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조선5도행정국(北朝鮮五道行政局)은 1945년 11월 19일 북한 지역 5도 행정의 통일적 지도관리를 위해 구성되었다. 10개부서 국장은 대체로 공산당원을 중심으로 선정하였으나, 위원장은 아직 김일성(金日成)에게 맡길 형편이 되지 않아 조만식(曺晩植)에게 맡아줄 것을 요청했지만 거절 당하고 공석으로 있었다. 중앙정부 형태를 흉내낸 조직이다.

이후 1945년 말 ~ 1946년 초 신탁통치 정국을 거치면서 1946년 1월 5일 조만식을 고려호텔에 연금하고, 2월 8일 김일성이 전면에 나선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로 된다.

출범의 과정

北朝鮮五道行政局의 設置
 1945년 10월 8일부터 11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북조선5도인민위원회 연합회의에서 북한지역을 독자적인 행정 및 경제단위로 분리하여 중앙집권적인 관리기관을 설립할 필요성을 강조했던 북한주둔 소련군사령관 치스차코프(Ivan H. Chistiakov) 장군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바로 작업을 시작했다. 치스차코프와 제25군 군사회의 위원 레베데프(Nikolai G. Lebedev) 장군은 10월 13일에 연해주군관구 사령관 메레츠코프(Kirill A. Meretskov) 원수에게 보낸 회의보고서에서 “북한의 정치, 경제, 문화생활을 정상화하기 위해서는 행정과 경제의 관리를 중앙집권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창설할 것과 북조선임시위원회와 각 도(道)의 인민위원회를 지도하기 위해 소련의 전문가들로 구성되는 기구를 설치할 것을 건의했다.[1] 한편 서울주재 소련영사 폴리안스키(Alexander S. Poliansky)도 극동회의 정치고문 말리크(Yakov. A. Malik)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소련군사령부의 지도와 감독하에 북한의 행정 경제생활을 통일적으로 지도할 단일한 중앙집권적인 관리기관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고 건의했다.[2]


北韓臨時民政自治委員會 창설하도록
  소련 외무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차관) 로조프스키(S. A. Lozovsky)[3]의 이름으로 10월 17일 소련군사령부에 하달된 훈령[1][4]은 이러한 중앙기관 설립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다섯가지 사항을 지시했다. (1)1945년 11월 초에 평양에 북한 주민의 민주적인 분자들 가운데에서 25명 내지 30명으로 구성되는 북한임시민정자치위원회를 창설한다. 임시위원회는 도-군 자치기관의 사업을 지도하고, 도-시-군-면-리 인민위원회의 선거를 실시한다. 선거는 1945년 11월에서 12월 사이에 한다. (2)임시위원회 안에 산업, 농업, 상업, 재정, 교통, 통신, 교육, 보건, 보안, 사법의 10개 행정국을 조직한다. (3)임시위원회와 행정10국의 사업은 북한주둔 소련군사령부의 직접적이고 상시적인 통제하에 둔다. (4)임시위원회와 행정10국의 사업을 통제하고 지도하기 위하여 북한주둔 소련점령군사령부에 민정업무 담당 부사령관 직제를 도입한다. (5)민정업무 담당 부사령관 휘하에 인민경제 각 분야의 소련 전문가들과 정치고문들로 실행기구를 창설한다.[1][5]

로조프스키의 훈령에 따라 10월과 11월에 걸쳐서 각 분야의 행정을 담당할 산업국, 교통국, 재정국, 농림국, 체신국, 상업국, 교육국, 보건국, 사법국, 보안국의 10개 국이 설치되었다. 그것은 흔히 로마넨코사령부로 통칭되는 소련군 민정사령부의 체계에 대응하여 유사하게 조직된 것이었다. 북조선5도행정국, 북조선행정국, 북조선5도행정의 통일적 지도관리를 위한 행정국, 북조선제행정국(北朝鮮諸行政局) 등으로 불린 이 기구는 11월 19일에야 설치가 완료되었다. 로조프스키의 훈령이 시달되고 북조선5도행정국의 설치가 완료되기까지 한 달이나 걸린 것은 민족진영 인사들의 38도선 고착화에 대한 우려와 반발 때문이었던 것 같다. 게다가 5도인민위원회 연합회의에서 추수기를 앞두고 각 도인민위원회별로 할당된 막대한 양의 양곡공출 문제에 대한 저항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부처별 인선

