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준혁(玄俊爀, 1906.05.13[1] ~ 1945.09.03)[2]은 일제 시기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했다.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로 대구사범학교 교사로 재직시 투옥되기도 했다. 그는 대구사범에서 학생들에게 공산주의보다는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말을 많이 해 주었다고 한다.

해방 직후 평양에서 정치활동을 개시하여 공산주의 조직을 꾸리기도 했고, 평양에 진주한 소련군의 압력으로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가 좌우 동수의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로 개편될 때 조만식 위원장 아래 부위원장을 맡았으나 곧바로 암살당했다.[3]

현준혁 묘비.[4] 1906.05.13 출생, 1945.09.03 희생이라고 되어 있으나, 정확성에 의문이 있다.

대구사범학교 출신인 박정희 전대통령의 은사였다고 한다.[5]

생애

이름 혁의 한자는 爀 과 赫이 혼용되고 있다. 그를 잘 알았던 한재덕(韓載德, 1911~1970)오영진(吳泳鎭, 1916 ~ 1974)은 爀으로 쓰고 있으므로 이것이 맞는 것같다.

현준혁의 약력과 암살에 대해 나옴. 피살일자는 9월 28일, 배후는 김일성, 장시우 등이라 함.

일제하 항일운동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현준혁(玄俊赫) : 1936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여기에는 그의 생년월일이 1904년 03월 13일로 나온다.

해방 후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부위원장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릴 정도로 기독교 세력이 강한 곳이라 해방 당시 공산주의 세력이 상당히 약했다. 이들을 지도하기 위해 서울에서 현준혁을 파견했다고 한다.

그러나 8월 26일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하자 사정이 달라졌다. 소련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는 민족주의자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한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조만식에게 공산주의자들도 동수로 포함시킬 것을 요구하여 건준을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각 16명씩의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로 개편하고 위원장은 조만식, 부위원장은 오윤선과 현준혁 두 사람이 맡게 된다.

온건한 공산주의자였던 현준혁은 조만식에 협력하였다고 한다.

암살 사건에 대한 논란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 1945년 10월 3일자 기사 「현준혁(玄俊赫) 동무를 조(弔)함」[6]. 현준혁 암살 1개월 뒤의 기사이나 피살일자는 나오지 않는다. 우익의 백색테러라 주장하고 있다. 당시 나이가 42세로 나오므로 1904년생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1]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부위원장 현준혁은 위원장 조만식과 함께 소련군 사령부를 방문했다가 같은 차에 동승해서 나오는 길에 총탄을 맞고 사망했다.

그가 암살당한 정확한 일자나 배후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란이 있다.

피살 일자

  • 남한에서는 1945년 9월 28일 또는 9월말 등으로 많이 알려져 있었다.[7][8]
  • 북한에 있다 6.25 때 월남한 김창순(金昌順, 1920 ~ 2007)의 저서 《역사의 증인 (1956)》[9]과 《북한 15년사 (1961)》[10]에서 현준혁 암살 사건을 다루고 있으나, 1956년 저서에는 피살 일자가 나오지 않고, 1961년 저서에 9월 28일이라 하였다.
  • 북한의 묘소앞 비석에는 9월 3일로 적혀있다.
  • 해방 당시 조선에 거주하며 일본인들의 철수를 돕던 모리타 요시오(森田芳夫)의 『조선 종전의 기록[朝鮮終戦の記録]』[11]에는 9월 4일로 나온다.[12]
『현준혁은 45년 9월4일 소련군 환영회에 출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도인민정치위원회 근처에서 저격당했는데 범인은 자동차가 서행하는 틈을 타서 뛰어올라 현을 확인한 다음 권총 한발로 즉사시켰다.』
  • 경성제대 시절부터 그를 알던 유진오(兪鎭午, 1906~1987)는 해방 직후 서울에서 그를 만나 이제 학문 연구에나 매진하자며 서로 의기투합했는데, 그후 현준혁은 평양으로 가서 정치를 하게되고 9월 초에 암살당했다고 하였다.[13][14]
  • 한재덕(韓載德, 1911~1970)은 해방 직후 평양에서 현준혁이 부위원장이던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의 위원으로 있었고, 그 후 김일성 정권에 협력하다 일본 공작원으로 파견나갔는데 1959년 2월 한국으로 귀순했다. 그는 현준혁의 피살 일자를 특정하지 않고, "9월의 태양 아직도 대지를 불태우는 듯한 어떤 날 대낮"이라고만 했다.[15] 태양이 아직도 뜨겁다면 추분 무렵인 9월말 아니라 9월초일 것이다.
  • 극작가 오영진(吳泳鎭, 1916~1974)은 해방 직후 평양에서 조만식과 부친 오윤선(吳胤善)의 일을 돕는 비서 역할을 했는데, 소련군의 평양진주(8월 26일) 이전에 서울로 와서 3주일간 체류하는 동안에 현준혁의 피살 소식을 들었다.[16] 8월 25일경부터 3주간이면 9월 중순 이전에 그 소식을 들은 것이다. 다른 데서는 현준혁의 피살 시기가 9월 초라고 명기하였는데,[17] 평양으로 돌아와서 들었을 것이다.

