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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산사건'''(獨山事件)은 1933년 6월 5일에 있었던 혜산진(惠山鎭) 경찰서 독산(獨山) 주재소 경관과 대안(對岸) 만주 장백현(長白縣)의 마적(馬賊)으로 추정되는 무장단 50여명 사이에 있었던 교전을 말한다. 경관 | '''독산사건'''(獨山事件)은 1933년 6월 5일에 있었던 혜산진(惠山鎭) 경찰서 독산(獨山) 주재소 경관과 대안(對岸) 만주 장백현(長白縣)의 마적(馬賊)으로 추정되는 무장단 50여명 사이에 있었던 교전을 말한다. 경관 3명 전사, 민간인 전사 3명, 중상 4명 피납 2명 등 피해가 컸다.<ref>[https://www.nl.go.kr/newspaper/detail.do?id=CNTS-00109006512 咸鏡南道, 獨山事件と一般被害者戰死三名拉去二名, 負傷者も頗る多い] 조선신문 [朝鮮新聞] 1933년 06월 20일 3면 3단</ref> 조선일보는 호외를 발행하며 이 사건을 보도했다.<ref>[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431019330607e10210&set_date=19330607&page_no=2 무장단 오십명 출현(武裝團 五十名 出現) 경관 4명(警官 四名)을 살상(殺傷)] 조선일보 1933.06.07 석간 2면<br>혜산진 관내 독산 대안(惠山鎭 管內 獨山 對岸)에서 오일(五日) 아침 격전(激戰) 끗헤 : '''호외재록(號外再錄)'''</ref> 이로부터 정확히 4년 후인 1937년 6월 4일 인근에서 [[보천보 사건]]이 일어났다. | ||
당시 국경 지역에는 만주로부터 마적단인지 독립군인지 구분하기도 힘든 무장단의 침입이 헤아릴 수 없이 잦았는데, 그 중에서도 규모가 큰 것이 1934년 1월의 [[토성습격사건]], 1935년 2월의 [[동흥사건]] 등이다. 이처럼 유사한 사건이 자주 있었음에도 모두 다 잊혀졌는데, 유독 특별할 것도 없는 보천보 사건만 엄청난 항일 전과로 터무니없이 과대포장되어 알려져 있는 이유는 북한 [[김일성]]이 집권 후 자신의 항일업적이라며 대대적으로 선전했기 때문이다. 남한에서도 1990년대 들어 학계가 좌경화되면서 북한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보천보 사건]]을 교과서에까지 싣는 한심한 작태를 보이고 있다. [[보천보 사건]] 자체도 큰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지만, 그 사건의 주역 [[동북항일연군]]의 1로군 [[김일성 (6사장)|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으며 북한 김일성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 당시 국경 지역에는 만주로부터 마적단인지 독립군인지 구분하기도 힘든 무장단의 침입이 헤아릴 수 없이 잦았는데, 그 중에서도 규모가 큰 것이 1934년 1월의 [[토성습격사건]], 1935년 2월의 [[동흥사건]] 등이다. 이처럼 유사한 사건이 자주 있었음에도 모두 다 잊혀졌는데, 유독 특별할 것도 없는 보천보 사건만 엄청난 항일 전과로 터무니없이 과대포장되어 알려져 있는 이유는 북한 [[김일성]]이 집권 후 자신의 항일업적이라며 대대적으로 선전했기 때문이다. 남한에서도 1990년대 들어 학계가 좌경화되면서 북한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보천보 사건]]을 교과서에까지 싣는 한심한 작태를 보이고 있다. [[보천보 사건]] 자체도 큰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지만, 그 사건의 주역 [[동북항일연군]]의 1로군 [[김일성 (6사장)|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으며 북한 김일성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
2020년 8월 6일 (목) 10:19 판
독산사건(獨山事件)은 1933년 6월 5일에 있었던 혜산진(惠山鎭) 경찰서 독산(獨山) 주재소 경관과 대안(對岸) 만주 장백현(長白縣)의 마적(馬賊)으로 추정되는 무장단 50여명 사이에 있었던 교전을 말한다. 경관 3명 전사, 민간인 전사 3명, 중상 4명 피납 2명 등 피해가 컸다.[1] 조선일보는 호외를 발행하며 이 사건을 보도했다.[2] 이로부터 정확히 4년 후인 1937년 6월 4일 인근에서 보천보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국경 지역에는 만주로부터 마적단인지 독립군인지 구분하기도 힘든 무장단의 침입이 헤아릴 수 없이 잦았는데, 그 중에서도 규모가 큰 것이 1934년 1월의 토성습격사건, 1935년 2월의 동흥사건 등이다. 이처럼 유사한 사건이 자주 있었음에도 모두 다 잊혀졌는데, 유독 특별할 것도 없는 보천보 사건만 엄청난 항일 전과로 터무니없이 과대포장되어 알려져 있는 이유는 북한 김일성이 집권 후 자신의 항일업적이라며 대대적으로 선전했기 때문이다. 남한에서도 1990년대 들어 학계가 좌경화되면서 북한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보천보 사건을 교과서에까지 싣는 한심한 작태를 보이고 있다. 보천보 사건 자체도 큰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지만, 그 사건의 주역 동북항일연군의 1로군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으며 북한 김일성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독산(獨山)은 오늘날 양강도 삼지연군 이명수노동자구이다.[3][4]
