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金聖柱), 김성주(金成柱), 김성주(金誠柱) 등으로 기록에 나타나고, 1930년 경에 김일성(金一成), 김일성(金一星) 등의 별명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1938년경부터 한자로 金日成이라 쓰는 이름을 사용한 것이 확인되나, 동북항일연군에서 중국인들 틈에 섞여 활동하며 이름을 김일성 아닌 중국어 발음으로 읽었으며, 1940년 10월 소련으로 도주한 이후 해방될 때까지 소련군에서의 공식적 이름은 金日成의 중국어 발음을 러시아어로 표기한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또는 Цзин Жичэн, Jing Zhichen)이었다. 해방 직후 원산항으로 입북할 때는 자신을 본명 김성주로 소개했고, 평양에 와서는 또다른 가명 김영환(金永煥)을 사용하다 1945년 10월 14일 평양의 대중 앞에 김일성 장군의 이름으로 처음나섰다.

하지만 당시 그의 정확한 신분은 소련군 진지첸 대위였을 뿐 해방전 어디에서도 그가 김일성 장군으로 불렸던 적은 없다. 국내인들은 소련군이 데려와 지도자로 내세운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다 온 사람인지 아무도 몰랐으며, 진지첸 자신도 해방직전 5년간 항일투쟁을 한 것이 아니라 소련군에서 복무하다 왔다는 사실을 끝까지 숨겼다. 또 국내에서 완전한 무명인사였던 약점을 감추기 위해 1920년경부터 조선인들 사이에 유명했던 실체가 불분명한 전설적인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여 가짜 김일성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된다.

본명

그의 본명 김성주의 정확한 한자 표기를 두고는 상당한 논란이 있어 왔다.

김성주(金聖柱)

"육문학교(毓文學校) 생도(生徒) 김성계(金聖桂)"가 바로 북한 김일성이며, 김성주(金聖柱)를 잘못 적은 것이다. 이것이 김성주가 일본측 기록에 나오는 최초의 사례이다
자서전 서두에 필자가 50년전 1900년에 출생했다고 하여 1950년 경 집필한 것임.
조혁군(朝革軍)은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1]을 말한다.
[pp.6 ~ 7] 내가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의 중앙간부(中央幹部)가 되고 조혁군(朝革軍)의 참모장(參謀長)이 됨에 이르러서는 나는 그들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들과 격렬(激烈)한 정면(正面) 충돌(衝突)을 불면(不免)케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나의 동지(同志)들을 많이 죽이고 또 나를 죽이려고 많이 힘썼다. 또 나도 나의 직권(職權)이 있는 한도내(限度內)에서 그들과 여하(如何)한 투쟁(鬪爭)도 불사(不辭)하여 처음에 이론(理論)으로부터 나중에는 실제행동(實際行動)에 이르기까지 치열(熾烈)한 투쟁(鬪爭)을 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실제행동(實際行動)이라 함은 물론(勿論) 서로 총칼을 가지고 상쟁(相爭)하였음을 말함이며, 그때 그들은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책임자(責任者) 현익철(玄益哲), 조혁군(朝革軍) 총사령(總司令) 양세봉(梁世奉)[2], 동참모장(同參謀長) 나를 가리켜 「삼대살인반동영수(三大殺人反動領袖)」라고 불렀던 것이다.
지금 북한(北韓)의 괴수(魁首) 김일성(金日成)은 그의 원명(原名)이 김성주(金聖柱)인 바, 그가 어렸을 때에 그의 집은 장백(長白)에 있었고 그의 부친(父親)은 우리 민족진영(民族陣營)의 일원(一員)이었다. 우리 정의부(正義府)에서 학비(學費)를 공금(公金)으로 주어 길림(吉林) 육문중학(毓文中學) 2학년(學年)까지 공부를 시켰는데, 그 후 그는 조혁군(朝革軍) 제(第)1중대(中隊) 이종락(李鍾洛) 대장(隊長) 아래 있다가 공산주의(共産主義)로 사상(思想)을 전환(轉換)한 것이다. 1929년(年) 내가 길림(吉林)에 어떤 대표(代表)로 가서 있을 때에 그는 상기(上記) 육문중학(毓文中學)에서 공부하면서 길림(吉林)에 있는 소년(少年)들을 몰아가지고 소년대(小年隊)를 조직(組織)하고 그가 대장(隊長)으로 있으면서 나를 찾아 다니던 것이 기억(記憶)되며, 내가 참모장(參謀長)으로 1932년(年) 하(夏) 당취오군(唐聚五軍)과 같이 통화(通化)에 사령부(司令部)를 설치(設置)하고 있을 때 그는 무송(撫松)으로부터 한국공산청년(韓國共産靑年) 수십명(數十名)을 데리고 중국인(中國人) 유본초(劉本初)라는 사람과 동행(同行)하여 통화성(通化城)에 있는 양사령(梁司令)[2]과 나를 찾아와, 자기(自己)네도 항일(抗日)할 터이니 무기(武器)를 달라고 요구(要求)하던 생각이 난다. 그러나 나는 그가 이미 사상적(思想的)으로 우리와는 적대진영(敵對陣營)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치지불리(置之不理)해 보냈던 것도 생각난다. 공산주의(共産主義)는 그의 기도(企圖)가 세계(世界)를 정복(征服)하는데 있기 때문에 그들과 우리와는 언제든지 양립(兩立)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과 타협(妥協)이니 하는 것은 호상(互相) 자기(自己)네의 정략전략(政略戰略)에 의한 일종(一種) 시간(時間)을 쟁취(爭取)하는 수단(手段)에 불과(不過)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성주(金成柱)