위와같은 기록들로 볼 때 현준혁의 피살 시기는 9월말이 아니라 9월초인 것은 대체로 분명한 것같으나, 북한이 주장하는 9월 3일이 정확한지는 알 수 없다. 모리타 요시오의 기록까지 종합하면 현준혁의 피살일자는 9월 3일 또는 4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암살의 배후

남한에서는 암살 배후가 김일성이라는 주장이 있어왔으나[7] 9월초에 암살 당했다면 김일성이 9월 19일 원산항으로 입북하여 22일 평양에 도착하기 이전의 일이므로[18] 사실이 아닌 것이 된다. 배후가 소련군이라는 설, 다른 국내 공산주의자라는 설, 우익의 백색테러라는 설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당시 소련군은 암살의 배후를 조사하는데 미온적이었고, 진상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는 공산주의자이면서도 온건파로서 북한 주민들의 신망이 높던 조만식에 협력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암살 당한 배경이라는 주장이 있다. 북한 지역의 공산주의자 중에 가장 신망이 높던 그를 다른 국내 공산주의자들이 암살했을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장시우(張時雨, 1891~1953)[19]가 배후라는 주장이 많다.[7] 한국에는 종래 소련군측이 김일성과 모의하여 그를 암살하기로 하고 장시우를 시켜 실행하게 했다는 설이 많았다. 그러나 김일성이 귀국하기 전인 것은 비교적 확실하므로, 그는 빼고, 소련군측과 현준혁을 못마땅해 하던 다른 공산주의자들이 공모해서 암살했을 가능성은 있는 것 같다.

1947년 7월 여운형 암살 후 한민당은 여운형 참변을 정략화하는 것에 대한 비난 성명서를 발표했는데[20], 거기에는 현준혁 암살이 처음에 우익의 소행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전되었지만 나중에 좌익의 소행으로 밝혀졌다고 했다.

[여운형 암살] 범인은 이북에서 왔다는 혐의가 농후하다. 그러면 呂씨 살해범은 과연 누구일까? 이북에서 왔으면 좌익의 범행으로 볼 수 있지 않겠는가?
평양에서 현준혁(玄俊赫)씨 살해사건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우익의 소위라고 하여서 좌익측에서 대대적으로 선전해 놓고 보니 결국 그 범인은 좌익에 속한 것이 판명되어서 그들의 모략은 민중의 민소(憫笑)를 사고 말았다고 하지 않는가? 금번 呂씨 사건도 그 분류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것은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일까?

해방 직후 평양에서 조만식과 부친 오윤선(吳胤善)의 일을 돕던 극작가 오영진(吳泳鎭, 1916~1974)은 당시 평양의 공산주의자들의 사정에 대해 "국수집 2층에서 조직된 공산당을 돕기위해 서울에서 현준혁을 파견했는데, 국수집파는 서울서 온 현준혁이 헤게모니를 잡을까봐 경계했다. 이들은 사무소를 대화숙(大和塾)으로 옮겼으나 아무런 계획도 실천도 없었고 시민들도 냉담했다. 8월 26일 소련군이 진주하기 전까지는 그들에게는 머리도, 돈도, 힘도 없었다."고 하였다.[21] 즉 평양 현지의 공산주의자들이 서울서 온 인텔리 현준혁이 헤게모니를 잡는 것을 경계했다고 하므로, 이들이 암살의 배후일 가능성이 상당하다.

