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산사건으로 검거되었을 때의 양일천 기자. 불기소로 풀려났다.

양일천(梁一泉, ? ~ 1946.04.14)은 1930년대 동아일보 기자로 혜산진 지국장(惠山鎭支局長)을 지냈다. 1937년 6월 4일의 보천보 사건 당시 보도기사를 작성했다. 호는 하암(河菴)이다.[1] 해방 후 천도교 청우당(天道敎靑友黨)[2] 중앙위원을 지냈다.[3]

약력

  • 1932년 2월 15일 동아일보 혜산진 지국장에 임명됨[4]
  • 1936년 12월 23일 천도교 청년당(天道敎靑年黨)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됨.[5]
  • 1937년 6월 4일 밤 보천보 사건 발생으로 다수의 관련 보도 기사 작성.
  • 보천보 사건에 연루된 지하조직을 적발, 검거하는 혜산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불기소로 풀려남.
(혜산사건 구속자들 사진 속에 들어 있으나,[6] 판결문에는 그의 이름이 나오지 않으므로 불기소, 석방된 것으로 보임.)
  • 1938년 3월 1일 동아일보 혜산진 지국장 의원해직(依願解職)[7]
(혜산사건으로 구속된 것이 사임 이유인 듯함.)
  • 1946년 4월 14일 오전 11시 서울 팔판정(八判町)[8] 128번지 자택에서 작고.[1][3]


그가 보천보 사건에 연루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혜산사건으로 구속된 것으로 보아 혐의를 받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재판에 회부되지는 않았으므로 불기소 처분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938년 3월 1일 동아일보 혜산지국장을 사직한 것은 혜산사건 여파로 보이나, 1938년 11월 잡지 《삼천리(三千里)》 기사를 작성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석방되었다.

양일천이 작성한 김일성 관련 주요 기사

양일천의 기사에 나오는 김일성은 보천보 사건의 주역인 동북항일연군 2군 6사장 김일성으로 1937년 11월 전사했으며,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사람이다. 하지만 북한은 김일성이 맞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김일성 회고록 등의 내용도 이에 맞추어 조작했다.


그가 작성한 잡지 《삼천리(三千里)》에 실린 아래 2건의 기사도 김일성과 관련하여 자주 거론된다.

참고 자료

박인진(朴寅鎭, 1886~1939.03.16)[9][10] 천도교 도정(天道敎 道正)[11]

함남후치령(咸南厚峙嶺(함남후치령))이북 풍산(豐山(풍산))삼수(三水(삼수))갑산(甲山(갑산))헤산(惠山(혜산))장백현(長白縣(장백현))각군천도교에서는 지난十六(십육)...
풍산군읍내에 거주하든 천도교도정 박인진(天道敎道正(천도교도정) 朴寅鎭(박인진))씨는 교회용무로 삼수,갑산,풍산 삼군(三水(삼수),甲山(갑산),豊山(풍산) 三郡(삼군))을 약 一(일)개월간 순회하고 인사차로 지난 26일 헤산 본지국을 내방하였는데.....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