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라심 마르티노비치 발라사노프
Gerasim Martynovich Balasanov
1946년 8월 28일 북조선공산당과 신민당이 합당한 북조선노동당 창당대회 주석단. 오른쪽부터 레베데프 소련군정 정치사령관 소장, 김두봉 신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김일성 북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정애 북조선여성동맹위원장, 게라심 발라사노프 소련군정 정치고문.
기본 정보
국적
소련
출생
1903년 7월 21일
다게 스탄 공화국(Dagestan)
사망
1976년 1월 26일
병역
해방 직후 평양 소련군정 대좌(대령)
경력
Cheka-OGPU-NKVD (KGB 전신)
2등 서기관
북조선 주둔 소련군사령관 정치고문
미소공동위원회 소련대표
소련외무성 소속
주일 대사

게라심 마르티노비치 발라사노프(Герасим Мартынович Баласанов, Gerasim Martynovich Balasanov, 1903.07.21 ~ 1976.01.26)[1]는 해방 직후 평양 소련군정의 핵심 인사로 당시 계급은 대좌(대령)였다.[2] 해방 직후 군정기의 문헌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다.

평양 소련군정시기 활동

1947.05.24 서울의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석한 미소 인사들의 비공식 촬영 사진이다. 왼쪽부터 미측 부대표 존 웨컬링(John Weckerling) 준장, 소련측 위원 코르쿨렌코(Korkulenko) 대좌, 둔킨(G. I. Tunkiv), 미 군정 정치고문 아서 번스(Arthur Bunce) 박사, 하지(Hodge) 중장, 소련측 대표 스티코프(T. F. Shtikov) 중장, 미국 측 대표 브라운(Albert E. Brown) 소장, 소련측 부대표 레베데프(N. G. Lebedev) 소장, 미국 측 위원 칼빈 조이너(Calvin M Joyner), 소련군 민정청 정치고문 발라사노프(G. M. Balasanov), 미 군정 정치고문 윌리엄 랭던(William R. Langdon), 미국 측 위원 로렌스 링컨(Lawrence L Lincoln) 대령.

1946년 1월 16일부터 2월 5일까지 서울에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에 참석했고[3], 3월 20일 덕수궁(德壽宮)에서 개최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에도 참석했다.[4] 1947년에도 서울에 왔었다.[5]


1937년 이후로 Cheka-OGPU-NKVD (KGB 전신) 소속이었다.[2]


발라사노프 게라심 마르띄노비치 : 2등 서기관, 북조선 주둔 소련군사령관 정치고문, 미소공동위원회 소련대표, 소련외무성 소속.[6]


1945년까지 주일 소련대사였으며, 1945년 11월 블라디보스톡을 거쳐 평양으로 왔다. 소련 제25군의 정치 고문이다. 영어와 한국어를 할 줄 알며, 일본말은 유창했다.[7] 미군정은 그를 주일 소련대사였다고 했으나, 역대 주일대사 명단에는 없다.[8] 그가 일본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9]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1부>⑬소련은 왜 일사불란했나 동아일보 2004-11-14

레베제프의 보좌진 중 가장 중요한 사람은 게라심 발라사노프 대령이었다. 아르메니아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국가보안위원회(KGB)의 전신인 국가공안부(MGB) 소속으로, 일본 주재 소련대사관에서 근무하면서 ‘극동전문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거기에 힘입어 그는 MGB의 북한지부장으로 임명됐다.

MGB 요원으로 서울 주재 소련총영사관의 부영사라는 대외직명을 가지고 활동하던 아나톨리 샤브신도 발라사노프의 지휘를 받았다.

서울의 소련 부영사였던 아나톨리 샤브신은 1946년 7월 영사관 폐쇄로 평양으로 가서 발라사노프의 부관이 되었다.

약력

Armenian Encyclopedia of the Hayazg Foundation 에 나오는 약력은 아래와 같다.[1]

  • 1903년 7월 21일 Dagestan에서 출생[10]
  • 1932~1935 모스크바 동양학연구소 외교학부 일본학과에서 공부
  • 1937 부터 NKVD 에 소속됨.
  • 1944~1945 외국정보원으로 도쿄에 거주
  • 이후 북한 근무
  • 1951~1954 주 인도 소련대사관 고문 겸 정보요원
  • 이후 KGB 산하 연구소, 학교 등에서 강의
  • 1971년 은퇴.
  • 1976년 1월 26일 사망