암살 배후에 대한 오영진의 견해

오영진은 당시 조만식과 부친 오윤선의 일을 돕고 있었으므로 당시 상황에 대해 잘 알만한 위치에 있었다. 그는 《소군정하(蘇軍政下)의 북한(北韓) : 하나의 증언(證言)》에서 현준혁의 암살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22]

[조만식] 선생(先生)의 곤경(困境)을 가장 잘 이해(理解)한 사람으로서 기본동지(基本同志) 이외(以外)의 사람으로 부위원장(副委員長)인 현준혁(玄俊爀)을 꼽아도 무방(無放)할듯싶다. 비록 노선(路線)은 달랐으나 현(玄)은 선생(先生)의 고결(高潔)한 인격(人格)과 치밀(緻密)한 두뇌(頭腦)와 강직(剛直)한 의지(意志)와 열렬(熱烈)한 애족심(愛族心)을 존경(尊敬)했고 선생(先生)은 온건(穩健)한 현(玄)의 성품(性品)과 그의 깊은 교양(敎養)을 아까와 했다. 그는 범백(凡百)의 공산과격파(共産過激派)와는 달리 같이 정사(政事)를 논의(議論)할만 하다. 현(玄)은 평남 개천군(平南 介川郡) 출신(出身)으로 경성제대(京城帝大)를 졸업(卒業)한 후(後) 오래 학생운동(學生運動)을 지도(指導)하던 지식인(知識人)이다. 그러나 현(玄)의 존재(存在)조차 조선생(曺先生)에게는 허락(許諾)되지 않았다.

현(玄)이 인민정치위원회(人民政治委員會)에서 점점 신임(信任)을 얻어가는 기미(氣味)를 알자 김용범(金鎔範) 장시우(張時雨)가 영도(領導)하는 공산당 과격파(共産黨 過激派)는 그를 경계(警戒)하고 감시(監視)하기 시작했다. 그를 중심(中心)으로한 새로운 당내 세력(黨內 勢力)의 형성(形成)을 두려워 한것이다. 그의 존재(存在)로 말미암아 장래(將來)할 당(黨)의 중심세력(中心勢力)의 이동(移動)과 분열(分裂)을 미연(未然)에 방지(防止)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면 그 방법(方法)은? 그들은 소련(蘇聯)의 방법(方法)을 본받는 길 밖에 없었다. 그것이 지상(至上)의 그리고 유일(唯一)의 표본(標本)이기 때문에.

9월초(九月初) 평남지구(平南地區)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은 백주 대로상(白晝 大路上)에서 현준혁(玄俊爀)을 암살(暗殺)했다. 조위원장(曺委員長)과 동승(同乘)하고 철도(鐵道)호텔로 치스차꼬프 장군(將軍)을 방문(訪問)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자동차(自動車)가 호텔에서 지척지간(咫尺之間)인 네거리에 이르자 돌연(突然) 괴한(怪漢)이 차(車)에 뛰어올라 권총(拳銃)을 발사(發射)하였다. 기민(機敏)한 군사령부(軍司令部)의 헌병(憲兵)은 하려고만 했으면, 당장에서라도 범인(犯人)을 체포(逮捕)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눈을 딱 감고 모른 척 했다. 조선생(曺先生)은 『범인(犯人)이 누군지 뻔히 알면서두…』하고 탄식(嘆息)했다. 며칠 후(後) 고 현준혁(故 玄俊爀)을 위하여 성대(盛大)한 장례식(葬禮式)을 거행(擧行)하고 그 시체(屍體)를 장중(鄭重)히 구 평양신사(舊 平壞神社) 자리 해방기지(解放墓地)에 묻었다. 최초(最初)의 피의 숙청(肅淸)이다.

현준혁(玄後爀)의 후임(後任)으로 취임(就任)한 공산당 출신(共産黨 出身) 김유창(金裕昌)은 해방전(解放前)까지 오래동안 평양 남문통(南門通)에서 조선사진관(朝鮮寫眞館)을 경영(經營)하고 있던 사진사(寫眞師)이다. 그는 온건(穩健)한 신사(紳士)이었으나 동시(同時) 사진기술(寫眞技術) 이외(以外)에는 별(別)로 출중(出衆)한 기능(技能)이 없는 무능(無能)한 인물(人物)이다. 공산당(共産黨)은 가장 적임자(適任者)를 선택(選擇)하여 부위원장(副委員長)으로 파견(派遺)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자기(自己)의 의견(意見)을 제출(提出)할 줄 모르는 대신에 당(黨)의 명령(命令)을 충직(忠直)히 이행(履行)하는 『대변인(代辯人)』만이 필요(必要)한 것이다. 김유창(金裕昌)은 이런 의미(意味)에서 최적임자(最適任者)이다.

현(玄)을 암살(暗殺)하고 총무부장(總務部長) 이주연(李周淵)을 매수(買收)하고 동(東) 서(西)평양서장(署長)을 반동음모죄(反動陰謀罪)로 불법체포(不法逮捕) 구금(拘禁)한 후(後) 공산당원(共産黨員)으로 대치(代置)하여 그들은 차차로 본성(本性)을 나타내었다. 그들은 제1단계(第一段階)의 중점적(重點的)인 포석(布石)이 끝나자 이제 공공연하게 위원장(委員長)과 대립(對立)하기 시작했다.

