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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8일===
===12월 28일===
* [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12_29_0010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9일  >  각정당 사회단체대표자회의임정에 주권행사 건의] 동아일보 1945년 12월 31일 
* [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12_28_0040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8일  >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 등 42개단체대표자회의, 반탁 결의] 서울신문 1945년 12월 30일
* [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12_28_0040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8일  >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 등 42개단체대표자회의, 반탁 결의] 서울신문 1945년 12월 30일
* [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12_28_0120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8일  >  임정, 긴급국무회의 열고 반탁결의문 채택] 동아일보 1945년 12월 30일
* [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12_28_0120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8일  >  임정, 긴급국무회의 열고 반탁결의문 채택] 동아일보 1945년 12월 30일


===12월 29일===
===12월 29일===
* [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12_29_0010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9일  >  각정당 사회단체대표자회의임정에 주권행사 건의] 동아일보 1945년 12월 31일 
* [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12_29_0190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9일  >  인공 중앙인민위원회, 탁치배격담화 발표] 서울신문 1945년 12월 29일  
* [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12_29_0190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9일  >  인공 중앙인민위원회, 탁치배격담화 발표] 서울신문 1945년 12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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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此) 운동은 반드시 우리의 최후 승리를 취득하기까지 계속함을 요하며 일반 국민은 금후 우리 정부 지도하에 제반사업을 부흥하기를 요망한다. (주석 2) }}
차(此) 운동은 반드시 우리의 최후 승리를 취득하기까지 계속함을 요하며 일반 국민은 금후 우리 정부 지도하에 제반사업을 부흥하기를 요망한다. (주석 2) }}


==좌익의 찬탁 선회==
==좌익의 찬탁 선회==

2019년 9월 23일 (월) 13:12 판


모스크바 3상 회의 이전의 미국의 신탁통치 거론과 국내의 반대 동향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를 결의한 것은 1945년 12월 27일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미국 쪽에서 신탁통치를 거론하고 있었고, 국내에서는 좌우진영을 막론하고 이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도 신탁통치에 반대하고 있다. 신탁통치안 반대에는 좌우 구분이 없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의안 발표 직후의 반탁운동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의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좌우 공히 반탁을 표명하고 반탁운동에 돌입하였다.

12월 27일

12월 28일

12월 29일

12월 30일

  • 12월 30일 고하 송진우(1890~1945) 피살 : 오전 6시 15분 종로구 원서동 자택에서 한현우(韓賢宇), 유근배(劉根培) 등 6명의 저격을 받고 사망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30일 > 한민당수석총무 宋鎭禹 피살 서울신문, 동아일보 1945년 12월 31일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9일 > 한민당 수석총무 宋鎭禹, 반탁투쟁을 역설 동아일보 1945년 12월 29일

1946년 1월 2일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31일 > 임정, 행정권이양 등을 선언하는 포고 발표 동아일보 1946년 01월 02일
임시정부 국무회의는 1946년 새해를 맞이하여 1월 1일 국자(國字) 제1호와 제2호를 잇따라 발표하여 임시정부가 권력행사의 주체임을 천명하였다. 이것은 미군정에 대한 정면 대결의 선언이었다.

국자 제1호(國字 第1號)

1) 현재 전국행정청 소속의 경찰기관 및 한인 직원은 전부 본 임시정부 지휘 하에 예속케 함.
2) 탁치반대의 시위운동은 계통적 질서적으로 행할 것.
3) 폭력행위와 파괴행위는 절대 금지함.
4) 국민의 최저생활에 필요한 식량 연료 수도 전기 교통 금융 의료기관 등의 확보 운영에 대한 방해를 금지함.
5) 불량상인의 폭리매점 등은 엄중취체함.

국자 제2호(國字 第2號) 요지

차(此) 운동은 반드시 우리의 최후 승리를 취득하기까지 계속함을 요하며 일반 국민은 금후 우리 정부 지도하에 제반사업을 부흥하기를 요망한다. (주석 2)

좌익의 찬탁 선회

조선공산당 등은 1946년 1월 1일까지는 반탁 입장이었으나 1월 2일부터 돌연 찬탁으로 선회하고, 1월 3일에 예정되었던 반탁 집회를 당일날 현장에서 찬탁 집회로 돌변시켜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은 1월 5일 11시에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고, 공식적으로 신탁통치을 지지한다는 견해를 밝힌다.

북한의 동향

북한의 소련군정은 일체의 반탁 움직임을 봉쇄하고, 신탁통치 지지 요청을 거부하고 반탁을 고수하던 조만식을 1946년 1월 5일 고려호텔에 연금한다. 이로서 북한 정계에서는는 소련군정에 협력하고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세력들의 정치활동만 허용된다.

1946년 2월 8일에는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시킨고, 3월 5일에는 토지개혁을 단행하여 남북분단이 기정 사실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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