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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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연구회 신임 회장에 박태균 서울대 교수[1]
국적태극기.jpg 대한민국
성별남성
출생1966년 12월 31일 (57세)
현직서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
직업교수, 역사학자
성향좌파 학자
학력서울대학교 국사학과 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 석사/박사

박태균은 역사학자이다,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0년부터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2] 미국 하버드대학교 동아시아학과에서 2007년과 2017년 ‘한국현대사’와 ‘한미관계사’로 학부와 대학원 강의를 했으며 계간 역사비평 주간과 서울대 대학신문 주간으로 일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1956~1964년 한국 경제개발계획의 성립과정〉(2000년)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 대학교 옌칭 연구소 방문 연구원(Visiting fellow, 1997년 - 1999년)을 지냈으며, KBS 〈인물현대사〉·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자문연구원(2000년 -), 《역사비평》편집위원(2001년 -),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의 《Pacific Affairs》편집위원(2005년 - )으로 활동 중이다.

-[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대일 협상, 일본의 진정한 사과 거듭 요구해야


저서

  • 《현대사를 베고 쓰러진 거인들》(1994년)
  • 조봉암 연구》(1995년)
  • 《한국현대사강의》(공저, 1998년)
  • 박정희 모델과 신자유주의 사이에서》(공저, 2004년) [3]

이승만 폄하를 위한 팩트 지어내기

역사학자라는 사람이 팩트까지 조작해서 이승만을 폄하하는데 열심이다.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의 한 유명 교수(역사학자)가 2년 전 어느 대중 강연에서 1952년 최초의 국민 직선제로 치러진 대통령 선거를 통해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 대통령을 폄훼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 당시에 문맹률이 높은데 누가 기호 1번 차지하느냐가 되게 중요하거든요. 이승만 대통령이 기호 1번이에요. 당연히 (당선)되는 겁니다. 이건 뭐, 기본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강한 권력을 차지하게 되는 거고요······.”

...........

1952년 8월 5일 전쟁 와중에 치러진 제2대 대한민국 정·부통령 선거에서 기호 1번을 달고 출마한 대통령 후보는 이승만이 아니라 조봉암(曺奉岩, 1898-1959)이었다. 이승만은 기호 2번이었다. 또한 전쟁 상황이었음에도 전국 투표율은 88.09%에 달했다. 사상 처음 치러지는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 국민 다수는 적극적으로 참여했음을 증명하는 놀라운 수치다. 그 결과 74.61%라는 실로 무서운 득표율을 과시하며 이승만은 제2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당시 선거 관련 자료를 조금만 들춰보면 누구나 위의 객관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번을 달고 출마한 조봉암의 선거 포스터도 수없이 발견된다.

그럼에도 대중 앞에서 왼손 검지로 1자까지 만들어 보이면서 이승만이 기호 1번을 달고 나와 문맹의 유권자들은 무조건 1번을 찍었다고 단언하고 있는 저 역사학자는 대체 왜, 무슨 생각으로 그런 뻔한 거짓말을 하는가? 무엇을 바라고, 어떤 정치적 목적으로 그런 가당찮은 허위 정보를 퍼뜨리는가? 직접 확인도 하지 않고 지레짐작을 객관적 사실처럼 꾸며서 말했다면 용서받기 힘든 학문적 부정직(academic dishonesty)이다. 이승만을 폄훼하기 위해 고의로 그런 거짓을 말했다면 이념적 인격 살해이며 정치적 역사 날조이다.

위에서 말하는 서울대 유명교수는 박태균이고, 문제의 날조된 내용은 아래 강연 유튜브 영상에도 나온다. TBC 방송에서 2020. 8. 6. 방송한 내용으로 보인다.[4]

(문제의 내용은 38분부터)


박태균의 이승만 관련 사료 조작은 더 있다.

