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소련 연해주 라즈돌노예 마을 남야영의 김일성-김정숙 부부. 오른쪽 맨 앞의 비스듬히 누운 사람이 김일성이고, 앞줄 여자 4명중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김정숙(金正淑, 1917~1949), 세번째가 황순희(黃順姬, 1919 ~ 2020), 네번째가 김철호(崔賢의 처)이다. 이들은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이 쥐어준 권력으로 김일성 일족 세습전제왕조를 만들어 인민들을 70년 이상 노예로 부려왔다.

김정숙(金正淑, 金貞淑, 1917년 12월 24일 ~ 1949년 9월 22일)은 김일성의 처이고, 김정일의 어머니, 김정은의 할머니이다. 김일성이 만주서 소련으로 도주하기 직전인 1940년 가을에 결혼하였다. 장남 김정일(유라), 차남 슈라[1], 장녀 김경희의 생모이다. 김일성은 김정숙 생전에 나중에 후처가 된 김성애(金聖愛)와 바람을 피워 가정 불화가 심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김정일이 계모 김성애를 극도로 증오하여 김일성 사망 후 연금하다시피 하고, 감시하게 했다고 한다.[2][3][4]

생애


김정숙은 아마 학교를 다닌 적이 없는 것으로 보이며 한글도 못 읽는 문맹이었다고 한다.[5]

김일성과 김정숙이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 1940년 10월 23일 만주에서 소련으로 불법 월경해 들어간 직후인 1941년 1월 김일성이 작성한 이력서에는 김정숙이 재봉일을 했다고 적혀 있다.[6]

북한은 그녀가 백발백중의 명사수라고 주장하는데[5], 해방 직후 김일성의 집에 두 번 초대받아 가서 김정숙을 본 적이 있는 한재덕(韓載德, 1911~1970)[7]은 당시에도 김정숙이 총을 잘 쏜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하였다.[8]

金貞淑(김정숙)은 金日成(김일성)이 「소련」으로 들어가던 당시의 아내로, 그 때 그의 「부대」 내에서는 가장 똑똑하고 또 총을 잘 쏘기로 유명하였다는 정평이었다.

김정숙은 88여단의 정식 대원은 아니었으며, 소련군 계급을 부여받은 일도 없다. 다만 부대 관련 일을 돕는 역할은 좀 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간행한 김정숙 전기에 '첫 여성 낙하산兵'이라고 했는데[5] 이는 거짓말이다. 만주에서 그런 일을 했을 가능성은 전무하고 소련에서도 88여단 정식 대원이 아니었으므로 낙하산 훈련을 받았을 가능성도 없다.

김정숙의 소련식 이름은 니나(Нина)였다.[9]

김일성과 결혼

김일성은 1940년 10월 23일 만주에서 소련으로 불법 월경하여 들어가기 직전에 김정숙과 결혼하였다. 김일성과 소련 월경을 동행하였던 서순옥(徐順玉)은 당시의 정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10]

“1940년 8월에 김일성, 강위룡 등 우리 16명은 소련으로 향하여 떠났다. 소련 땅에 들어서기 전에 훈춘의 어느 산곡대기에 서 김일성과 김정숙의 혼례를 하였는데 혁명가를 부르며 오락을 진행하였다. 김일성, 강위룡 등 우리 16명 유격대 전사들은 소련땅에 들어선 다음 김일성 동지가 강위룡과 다른 한 동무를 파견하여 소련 변방 전사들에게 체포당하라고 지시하였다. 체포된 다음에 정황을 소련 당조직에 알리자는 계획인 것 같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체포되어 땅굴 감옥에 감금되었다.”[11]

김일성과의 결혼 배경

만주 유격대 시절 김일성에게는 김혜순(金惠順)이라는 처가 있었고, 김정숙은 김일성의 부하 지갑룡(池甲龍)의 처였다. 그런데 1940년 4월 김혜순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김일성과 헤어지게 된다[12][13][14]. 또 지갑룡은 모종의 임무를 띄고 부대에서 파견나갔다가 기한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죽은 것으로 잘못 알려지게 된다. 이렇게 해서 짝을 잃은 김일성과 김정숙이 결혼하게 된 것이라 한다. 그러나 소련으로 넘어간 뒤 지갑룡이 돌아와보니 김정숙은 이미 김일성과 결혼해 있어, 그꼴을 보면서 같은 부대에 있을 수가 없어 1941년 4월 김일성과 함께 만주로 일시 파견나왔다가[15] 부대로 돌아가지 않고 잠적하였다고 한다.[13][16]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던 김일성의 전처 김혜순은 이후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가 해방 후 북한으로 왔으며, 1994년 김일성 사망 때까지 평양에 생존해 있었다.[17][18]

