取키 爲하야 力을 費할 餘地가 無함으로 步兵銃若干梃만 收取하다.
三. 我獨立軍의 戰鬪
元年年末부터 北墾島에 駐屯한 我獨立軍이 敵兵으로 더부러 屢次 交戰이 間有하던바 六月七日에는 洪範圖 崔明錄 兩將軍이 七百의 義軍을 率하야 三屯子에셔 倭兵 一百五十七名을 擊殺하고 二百餘名을 重傷한 後 小춍 一百六十餘挺, 機關총 三門, 手춍 여러슬 獲得하다
秋七月에 聯隊長 洪範圖, 金佐鎭, 崔振東이 部下兵을 率하고 鳳梧洞에셔 倭兵 百五十七名을 殲滅하다
冬十月에 琿春事件으로 敵이 多衆의 軍隊를 北墾島에 出하야 靑山里附近으로 來하는지라 洪範圖, 金佐鎭, 崔振東 三將軍이 邀戰하야 倭兵 六百餘名을 射殺하다
최명록(崔明錄)과 최진동(崔振東)은 동일인이나 서로 다른 사람으로 안 듯하다.

중국측 기록

18) 延吉道尹公署外交科, 「汪淸縣呈報韓亂等第2號」 第40號卷, 延邊檔案館 소장; 김춘선,. 2016[19]: 479쪽에서 재인용. “1920년 6월 13일 延吉保衛 제1대 대장 徐毓麟이 延吉道尹 陶彬에게 올린 보고”(延吉欓案館 소장 문서, 독립기념관 소장 사본)

  • 중국 연길보위단 제1대대장 서육린(徐毓麟)이 1920년 6월 14일 상부에 보고한 보고서 "汪淸縣呈報韓亂事件"[20][21][22]
독립군 1명 전사 1명 부상, 일본군 병사 49명과 장교 3명 사망. 시체는 그날로 모두 모아 수레에 실어 가져갔다. 독립군은 보총 14자루 노획.
汪清縣呈報韓亂 : 呈報 - 向上級報告, 상신(上申), 보고서. 신고서.
大正九年六月十四日在間島日本總領事代理領事堺․延吉道尹張世銓殿 외
不逞鮮人取締問題ト關海淸ノ延吉道尹轉任ニ關スル件 1920.06.12
不逞鮮人取締ト延吉道尹更任ニ關スル件 1920.06.18
新任延吉道尹陶彬ノ京城滯在ニ關スル件 1920.07.03