암살 배후에 대한 한재덕의 견해

한재덕은 현준혁과 상당히 친했는데 그의 피살 시기를 "9월의 태양 아직도 대지를 불태우는 듯한 어떤 날 대낮"이라 했다.

또 배후로 소련군정과 김일성이 모의하여 장시우(張時雨, 1891~1953)가 거사를 하도록 유도한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김일성은 아직 귀국하기 전의 일이 확실하므로 김일성과는 무관한 일로 보아야 한다. 소련군정 당국자와 장시우의 관련설은 사실일 수도 있을 것이다.

"동무 玄俊爀(현준혁)"의 暗殺(암살)
下手(하수) 自請(자청)한 張時雨(장시우)
김용범(金鎔範) 장시우(張時雨) 충성경쟁(忠誠競爭)을 이용(利用)
玄(현)의 暗殺 密議(암살 밀의) 綻露(탄로)
스탈린式(식) 肅淸(숙청) 시작


같은 연재물 (4)회에서 한재덕은 자신이 현준혁과 가까왔는데, 그의 당책 자리를 탐내는 자들의 흉탄에 암살당했다고 하였다.

암살 배후에 대한 김창순의 견해

위에서 언급한 김창순(金昌順, 1920 ~ 2007)의 두 저서[9][10] 모두에 소련군과 김일성 등이 현준혁의 급진 공산화를 배격하고 조만식 진영의 민족주의자들과 협력하는 노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암살을 모의하고 장시우가 부하를 시켜 실행하도록 했다고 나온다. 당시 소련군은 범인을 체포해 수사할 생각도 하지 않았고, 언론도 보도를 못하게 하다 며칠 후 조그만 기사로 보도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일성은 아직 귀국도 하기 전의 일이므로 그는 모의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거의 확실하다.

암살 배후에 대한 참고 자료

◎고당과 함께 가다 암살당한 현준혁/적위대복장 청년이 총격/대낮 평양시내서 타고가던 트럭 습격/“민족계열과 친하다” 소 군정에 밉보여
사건 당시 동평양경찰서장(東平壤署長)을 지낸 유기선씨(79·의사·부산시 중구 보수동 1가 130)[23][24]가 최근 주목할만한 증언을 하고있다.

유씨의 증언.

『민족계열이었던 내가 동평양경찰서장을 맡은지 얼마되지 않은 9월초로 기억합니다. 3일 아니면 4일쯤이었을 겁니다. 점심시간이 지나 평상시처럼 서장실에 앉아 있는데 고등과서원(경찰서 직원)들이 헐레벌떡 뛰어들어왔습니다. 조만식 선생과 트럭을 타고 가던 현준혁이 평양경찰서 관내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는 것입니다.

충격이었습니다. 현은 당시 합리적인 공산주의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어 민족진영에 인기가 있었고 조만식선생과도 잘지냈습니다.

깜짝 놀란 마음으로 먼저 조만식 선생의 집으로 부하들과 달려갔습니다. 조선생댁에 가보니 선생은 댁에 와계셨는데 놀라서 정신이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머리에 발찌가 나서 붕대를 두르고 눈이 휘둥그래진 모습으로 당시 정황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유씨가 전하는 조만식선생의 증언.

『나와 현준혁군(조만식선생은 당시 현을 그렇게 불렀다)을 태운 일제 트럭이 평양시 교외의 커브길을 도는데 갑자기 17∼18세 정도로 보이는 적위대차림을 한 청년이 올라타는 거야. 운전사옆 가운데에 내가 앉고 문옆에는 현군이 앉았어. 커브길이니까 속력이 줄어든 트럭에 골목에 서 있던 이 청년이 달려오더니 올라타. 그러면서 트럭문을 잡고 안을 흘끗보더니 현군의 가슴에 대고 권총을 쏘는거야. 땅 땅하는 소리가 몇 번 들렸던 것 같은데 현군이 내 무릎위로 푹 쓰러져. 그래 내가 「현군,현군」하고 소리를 치며 일으켜 세웠더니 가슴에서 피가 콸콸 쏟아졌어. 정신이 아득해지더군. 총을 쏜 청년은 뒤를 흘끗 흘끗 보면서 천천히 골목속으로 사라졌어.』

사후

  • 현준혁은 피살된 며칠 후인 9월 6일 서울에서 구성된 조선인민공화국 전국인민위원 후보 명단에 들어있다. 서울에는 그의 피살 소식이 이때까지도 전해지지 않았다.

