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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20일 (월) 21:34 판

Harry S. Truman
해리 S. 트루먼
Harry S. Truman
약력
직책 미국 제33대 대통령
(1945.4 ~ 1949.1)
←전임후임→

미국 제33대 대통령
(1949.1 ~ 1953.1)
←전임후임→

정당 민주당

개요

해리 트루먼은 미국의 제34대 부통령(1945년), 33번째 대통령(1945년 4월 12일~1953년)이었다. 이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부통령이 된 지 불과 82일 만에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항복을 받았고,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제국천황히로히토로부터 항복을 받았으며, 6.25전쟁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핵무기를 전쟁에서 사용하라고 명령한 국가 원수이다.

냉전

트루먼의 재임 기간에 냉전이 시작되었다.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은 이념 상 자본주의 체제에 적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자유주의 체제인 미국은 냉전에 대한 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재임 기간에 재무장관의 보좌관이자 IMF설립을 위한 브레턴 우즈 회담의 미국 대표였던 해리 덱스터 화이트(Harry Dexter White)마저도 소련의 간첩으로 밝혀졌을 정도로 서방 국가의 곳곳에 소련 간첩과 공산주의자들이 침투해있었다. 트루먼은 비록 민주당 소속이었지만 이러한 현실을 깨닫고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여 서유럽과 한국, 일본 등지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으려 노력했다.

한국과의 관계

1950년 6월 북한의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한국에 미군을 파견한 대통령이다. 그러나 전쟁 당시 중국 영토인 만주로의 진격을 주장한 맥아더 장군을 해임하고 확전을 자제하려는 의도를 보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는 클레멘트 애틀리의 영향이 매우 컸다.

원래 트루먼 대통령은 중공군 격퇴를 위한 핵무기 사용 등에 대해 꺼리지 않는 입장이었다. 6.25 전쟁에서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대한민국과 유엔군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던 1950년 11월 30일, 미국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기자회견장에서 유엔군 임무 수행을 위해서는 원자폭탄 사용도 배제하지 않는다[1]고도 말했다.

그런데 이때 영국 총리였던 클레멘트 애틀리가 미국으로 날아와 원자폭탄 사용 등으로 인해 발생할 확전을 막아야 된다며 트루먼 대통령을 적극 만류했고, 영국도 유엔군임을 내세워 영국 동의 없이 원자폭탄을 사용해서는 안된다[2]고도 이야기했는데 이 이야기에 설득당한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 원수를 해임하고 이하 유엔군에게 확전을 자제하라는 명령을 하달한 것이다.

애틀리가 이토록 6.25 전쟁의 확전을 막은 데에는 중국과 인접한 자국 영토 홍콩을 잃기 싫었고, 확전으로 미국이 동아시아에 전력을 쏟으면 서유럽이 소련의 위협에 노출된다는 점 등을 고려한 것이었다. 하지만 70여년이 흐린 지금 상황에서 보면 애틀리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홍콩은 결국 중국에 반환되었고, 서유럽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피폐해지긴 했어도 경제선진국으로서 자국의 방어를 위한 능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던 것을 고려하면 애틀리의 확전자제요청은 앞날을 내다보지 못한 정말 근시안적 판단이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