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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주현, [https://dl.nanet.go.kr/SearchDetailView.do?cn=KINX2013082067 《문암 박인진의 천도교 활동과 민족운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75집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3. 6) pp.219 ~ 250.<ref>[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776913 문암 박인진의 천도교 활동과 민족운동] KCI 검색</ref>
* 성주현, [https://dl.nanet.go.kr/SearchDetailView.do?cn=KINX2013082067 《문암 박인진의 천도교 활동과 민족운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75집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3. 6) pp.219 ~ 250.<ref>[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776913 문암 박인진의 천도교 활동과 민족운동] KCI 검색</ref>
*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5권 제15 장 4. 박인진도정
*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5권 제15 장 4. 박인진도정
* [http://db.history.go.kr/samil/IDS/DEMONS/N_00098 3월 14일 함남 풍산 이인면(咸南 豊山 里仁面) 시위] 삼일운동 DB - 국사편찬위원회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0091300209204018&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0-09-13&officeId=00020&pageNo=4&printNo=164&publishType=00020 풍산천도교청년회(豐山天道敎靑年會) : 宗敎와 政治의 關係(朴榮燮), 靑年의 自由精神(朴寅鎭)] 동아일보 1920-09-13 4면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0091300209204018&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0-09-13&officeId=00020&pageNo=4&printNo=164&publishType=00020 풍산천도교청년회(豐山天道敎靑年會) : 宗敎와 政治의 關係(朴榮燮), 靑年의 自由精神(朴寅鎭)] 동아일보 1920-09-13 4면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104050020920301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1-04-05&officeId=00020&pageNo=3&printNo=3689&publishType=00020 天道敎靑友黨(천도교청우당) 關北道聯開催(관북도련개최)] 1931.04.05 동아일보 3면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104050020920301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1-04-05&officeId=00020&pageNo=3&printNo=3689&publishType=00020 天道敎靑友黨(천도교청우당) 關北道聯開催(관북도련개최)] 1931.04.05 동아일보 3면

2020년 10월 20일 (화) 17:44 판

혜산사건으로 검거되었을 때의 양일천 기자. 불기소로 풀려났다.

양일천(梁一泉, ? ~ 1946.04.14)은 1930년대 동아일보 기자로 혜산진 지국장(惠山鎭支局長)을 지냈다. 1937년 6월 4일의 보천보 사건 당시 보도기사를 작성했다. 호는 하암(河菴)이다.[1] 해방 후 천도교 청우당(天道敎靑友黨)[2] 중앙위원을 지냈다.[3]

약력

  • 1931년 9~10월 : 동아일보 혜산진 지국 기자로 《장백촌 촌방문(長白村村訪問)》 기사를 22회에 걸쳐 연재.[4]
  • 1932년 2월 15일 동아일보 혜산진 지국장에 임명됨[5]
  • 1936년 12월 23일 천도교 청년당(天道敎靑年黨)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됨.[6]
  • 1937년 6월 4일 밤 보천보 사건 발생으로 다수의 관련 보도 기사 작성.
  • 보천보 사건에 연루된 지하조직을 적발, 검거하는 혜산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불기소로 풀려남.
(혜산사건 구속자들 사진 속에 들어 있으나,[7] 판결문에는 그의 이름이 나오지 않으므로 불기소, 석방된 것으로 보임.)
  • 1938년 3월 1일 동아일보 혜산진 지국장 의원해직(依願解職)[8]
(혜산사건으로 구속된 것이 사임 이유인 듯함.)
  • 1946년 4월 14일 오전 11시 서울 팔판정(八判町)[9] 128번지 자택에서 작고.[1][3]


그가 보천보 사건에 연루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혜산사건으로 구속된 것으로 보아 혐의를 받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재판에 회부되지는 않았으므로 불기소 처분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938년 3월 1일 동아일보 혜산지국장을 사직한 것은 혜산사건 여파로 보이나, 1938년 11월 잡지 《삼천리(三千里)》 기사를 작성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석방되었다.

양일천이 작성한 김일성 관련 주요 기사

양일천의 기사에 나오는 김일성은 보천보 사건의 주역인 동북항일연군 2군 6사장 김일성으로 1937년 11월 전사했으며,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사람이다. 하지만 북한은 김일성이 맞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김일성 회고록 등의 내용도 이에 맞추어 조작했다.


그가 작성한 잡지 《삼천리(三千里)》에 실린 아래 2건의 기사도 김일성과 관련하여 자주 거론된다.

참고 자료

박인진(朴寅鎭, 1886~1939.03.16)[10][11] 천도교 도정(天道敎 道正)[12]

함남후치령(咸南厚峙嶺(함남후치령))이북 풍산(豐山(풍산))삼수(三水(삼수))갑산(甲山(갑산))헤산(惠山(혜산))장백현(長白縣(장백현))각군천도교에서는 지난十六(십육)...
풍산군 읍내에 거주하든 천도교도정(天道敎道正) 박인진(朴寅鎭)씨는 교회용무로 삼수(三水), 갑산(甲山), 풍산(豊山), 삼군(三郡)을 약 一(일)개월간 순회하고 인사차로 지난 26일 헤산 본지국을 내방하였는데 씨의 담에 의하면 삼군중에 조상조냉(早霜早冷)으로 특히 풍산군이 우심하다는 바.......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