  • 1930년 3월 14일 국민부 산하 남만한인청년총동맹(南滿韓人靑年總同盟), 남만농민동맹(南滿農民同盟), 남만여자교육회(南滿女子敎育會) 등 3개 단체를 통합시켜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東省朝鮮人農民總同盟)을 조직한다. 이 동맹의 무송(撫松)·안도(安圖) 지방을 담당할 지부동맹조직위원(支部同盟組織委員)으로 북한 김일성(金成柱)이 선출되었다.[3]
북한 김일성을 보천보 사건 당사자라 하고, 본명을 金成桂라 하였다. (桂는 柱의 오기)

김성주(金誠柱)

최동오(崔東旿, 1892~1963)는 월북한 최덕신(崔德新, 1914~1989)의 부친으로 김일성이 1926년 봄 정의부(正義府)에서 세운 만주 화전현(樺甸縣)의 화성의숙(華成義塾)[4]을 3개월여 다닐 때 숙장(塾長)이었다. 1948년 4월 남북협상 당시 제자 김일성을 만난다며 평양을 다녀왔는데, 6.25 때 납북 당했다고 하나 월북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김성주(金成周)

1930년 6월 27일에 국민부 소년단(國民府 少年團)이 창립되었는데, 단원 52명으로 총대장 이윤홍(李允洪) 아래 제3분대장으로 김성주(金成周)가 나온다. 김성주(金成周)라는 이름은 다른 기록에는 보이지 않으므로 周는 아마도 柱의 오기로 추정되며 김일성이 맞을 것이다.

공개가 금지된 소학교 학적부

대외 열람이 불가능한 자료이기는 하지만 金日成이 어린 시절 장백에서 학교를 다닐 때 학사기록부가 남아 있다.

별명

김일성(金一成)

1931년 3월 및 5월 동아일보 기사

김일성(金一星)

1930년 말 ~ 1931년 초 만주 회덕현 오가자(懷德縣 五家子) 시절 최형우(崔衡宇, 1905~1950)가 지어준 별호

홍종환(洪鍾煥)은 누구인가?

만주 공산 유격대의 김일선과 김일성

  • 검거된 김일성은 명백히 다른 인물

조국광복회와 김동명

보천보 사건의 김일성(金日成)

보천보 사건의 주역인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2군 6사장 김일성(金日成)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으며, 북한 김일성과는 명백히 다른 인물이다.

항일연군 1로군 제2방면군장 김일성(金日成)

소련군 88여단 진지첸 대위

해방 후

원산항 입북 당시 본명 김성주로 소개

해방 후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코예 마을의 88여단을 떠나 1945년 9월 19일 소련군함 푸가초프호로 원산항에 입북할 때 배에서 내리면서 마중나온 인사들에게 자신을 본명 김성주로 소개했다고 한다.

평양에 와서 가명 김영환(金永煥)을 사용

소련군 문서에 1945년 10월 2일부터 진지첸을 김일성으로 바꾸어 적어

전설의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을 자칭

함께 보기

각주

  1.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 백과사전
  2. 2.0 2.1 양세봉(梁世奉, 梁瑞鳳, 梁世鳳) 위키백과
  3. 東省朝鮮人農民總同盟組織에 관한 件 1930-06-25 일자로 길림(吉林) 주재 일본 총영사(總領事)가 외무대신에게 올린 보고서
  4. 화성의숙(華成義塾) 터 - 국외독립운동사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