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은 부친 김일성으로부터 북한 최고 권력을 세습하여 셋째 아들 김정은에게 물려준 독재자인데, 권력을 세습하는 과정에서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름, 출생 연도, 출생지 등을 모두 조작하여 백두혈통의 가짜 신화를 만들어 내었다. 여기서는 김정일의 이름을 어떻게 조작했는지 밝힌다.

입증된 김정일의 출생 관련 조작의 사례

김정일의 출생과 관련한 북한의 주장들이 모두 조작이라는 것은 우남위키의 아래 항목들에 밝혀져 있다.

김정일의 이름 조작

북한은 출생 당시부터 김정일이란 이름을 써 온 것처럼 주장하며, 처음에 소련식의 이름을 가졌던 것을 부인한다. 소련식의 이름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그가 백두산 밀영 아닌 소련에서 태어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출생 당시의 이름

김정일은 1941년 2월 16일 소련 연해주의 라즈돌노예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출생 당시의 이름은 소련식의 유라(Юра, Yura)였고, 한국식 이름은 없었다. 유라는 소련 이름 유리(Юрий, Yuri)의 애칭이다.

흔히 소련에서 김정일의 정식 이름은 소련식 작명법을 따라 유리 일세노비치 킴(Юрий Ирсенович Ким, Yuri Irsenovich Kim)[1]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소련에 있을 당시 김일성의 이름은 김일센(Ким Ир Сен, Kim Irsen)이 아니라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또는 Цзин Жичэн, Jing Zhichen)이었으므로[2][3][4] 김정일의 이름도 유리 지체노비치 진(Юрий Жичэнович Цзин, Yuri Zhichenovich Jing)[5]이었을 것이다.

김일성은 북한에 온 뒤인 1945년 10월 2일부터 Ким Ир Сен(Kim Irsen)으로 이름을 바꾸어 쓰기 시작했으므로[4][6] 그때부터 소련군들은 김정일의 소련식 이름도 유리 일세노비치 킴(Yuri Irsenovich Kim)으로 바꾸어 불렀을 수 있다.

해방 후 평양에 온 뒤로 김정일은 실제로는 김유라의 이름으로 불렸고, 여전히 한국식 이름은 따로 없었다.

김정일김경희의 이름이 처음 나오는 CIA의 1951년 문서. 두번째 페이지에 1951년 3월 1일자 부산의 국제신보 기사를 인용했다.

그러나 김정일이 아직 어릴 때라서 그의 이름을 기록한 당시 문헌은 발굴된 것이 없고, 당시 일을 아는 관련자들의 후일 증언만 있다. 그러나 증언만으로는 북한의 생떼를 부정하는데에 한계가 있다.

김정일의 이름이 나오는 최초의 기록

6.25 전쟁 중인 1951년 3월 1일에 부산의 국제신보는 체포된 김일성의 전속 간호사 조옥희(趙玉姬)의 증언을 보도하는데, 김일성의 자녀로 11세된 아들 김유나(Kim Yu-na), 5세인 딸 김경자(Kim Kyong-cha)가 있다고 하였다.[7][8] 하지만 불행히도 국제신보 기사 원본은 남아있지 않고, 당시 작성된 미국 CIA 문서에 그 내용이 인용되어 전한다.

그의 이름이 유라(Yura) 아닌 유나(Yu-na)로 적힌 것은 조금 이상하지만 아마 국제신보에 한자 有羅(유라) 정도로 표기된 이름을 유나로 읽고 영어로 표기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1944년 소련에서 태어나 1947년 평양에서 익사한 김정일의 동생 슈라[9]의 이름을 受羅(수라)로 적은 사례가 있는 것으로 볼 때[10] 가능한 일로 보인다.

이것은 김정일의 이름이 명문 기록으로 나오는 알려진 최초의 사례인데, 당시 그의 이름이 "정일" 아닌 "유라"였다는 것을 입증하는데는 부족함이 없다. 또 이 기사로 미루어 동생 김경희의 처음 이름은 김경자일 가능성이 있다.