소련 군정에서 발라사노프의 역할

국가공안부(MGB)는 국가보안위원회(KGB)의 전신이다.
[pp.154~155] 1945년 9월 21일 소련인민위원회 결정에 따라 일본 주재 소련대사관에서 근무하던 MGB 요원 발라사노프(Gerasim Martynovich Balasanov)가 MGB 북한지부의 책임자로 임명됐다.4) 발라사노프는 소련 군정기간 내내 평양에 머무르다 북한정권 수립 후 떠났다. 북한 정권이 수립(1948. 9. 9)되기 일주일 전인 1948년 9월 2일자 쉬띄꼬프 일기에는 ‘발라사노프에게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 외무성 직제 초안을 작성하도록 지시하다’는 글귀가 있다. 이로 미루어 발라사노프는 북한정부 수립을 끝내놓고 북한을 떠났음을 알 수 있다.

재소 한인 2세 김 이노겐치는 MGB 모스크바 본부의 일본과에서 일하다가 1946년 3월 MGB 북한지부에 파견되어 1949년 5월까지 일했다. 그에 따르면 당시 MGB모스크바 본부에서는 일본과가 한국문제를 관할하고 있었다. 김 이노겐치는 또 발라사노프가 쉬띄꼬프, 레베데프 등과 함께 소련 군부에서 ‘북한정권 창출 5인방’으로 불렸다고 한다.5)

MGB 북한지부는 대외명칭으로 ‘정치고문단’이란 이름을 쓰고 있었다. 1946년 4월 4일 소련 내각회의는 ‘정치고문단 정원규정’을 확 정했다. 이 규정에 따르면 MGB 북한지부는 고문 1명(발라사노프), 부관 1명(샤브신), 서기, 통역 등 총 13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6) 평양이외 도·시·군까지 하부단위를 조직하지는 않았다.

샤브신은 1946년 7월 서울에서 북으로 올라와 MGB 북한지부의 부책임자로 일했다. 그는 일제 시기인 1939년 서울에 소련 총영사관이 개설될 때부터 부총영사라는 위장직함을 가지고 근무하고 있었다. 해방이전부터 한반도에 MGB 거점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샤브신의 부인 파냐 샤브시나(일명 ‘샤브신 쿨리코아’) 역시 MGB 요원으로 샤브신이 수집한 정보를 정리해서 모스크바에 보고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샤브시나는 총영사관 도서실장으로 위장하고 있었다.7)

샤브신은 1946년 7월 월북할 때까지 남한의 공산주의 활동을 배후 조정하는 사령탑이었다. 샤브시나는 1992년 한국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샤브신과 박헌영과의 관계에 대해 “우리는 서울에 가기 전 그에 대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고 해방 후 직접 만나기 직전까지 일본 당국의 눈을 피해 제3자를 통해 광주에 있던 그에게 비밀 메시지도 보냈다.”고 증언했다.8) 이는 MGB가 해방이전부터 박헌영을 꾸준히 관리했다는 사실을 말한다.

3) 김국후, 『평양의 카레이스키 엘리트들』(서울: 한울, 2013), p.40.
4) 전현수, “소련군의 북한진주와 대북한정책,” 『한국독립운동사연구 9』(1995. 12), pp.359-360.
5) 김국후, 『비록 평양의 소련군정』(서울: 한울, 2008), pp.86-87.
6) 전현수, 앞의 논문(주 4), p.360.
7) 김학준, 『북한의 역사 제1권』(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8), p.715.
8)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비록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상권(서울: 중앙일보사, 1992), p.280.

발라사노프의 번스-김일성 면담 주선

발라사노프의 번스(Arthur C. Bunce)-김일성 면담 주선[11]
- 김일성 암살 미수사건 항의 -

...미군정은 이 같은 「위기 정국」이 좌익진영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분석했다. 따라서 미군정은 위기정국을 타개해 나가기 위해서는 사실상 남한의 좌익진영을 지도하고 있는 소군정·북로당 지도부의 의중과 분위기를 읽어내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 즉시 이를 실행에 옮겼다.

