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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헌영 외신 인터뷰 사건]]
* [[박헌영 외신 인터뷰 사건]]
* [[존 스톤의 박헌영 1국 탁치 지지 표명기사 조작 논란]]


많은 사람들이 박헌영같은 노회한 정치인이 이런 무모한 발언을 했을리는 없으므로, 이 사건은 뉴욕타임즈 존스턴 기자와 미군정의 조작이라고 주장한다. 박헌영 본인도 이런 발언의 파장을 모를리 없었으니 국내기자 회견에서는 당연히 이런 말을 하지 않았고, 외신회견에서만 한 것이다. 당시 [[김일성]]과 지도자 경쟁을 벌이고 있던 그가 소련에 잘 보일 목적으로 국내용 아닌 대소용(對蘇用) 발언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기대와 달리 외신 회견 발언 내용이 뒤늦게 국내에도 전해져 문제가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박헌영같은 노회한 정치인이 이런 무모한 발언을 했을리는 없으므로, 이 사건은 뉴욕타임즈 존스턴 기자와 미군정의 조작이라고 주장한다. 박헌영 본인도 이런 발언의 파장을 모를리 없었으니 국내기자 회견에서는 당연히 이런 말을 하지 않았고, 외신회견에서만 한 것이다. 당시 [[김일성]]과 지도자 경쟁을 벌이고 있던 그가 소련에 잘 보일 목적으로 국내용 아닌 대소용(對蘇用) 발언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기대와 달리 외신 회견 발언 내용이 뒤늦게 국내에도 전해져 문제가 된 것이다.
==좌익의 찬탁 선회==
조선공산당 등은 1946년 1월 1일까지는 반탁 입장이었으나 1월 2일부터 돌연 찬탁으로 선회하고, 1월 3일에 예정되었던 반탁 집회를 당일날 현장에서 찬탁 집회로 돌변시켜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
* [http://db.history.go.kr/id/dh_001_1946_01_02_0110 1946년 01월 02일 : 조공, 3상회담 결의에 지지 표명] 중앙일보 1946년 01월 03일
* [http://db.history.go.kr/id/dh_001_1946_01_02_0080 1946년 01월 02일 : 인공 중앙인민위원회, 3상회의 결정 지지 전문 보냄] 조선일보 1946년 01월 04일 
* [http://db.history.go.kr/id/dh_001_1946_01_03_0070 1946년 01월 03일 : 반탁대회가 친탁대회로 취지변경] 동아일보 1946년 01월 04일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은 1월 5일 11시에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고, 공식적으로 신탁통치을 지지한다는 견해를 밝힌다.
* [[박헌영 외신 인터뷰 사건]]


==북한의 동향==
==북한의 동향==

2019년 9월 23일 (월) 14:14 판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를 결의한 것이 발표되고, 한국에 이 소식이 전해지자 처음에는 좌우 공히 반탁을 표명하고 반탁운동에 돌입하였다. 해가 바뀐 1946년 1월 초부터 좌익은 돌연 찬탁으로 선회하고, 이후 정국은 반탁과 찬탁 세력간의 갈등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모스크바 3상 회의 이전의 미국의 신탁통치 거론과 국내의 반대 동향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를 결의한 것은 1945년 12월 27일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미국 쪽에서 신탁통치를 거론하고 있었고, 국내에서는 좌우진영을 막론하고 이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도 신탁통치에 반대하고 있다. 신탁통치안 반대에는 좌우 구분이 없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의안 발표 직후의 반탁운동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의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좌우 공히 반탁을 표명하고 반탁운동에 돌입하였다.

최초 보도

12월 27일

12월 28일

12월 29일

12월 30일

  • 12월 30일 고하 송진우(1890~1945) 피살 : 오전 6시 15분 종로구 원서동 자택에서 한현우(韓賢宇), 유근배(劉根培) 등 6명의 저격을 받고 사망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30일 > 한민당수석총무 宋鎭禹 피살 서울신문, 동아일보 1945년 12월 31일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9일 > 한민당 수석총무 宋鎭禹, 반탁투쟁을 역설 동아일보 1945년 12월 29일

1946년 1월 2일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31일 > 임정, 행정권이양 등을 선언하는 포고 발표 동아일보 1946년 01월 02일
임시정부 국무회의는 1946년 새해를 맞이하여 1월 1일 국자(國字) 제1호와 제2호를 잇따라 발표하여 임시정부가 권력행사의 주체임을 천명하였다. 이것은 미군정에 대한 정면 대결의 선언이었다.

