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문제는 어느 군대에나 따라 다닌 것으로 북한 인민군도 예외가 될 수 없다.

해방 전 만주 빨치산 시기

김일성 등 해방 후 북한 인민군의 최고 지휘부 중 다수는 만주 동북항일연군 빨치산 출신들이다. 만주 빨치산들의 여자 문제는 어떠했던가?

동북항일연군은 정규군이 아닌 게릴라 부대로 만주 각지에 소부대들이 산재해 있었다. 이들은 부대 유지에 필요한 보급품과 인력을 자체 조달해야 했기 때문에 양민에 대한 약탈, 납치를 무수히 자행했다. 그러다 가끔씩은 일본군이나 만주군과 교전을 하기도 했다.

각지의 여러 부대에는 여자 대원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입대한 사람들도 없지는 않았지만 대부분 납치되어 왔다가 어쩔 수 없이 그들과 함께 거주하며 사상적으로 동화되어가서 나중에는 열성 대원이 되기도 한 사람들이다. 여자들을 납치해온 동기는 부대의 취사, 재봉, 빨래 등 허드렛 일을 할 사람이 필요해서이기도 하지만 주요한 동기 중 하나로 성문제 해소도 당연히 포함되었을 것이다. 남녀가 같은 부대에서 장기간 같이 숙식하다 보면 서로 눈이 맞는 경우도 생기고, 상호간에 여자를 두고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상관이 부하의 여자를 빼앗기도 했다.

이 시절 김일성에게도 여러 명의 여자가 거쳐갔고, 김정숙도 처음에는 다른 부대원의 아내였다.

이들이 일본군에 쫓겨 1940년 말 소련으로 도주하여 소련군 88여단에 복무할 때는 지휘관들은 대부분 여자 대원들과 결혼해 있었다.

빨치산들의 여성 납치 기사

시인 파인(巴人) 김동환(金東煥, 1901 ~ 1958)이 간행하던 잡지 《삼천리(三千里)》에는 동북항일연군 빨치산들이 납치해간 여자들에 대한 기사가 나온다.

  1. 국경의 비적수괴 김일성 회견기 (國境의 匪賊首魁 金日成 會見記) 《삼천리(三千里) 제9권 제5호》 (1937년 10월 01일)
  2. 귀순한 여당원과 김일성 (歸順한 女黨員과 金日成), 그의 운명(運命)은 장차 엇더케 될가 《삼천리(三千里) 제10권 제11호》 (1938년 11월 01일)
  3. 김일성 비중에 무장 여군(金日成 匪中에 武裝 女群), 납치(拉致)된 二十五名 무사(無事)히 돌아오다 《삼천리(三千里) 제12권 제4호》 (1940년 04월 01일)


소련 군정 시기 소련군의 만행

2차대전 당시 소련군은 독일과의 전쟁에서 엄청난 수의 병력을 잃었다. 유럽전선의 대독전 종료 후 극동에서 대일본전을 벌일 때 1945년 8월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 병사들의 교육 수준은 말할 수 없이 낮았고, 죄수 출신도 많았다고 한다. 이들이 북한에서 온갖 행패를 부렸을 것은 불문가지이다.

해방된 지 이틀 후인 17일 평양에서는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고 중학교 3년 이상 남학생들은 학생 治安(치안)대원이 되어 평양의 주요거리들에 배치되었는데 22일부터 소련군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USA 표시가 분명한 미국제 지프와 트럭을 탄 소련 군인들이 평양거리에 밀려들어오자 거리 곳곳에서는 ‘다와이(약탈)’ 소동이 벌어지게 되었다. 어느 날 전차길이 있는 평양의 번화가를 걷고 있었는데 지프를 타고 접근해 온 소련군 장교가 내 손목시계를 가리키며 ‘다와이’를 연발하기에 그 시계를 벗어 줄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 입학기념으로 아버지가 사준 ‘스위스 12석’ 손목시계였다.

자기들이 해방시켜 주었다는 식민지의 중학생 손목시계를 ‘다와이’하는 이 장교를 보면서 ‘공산주의는 사람 못살 주의로구나’라고 직감하게 되었다.

손목시계를 ‘다와이’ 당한 지 이틀 후, 나는 평양에서 가장 번화한 조선은행 앞 네거리에서 대낮에 소련군 병사들이 집단 강간을 하는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개가 交尾(교미)를 해도 구경꾼이 몰려드는 데, 번잡한 네거리에서 한 여자를 뉘어놓고 5~6명의 병사가 집단 강간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소련 군인 하나가 다발총을 하늘에 대고 드르륵 드르륵… 쏘면서 고함을 치는 소리가 ‘카레스케 노- 야폰스키’(조선 사람 아니다. 일본 사람이다) 참으로 짐승보다도 못한 야만이었다.

