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를 결의한 것이 발표되고, 한국에 이 소식이 전해지자 처음에는 좌우 공히 반탁을 표명하고 반탁운동에 돌입하였다. 해가 바뀐 1946년 1월 초부터 좌익은 돌연 찬탁으로 선회하고, 이후 정국은 반탁과 찬탁 세력간의 갈등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모스크바 3상 회의 이전의 미국의 신탁통치 거론과 국내의 반대 동향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를 결의한 것은 1945년 12월 27일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미국 쪽에서 신탁통치를 거론하고 있었고, 국내에서는 좌우진영을 막론하고 이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0월 20일 > 미국무부 극동과장,미외교정책협의회에서 조선에 신탁실시 제창 매일신보 1945년 10월 23일
-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0월 22일 > 이승만, 민족통전,38선,신탁문제 등에 관해 기자회견 자유신문 1945년 10월 23일
-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0월 26일 > 각정당행동통일위원회, 신탁실시반대 결의하고 성명서발표 매일신보 1945년 10월 29일
-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도 신탁통치에 반대하고 있다. 신탁통치안 반대에는 좌우 구분이 없었다.
- Korean Trusteeship Called 'Unthinkable' Morning World-Herald (미국) 1945.11.21
- 완전독립의 선결조건은 민족통일파괴자를 除함에 잇다 : 우국동지회 1945.12.01 성명서 12월 1일에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있음.
-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6일 > 이승만, 방송통해 신탁통치안을 반대 동아일보 1945년 12월 28일 - 3상 회의 결과 발표 전, 미국 통신 인용.
모스크바 3상회의 결의안 발표 직후의 반탁운동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의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좌우 공히 반탁을 표명하고 반탁운동에 돌입하였다.
12월 27일
-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7일 > 소련의 조선신탁관리주장에 대해 각계에서 반대견해 피력 동아일보 1945년 12월 28일
12월 28일
-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8일 >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 등 42개단체대표자회의, 반탁 결의 서울신문 1945년 12월 30일
-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8일 > 임정, 긴급국무회의 열고 반탁결의문 채택 동아일보 1945년 12월 30일
12월 29일
-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9일 > 각정당 사회단체대표자회의임정에 주권행사 건의 동아일보 1945년 12월 31일
-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9일 > 인공 중앙인민위원회, 탁치배격담화 발표 서울신문 1945년 12월 29일
-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9일 > 군정청 조선인직원, 탁치반대을 위해 총사직 결의하고 시위행진 동아일보 1945년 12월 30일
-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9일 > 미국무성 극동부장 빈센트, 조선탁치에 관해 연설 자유신문 1945년 12월 29일
-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9일 > 아놀드, 기자회견 조선탁치에 관한 견해밝힘 동아일보 1945년 12월 30일
-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9일 > 미육군부, 3국외상회의에서 결정된 조선문제 코뮤니케 발표 동아일보 1945년 12월 30일
12월 30일
- 12월 30일 고하 송진우(1890~1945) 피살 : 오전 6시 15분 종로구 원서동 자택에서 한현우(韓賢宇), 유근배(劉根培) 등 6명의 저격을 받고 사망
-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30일 > 한민당수석총무 宋鎭禹 피살 서울신문, 동아일보 1945년 12월 31일
-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9일 > 한민당 수석총무 宋鎭禹, 반탁투쟁을 역설 동아일보 1945년 12월 29일
1946년 1월 2일
- 臨政(임정)의 佈告(포고)로 不合作(불합작)을 指令(지령) 동아일보 1946-01-02 1면
-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31일 > 임정, 행정권이양 등을 선언하는 포고 발표 동아일보 1946년 01월 02일
국자 제1호(國字 第1號)
1) 현재 전국행정청 소속의 경찰기관 및 한인 직원은 전부 본 임시정부 지휘 하에 예속케 함.
2) 탁치반대의 시위운동은 계통적 질서적으로 행할 것.
3) 폭력행위와 파괴행위는 절대 금지함.
4) 국민의 최저생활에 필요한 식량 연료 수도 전기 교통 금융 의료기관 등의 확보 운영에 대한 방해를 금지함.
5) 불량상인의 폭리매점 등은 엄중취체함.
국자 제2호(國字 第2號) 요지
좌익의 찬탁 선회
조선공산당 등은 1946년 1월 1일까지는 반탁 입장이었으나 1월 2일부터 돌연 찬탁으로 선회하고, 1월 3일에 예정되었던 반탁 집회를 당일날 현장에서 찬탁 집회로 돌변시켜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
- 1946년 01월 02일 : 조공, 3상회담 결의에 지지 표명 중앙일보 1946년 01월 03일
- 1946년 01월 02일 : 인공 중앙인민위원회, 3상회의 결정 지지 전문 보냄 조선일보 1946년 01월 04일
- 1946년 01월 03일 : 반탁대회가 친탁대회로 취지변경 동아일보 1946년 01월 04일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은 1월 5일 11시에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고, 공식적으로 신탁통치을 지지한다는 견해를 밝힌다.
북한의 동향
북한의 소련군정은 일체의 반탁 움직임을 봉쇄하고, 신탁통치 지지 요청을 거부하고 반탁을 고수하던 조만식을 1946년 1월 5일 고려호텔에 연금한다. 이로서 북한 정계에서는는 소련군정에 협력하고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세력들의 정치활동만 허용된다.
1946년 2월 8일에는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시킨고, 3월 5일에는 토지개혁을 단행하여 남북분단이 기정 사실화된다.
함께 보기
-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 위키백과
- 신탁 통치 반대 운동 위키백과
- 신탁통치 오보사건 위키백과
- 김구
- 여운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