국자 제1호(國字 第1號)

1) 현재 전국행정청 소속의 경찰기관 및 한인 직원은 전부 본 임시정부 지휘 하에 예속케 함.
2) 탁치반대의 시위운동은 계통적 질서적으로 행할 것.
3) 폭력행위와 파괴행위는 절대 금지함.
4) 국민의 최저생활에 필요한 식량 연료 수도 전기 교통 금융 의료기관 등의 확보 운영에 대한 방해를 금지함.
5) 불량상인의 폭리매점 등은 엄중취체함.

국자 제2호(國字 第2號) 요지

차(此) 운동은 반드시 우리의 최후 승리를 취득하기까지 계속함을 요하며 일반 국민은 금후 우리 정부 지도하에 제반사업을 부흥하기를 요망한다. (주석 2)

좌익세력, 반탁에서 찬탁으로 돌변

조선공산당 내에서도 반탁 기류가 상당했으나, 다른 정파와는 달리 공식적인 입장표명은 없었고,[1] 정태식(鄭泰植)이 개인적으로 반탁입장을 밝혔다.[2]

한편 김구와 임정세력이 주도하여 1945년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信託統治反對國民總動員委員會)」에 박헌영도 홍명희(洪命憙) 등과 함께 참여하여 중앙위원이 되었고[3], 이튿날인 31일 상무위원(常務委員)에 선정되었다.[4] 이를 위한 준비모임인 12월 28일 밤의 경교장 모임에 박헌영도 참석했다는 강원룡 목사의 증언이 있다.[5] 중앙위원에는 북한에 있는 조만식(曺晩植), 김두봉(金枓奉), 김무정(金武亭)도 들어 있는데 이들이 실제로 참여했다고 볼 수는 없으므로 박헌영의 이름이 들어있는 것만으로 그의 참여가 사실이라 단정할 수 없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튿날 상무위원에까지 선정되었으므로 그의 이름을 임의로 집어넣은 것으로 보기는 무리이다. 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의 이름이 본인 동의없이 임의로 들어간 것이라면 공산당 측의 거센 항의가 있었을 것이나 그런 흔적은 없다.

조선공산당 서울시 위원회에서는 12월 31일 탁치반대 전단을 살포하였다.[6] 같은 날 반파쇼공동투쟁위원회결성총회에 역시 공산당 서울시 위원회가 참여하였고, 박헌영의 심복인 이현상(李鉉相)이 동회의 취지설명과 결성에 이르기까지의 경과보고를 했다.[7]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는 1846년 1월 1일 오후 2시부터 기자단과 회견하고 탁치안을 절대 배격할 투쟁방침을 선명한 담화를 발표했다.[8]

미군정의 기록에 의하면 하지 장군이 박헌영을 1월 1일에 만났을 때는 강경한 반탁 입장이었으나 1월 3일 다시 만났을 때는 입장이 정반대로 바뀌어 있었다고 하였다.[9][10].

1월 2일 공산당중앙위원회는 모스크바 3상회의 합의사항을 지지(찬탁)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책임비서 박헌영이 주도했을 것이다.[11][12] 공산당은 하루만에 전날의 반탁에서 찬탁으로 입장을 180도 선회하였다.

이날을 기준으로 모든 좌파들이 연말의 반탁에서 찬탁으로 입장을 표변하였다[13].

1월 3일 예고되었던 좌익들의 반탁집회는[14] 당일날 지도부에 의해 찬탁집회로 변경되어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15][16][10][17] 좌파들은 입으로만 민주주의니, 인민의 뜻을 받드느니 하며 떠들 뿐, 실제로는 인민들은 자신들의 지시를 무조건 따라야 하는 졸로 여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좌파들이 1월 1일까지 반탁입장을 견지하다 1월 2일부터 갑자기 찬탁으로 돌아선 배경에는 소련의 지시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당시 미군정도 그렇게 보고 있었다.[18].


