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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설명

1950년판 조선중앙년감에 실린 제1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명단. () 속의 이름은 1950년 당시 사망한 사람이다. 이들은 1948년 8월 25일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p.14의 리정숙(이정숙)과 p.15 (맨뒷페이지)에 나오는 강규찬, 고진히(고진희), 김달삼, 안세훈 등은 제주 4.3 사건을 주도했던 인물들이다. 이들이 월북하여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었다는 것은 이 사건에 북한의 소련 군정, 김일성, 박헌영 등이 깊숙히 개입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강규찬과 고진희는 부부이다.

pp.13~15에 초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명단이 나온다.
▲김달삼의 월북

미군정의 대응이 조기 강경진압정책으로 굳어져가던 7월 북한의 정권 수립을 위해 남한 전역에서 지하선거가 열렸는데, 지하선거는 8월 21일 해주에서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시.군별 5~7명씩 1080명)에 참가할 남측 대표자를 선출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4.3사건이 벌어지고 있던 제주에서의 지하선거는 주로 백지에 이름을 쓰거나 손도장을 받아가는 형식으로 진행됐는데, 주로 중산간 마을과 농촌지역을 대상으로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그런데 백지날인은 대부분 강압에 못 이겨 이뤄졌는데, 실제로 서귀포에서는 이 선거를 거부한 마을 주민 5명이 폭도들의 칼에 찔려 중상을 입기도 했다고 미군정 보고서에는 기록돼 있다.

또 이 같은 백지날인이 빌미가 돼 제주도에서는 도장 한 번 찍은 것이 총살의 원인이 될 정도로 훗날 엄청난 인명이 희생되는 결과를 빚기도 했다.

결국 지하선거를 통해 제주도에서는 6명이 대표로 선출돼 8월 21일 1080명 중 1002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해주대회에 참가하게 된다.

이 중에는 무장대 총책이었던 김달삼과 안세훈, 강규찬, 이정숙, 고진희, 문등용이 있었던 것으로 좌파쪽 자료에는 기록돼 있다.

김달삼이 언제 떠났는지 확실치 않으나 미군정 보고서에는 8월 2일 5명의 공산주의자들이 배를 타고 목포로 떠났으며 북한 선거에 참여하기 위해 평양으로 가는 길인 것 같다고 기록돼 있다.

해주대회 첫날 35명을 뽑는 주석단 선거가 있었는데 20대 중반의 김달삼은 허헌, 박헌영, 홍명희 등 좌파거물과 나란히 주석단의 일원으로 뽑혔으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에 북한측 212명, 남한측 360명 중 제주도대표로 안세훈, 김달삼, 강규찬, 이정숙, 고진희가 선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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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2023년 2월 17일 (금) 15:33750 × 1,052, 4쪽 (2.05 MB)JohnDoe (토론 | 기여)제1기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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