북조선5도행정국(北朝鮮五道行政局)

공업국장 정준택(鄭準澤), 재무국장 이봉수(李鳳洙), 교통국장 한희진(韓熙珍), 교육국장 장종식(張鍾植), 농림국장 이순근(李舜根),
보건국장 윤기녕(尹基寧), 상업국장 한동찬(韓東燦), 사법국장 조송파(趙松波), 체신국장 조영렬(趙永烈), 보안국장 최용건(崔庸健)
(≪정로(正路)≫, 1945년 11월 25일).

소련군사령관의 검사(檢事)감독에 관한 고문관으로 한낙규(韓洛奎), 재판에 관한 고문관으로 양태원(梁台源)이 임명되었다.

(≪정로(正路)≫, 1945년 11월 25일).
  1. ≪정로(正路)≫는 북한 노동신문의 전신으로 1945년 11월 1일 창간되었다.[6][7]
  2. 위의 사람들은 모두 이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북조선인민위원회북한 초대 내각 등에서 요직을 차지한다.
  3. 한낙규(韓洛奎)는 이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북조선인민위원회 사법국장 최용달(崔容達) 아래에서 검사총장을 지내는데, 1939년 만주 고등문관 채용고시에 합격하고 봉천(奉天) 지방법원에서 판사를 했다.[8]
  4. 동아일보 1946년 1월 24일자 기사에도 5도행정국 각 국장이 나오는데, 사법부국장(司法副局長)에 전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普專) 교수 최용달(崔容達)이라 했다.[9]
  5. 오영진, ≪소군정하(蘇軍政下)의 북한 - 하나의 증언 (1952)≫ (국토통일원, 1983년 복각판) pp.88~89
    5도행정국 인선에 조만식의 『조민당(朝民黨)』은 비협력적이었으나, 부당수(副黨首) 최용건(崔鋪健)이 자천(自薦)하여 보안국장(保安局長) 자리로 나아가고, 마지못하여 추천(推薦)한 사람은 보건국(保健局)의 윤기녕(尹基寧) 밖에는 없었다고 한다. 각 부서별 국장의 명단과 경력은 아래와 같다.
產業局長 鄭俊澤(某鑛山課長 蘇聯軍이 發堀한 人材)
教育局長 張鍾植(共產黨)
保安局長 崔鏞健(東北滿洲에서 歸國, 朝民黨)
司法局長 趙松坡(蘇聯系統)
交通局長 韓軫熙(咸南出身)
農林局長 李舜根
財政局長 (?) (延安系統)
遞信局長 趙永烈
保健局長 尹基寧(開業醫 博士)
商業局長 韓東燦(無所屬 齒科醫)


"붉은 紙幣(지폐)"와 "改貨(개화)"
사실 「김일성장군 환영대회」를 치루고난 후의 김일성(金日成)의 위치와 거취는 자못 미묘하였다.

그는 이제 정정당당히 일제시 평양(平壤)에서 가장 큰 잡화도매상으로 일본인 중에서 가장 좋은 「저택」을 가지고 있다는 정평이 있던 광전상회(廣田商會)의 남산정(南山町) 집을 자기 숙사라기 보다 「본부」로 삼아가지고 이곳을 중심으로 하여 「소련」군사령부와 공산당 최고간부들의 밀집소(당시 주로 김용범(金鎔範)ㆍ박정애(朴正愛) 부부(夫婦)가 사는 역시 적산가옥이 이용되었다) 그리고 「평남 인민정치위원회」 사이를 매일 몇번씩이나 불이나게 왕래하였다.