현준혁이 암살당한 후인 1946년 3월 1일 그가 재직했던 대구사범학교(邱師) 강당에서 그를 포함한 반일희생자 추도회가 열렸다.

일제시대 그를 검거 투옥했던 고등계 형사 송세태(宋世泰)가 1949년 3월 14일 반민특위 경북지부에 의해 구속 수감되었다.

함께 보기

각주

  1. 1.0 1.1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현준혁(玄俊赫) : 1936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여기에는 그의 생년월일이 1904년 03월 13일로 나온다.
  2. 출생 및 사망 연월일은 북한 묘소 앞의 비석에 적힌 것임.
  3. 국내파 공산주의자 현준혁 암살사건 2018-06-12
  4. 孫世一의 비교 評傳 (77)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 平壤市民衆大會에 나타난 ‘金日成 장군’ 월간조선 2010년 8월호
  5. 조갑제, 박정희 전기 : 사회주의자 현준혁교사
  6. 金南植; 李庭植; 韓洪九 엮음, 한국현대사자료총서(韓國現代史 資料 叢書) 5권 (서울: 돌베개, 1994) p.6
  7. 7.0 7.1 7.2 북한괴뢰집단(北韓傀儡集團)의 내분(內紛) 경찰당국(警察當局) 정보분석(情報分析) ❶ 1957.10.04 동아일보 3면 : 中傷(중상)·謀略(모략)·殺傷等(살상등) 지독한 權力(권력)싸움 連(연)달아爆發(폭발)되는肅淸事件(숙청사건) 쏘·延(연)·남노·국내 4파로 분립
  8. 현준혁(玄俊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9. 9.0 9.1 김창순(金昌順, 1920-2007), 『역사(歷史)의 증인(證人)』 한국아세아반공연맹(韓國亞細亞反共聯盟), 1956 : pp.197~214.
  10. 10.0 10.1 김창순(金昌順, 1920-2007), 『북한 15년사(北韓 15年史) : 1945年8月 - 1961年1月』 지문각(知文閣), 1961, pp.65~69.
  11. 森田芳夫(모리타 요시오), 『朝鮮終戰の記錄 : 米ソ兩軍の進駐と日本人の引揚』, 東京 : 巖南堂書店, 昭和39 [1964]
  12.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12 중앙일보 1991.10.03 종합 9면
  13. 各界元老(각계원로)들의 體驗(체험)을 엮는 長期(장기)시리즈 片片夜話(편편야화) 俞鎭午(유진오) <56> 亞細亞茶房(아세아다방)의 對話(대화) 동아일보 1974-05-06 5면 : "이젠 마음껏 공부나하자" 학문정진(學問精進) 다짐한 현준혁(玄俊赫), 本心(본심)과는 달리 平壤(평양)에 가서 政治運動(정치운동)하다 暗殺(암살)돼
  14. 各界元老(각계원로)들의 體驗(체험)을 엮는 長期(장기)시리즈 片片夜話(편편야화) 俞鎭午(유진오) <23> 朴文圭(박문규)·玄俊赫(현준혁) 1974.03.27 동아일보 5면
  15.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金日成(김일성) 直屬記者(직속 기자)의 手記(수기)〉 (31) 韩載德(한재덕) 1962.06.06 동아일보 2면 : "동무玄俊爀(현준혁)"의暗殺(암살)
  16. 오영진(吳泳鎭, 1916 ~ 1974), ≪소군정하의 북한-하나의 증언 (국민사상지도원, 1952)≫, 복간본 (중앙문화사, 1983) p.52
  17. 오영진(吳泳鎭, 1916 ~ 1974), 같은 책 p.78.
  18. 김일성이 1945년 9월 19일 원산항으로 입북했다는 사실은 1990년대 초 공산권 붕괴 이후에야 처음으로 알려졌다.
  19. 장시우(張時雨, 1891~1953)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 자료대한민국사 제5권 > 1947년 07월 28일 > 한민당, 구국대책위원회의 여운형 참변 정략화 비난 성명서 발표 동아일보 1947년 07월 30일
  21. 오영진(吳泳鎭, 1916 ~ 1974), ≪소군정하의 북한-하나의 증언 (국민사상지도원, 1952)≫, 복간본 (국토통일원, 1983) p.33
  22. 오영진, 《소군정하(蘇軍政下)의 북한(北韓) : 하나의 증언(證言)》 복간본 (중앙문화사, 1983) pp.78~79.
  23.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동평양서장(東平壤署長) 유기선(劉基善)
  24. 유기선(劉基善, 1912~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