김일성과의 부부 관계

해방 직후 김일성의 직속담당기자로서 온갖 연설문, 담화문을 대필하다 1959년 귀순한 한재덕(韓載德, 1911~1970)[7]은 1962년 《동아일보》에 『김일성(金日成)을 고발(告発)한다』는 글을 연재했는데[19], 5월 30일 자에 김일성과 김정숙의 부부 사이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는 내용이 나온다. 김일성은 밖에서는 여성을 배려하는 페미니스트처럼 언행을 하고 다녔지만, 집에만 들어오면 아내 김정숙에게는 더 없는 폭군처럼 대했다고 한다.

〈김정숙은 김일성이 소련으로 들어가던 당시의 아내로 그때 그의 부대 내에서는 가장 똑똑하고 또 총을 잘 쏘기로 유명하였다는 정평이었다. 그런데 김일성의 기이한 현상 한 가지가 화제에 오르게 되었다. 김일성이 그 아내를 어떤 회합이나 ‘파티’나 극장에나 동반하는 일이 거의 없으며, 그를 사람 앞에 내놓지 않는 사실이었다. 여성해방을 운운하고 남녀평등권법령을 서두른 김일성이 어찌하여 자기 아내만은 집안 구석에 가둬두고 내놓지 않는가? 하물며 그 여자는 과거 유격대 시대의 동지라고 하지 않느냐는 의문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소련군 측 최고간부들과 어울리는 대대적인 파티가 있어 소련 장군들은 물론 북한 측 고급간부들까지 되도록 모두 부인을 동반하고 나오는 자리에도 어찌된 까닭인지 김일성은 아내를 동반하지 않았다. 그러니 북한의 최고간부 가운데도 김일성의 아내를 본 사람은 극히 적었다.〉

〈나는 전후 두 번 김일성의 가정에 초대받아 그 아내와 애들까지 만날 수 있었다. 그의 아내는 삼십 전후의 키가 조그마한 아주 평범한 가정부인으로 보였는데 그 촌뜨기 같은 소련식 옷차림이 그를 더욱 소박하게 보이게 하였는지도 모른다. 어느 모로 보나 이전에 빨치산 투쟁을 하였다는 여성으로는, 더욱이나 소문 같은 명사수의 여장부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김일성이 예상외로 우락부락 큰소리를 내며 가정폭군 노릇을 하였는데 그 아내는 그 앞에서 벌벌 떠는 꼴이었다. 대개 밖에서 여성을 위하는 체 말이 많은 사람일수록 가정에서는 폭군이라고 했다. 김일성도 예외가 아니었다.〉

김일성이 외부에서는 열렬한 페미니스트처럼 행동하며 남녀평등을 외치고 다녔다는 것은 6.25 전쟁 중인 1951년 체포된 김일성의 전속 간호사 조옥희(趙玉姬)[20]도 증언한 바 있다. 아래는 1951년 3월 1일자 부산 국제신보의 조옥희 인터뷰 기사를 인용한 마국 CIA 문서의 내용이다.[21]

NURSE SAYS KIM IL-SONG SUFFERING FROM HEART AND VENEREAL DISEASE -- Pusan Kukche Sinpo, 1 Mar 51

Cho Ok-hui, a 25-year old former private nurse of Kim Il-song, disclosed in a press interview on 28 February 1951 in the office of Col Kim Ch'ang-yong[22], director of the Joint Investigation Headquarters, that Kim Il-song is suffering from a heart ailment as well as from "various kinds" of venereal diseases. The nurse asserted that Kim Il-song is a feminist in his own way and, vehemently advocating the "equal rights for both sexes" which he incorporated in the constitution of North Korea, takes liberty of "any woman that comes in his sight." The puppet premier is being treated with penicillin and “Sarupalsan” [Salvarsan?][23] injections. He has been a regular patient of the P'yongyang Central Hospital.

Kim Il-song has an 11-year old son, Kim Yu-na, and a 5-year old daughter, Kim Kyong-cha.

사망 원인

김정숙의 사인은 병사(病死)라는 설[24], 아기를 낳다 난산으로 죽었다는 설[20][25], 김성애와의 관계에 대해 항의하다 임신 중에 김일성에게 배를 차여 죽게 되었다는 설[26], 김성애로 인한 가정불화로 자살했다는 설[27][5] 등 여러 주장이 있으나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다.