박헌영이 이 무렵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하고 소련의 지령을 받아왔다고 증언한 사람이 많이 있으나, 사람마다 방북했다는 날자가 제각각이고, 명백한 문헌근거는 없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알기 어렵다. 전 노동당 간부 박병엽(朴炳燁, 1922 ~ 1998)은 박헌영이 신탁통치에 대한 소련의 뜻을 파악하려고 12월 28일 밤 비밀리에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가서 지침을 받고, 신년 행사에 참석한 후 1월 1일 밤 3.8선을 넘어 1월 2일 서울로 귀환했다고 증언했다.[19][20] 하지만 이 기간은 위에 언급한 다른 기록들과 상충하는 점이 많다. 이 일에 관해서는 당시 서울의 소련 부영사였던 아나톨리 샤브신의 부인이자 영사관 도서관장이었던 샤브시나(쿨리코바)의 증언도 있고[21], 전 북한 외무성 부상 박길용(朴吉用, 1920 ~1997)과 소련 군정 핵심 인사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 메클레르 중좌의 증언도 있지만, 박헌영이 방북했다는 시기는 제각각이다.[22]


박헌영 본인이 공개적으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한다면서 찬탁 입장을 밝힌 것은 1월 5일 11시에 열린 내외신 기자회견에서이다. 국내 기자와의 회견에서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반탁 진영을 맹비난한 것이 이튿날 국내 신문에 보도 되었으나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런데 외신 회견에서는 "소련 단독의 신탁통치를 원하며, 10 ~ 20년 내에 조선이 소련연방의 일원으로 편입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는 것이 뒤늦게 샌프란시스코 방송을 통해 국내에 알려지면서 큰 논란이 벌어지고, 공산당 지도자로서의 그의 위상도 큰 타격을 받는다.

많은 사람들이 박헌영같은 노회한 정치인이 이런 무모한 발언을 했을리는 없으므로, 이 사건은 뉴욕타임즈 존스턴 기자와 미군정의 조작이라고 주장한다. 박헌영 본인도 이런 발언의 파장을 모를리 없었으니 국내기자 회견에서는 당연히 이런 말을 하지 않았고, 외신회견에서만 한 것이다. 당시 김일성과 지도자 경쟁을 벌이고 있던 그가 소련에 잘 보일 목적으로 국내용 아닌 대소용(對蘇用) 발언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기대와 달리 외신 회견 발언 내용이 뒤늦게 국내에도 전해져 문제가 된 것이다.

북한의 동향

북한의 소련군정은 일체의 반탁 움직임을 봉쇄하고, 신탁통치 지지 요청을 거부하고 반탁을 고수하던 조만식을 1946년 1월 5일 고려호텔에 연금한다. 이로서 북한 정계에서는는 소련군정에 협력하고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세력들의 정치활동만 허용된다.

1946년 2월 8일에는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시킨고, 3월 5일에는 토지개혁을 단행하여 남북분단이 기정 사실화된다. 이것은 소련이 처음부터 북한에 공산정권을 세운다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착실히 진행해 가고 있었으며, 신탁통치안이나 이후의 미소공동위원회는 남한과 미군정에 혼란을 주기 위한 술책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소공동위원회에 임하는 소련의 입장은 남북한 단일의 좌파(공산)정권을 세우도록 공작을 해보고, 여의치 않으면 북한만의 공산주의 정권을 그대로 밀고간다는 것이었다.