이 기록에서 그의 처음 이름이 소련식인 유라로 명백히 확인되므로 이것은 그가 백두산 밀영 아닌 소련에서 태어났다는 확실한 증거이기도 하다.

1959년 김일성의 소련방문 수행 당시 기록

김일성은 1959년 1월 27일 ~ 2월 5일 간에 열린 제21차 소련 공산당대회[11]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는데, 그때 남산 고급중학교 학생이던 김정일도 따라 갔다. 당시 소련대사관 기록에 김일성을 수행한 사람으로 아들 유라(Юра, Yura)가 나오므로[12], 당시까지도 그는 김정일 아닌 김유라의 이름을 사용했던 것은 확실하다.

대표단은 [1959년] 1월 23일에 IL-14 비행기[13]를 타고 모스크바로 출발할 것입니다. 대표단과 함께 수행원 6명이 가는데, 그중 한 명은 김일성의 아들 유라(Юра, Yura)이고, 9학년 학생입니다.

Делегация вылетит в Москву 23 января на своем самолете ИЛ-14. Делегацию будет сопровождать 6 человек, в том числе сын Ким Ир Сена - Юра /ученик 9 класса/.

영역 : The delegation will fly to Moscow on January 23 on its IL-14 aircraft. The delegation will be accompanied by 6 people, including the son of Kim Il Sung - Yura / a student of grade 9 /.

1970년 고바야시 가즈코(小林和子)의 수기에 나오는 유라

해방 직후 김일성 관저에는 고바야시 가즈코(小林和子)라는 일본 여자가 가정부로 있으면서 가사 일과 자녀를 돌보는 일을 도왔다. 그녀는 일본으로 귀환한 후 1970년에 『나는 김일성 수상의 하녀였다 (私は金日成首相の小間使いだった)』라는 제목의 수기를 썼는데, 여기에 김일성의 아들로 유라와 슈라의 이름이 나온다 .[14]

이것은 한동안 김정일의 이름이 나오는 최초의 사례로 알려져 있었다. (위의 1951년과 1959년 기록은 2019년에 처음 발굴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그녀가 일하던 해방 직후 당시의 기록이 아니므로 후일 증언으로 보는 것이 맞다. 이 글이 출판될 당시에는 유라는 김정일로 개명한 뒤인데, 그녀는 개명한 이름 김정일은 몰랐을 것이다. 1970년까지도 김정일의 존재와 이름은 한국이나 일본 등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1974년부터 김정일(金正一)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등장

한국 신문에 김정일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보도되기 시작하는 것은 그가 후계자로 부상하는 1974년부터이며, 한동안 한자로 金正一로 나온다.

1939년 소련태생, 본명 수라, 소련명 유리

1980년 김정일(金正日)로 개명

1980년 10월의 당대회 직후부터 김정일은 이름의 한자 표기를 金正一에서 金正日로 바꾸었다. 이후 한국, 중국, 일본 언론에서도 金正一로 쓰던 이름을 金正日로 바꾸어 적기 시작했다.

이는 모친 김정숙의 이름의 正자와 부친 김일성 이름의 日을 딴 것으로, 부모의 빨치산 투쟁 정신을 계승한 유일한 적통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1994년에 유라에서 김정일(金正一)로 개명한 시기가 1960년으로 밝혀져

1994년 김정일과 남산고급중학 동창생의 증언에 의해 그가 이름을 김유라에서 김정일(金正一)로 개명한 것은 고급중학을 졸업할 때인 1960년 7월인 것으로 밝혀졌다.[15]

김정일은 1957년부터 1960년까지 남산 고급중학교(남한의 고등학교 과정)를 다녔다. 당시 학교 기록에 그는 1941년생이고 이름은 '김유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15][16][17] 조선혁명박물관에 진열된 김정일과 관련된 사적물들 가운데 남산중학교 과정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는데 원인이 당시 성적기록부나 출석부를 비롯한 학교 문건들에 1941년생이고 이름이 '김유라'로 되어있기 때문이라 한다.