김일성의 친척인 강명도 경민대 교수는 “실제 김정숙의 산파를 했던 친척의 증언으로는 김정숙이 출산 도중 하혈을 한 상태에서 처리하지 않고 문을 걸어 잠근 채 죽었다”고 했다. 김정숙이 자살했을 때 김정일과 그의 여동생 김경희의 나이는 각각 일곱 살과 세 살이었다.[5]

심지어 김일성이 김정숙을 죽이고 싶어했고, 그로 인해 죽었을 것리라는 주장도 있다.[28]

6.25 전쟁 중에 체포된 김일성의 전속 간호사 조옥희(趙玉姬)는 김일성이 매독에 걸려 606호 주사를 맞는 것을 10여 차례 보았다고 증언했다. 또 본처 김정숙이 어린애를 낳다가 자궁출혈로 죽었다고 하면서 아마 화류병 관계인 듯하다고 했으므로, 문란했던 김일성의 여자 관계가 김정숙의 사망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다.[20][21]

김정숙이 사망했을 당시 남한 신문들은 평양방송을 인용하여 단순히 병사라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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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처(金日成妻) 병사(病死)
<서울 二十三日發 로이타 合同> 23일(二十三日) 밤 평양방송(平壤放送)에 의(依)하면 북한 괴뢰집단 수상(北韓傀儡集團首相) 김일성(金日成)의 처(妻)가 병사(病死)하였다 한다. 그런데 북한공산당(北韓共産黨) 지도자(指導者) 김일성(金日成)은 한국(韓國)이 일본(日本)에 점령(占領) 당(當)하엿을 때 항일전(抗日戰)을 전개(展開)한 위대(偉大)한 한국(韓國)의 애국자(愛國者)의 성명(姓名)을 사칭(詐稱)한 것이다.

신동아 2000년 8월호에는 김정숙의 죽음과 관련한 몇 가지 증언들을 소개하고 있다. 어느 증언이 사실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1949년 9월22일 김정일이 7살 때 사랑하는 어머니가 급사했다. “북한의 고위간부들 사이에 잘 알려진 소문은 김정숙이 6번째 아기를 출산하던 중 난산으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한국에 망명한 고영환은 저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6번째 아이’는 분명 잘못이며 ‘5번째 아이’가 맞다. 그러나 김정숙이 병사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그 이유는 나중에 김일성의 후처가 되는 김성애의 존재 때문이다. 김일성과 김성애의 관계에 대해서 고영환은 김일성 부자와 친했던 여자 빨치산이었던 황순희(현재 북한 혁명박물관 관장)로부터 1970년대 초에 들었다고 하는 귀중한 증언을 소개하고 있다.

“(6·25전쟁이 시작한 해인) 1950년 늦가을부터 겨울까지는 무척 추웠고, 제일 힘든 기간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최고사령부의 퇴각 행렬에 섞여 자강도의 강계, 만포까지 후퇴했습니다. 먹을 것도 없었고 목욕도 못했기 때문에 이가 몸 속을 돌아다녔습니다. 최고사령관 동지(김일성)도 이 때문에 가려워서 어쩔 줄 몰라 했기 때문에 무척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때 그(김일성)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누구보다도 가슴 아파했던 것이 김성애라는 여자였습니다.

김성애는 당시 최고사령부 기술서기, 즉 최고사령관의 기술서기였지만, 김일성과 오랫동안 함께 생활해온 우리들보다 김일성을 귀중히 여기고 사랑했습니다. 그녀는 김일성의 식사 준비와 의복에도 신경을 써서 김일성이 가려워하는 것을 보면 깨끗한 손수건을 김일성의 옷 속에 넣어드리곤 했습니다. 이가 손수건에 모이면 꺼내서 불에 태운 뒤 다시 손수건을 넣어드렸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고영환은 “두 사람의 관계가 이미 전쟁 전부터 시작된 것을 나는 처음 알았다”고 쓰고 있다. 김일성 곁에 있었던 홍순관[29]은 다음과 같이 김정숙의 죽음에 의문을 나타내고 있다.