그러나 이때 그는 정식으로 내세우는 직책이 아무것도 없었다. 「볼세비키」 당원이요, 「소련」 군 소좌라는 것은 물론 비밀로 하려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는 이미 10월 10일 「당대표자대회」에서 조직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실질적인 책임자로 되었음에 불구하고 이때는 이것마저 감추고 김용범(金鎔範)이가 책임자인 듯이 위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인민정치위원회」에 있어서도 조만식(曺晩植) 선생이 있는 이상 그 위원장으로 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밑에서 부위원장으로 되려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아무 명색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조직된 후 「소련」 사령부에서는 다음 「프로그램」 대로 「북조선五도대회」를 열고 「북조선五도행정국(行政局)」이란 것을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三八선을 더욱 공고히 하며 그 이북 땅에다 우선 독자적 행정부를 (물론 군정하에서이지만) 조직하였다. 이것이 바로 김일성(金日成)이 자기의 노선인듯 내세운 소위 「북조선민주기지」 창설 정책의 구현이었던 것이며 이것이 바로 오늘의 소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태아(胎兒)였던 것이다. 그런 데그 「五도행정국」의 10개부서 국장은 대체로 공산당원을 중심으로 선정하였으나 그 우두머리 위원장이 문제였다.

공산당측에서는 물론 김일성(金日成)을 내세울려고 하였다. 그러나 「소련」 사람들은 이런 점에서도 훨씬 더 음흉하고 능숙하였다. 그들은 이 「위원장」에는 북한에서 절대신망이 두터운 조만식(曺晩植) 선생을 올려 앉히지 않고서는 다시말하면 이용하지 않고서는 자기들의 군정 목적을 원활히 성취시킬 수 없음을 잘알고 있었다.

그래서 여러번 조(曺)선생에게 위원장 취임을 요청하고 간청하고 나중에는 반위협까지 하려들었으나 조(曺)선생은 "나는 平南(평남)만으로도 힘에 겨웁다"는 한 마디로 간곡히 이것을 거절하였다. 물론 선생으로서는 「소련」 사람들의 하는 일이 못마땅하였던 것이며 그중에도 특히 그들의 북한분할정책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바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자리는 끝내 빈자리로 있었다. 그래도 「소련」 사람들은 이 자리에 아직 김일성(金日成)을 공식적으로 끌어올리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일성(金日成)은 모든 우리나라 사람에 대해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최고실권자로 행세하며 (신바람이나서) 돌아갔다. 오로지 「소련 」 상전의 「대행인」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조만식(曺晩植) 선생의 측근자의 한 사람은 김일성(金日成)이 「소련」 군인과 함께 위원장실에 와서 떠들고 돌아간 후에 조(曺)선생은 「이렇게 상전(上典)이 많아서야---」 하고 개탄하는 것이었다" 고 쓰고있다.

김일성(金日成)이 공개적으로 나타난 후로부터는 「소련」 장군들은 될수록 그를 통하여 자기 침략정책을 실현시키려 하였는데 이 시기에 그들이 가장 주력한 것은 우선 경제적 약탈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파염치한 사기협잡이 서두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붉은지폐」의 남발과 후일의 그 「화폐개혁」이었던 것이다

참고 자료

5도행정국 국장 명단이 나옴.

함께 보기

각주

  1. 1.0 1.1 1.2 전현수, 「소련군의 북한 진주와 대북한정책」, 『한국독립운동사연구』9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5. 6, pp. 362~363
  2. 기광서,「러시아연방 국방성중앙문서보관소 소재 해방후 북한정치사 관련 자료 개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해방 전후사 사료 연구Ⅱ』, 선인, 2002, p. 118.
  3. Solomon Lozovsky(1878–1952) - Wikipedia
  4. 해외사료총서 33권 러시아 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ЦАМО) 소장 한국 관련 자료 목록 Ⅰ (1945년 이전) > ЦАМО Ф. 19 노농적군 정치부 : 1945.10.17 한국사데이터베이스
  5. 김국후, 『비록·평양의 소련군정』, 한울, 2008, pp. 88~90.
  6. 정로(正路)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7. 로동신문 - 위키백과
  8. 김두식저, "법률가들 -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탄생" / 북한지역의 초창기 법원과 검찰 (창비 2018-11-20)
  9. [三八以北消息(삼팔이북소식)] 通行(통행)은 右側(우측), 娼妓(창기)는 解放(해방) 동아일보 1946-01-24 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