소련 군인들의 집단 强姦(강간)소동은 일본인만이 아니었다. 밤에는 조선인 거주지역에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때문에 큰 거리에서 주택가로 들어오는 골목길 입구에는 나무판자와 철조망으로 바리케이트를 치고 작은 출입구를 만들어 놓고 보초를 서게 되었는가 하면 한옥집 조선인 거주지역들에서는 소련 군인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부엌에 들어가 가마솥 뚜껑을 들고 나와 두들겼다.

그러면 집집마다 가마솥 뚜껑을 부지깽이로 두드리게 되고 여자들은 숨고 남자들은 골목 밖으로 나와서 침입해온 소련 군인들을 다른 곳으로 쫓아내었다. 이래서 해방이 된 평양에서는 편하게 잠잘 날이 드물었다.

내가 다니던 평양사범학교의 경우는 수업시간에도 소련 군인들의 ‘다와이’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우리 학교는 평양 비행장 옆에 있었던 탓으로 소련군이 점유한 까닭에 평양역 부근 일본인 소학교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2층인 이 학교의 아래층에는 만주에서 철수해 온 일본인 피난민들이 있었고 우리는 2층에서 공부를 했다.

소련 군인들은 우리가 수업중인 대낮에도 이 피난민들을 습격했다. ‘마담 다와이‘(여자를 내놔라)를 연발하며 소련 군인들이 들이닥치면 ‘○○옥상(부인) 야라렛다요(당했다)’ 등 비명소리와 함께 이리저리 도망치는 피난민들로 온 학교 건물이 소란스러웠다. 이래서 일본인 피난민 속의 젊은 여자들은 얼굴에 검댕이 칠을 하고 누더기 옷을 입고 있었다.

소련군인들의 행패는 일본 피난민만이 아니었다. 우리 학교 음악실에 있던 온갖 악기들을 한밤중에 몽땅 털어간 사건도 있었다. 이러니 ‘우리를 해방시켜주신 위대한 소비에트를 향하여 배우자’는 소련 앞잡이 공산주의자들의 말이 학생들의 귀에 담아질 수가 없었다.

6.25 전쟁 시기

1945년 8월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은 김일성 등 소련군 88여단의 조선인들을 데려와 앞잡이로 내세워 북한의 최고 권력을 쥐어준다. 이들이 북한군의 최고 지휘관이 되어 6.25 남침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 중 북한군의 성문제는 어떠했는가?

여정(呂政, 1925~ ?)은 본명이 강수봉이며[1], 일제의 징병을 피해 1945년 5월 만주로 도피했다가 중국 공산당원이 되어 국공내전에 참전했다. 1950년 북한으로 돌아와 6.25에 참전하고, 훈장도 받으며 인민군 소장까지 승진했다. 1959년 연안파 숙청 때 투옥되어 10년간 징역을 살고 만기 출소하여 중국으로 탈출하였다. 1990년 동아일보에 『비화(秘話) 김일성(金日成)과 북한(北韓) : 전(前) 북한군(北韓軍) 사단(師團) 정치위원 여정 수기(呂政 手記)』를 연재하여 한국에 알려졌다.[2]


그의 동아일보 연재 수기 중 4회에 6.25 전쟁 중 인민군들의 성문제는 어떠했는지 폭로하고 있다. 탈북자들은 오늘날 인민군에서 여군들의 처지도 6.25 당시와 별반 다를 것없이 유사하다는 증언을 하고 있다.



만주 빨치산들이 북한이라는 국가 권력을 장악한 뒤로는 국가 군대인 인민군을 창설하고, 군수품 조달은 약탈 대신 국가가 몰수한 재산이나 세금, 국영기업, 국영농장 생산품 등으로, 인력 조달은 납치 대신 징집으로 하게 된다. 징집되어온 여군들은 빨치산 시절 납치되어온 여성 대원들과 유사한 역할을 하게 된다.

오늘날 북한 여군들의 사정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오늘날 북한의 여자 군인들은 인권 사각지대에 놓인 대표적인 계층으로, 상시적으로 성폭력이나 성희롱에에 시달리고, 그 중에는 진급이나 보다 좋은 보직을 위해 자발적으로 성상납을 하는 경우도 빈번하다고 한다. 전시가 아닌 평시에도 북한 여군들은 전시 위안부나 다름없는 역할까지 맡고 있다.

함께 보기

* (일본군) 위안부
* (한국과 미군의) 위안부
* 공창제 (일본군 위안부 이전까지)
* 위안부
* 위안부 (사죄와 배상 문제)
* 일본의 사죄
* 제국의위안부
* 제국의위안부 사건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