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만드는 행위 또는 산업은 조선(造船)으로

朝鮮
大朝鮮國(대조선국)
영어: Joseon
(1392년~1897년)

개요

조선은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아 한반도를 505년 간 다스렸던 왕조이다. 고려신진 사대부의 지지를 등에 업어 무관 이성계가 건국하였고, 고종이 선포한 대한제국으로 계승되었다.

역사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조선전기와 조선후기로 나뉜다.

조선전기

조선후기

국왕

조선/역대 국왕

경제

동시대 타 국가들에 비해 경제발전이 굉장히 지체되었으며 이는 서구 유럽 뿐만 아니라 주변의 중국, 일본과 비교해보아도 그러하다.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시기에 이런 문제가 두드러졌는데, 보급 능력이 떨어졌던 명나라 군대는 은화를 챙겨왔는데 아직도 소규모 물물거래 경제였던 조선사람들은 은화를 받질 않아, 명나라 군대가 조선 백성들을 약탈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그로부터 백년가량 지난 1678년 숙종때에 이르러 상평통보가 주조되었으며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1] 18세기 가까이 되어서야 겨우 물물경제를 탈피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금속화폐의 보급에도 불구하고 타국에 비해 상공업 발전은 매우 미약하였으며, 이에 대한 서술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저서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연암 박지원은 그의 저서 <열하일기>에서 벽돌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박제가는 저서 <북학의>에서 도로를 닦아 수레를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서술은 조선의 미약한 인프라스트럭쳐에 대한 증명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기초적인 사회간접자본의 부재로 상업과 공업 발달에도 악영향이 있었을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조선의 경제 발달이 이처럼 미약했던 것은 상공업을 천시하던 성리학적 사고방식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사유재산제나 그 외의 기술개발과 기업가 정신의 발흥이 불가능하도록 만드는 관존민비(官尊民卑) 정치 및 행정 시스템에도 원인이 있을 것이다.

역사적 미화

일본의 침략으로 멸망한 국가이기 때문에(물론 1897년부터 1910년까지는 대한제국이였다. 하지만 13년에 불과한 기간동안 조선이란 국호가 더 많이 쓰였다) 민족주의 진영과 좌익진영은 조선왕조를 미화하는데 많이 움직인다.

구한말 삼정의 문란과 세도정치 등 국력을 약화시킨 원인이 있음에도 마치 모든게 일본때문이고 조선왕조가 백성들을 선하게 다스리고 있었는데 일본이 와서 백성을 억압했다는건 1차원적이다.

조선의 멸망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