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상(李鉉相, 1905년 9월 27일 ~ 1953년 9월 17일)은 남로당 간부이자 박헌영의 심복으로 한국전쟁 전후 지리산 빨치산 대장이었다. 휴전 성립 직후인 1953년 9월 17일 지리산에서 사살되었다. 토벌군경에 의한 사살인지, 북한 김일성의 지령을 받은 빨치산 내부자에 의한 사살인지를 두고 논란이 있다. 휴전 성립 당시 북한에서는 박헌영과 남로당 계열에 대한 대대적 숙청이 벌어지고 있었다.
1. 이현상의 김일성 비판
해방 당시 전력을 잘 알 수 없는 북한 김일성에 대해 가장 직설적이고 통렬한 비판을 한 사람은 남로당 중앙위원회 간부 부장인 이현상(李鉉相, 1905 ~ 1953)이다. 그가 소련유학을 위해 강동정치학원에서 러시아어를 배우던 1948년 7월에[1] 북로당 중앙 간부 부장 이상조(李相朝, 1915 - 1996) 및 김창만(金昌滿 1907~1966) 등과의 술자리에서 김일성과 박헌영 중 누가 더 지도자로 적합한가 논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때 이현상이 했다는 발언을 박갑동(朴甲東, 1919~ )이 증언했다.[2]
김일성은 내가 듣기로는 본명이 김성주라고 하는데 언제부터 왜 김일성이 됐는가 명백하지도 않고 그의 투쟁 경력도 확실한 것을 알리지 않아 불투명한데가 많다. 어떻게 박헌영을 제쳐놓고, 해방 후 외국에서 갑자기 나타난 경력 불명의 자를 최고 지도자로 인정하겠는가.』
이현상의 발언은 박헌영을 추종하던 남로당 계열 사람들의 생각을 대변한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북한 지도자 자리를 굳혀가던 김일성의 문제점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남로당 간부가 북한 김일성의 전력에 대해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면 남북한의 일반 국민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심지어는 박헌영 본인도 소련군이 데려와 지도자로 내세운 김일성의 전력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들 사이의 논쟁을 박헌영과 김일성이 알게 되자 박헌영은 재빨리 이현상을 견책하여 소련유학을 취소시키고 서울로 보냈다. 김일성은 이상조를 간부 부장직에서 해임, 상업관리국장으로 강등시켰다고 한다.[2] 이상조는 1989년 방한하여 자신과 김창만이 이현상과 사이가 껄끄러워 한직으로 좌천되었으며, 6.25 당시 자신은 상업성 상업관리국장의 한직에 있었기 때문에 남침 계획을 사전에 잘 알지 못했다고 하였는데[3][4], 이는 박갑동의 위 증언이 사실임을 뒷받침한다. 이와같은 논쟁에 대해서는 전 북한 외무부상 박길룡이나[5] 전 내무부상 강상호도 같은 증언을 했으므로[1][6] 사실로 볼 수 있다.
지리산 빨치산 대장을 하던 이현상이 북의 지령을 받은 내부자에 의해 사살된 것이 맞다면 아마도 위와 같은김일성 비판이 한 이유가 되었을 수도 있다.
2. 이현상의 최후
- 전설의 빨치산 이현상... 김일성이 그의 뒷통수를 겨눈 이유 [호준석의 역사전쟁] 조선일보 2025.11.23.
- 김일성의 숙청 대상이 된 , '전설의 빨치산' 이현상... 그리고 그의 최후를 둘러싼 미스터리 [호준석의 역사전쟁 EP.8] 2025. 11. 22.
이현상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믿기 힘들지만 허황하다고 치부하기도 힘든 꿈 이야기가 전해진다.[7]
같은 꿈을 이틀 연속 꿨지만 누구에게 얘기하지 못하고 살던 이 여인에게, 손자가 7살이 된 87년에 또 그 남자가 꿈에 나타났습니다. ’당신이 세상에 알리지 못한다면 옆에서 자고 있는 저 손자에게 이 사실을 말해 달라‘고 얘기하자, 이 여인이 마침내 그 손자에게 해마다 한번씩 이 꿈 얘기를 해줬다는 것입니다. 이현상이라는 이름을 잊을 수 없게 된 이 손자가 고등학생이 돼서 논술 대비를 하려고 소설 태백산맥을 읽다가 이현상이 실존인물임일 알게 되고 마침내 SBS 제작진에 이 내용을 제보하면서 방송에 소개된 것입니다.