박태균 등은 미군정 기록을 근거로 여운형 암살의 배후가 이승만이라고 의심하는 주장을 한다. 당시 미군정 기록에는 하지 사령관이 1947년 6월 28일 이승만에게 편지를 보내 이승만김구가 정치적 암살을 포함한 테러사건을 일으키려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사실이 아니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박태균이나 김삼웅은 여기서 김구는 숨기고 이승만만 부각시켜 이를 근거로 그가 여운형 암살의 배후인 것처럼 주장한다. 하지만 이승만은 즉각 이 편지를 김구에게도 알리고 하지에게 답장을 보낸 후 편지 내용을 언론에도 공개하여 7월 2일자 조선일보에 실렸다.[5] 김구의 반박편지도 7월 4일자 동아일보와[6] 경향신문에 실렸다.[7] 또 하지 사령관의 서한과 관련하여 88개 애국단체가 미군정에 항의하는 일도 있었고,[8] 7월 16일 저녁에는 이승만이 하지 사령관의 관저를 찾아 요담을 하기도 했다.[9] 이런 일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불과 며칠 뒤에 이승만이나 김구여운형 암살을 주도했다는 주장은 사실이기 어렵다. 여운형 암살을 실제로 실행한 자들이 이승만이나 김구를 의심하도록 미군정에 역정보를 제공했을 가능성이 있다.

미군정 중위 버치의 이승만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답습

레너드 버치(Leonard M. Bertsch, 1910~1976)[10]는 미군정 당시 중위의 낮은 계급이었으나 하버드 대학 로스쿨을 나와 변호사 자격을 가진 탓에 하지 사령관의 정치 고문이 되어 여러 사안에 개입하였다. 미군정이 이승만을 배제하고, 김규식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좌우합작을 추진할 때 핵심역할을 한 인물이다.[11] 좌파적 성향으로 이승만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박태균이 이승만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것도 이러한 버치가 남긴 기록을 중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승만에 대한 그의 부정적 견해를 버치 문서가 뒷받침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일개 미군 중위에 불과한 버치가 당시의 복잡한 상황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객관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여운형의 공명심 비극적 죽음 자초 허약한 김규식은 스스로 무너져
이런 상황에서 좌익을 다루는 공작을 맡은 사람이 하지의 정치 고문인 버치(Leonard M. Bertsch) 중위였다. 미 오하이오주 애크론(Akron) 출신으로서 1946년 초에 소위로 부임한 그는 비록 계급은 낮았으나 군정청 안에서 가장 우수한 정치군인이었다. 그는 하버드대학 법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매사추세츠의 홀리크로스(Holy Cross)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기억력이 비상했고 문필에 뛰어났으며 형세 판단이 빨랐다. 버치는 자신이 한 신생국가의 창설 과정에서 ‘미국의 세기(American Century)’에 태어난 마키아벨리(N. Machiavelli)인 것처럼 여기고 있었다. 1973년에 커밍스(B. Cumings)가 그를 만났을 때 “나는 세계에서 가장 높이 올라간 중위(the highest ranking first lieutenant in the world)”라고 그는 말했다. 겸손이라는 것과는 담을 쌓은 사람이었다. 교만은 천천히 자살하는 독약임을 그는 몰랐다. 정병준 교수(이화여대)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한국에서 자동차도 많지 않던 그 시절, 1년 동안에 교통법규를 여덟 번이나 위반했다. 한국을 그만큼 우습게 보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는 귀국해서는 변호사 자격마저 정지당한 채 한국에서의 수많은 정치 공작을 가슴에 묻고 평범한 시민으로 삶을 마감했다. 그는 ‘재주는 넘쳤으나 덕이 부족(才勝薄德)한 사람으로 그릇에 넘치게 물을 담으려 했다. 한국의 원로 정객들은 1910년생인, 아들 또래의 그를 보며 시큰둥했다.
그와 달리 미군은 소련군에 필적할 만한 정치 장교를 갖추지 못했다. 하지 사령관은 미국 육군사에서 ‘군인 중의 군인’이라는 칭호를 들었을 정도로 거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 사령관 밑에 조력자가 필요하자 미국은 1946년 초 뒤늦게 레너드 버치 중위를 하지의 정치고문으로 임명했다. 그의 나이는 불과 35세였다.
하버드대 출신인 버치 중위는 자신이 마치 신생국 창설의 주역인 것처럼 행세하며 “나는 세상에서 가장 출세한 중위”라고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연해주 관구 사령관 메레츠코프 대장의 군사위원으로 경험을 쌓은 스티코프 상장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미국과 소련의 대한 정책의 본질을 설명하자면 어느 쪽의 선악 문제가 아니라, 소련의 노회함과 미국의 서툰 대결에서 미국이 비본질적인 결함으로 인해 상처를 입은 것으로 봐야 한다.

한국전쟁을 보는 시각

수정주의 한국전쟁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서울대에서 한국전쟁을 이렇게 교육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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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