미군정은 미소공동위원회의 미국측 대표 중 한 사람인 번스(Arthur C. Bunce)를 46년 10월 3일부터 8일까지 6일간 평양에 밀사로 파견, 김일성 북조선임시인민위원장과 미소공위 소련측 대표 중 한 사람으로 번스의 테이블 파트너인 소군정 정치고문 발라사노프·조만식 등을 만나 북한의 분위기를 파악해 오도록 한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중앙일보」가 최근 구소련에서 단독 입수한 소련 대외정책 고문서 중 「번스와 김일성 등의 특별 면담내용 보고서」에서 처음으로 소상하게 밝혀졌다. 번스 밀사의 평양 방문은 KGB 소속으로 해방 전까지 동경 주재 소련 대사관 공사로 있다 46년 2월부터 평양 주재 KGB 본부 책임자이면서 대외직명은 소군정 사령부 정치고문으로 불리고 있는 막강한 실력자 발라사노프 대령의 초청 형식이었다. 당시 서울에서 박헌영을 비롯한 좌익 진영을 총 지휘했던 샤브신도 발라사노프의 지시를 받을 정도였다.
「46년 10월 6일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실에서 있었던 번스와 김일성의 대화에 대한 기록을 보고합니다」로 시작된 이 고문서는 발라사노프가 당시 소련 외무부 차관 말리크에게 보낸 전문이다. 이 전문 서두에는 이 자리에 발라사노프·샤브신(전 서울 주재 소련 영사관 부영사)·브로스토프(소군정 7호 정치국 소속 장교), 그리고 김일성의 비서 문일 등이 배석했다고 기록돼 있다.(pp. 244-245)
...
김일성 : 좌우통합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우선 민주·진보주의자들을 테러하는 친일 분자들을 당에서 축출해야 한다. 강량욱 목사(김일성의 외조부 뻘로 당시 북조선 임시인민위 서기장)의 아들·딸을 테러분자들이 죽였다(46년 3월). 이 테러분자들로부터 김구의 사인이 있는 문건이 나왔다. 또 남조선에서 좌우익 통합문제를 협의한 후 테러단들이 여운형을 나무에 걸어 교수시키려다 실패하기도 했다.
(당시 좌우합작위 우측 비서였으며 현재 민족통일촉진회 최고위원인 송남헌(宋南憲, 1914~2001)씨는 박헌영 진영 청년들이 서울 신당동 친지 집에 있던 여운형을 높이 10m의 나무에 매달아 죽이려다 실패했었다고 증언했다.)

번스 : 그 테러 미수사건의 배후는 좌익 진영이다. 특히 박헌영이 좌우 통합을 방해하고 있다.

김일성 : 조선 인민과 오랫동안 이탈됐고 조선을 후퇴시키려고 하는 이승만김구 같은 반민주 분자들과 어떻게 통합할 수 있는가. 통합은 오직 조국의 애국자들끼리만 할 수 있다. 김구·이승만 같은 분자들과는 절대 통합할 수 없다.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하』(중앙일보사, 1993), PP. 244-248.
1946년 10월 5일 진행된 조만식과 번스의 회담 내용[12] (번스는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의 경제고문으로 평양을 방문중이었다.)
1946년 10월 6일 진행된 김일성과 번스의 회담 내용[12]

함께 보기

각주

  1. 1.0 1.1 Баласанов Герасим Мартинович Armenian Encyclopedia of the Hayazg Foundation
    Balasanov Gerasim Martinovich 구글 영역
  2. 2.0 2.1 Баласанов, Герасим Мартынович
    Balasanov, Gerasim Martynovich Stalin's Secret Police : 위 글의 구글 영역
  3. 북조선 주둔 소련군사령부와 남조선 주둔 미군사령부 대표자협의회의 결과보고서 한국학중앙연구원
  4. 美·蘇共同委員會 (李元卨) > Ⅴ. 第1次 美·蘇共委의 開幕 國史館論叢 第11輯 (국사편찬위, 1990-07-15)
  5. 共委 蘇대표단 일행, 작일 空·陸 양로로 離京 자유신문 1947년 10월 22일
  6. 해외사료총서 10권 쉬띄꼬프일기 > 쉬띄꼬프 일기(번역) > 쉬띄꼬프 일기 Ⅰ부 > 1946년 9월 9일 한국사데이터베이스
  7. Members of Soviet Delegation: G. M. Balasanov RG 332, USAFIK, XXIV Corps, G-2, Historical Section, Box No. 72, U.S.-U.S.S.R. 3rd Year: AG Transcripts (Radio) Sept.-Nov. 1947 thru U.S.-U.S.S.R. Relations 3rd Year: Electricity, Communism (3 of 5)
  8. List of ambassadors of Russia to Japan Wikipedia
  9. Yossef Bodansky, Crisis in Korea 1994
  10. 다게스탄 공화국 위키백과
  11.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하』(중앙일보사, 1993), PP. 244-248.
  12. 12.0 12.1 해외사료총서 10권 쉬띄꼬프일기 > 쉬띄꼬프 일기(번역) > 쉬띄꼬프 일기 Ⅰ부 > 1946년 10월 7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