제작진은 이 내용을 방송으로 제작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할머니가 그 남자를 만난 것이 1953년 9월로, 이현상이 죽은 때와 일치한다. 그리고 이현상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던 할머니가 손자에게 설명해준 그 남자의 인상착의가 이현상과 일치한다. 또 삼척은 지리산에서 북으로 넘어갈 때 거쳐야 하는 루트라는 점도 사실과 일치한다.
꿈 얘기를 100% 믿을 필요는 없지만 베일에 가려있는 이현상의 죽음과 관련해 흥미로운 진술의 하나인 것은 분명합니다.이현상에 대한 꿈 이야기가 나오는 SBS 토요 미스테리극장 57회는 실제로는 1998. 08. 15에 방영되었다. (1998년 5월 30일이 아님.)
- [토요 미스테리극장 57회] 빨치산 대장 이현상, 나는 이렇게 죽었다! SBS 1998. 08. 15 (SBS 옛날 예능 - 빽능)
꿈 이야기를 근거로 할 수는 없지만 당시 관련자들의 증언을 볼 때 이현상은 토벌군경보다는 북한의 지령을 받은 내부자에 의해 근접 거리에서 사살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김씨 왕조가 무너지고 비밀문서가 발굴되면 그의 죽음에 대한 진실이 밝혀질 수도 있겠다. 아래는 당시 지리산 공비 토벌군 측에서 뿌린 1953년 8월 20일자 비라인데, 북에서 박헌영이 숙청되었다는 말이 나온다. 박헌영과 그를 추종하는 남로당 세력들에 대한 숙청이 한창 진행되던 시기라 북에서 이현상을 사살하라는 지령을 내렸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는 것으로 보인다.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이현상의 가묘가 만들어져 있다.
3. 참고 자료
4. 각주
- ↑ 1.0 1.1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도서출판 한울, 2008년) pp.231-232.
- ↑ 2.0 2.1 박갑동(朴甲東, 1919~ ), 『내가 아는 박헌영』 (108회) 중앙일보 1973.07.04 종합 5면
박갑동(朴甲東, 1919~ ), 『박헌영(朴憲永) : 그 일대기를 통한 현대사의 재조명』 (서울, 인간사, 1983) p.190 : 위 중앙일보 연재물을 책으로 간행한 것임. - ↑ 李相朝(이상조)씨—申一澈(신일철)교수 對談(대담) : 8月宗派(월종파)사건「反金(반김) 세력」제거 造作劇(조작극) 1989.09.18 동아일보 5면
申(신) = 6. 25전쟁은 人民軍(인민군)의 남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남침 준비상황은 어떠했는지요? ......
李(이) = 나는 당시 상업성 副相(부상)으로 군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세한 내막은 모릅니다. .... 나는 당시 알 수 없는 이유로 金昌滿(김창만)과 함께 한직으로 좌천됐는데 許哥而(허가이)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우리가 벼슬하려고 혁명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며 이유를 말하지 않아 그냥 받아들였습니다. 짐작컨대 남로당의 李舟河(이주하)와 李鉉相(이현상)(지리산 빨치산대장)이 북한에 와 있었는데 우리와 그들의 사이가 껄끄러워질 것같아 거리를 두도록 떼어놓은 것 같습니다. 내가 보기에 李舟河(이주하)는 괜찮은 인물로 보였으나 李鉉相(이현상)은 용인하기 어려운 데가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 사이에 논쟁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 ↑ 李相朝(이상조)씨「칼칼한 所信(소신)」인상적 1989.09.21 동아일보 8면 :崔昌益(최창익) 金武亭(김무정)등과 함께 북한군 창설의 주역인 李(이)씨는 죽마고우인 金昌滿(김창만)과 더불어 한직으로 밀려나 상업성 상업관리국장으로 6, 25동란을 맞이했다고 한다.
- ↑ 《비록(秘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상, 하 2권》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중앙일보사, 1992), 상권 pp.296~298.
- ↑ 김국후, 평양의 카레이스키 엘리트들, (한울 아카데미, 2013) pp.278~279 : 전 내무부상 강상호 등의 증언
- ↑ 전설의 빨치산 이현상... 김일성이 그의 뒷통수를 겨눈 이유 [호준석의 역사전쟁] 조선일보 2025.1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