일본측 기록

鳳梧洞戰鬪詳報(봉오동 전투 상보) {생산자 안천(安川), 생산년도 1920)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을 통틀어 가장 상세한 사료가 야스카와 지로(安川二郞) 소좌의 추격대(이른바 ‘안천추격대’)가 작성한 『봉오동부근전투상보(鳳梧洞附近戰鬪詳報)』다. 이 문건은 전투 중이던 6월 4~7일에 걸쳐 각 부문 지휘관들의 보고를 총지휘관이던 야스카와 소좌가 작성해 다시 상부에 보고한 62쪽짜리 보고서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봉오동 전투 당시 일본군의 피해는 병졸 1명 사망, 2명 부상(병졸 1명, 순사 1명)이라고 기록돼 있다.
  • 육군대신에게 보낸 조선군사령관의 전보 : 陸軍大臣(田中義一)宛 朝鮮軍司令官(宇都宮太郞) 電報
大正9年6月9日 電報 朝特35 : C06031201400 六月八日 午後六時十分発 午前一時五十八分着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7) [穩城方面의 戰況 報告의 건] 朝特 35 공훈전자사료관
일본군 병졸 1명 전사, 적 피해는 명확하지 않으나 유기사체 24구.
大正9年6月9日 電報 朝特33 : C06031201500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大正9年6月9日 電報 朝特34 : C06031201300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18 > 越境추격대의 狀況에 관해 다음과 같이 咸鏡北道知事로부터 電報 : 7940(暗) 제155호
발신자 堺與三吉(總領事代理) / 수신자 內田康哉(外務大臣) / 발신일 1920년 06월 09일 / 수신일 1920년 06월 10일
일본군 피해 병졸 1명 전사, 1명 부상, 독립군 측 유기 사체 24구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18 > [不逞鮮人團과 교전] 7968(暗) 제156호
발신자 堺與三吉(總領事代理) / 수신자 內田康哉(外務大臣) / 발신일 1920년 06월 10일 / 수신일 1920년 06월 11일
일본군 피해 전사 병졸 1명, 독립군 측 전사 20여명
  • 川南省一(局子街分館主任)이 堺與三吉(總領事代理)에게 올린 보고문 : 1920년 6월 10일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18 不逞鮮人 추격을 위해 越江 支那령에 진입한 아군대의 行動에 관한 건 / 機密 제131호
堺與三吉(總領事代理) / 內田康哉(外務大臣) / 발신일 1920년 06월 14일 / 수신일 1920년 06월 23일
咸鏡北道 穩城군|汪淸縣 空洞山|高麗嶺南溝|草帽項子|嘎呀河 川南省一(局子街分館主任)|張世銓(延吉道尹)|孟(團長)|崔明祿|安川(少佐)|丁(琿春工兵營長)|吳(琿春步兵營長)|熊(琿春縣知事) 日本군대 越境문제에 대한 훈령|崔明祿 가택搜査|朝鮮人2명 총살 4명부상 45명 逮捕|道尹과 교섭 朝鮮人決死隊|부녀의 사상
  • 와쿠이 키치노수케(和久井吉之助)가 川南省一(局子街分館主任)에게 올린 복명서(復命書) : 大正九年七月三日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2권 中國東北地域篇 Ⅳ > 中國東北地域民族運動 Ⅳ > 越境追擊地方面ノ踏査復命書進達ノ件 (원문 텍스트)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19 越境 追擊隊 방면의 搜査復命書의 건 機密 제185호 (원문 이미지)
발신자 在間島 總領事代理領事 堺與三吉 / 수신자 外務大臣 子爵 內田康哉 / 발신일 1920년 07월 21일 / 수신일 1920년 07월 29일
復命書 : 大正九年七月三日 在間島局子街分館主任警察署 外務省警部 와쿠이 키치노수케(和久井吉之助) / 在局子街 分館主任 川南省一 殿
“봉오동에서 我軍의 死 병졸 壹名 부상 5명 7명 혹은 十數名이라고 한다”

국내 신문에 보도된 쌍방 피해 규모

봉오동 전투에 관한 국내 신문 최초 보도인 6월 10일자 매일신보 기사에는 일본군 사상자가 12명이고, 독립군의 피해는 불명이나 버리고 간 유기시체가 24구라고 하였다.[11]

6월 20일자 동아일보조선일보, 21일자 매일신보 등에 보도된 쌍방 피해는 일본측 기록과 거의 유사하다.

일본측 : 전사 보병 이등졸 호리이 시게쿠니(堀井茂邦) (흉부 관통 총상)
부상 일등졸 카지우라 긴지로(梶浦銀次郞) 외 순사 1명

조선인 측 : 유기시체 34구, 부상자 다수, 포로 8명

조선인의 사체를 쌓아놓고 사진을 찍어 상해 가정부(上海 假政府)로 보내어 선전에 이용함.

기타 기록

1920-06-12 (양력) : 1920-04-26 (음력) 경신(庚申)년 신사(辛巳)월 신축(辛丑)일
[四月] 二十六日辛丑 陰. 午天, 據梧洞的報, 則日兵死者百餘名, 吾軍死者三人, 洞民死傷者十數名.
음력 4월 26일 신축일. 한낮 봉오동 소식에 의하면 일본군 사망자는 100여명이고, 우리 군의 사망자는 3인, 동민 사상자는 십수명이라 한다.
김정규(金鼎奎, 1881~1953) : 독립유공자 애국장(1993)
時報는 상해에서 간행되던 중국어 신문
1920년 6월 4일 봉오동 전투