“나처럼 숙청을 피해 중국에 망명한 전 북한간부 일부는 김정숙이 세번째 아기를 출산하는 도중에 난산으로 죽었다는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시 북한의 의료수준은 그렇게 형편없지 않았으며, 중앙간부를 진찰하는 평양중앙병원 전문의들은 절대로 김일성의 처를 난산으로 죽게 할 만큼 무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이며 김일성의 경력을 밝히는 데 일생을 바친 이명영(李命英, 1928 ~ 2000)은 저서 ‘네 명의 김일성’에서 김정숙의 사망원인에 관하여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30]

“당시 평양에서 유명한 의사였던 조진석(趙震錫, 1901~1990) 박사[31][32][33]장기려(張起呂, 1911 ~ 1995) 박사의 증언에 의하면, 김정숙은 북한의 고급간부들만 진찰받는 특별병원 산부인과 과장 황명곤(黃明坤) 박사 밑에 있던 허신(許信) 박사에게 진찰을 받았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전치태반(前置胎盤)[34](자궁 외 임신)이라는 것은 조금만 늦어도 살릴 수 없는데 김정숙이 바로 그 경우였다고 한다.”

조진석 박사[35]와 장기려 박사는 1949년 9월 김정숙이 사망할 당시 평양에 있다 6.25 때 월남하여 당시 사정을 알만한 위치에 있었다. 만일 당시 평양 특별병원에 산부인과 과장 황명곤 박사와 허신 박사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면 월남한 조, 장 두 박사의 증언은 믿을만하며, 김정숙은 출산중 전치 태반으로 사망한 것이 맞을 것이다.

갤러리

북한의 김정숙 우상화(偶像化)

김정숙의 장남 김정일은 후계자로 지명된 이후로도 계모 김성애와 권력투쟁을 벌이는 한편으로 생모(生母) 김정숙을 우상화(偶像化)하는 일을 추진하였다.

生母偶像化(생모우상화) 작전은 自己美化(자기미화) 속셈
郡(군)·學校(학교) 명칭도 金貞淑(김정숙) 이름 따 개칭 성역화(聖域化)
각종 「회상기(回想記)」 발간 주민(住民)들에 학습(學習) 강요

김정숙의 손자 김정은도 조모 김정숙의 우상화에 열을 올리고 있다. 생모 고용희가 북한에서 천대받는 재일교포 출신이라 우상화에 한계가 있고, 김정은 자신이 "후지산 줄기"라는 비아냥을 당할 우려도 크기 때문이다. 또 조부 김일성과 부친 김정일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자신이 백두혈통이라는 것을 강조는 하고 싶기 때문에 이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조모 김정숙이라서 우상화 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인다고 한다.