함께 보기

각주

  1.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7일 > 소련의 조선신탁관리주장에 대해 각계에서 반대견해 피력 동아일보 1945년 12월 28일
  2.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9일 > 조선공산당의 鄭泰植, 개인자격으로 탁치반대를 표명 서울신문 1945년 12월 29일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9일 > 탁치배격각당 각계층 대표자회, 국민운동 실행방법 결의 동아일보 1945년 12월 30일
  3.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30일 >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 선임 서울신문 1946년 01월 01일 (국사편찬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印은 常任委員) ▲洪命憙 ..▲洪南杓 ▲朴憲永 등 포함
  4.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31일 >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파업단행과 상무위원 선정 동아일보 1946년 01월 01일 (국사편찬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洪命憙, ...洪南杓 朴憲永 金若水..
    南北朝鮮, 左右一致, 行動方針을 討議 決定, 反託總動員中央委員會 중앙신문 1946.01.01 상임위원 : 21명중 洪命憙, 朴憲永 있음.
  5.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1부>(17) 삼상회의 보도 동아일보 2004-12-12 : 강목사는 29일 밤이라고 했으나 28일 밤의 착각이라고 한다.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8일 >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信託統治反對國民總動員委員會)」가 설치 동아일보 1945년 12월 30일
  6.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31일 > 조선공산당, 탁치반대전단을 살포 중앙신문 1946년 01월 01일
    元旦의 決意는 託治 排擊!! 共黨서울委員會서 飛檄, 託治는 民族의 恥辱, 戰線 統一하고 走狗輩를 驅逐하자. 중앙신문 1946년 01월 01일
  7.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31일 > 반파쇼공동투쟁위원회결성총회, 신탁안 철폐요구 성명서 발표 서울신문, 조선일보 1946년 01월 01일 - 朝鮮共産黨서울市委員會: 이날 총회는 金台俊의 개회사에 이어 朝共黨 李鉉相으로부터 동회의 취지설명과 결성에 이르기까지의 경과보고.
  8.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6년 1월 1일 > 조선공산당, 탁치문제의 해결방법에 관한 담화발표 조선일보 1946년 01월 01일
    "먼저 민족통일". 공산당 신탁통치반대 방법 闡明 조선일보 1946년 1월 2일
  9. Radio TFGBI #157, Telegram from CG USAFIK to CINCAFPAC 25 Jan. 1946
    Radio TFGBI #157, Telegram from CG USAFIK to CINCAFPAC ; 25 Jan. 1946
  10. 10.0 10.1 주한미군사 2 > 2부. 4장. 점령 첫 해의 미소관계(American-Soviet Relations, The First Year) > 모스크바 회담과 조선 > 후폭풍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1.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6년 01월 02일 > 조공, 3상회담 결의에 지지 표명 중앙신문 1946년 01월 03일
    反託보다 먼저 戰線 統一, 朝鮮共産黨中央委員會 態度 表明. 중앙신문, 1946.01.03
  12. 託治(탁치)는 國際協力(국제협력) 朝共(조공)의 態度表明(태도표명) : 1월 2일 동아일보 1946-01-05 1면
  13.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6년 01월 02일 > 인공 중앙인민위원회, 3상회의 결정 지지 전문 보냄 조선일보 1946년 01월 04일
  14. 신탁통치반대 시민대회. 來 3일 서울운동장서 조선일보 1946년 1월 1일 2면
  15. 1946년 01월 03일 : 반탁대회가 친탁대회로 취지변경 동아일보 1946년 01월 04일
  16.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6년 01월 05일 > 각정당, 조공과 인공의 2일의 찬탁대회 반박성명서 발표 동아일보 1946년 01월 05일 : 찬탁대회는 2일이 아닌 3일에 있었다.
  17.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shab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텍스트가 없습니다
  18. Telegram TFGBI #176 from CG USAFIK to CINCAFPAC 1946-01-30 하지 장군이 맥아더 사령부에 보낸 1946년 1월 30일자 전문.
    미군정청 USAFIK G-2 Weekly Summary #32, 23 Apr. 1946, Incl. #2. 조선공산당이 소련 지시를 받는 문헌적 증거 입수
  19. 박병엽 구술; 유영구, 정창현 엮음,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 전 노동당 고위간부가 본 비밀회동》 : (선인출판사, 2010.11.10.) pp. 27~34, 제1장 김일성과 박헌영의 비밀회동
  20. 孫世一의 비교 評傳 (84)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 信託統治反對鬪爭을 ‘새로운 獨立運動’으로 월간조선 2011년 3월호
  21. 박헌영의 정치노선:상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37) 중앙일보 1992.02.06 종합 11면
    박헌영의 정치노선:하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38) 소의 「찬탁」지지에 겉으로만 따르는 척/남쪽 정세 불리하자 김일성 지지 선회“중위세력 손잡고 사회주의로 통일” 중앙일보 1992.02.10 종합 11면
  22. <비록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 20> 신탁통치 소용돌이(1) 평양 다녀온 박헌영 돌연 "찬탁" 중앙일보 1991.11.21 종합 11면
    <비록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 21> 신탁통치 소용돌이(2) 소 군정, 반탁 고수 조만식에 온갖회유·협박 중앙일보 1991.11.28 종합 11면
    <비록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 22> 신탁통치 소용돌이(3) 박헌영 웃고간 평양 울며 떠났다 중앙일보 1991.12.05 종합 11면
    증언에 나오는 서용규는 박병엽(朴炳燁, 1922 ~ 1998)이 남한에 와서 쓰던 가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