전투 관련 국내 신문 보도와 일본측 추가 기록

국내 신문의 전투 경과 보도

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추기(追記) 매일신보[每日申報] 1920년 06월 21일 3면 7단
排日軍(배일군)의組織內容(조직내용) 군긔는최신식규률은엄정 동아일보 1920-06-20 3면


일본 측의 전투 관련 추가 기록

발신 : 宇都宮太郞(朝鮮駐箚軍司令官) / 수신 :田中義一(陸軍大臣) / 사건 :江陽洞 전투 / 지명 :咸鏡北道 穩城 江陽洞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6) [江陽洞 전투의 진행 상황 朝特 제31호] 1920-06-06 : 공훈전자사료관
발신 : 宇都宮太郞(朝鮮駐箚軍司令官) / 수신 :田中義一(陸軍大臣) / 사건 :獨立軍의 穩城 襲擊, 江陽洞 戰鬪 / 지명 :咸鏡北道 穩城, 江陽洞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6) [南陽守備隊 강화 목적으로 일본군 增派 朝特 제32호] 1920-06-06 : 공훈전자사료관
발신 : 宇都宮太郞(朝鮮駐箚軍司令官) / 수신 :田中義一(陸軍大臣) / 사건 :南洋守備隊 강화 목적으로 일본군 增派 / 지명 : 咸鏡北道 羅南, 會寧, 鍾城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6) [間島지방의 독립군과 일본군 동향]
齋藤實(朝鮮總督) / 田中義一(陸軍大臣) / 사건:사건 安川二郞 지휘 일본군의 高力嶺 등지 수색, 중국군의 馬牌 등지로 이동, 大韓軍政府 등 독립군단체의 일본군 공격계획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6) [第十九師團長의 中村討伐隊 北蒼坪 집결 명령] 朝特 제37호 1920-06-10
발신 : 宇都宮太郞(朝鮮駐箚軍司令官) / 수신 :田中義一(陸軍大臣) / 사건 : 第十九師團長의 中村討伐隊 北蒼坪 집결 명령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6) [安川二郞 추격대 등의 동향] 朝特 제38호 1920-06-10
발신 : 宇都宮太郞(朝鮮駐箚軍司令官) / 수신 :田中義一(陸軍大臣) / 사건 : 安川二郞 추격대 등의 동향
발신 : 宇都宮太郞(朝鮮駐箚軍司令官) / 수신 :原敬(내각총리대신) 외 / 사건 : 間島軍政署의 動向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6) [安川二郞의 독립군 동향 보고] 朝特 제44호 1920-06-14 : 공훈전자사료관
密第102号其981 大臣宛朝鮮軍司令官よりの電報 朝特 제44호: C06031174400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발신 : 宇都宮太郞(朝鮮駐箚軍司令官) / 수신 :原敬(내각총리대신) 외 / 사건 :東崗子지역의 독립군 증가 보고 / 인명 :安川二郞(少佐)
발신 : 宇都宮太郞(朝鮮駐箚軍司令官) / 수신 :田中義一(陸軍大臣) / 사건 :軍務都督府에서 鳳梧洞전투 軍情報新報 號外 발행, 國民會에서 봉오동전투 선전물 제작, 일본군 150명 전사라고 함.
발신 : 宇都宮太郞(朝鮮駐箚軍司令官) / 수신 :田中義一(陸軍大臣) / 사건 :中村討伐隊와 安川追擊隊의 歸還 / 인명 :中村, 安川二郞(少佐) / 지명 :咸鏡北道 穩城
密第102号其1003 陸軍大臣宛朝鮮軍司令官よりの電報 大正9年6月 23日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수신 :宇都宮太郞(朝鮮駐箚軍司令官)사건 :鳳梧洞 부근 독립단의 정식군대 體式 제정, 鳳梧洞 전투인명 :지명 :豆滿江, 鳳梧洞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6031086700、大正8年乃至同10年共7冊其1 朝鮮騒擾事件関書類(密受号其他) 陸軍省(防衛省防衛研究所)」
不逞鮮人団取締に関する件 大正9年6月16日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外務大臣男爵 内田康哉
발신자 堺與三吉(總領事代理) / 수신자 內田康哉(外務大臣) / 발신일 1920년 06월 09일 / 수신일 1920년 06월 09일
堺與三吉(總領事代理) / 內田康哉(外務大臣)
咸鏡北道 穩城군|汪淸縣 空洞山|高麗嶺南溝|草帽項子|嘎呀河 川南省一(局子街分館主任)|張世銓(延吉道尹)|孟(團長)|崔明祿|安川(少佐)|丁(琿春工兵營長)|吳(琿春步兵營長)|熊(琿春縣知事) 日本군대 越境문제에 대한 훈령|崔明祿 가택搜査|朝鮮人2명 총살 4명부상 45명 逮捕|道尹과 교섭 朝鮮人決死隊|부녀의 사상
堺與三吉(總領事代理) / 內田康哉(外務大臣)
鳳梧洞 金貞(國民會第二北地方會長)|黃河白(조선전사자)|朱澤烈(조선전사자) 國民會 日本군 추격사건에 대한 선전활동|적의 대대장 중대장 각 1명과 병졸 49명 즉사 조선군의 대첩
堺與三吉(總領事代理) / 內田康哉(外務大臣)
局子街|鳳梧洞 姜九禹(國民會제2中部會長) 局子街分館|大韓國民會 國民會의 통첩문 살포|鳳梧洞 승리 선전|日中合同搜査|支會 內 민가에 통지하여 輕便 군량준비 국민의무금
발신자 堺與三吉(總領事代理) / 수신자 內田康哉(外務大臣) / 발신일 1920년 06월 15일 / 수신일 1920년 06월 16일
일본군 전사자 150명이라고 선전
鳳梧洞 不逞鮮人團이 越江진격대에 대승리했다고 선전|警團隊와 看護隊 派遣 獨立전쟁제1회전|獨立의군
발신자 堺與三吉(總領事代理) / 수신자 內田康哉(外務大臣) / 발신일 1920년 06월 16일 / 수신일 1920년 06월 17일
鳳梧洞 교전 시 총탄에 맞은 촌민 사체 사진촬영,日本군의 학살로 선전,日本군이 국제공법 무시하고 支那영토 侵入
발신자 堺與三吉(總領事代理) / 수신자 內田康哉(外務大臣) / 발신일 1920년 07월 05일 / 수신일 1920년 07월 06일
不逞鮮人 수색,日本군 越江 추격 시 양민 사망자 男女小兒 17명,부상자4명,不逞鮮人 侵入으로 가옥 피해
和久井光之助(警部)
양민사상자 조사,총계 24명,鳳梧洞의 사망자 16명,부상자 2명, 警部(和久井光之助)는 각지에서 조선민 집합시키고 日本군대가 不逞鮮人 추격 상 불가피했음을 설명,피해자 유족의 항의,중국군경이 日本경찰 감시
상해 임시정부가 봉오동 전투 후 독립군이 회령(會寧 )으로 가는 경편철도(輕便鐵道) 40여리를 점령하여 일본군의 교통이 단절되었다고 허위 주장한다고 보고.
발신자 第十九師団長子爵 高島友武 / 수신자 육군병기본창 / 발신일 1920년 08월 17일

