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산사건(獨山事件)은 1933년 6월 5일에 있었던 혜산진(惠山鎭) 경찰서 독산(獨山) 주재소 경관과 대안(對岸) 만주 장백현(長白縣)의 마적(馬賊)으로 추정되는 무장단 50여명 사이에 있었던 교전을 말한다. 경관 6명이 전사하는 등 일본측 피해가 컸다. 조선일보는 호외를 발행하며 이 사건을 보도했다.[1] 이로부터 정확히 4년 후인 1937년 6월 4일 인근에서 보천보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국경 지역에는 만주로부터 무장단의 침입이 헤아릴 수 없이 잦았는데, 그 중에서도 규모가 큰 것이 1934년 1월의 토성습격사건, 1935년 2월의 동흥사건 등이다. 이처럼 유사한 사건이 자주 있었음에도 모두 다 잊혀졌는데, 유독 특별할 것도 없는 보천보 사건만 엄청난 항일 전과로 터무니없이 과대포장되어 알려져 있는 이유는 북한 김일성이 집권 후 자신의 항일업적이라며 대대적으로 선전했기 때문이다. 남한에서도 1990년대 들어 학계가 좌경화되면서 북한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보천보 사건을 교과서에까지 싣는 한심한 작태를 보이고 있다. 보천보 사건 자체도 큰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지만, 그 사건의 주역 동북항일연군의 1로군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으며 북한 김일성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독산(獨山)은 오늘날 양강도 삼지연군 이명수노동자구이다.[2][3]

언론 보도

  1. 혜산진 대안(惠山鎭 對岸)에도 마적부대(馬賊部隊)가 출현(出現) 조선일보 1933.06.06 조간 2면
  2. 무장단 오십명 출현(武裝團 五十名 出現) 경관 4명(警官 四名)을 살상(殺傷) 조선일보 1933.06.07 석간 2면
    혜산진 관내 독산 대안(惠山鎭 管內 獨山 對岸)에서 오일(五日) 아침 격전(激戰) 끗헤
    호외재록(號外再錄)
  1. 山上(산상)에서 突然 射擊(돌연 사격) 警官 四名 戰死(경관 4명 전사) 1933.06.07 동아일보 석간 2면
  2. 越境(월경)한 應援 警官隊(응원 경관대) 共產軍 討伐(공산군 토벌)을 開始(개시) 長白縣 事件(장백현 사건)의 顚末(전말) 1933.06.07 동아일보 조간 2면
  • 조선중앙일보
  1. 국경방면(國境方面)의 무장단(武裝團), 경관대(警官隊)를 포위사격(包圍射擊), 경관 고전(警官苦戰), 전사 6명(戰死六名) 조선중앙일보 1933년 06월 07일 02면
    5일(五日) 함남 혜산진 대안(咸南 惠山鎭 對岸)의 사변(事變)
  2.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경관대 전멸 상태(警官隊全滅狀態), 혜산진 대안 2호언(惠山鎭 對岸 二號堰)에서의 마적(馬賊)과의 충돌상보(衝突詳報) 조선중앙일보 1933년 06월 08일 02면

함께 보기

각주

  1. 무장단 오십명 출현(武裝團 五十名 出現) 경관 4명(警官 四名)을 살상(殺傷) 조선일보 1933.06.07 석간 2면
    혜산진 관내 독산 대안(惠山鎭 管內 獨山 對岸)에서 오일(五日) 아침 격전(激戰) 끗헤 : 호외재록(號外再錄)
  2. 양강도 삼지연군 이명수노동자구 개요 - 북한지역정보넷
  3. 獨山 노동자구 -> 이명수 노동자구
    獨山 노동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