함께 보기

각주

  1. 1.0 1.1 김만일 - 위키백과
  2. 北노동당 '금고지기'에 한광상…김일성 부인 김성애 2014년 사망(종합) 연합뉴스 2018-12-27 16:47 : 1928년생이라는 설도 있다고 함.
  3. 통일부 “김정일 의붓 어머니, 김성애 2014년 사망” 중앙일보 2018.12.27
  4. [김씨 일가의 실체] 김일성의 부인 김성애 실성하다 RFA 2012-09-18
  5. 5.0 5.1 5.2 5.3 5.4 최근 발간한 《김정숙 전기》: 백발백중 명사수, 광복 후 다양한 활동 등 김정숙 우상화에 혈안 월간조선 2015년 3월호
  6. [단독] 김일성 소련 ‘붉은군대’ 이력서 단독입수 : 중국공산당 입당 보증인 ‘이청산’은 누구… [주간조선 2551호] 2019.04.01
    [단독] “김일성이 이끌던 조선인 단독 부대는 없었다” : ‘김일성 이력서’ 발굴한 러시아인 학자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주간조선 2551호] 2019.04.01
  7. 7.0 7.1 한재덕(韓載德, 1911~1970) 위키백과
  8.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26) 〈金日成直屬(김일성직속)〉 〈記者(기자)의手記(수기)〉 1962.05.30 동아일보 2면
  9. "소련, 김일성을 임시 지도자로 임명했을 수도" 연합뉴스 2018-11-06
  10. 서재진,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의 신화화 연구》 통일연구원 연구총서 2006-11 pp.206~207
  11. 박창욱 교수 및 권립 교수 인터뷰; 신주백, 《김일성의 만주항일유격운동에 대한 연구》 p. 183.
  12.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처 김혜순이 체포되어 전향했다는 1940년 7월 5일자 조선일보 기사.
  13. 13.0 13.1 장해성, 인간의 운명 : (김일성의 여자, 김정숙 그리고 김혜순의 이야기) NK-PEN 2014-06-28 : Archived 2018.11.06
  14. [생생토크 평양수다] 北, 크리스마스 어떻게 보내나? TV조선 2013. 12. 25 : 김일성 전처 김혜순에 대한 장해성의 이야기가 나옴.
  15. 제88독립보병여단#김일성 인솔 소부대의 만주 파견
  16. 유순호, 《김일성 평전 하권》, 출간 예정
  17. 김일성 가짜설#체포된 김일성의 처 김혜순(金惠順)의 후일담
  18. 문명자(1930 ~ 2008), 《항일무장투쟁 여전사 박정숙, 김혜순 인터뷰 : 나의 사령관 김일성 장군》 월간 말 1994년도 9월호(통권 99호), 1994.9, pp.46-48
  19. 단행본 : 『김일성(金日成)을 고발(告発)한다 : 조선노동당치하의 북한회고록』, 서울, 내외문화사(內外文化社), 1965
  20. 20.0 20.1 20.2 金日成 전속 간호부 趙玉姬, 체포 후 기자회견 부산일보 1951년 03월 01일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金日星(김일성)의 看護婦(간호부) 合同搜査本部(합동수사본부)서 逮捕(체포) 부산일보 1951-03-01
  21. 21.0 21.1 NORTH KOREAN AGENTS CONFIRM DEATH OF SOVIET MILITARY ADVISOR AND ILLNESS OF KIM IL-SONG 미국 CIA 문서 1951년 5월 11일자
  22. 김창룡(金昌龍, 1920~1956) 위키백과
  23. [의과학 칼럼] 최초의 블록버스터 의약품 `살바르산` - 디지털타임스 2014. 11. 25
  24. 6.25北(북)에서 본 證言(증언) <16> 제4부 開戰準備(개전준비) 진행 (1949년) 1980.07.03. 경향신문 3면
  25. 『비화(秘話) 김일성(金日成)과 북한(北韓) : 전(前) 북한군(北韓軍) 사단(師團) 정치위원 여정 수기(呂政 手記)』 : 金聖愛(김성애)는 시종비서 女軍(여군) 출신 戰爭(전쟁) 와중 姙娠(임신)┉소문나자 극비 결혼 동아일보 1990년 5월 13일 5면
  26. 김일성에게 배를 걷어차여 숨진 본처 김정숙 premium.chosun 2014.09.24
  27. "「金正日(김정일) 백두산出生(출생)」은 거짓말" : 蘇(소)「콤소몰스카야 프라브다」紙(지) 보도 1991.12.26 동아일보 15면
  28. 6.25 北(북)에서 본 證言(증언) <16> 제4부 開戰準備(개전준비) 진행 (1949년) 1980.07.03 경향신문 3면
  29. 무정… 비운의 혁명가:하(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14) 중앙일보 1991.10.10 종합 11면
  30. 이명영(李命英, 1928 ~ 2000), 《金日成 列傳》 (신문화사, 1974) p.343 : "金靜淑은 一九四九年에 임신했다가 출산 때 前置胎盤으로 죽었다. 당시 平壤에서 有名한 의사였던 趙震錫 박사와 張起呂 박사(釜山福音病院長)의 證言에 의하면 北韓의 高級幹部들만 출입하는 특별 병원의 産婦人科長 黃明坤 박사 밑에 있던 許信 박사가 金靜淑을 봤는데, 前置胎盤이란 것은 조금만 때를 놓지면 죽는 병이어서 살리지 못했다고 한다."
  31. 장우성(張遇聖, 1912~2005) : 화단풍상 70년 제4장 화단의 형성 : 마지막 평양여행 (30회)
    장우성(張遇聖, 1912~2005),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3312) 제76화 ?맥인맥(31)|평양 구경 중앙일보 1982.01.14 종합 7면
  32. 대한적십자사 혈액원장을 역임하신 조명준(1924~2014) 박사 조명준 박사의 부친이 조진석 박사이다.
  33. 김태호, “독학 의학박사”의 자수성가기: 안과의사 공병우(1907-1995)를 통해 살펴 본 일제강점기 의료계의 단면 의사학 제22권 제3호(통권 제45호) 2013년 12월
  34. 여성질환 전치 태반 삼성서울병원 산부인과
  35. 조진석 박사는 평양에 있을 때 김일성의 맹장염을 진단한 적이 있고, 소련군 의사가 맹장염 수술을 할 때 입회하기도 했다고 한다. : 이명영(李命英, 1928 ~ 2000), 《金日成 列傳》 (신문화사, 1974) p.344
  36. 小林和子(旧姓:萩尾) 著, 『나는 김일성 수상의 하녀였다 (私は金日成首相の小間使いだった)』 : 奥村芳太郎編, 在外邦人引揚の記録 ― この祖国への切なる慕情, (毎日新聞社, 1970)에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