논란

홍범도가 벌였다는 봉오동·청산리전투는 알고보면 대승·대첩이 아니라 잘해야 무승부였다. 사상적 동지였던 이동휘의 감언이설에 속아 자유시로 이동해서는 동료 독립군을 몰살하는 편에 섰던 사람이 홍범도다. 레닌으로부터 소비에트 적군 편입을 거부하는 한국 독립군을 청소해줘 고맙다고 격려금과 권총까지 선물받고, 소련공산당에 입당하여 당원이 된 사람이다. 홍범도가 과연 대한민국 건국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기에 문재인 대통령은 그를 “최고의 예우로 보답”하려는 것이며, 1등급 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려는 것일까?
항일 의병장 유인석, “상놈 주제에 양반에게 대든” 죄목으로 의병 선봉장 김백선의 목을 베다.
항일무장투쟁의 영웅 김좌진은 독립 군자금 마련 위해 무장 강도 행각 벌여.
독립 군자금 강제 징수하다 연해주 한인 교포들에게 맞아죽은 독립군 대장 최영호.
자유시에서는 소련 적군과 손잡은 한인 무장부대가 동료 대원 수백 명을 사살·체포.
홍범도, 자유시 참변 당시 가해자 편에 서서 한인 독립군 몰살 후 레닌에게 군복·권총 선물받아