신동아 2000년 8월호[18]
한국 중앙일보사 편 ‘김정일, 충격의 실상’에 의하면[15][19],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함께 다녔고 러시아에 사는 김단(金丹)이라는 동창생은 1960년 7월 중순 남산고급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김정일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조선식 이름이 정일이라고 결정되어, 최근 이 이름으로 공민증이 발급됐다. 이제부터 정일이라고 불러줬으면 한다.” 또 당시 발행된 졸업앨범에 김정일은 ‘김유라’라고 기록돼 있다고 하지만,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있는 앨범에 사진이 실리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

김정일은 1959년까지 김유라의 이름으로 학교를 다닌 것이 확인되므로 1960년 7월에 김정일(金正一)로 개명한 것은 사실일 것이다.[20] 이로 미루어보면 형제들 이름에 '일(一)'을 항렬 글자로 쓴 것은 김정일보다 김성애의 아들인 이복 동생 김평일(金平一, 1954 ~ )이 먼저인 것으로 보인다.

각주

  1. 김일센(Ким Ир Сен, Kim Irsen)의 아들 유리(Юрий, Yuri)라는 의미의 소련식 작명
  2. Gavril Korotkov (1925~ )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동아일보사, 1993) 권1 p.162.
  3.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한울아카데미, 2008) pp.61~63, 제3장 제88정치여단
  4. 4.0 4.1 金日成-한국전 관련 舊蘇비밀문건 요지 연합뉴스 1992-06-16 18:15 ;
    Gavril Korotkov (1925~ )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동아일보사, 1993) 권1 pp.179~185
  5.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또는 Цзин Жичэн, Jing Zhichen)의 아들 유리(Юрий, Yuri)라는 의미의 소련식 이름
  6. 소(蘇), 6.25 남침(南侵) 비밀 문건(文件) 공개 동아일보 1992.06.17 일자 2면
  7. 국제신보 기사 원본은 남아있지 않고, 미국 CIA 문서에 인용되어 전한다 : NORTH KOREAN AGENTS CONFIRM DEATH OF SOVIET MILITARY ADVISOR AND ILLNESS OF KIM IL-SONG REPORT May 11, 1951 : CIA 문서
  8. 金日成 전속 간호부 趙玉姬, 체포 후 기자회견 부산일보 1951년 03월 01일
  9. 김만일 - 위키백과
  10. 비화 김일성과 북한 : 전 북한군 사단 정치위원 여정(呂政) 수기 <4> 김성애는 시종비서 여군 출신 1990.05.13 동아일보 5면
  11. 21st Congress of the Communist Party of the Soviet Union Wikipedia
  12. 러시아인 북한 연구자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박사 발굴 자료.
  13. Ilyushin Il-14 Wikipedia
  14. 小林和子(旧姓:萩尾) 著, 『나는 김일성 수상의 하녀였다 (私は金日成首相の小間使いだった)』 : 奥村芳太郎編, 在外邦人引揚の記録 ― この祖国への切なる慕情, (毎日新聞社, 1970)에 수록되어 있다.
  15. 15.0 15.1 15.2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한반도 절반의 상속인 김정일』, (중앙일보사, 1994) pp.52~53
  16. 정창현, 《김정일의 성장과정과 후계체제 확립》 『김정일 연구』 (통일부, 1999.12) p.18
  17. [사건으로 보는 북한] 82년 김정일 백두산출생 신화 NK조선 2002-03-09 : 생모 김정일 낳을 때 소련병영에 머물러 / 김정일 본인 40회 생일 앞두고 출생설 조작
  18. '少年 김정일'을 둘러싼 7가지 미스터리 신동아 2000년 8월호
  19. 韓國·中央日報社 編; 金燦 譯, 『金正日 衝擊の實像』 東京: 德間書店, 2000
  20. John H. Cha with K. J. Sohn, Exit Emperor Kim Jong-Il: Notes from His Former Mentor (Abbott Press, 2012년 2월 29일) p.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