언론 보도
- 혜산진 대안(惠山鎭 對岸)에도 마적부대(馬賊部隊)가 출현(出現) 조선일보 1933.06.06 조간 2면
- 무장단 오십명 출현(武裝團 五十名 出現) 경관 4명(警官 四名)을 살상(殺傷) 조선일보 1933.06.07 석간 2면
혜산진 관내 독산 대안(惠山鎭 管內 獨山 對岸)에서 오일(五日) 아침 격전(激戰) 끗헤
호외재록(號外再錄)
- 山上(산상)에서 突然 射擊(돌연 사격) 警官 四名 戰死(경관 4명 전사) 1933.06.07 동아일보 석간 2면
- 越境(월경)한 應援 警官隊(응원 경관대) 共產軍 討伐(공산군 토벌)을 開始(개시) 長白縣 事件(장백현 사건)의 顚末(전말) 1933.06.07 동아일보 조간 2면
- 조선중앙일보
- 국경방면(國境方面)의 무장단(武裝團), 경관대(警官隊)를 포위사격(包圍射擊), 경관 고전(警官苦戰), 전사 6명(戰死六名) 조선중앙일보 1933년 06월 07일 02면
5일(五日) 함남 혜산진 대안(咸南 惠山鎭 對岸)의 사변(事變) -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경관대 전멸 상태(警官隊全滅狀態), 혜산진 대안 2호언(惠山鎭 對岸 二號堰)에서의 마적(馬賊)과의 충돌상보(衝突詳報) 조선중앙일보 1933년 06월 08일 02면
- 我警官隊賊匪와 交火 三名戰死 一名危篤 人夫三名도 被殺, 一名失踪 國境 니록석 壯烈戰 매일신보 [每日申報] 1933년 06월 07일 2면 9단
- 衆敵을 相對로 勇敢히 獨山警官奮戰眞相 重傷不屈吉川巡査의 熱血 동료의 품에 안키어 만세부르며 절명 兩洞民壯烈한 죽엄 매일신보 [每日申報] 1933년 06월 08일 2면 5단
- 獨山서 壯烈戰死한 三警官의 遺骨 금十三일 아침 경성역 도착 눈물 새로운 燒香 매일신보 [每日申報] 1933년 06월 14일 2면 6단
- 獨山事件現場과 犧牲 매일신보 [每日申報] 1933년 06월 23일 7면 6단
- 獨山事件犧牲者 合同署葬擧行 매일신보 [每日申報] 1933년 06월 25일 7면 6단
- 五十餘名の馬賊に警官四名の大苦戰, 遂に三名は壯熱殉職殘る一名は中傷を負ふ 조선신문 [朝鮮新聞] 1933년 06월 07일 2면 1단
- 勇敢に賊團に肉薄, 彈丸を射盡して殪る 조선신문 [朝鮮新聞] 1933년 06월 07일 2면 1단
- 五十餘名の馬賊團に惡戰苦鬪して全滅, 殪れ乍らも『攻擊』を叫ぶ, 獨山駐在所員の悲壯な殉職 조선신문 1933년 06월 08일 2면 1단
- 咸鏡南道, 田中高等課長獨山事件で出張, 壯熱なる警察官の殉職, 激烈なるその戰鬪 조선신문 [朝鮮新聞] 1933년 06월 08일 3면 1단
土肥茂雄, 吉川正一, 岩崎淸次, 松本源市 - 咸鏡南道, 四警官に對し弔慰の電報, 咸興通信聯盟より 조선신문 [朝鮮新聞] 1933년 06월 09일 3면 1단
- 咸鏡南道, 獨山事件後報, 勇敢なる警察官の奮闘長白縣長一行惠山署を訪ひ三戦死者に弔辭 조선신문 [朝鮮新聞] 1933년 06월 10일 3면 1단
- 咸鏡南道, 獨山事件戰死者告別式を擧行, 十一日午後一時より, 丹下警察部長出席 조선신문 [朝鮮新聞] 1933년 06월 12일 3면 7단
- 咸鏡南道, 獨山事件の殉職警察官盛大に署葬執行 조선신문 [朝鮮新聞] 1933년 06월 14일 4면 8단
- 咸鏡南道, 一千餘名の盛大な見送り, 獨山事件殉職警官遺骨十二日咸興通過 조선신문 [朝鮮新聞] 1933년 06월 15일 4면 11단
- 咸鏡南道, 獨山事件と一般被害者戰死三名拉去二名, 負傷者も頗る多い 조선신문 [朝鮮新聞] 1933년 06월 20일 3면 3단
- 咸鏡南道, 咸南對岸でも警戒を嚴に, 獨山事件に鑑みて 조선신문 [朝鮮新聞] 1933년 06월 21일 4면 8단
- 咸鏡南道, 獨山事件遭難 조선신문 [朝鮮新聞] 1933년 06월 21일 4면 8단
마적단의 평북 의주(義州) 침입
독산사건과 거의 같은 때에 평북 의주(義州)에서도 마적단의 침입이 있었다.
- 金品을 强奪하고 十餘名을 人質로 拉去 : 義州郡下에 馬賊이 襲來 國境警察크게 緊張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 1933년 06월 08일 2면 1단
- 民兵이 出動交戰하야 被拉者七名奪還 : 住民은 避亂 討伐隊增派 매일신보 [每日申報] 1933년 06월 10일 7면 9단
함께 보기
각주
- ↑ 咸鏡南道, 獨山事件と一般被害者戰死三名拉去二名, 負傷者も頗る多い 조선신문 [朝鮮新聞] 1933년 06월 20일 3면 3단
- ↑ 무장단 오십명 출현(武裝團 五十名 出現) 경관 4명(警官 四名)을 살상(殺傷) 조선일보 1933.06.07 석간 2면
혜산진 관내 독산 대안(惠山鎭 管內 獨山 對岸)에서 오일(五日) 아침 격전(激戰) 끗헤 : 호외재록(號外再錄) - ↑ 양강도 삼지연군 이명수노동자구 개요 - 북한지역정보넷
- ↑ 獨山 노동자구 -> 이명수 노동자구
獨山 노동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