참고 자료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2. 봉오동승첩과 청산리대첩 > 1) 봉오동승첩 우리역사넷
朴昌昱 著 ; 金春善 譯 국회도서관
독립전쟁 日 자료 분석… 이해 높여
“조명받지 못했던 역사, 국군의 역사로 편입 계기”
“일본군 1명 사망” 날조된 역사 ‘봉오동 전투’ [밀리터리 인사이드] 서울신문 2021-06-06
양민의 피로 쓴 日 전투보고서…진실은 / 일본이 만든 ‘봉오동부근전투상보’/ 독립군에 포위됐지만 ‘전사자 1명’/ 양민 학살해 ‘독립군 사살’로 둔갑 / 일제 역사왜곡에 휘둘리지 말아야

함께 보기

각주

  1. '봉오동 대첩의 영웅' 최진동 장군 사진 찾았다 연합뉴스 2019-12-30
  2. 봉오동 전투의 주역…최진동 장군 사진 '최초 공개' SBS 뉴스 2019.12.30
  3. '봉오동 대첩의 영웅' 최진동 장군 사진 찾았다 SBS 뉴스 2019.12.30
  4. 함경북도 청진시 라남구역
  5. 第19師団 (日本軍) 일본어 wikipedia
  6. ‘봉오동 전투’가 승전? 일본군 공식 사망자는 단 1명에 불과 미디어워치 2019.08.16
  7. 7.0 7.1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6) [都督府와 國民會의 鳳梧洞戰鬪 선전물 발행] 朝特 제45호 1920-06-15 : 공훈전자사료관
  8. 8.0 8.1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18 > [不逞鮮人團의 승리선전] 8203(暗) 제166호
  9. 9.0 9.1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18 國民會가 살포한 指明書에 관한 건 / 機密 제149호 1920-06-23
  10. 10.0 10.1 密第102号其1066 1.仮政府の虚報発表に関する件 2.上海在留朝鮮人に対する注意書の件 : C06031177400 大正9年8月6日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1. 11.0 11.1 국경 대안에 무장단이 襲來 매일신보[每日申報] 1920년 06월 10일 3면 1단
  12. 일제의한국침략사료총서 間島出兵史 第二章 作戰行動, 第五節 第十九師團의 剿討行動 朝鮮軍司令部 : p.23 청산리전투 安川 少佐
  13. 신편 한국사 근대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2. 봉오동승첩과 청산리대첩 2) 청산리대첩 (4) 청산리대첩 가. 백운평전투 우리역사넷
  14. 청산리 대첩(靑山里 大捷)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5. 15.0 15.1 15.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第1輯 - 14輯, (서울 :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84)
  16.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6) 間島 不逞鮮人團에 관한 參考書類 [高警 제34318호] : 國民會 南地方會 通告文 (朝鮮總督府 警務局, 1920-10-28) pp.35~37 : 공훈전자사료관
  17. 獨立軍勝捷 독립신문 제85호 1920-06-22
  18. 北墾島에 在한 我獨立軍의 戰鬪情報 독립신문 제88호 1920-12-25
  19. 김춘선. 2016. 『북간도 한인사회의 형성과 민족운동』. 서울: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 원.
  20. 연길도윤 공서(延吉道尹 公署 ) 외교과, <汪淸縣呈報韓亂 等 제20호>, 民國 9년 ~ 10년 제40호권, 연변자치주 당안관 장서
  21.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연구 : 庚申年反討伐戰을 재론함 / 朴昌昱 한국사연구. 111 (2000. 12), (韓國史硏究會, 2000.12.30) pp.115~117
  22. 박창욱(朴昌昱) 著 ; 김춘선(金春善) 譯, 東北 지역 한민족독립운동사 관련 사료 정황.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18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2. 8) pp.293~2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