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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해방 직후 평양이 자유롭던 시기는 단 열흘을 넘기지 못했다.<ref>[[조만식#평양의 자유는 건준과 함께 10일만에 마감]]</ref> 소련군이 진주해 오면서 일제시대보다 더 못한 상황으로 전락해 갔다. 소련군은 도처에서 재물을 약탈하고 부녀자들을 겁탈했다.<ref>[[북한 점령 소련군의 만행]]</ref>  하루에도 수십명이 "동무 잠깐 봅시다"라는 한마디에 끌려나가 행방불명되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8.15 해방 직후 평양이 자유롭던 시기는 단 열흘을 넘기지 못했다.<ref>[[조만식#평양의 자유는 건준과 함께 10일만에 마감]]</ref> 소련군이 진주해 오면서 일제시대보다 더 못한 상황으로 전락해 갔다. 소련군은 도처에서 재물을 약탈하고 부녀자들을 겁탈했다.<ref>[[북한 점령 소련군의 만행]]</ref>  하루에도 수십명이 "동무 잠깐 봅시다"라는 한마디에 끌려나가 행방불명되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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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평양의 자유는 건준과 함께 마감|북한의 자유는 소련군 진주와 함께 10일만에 마감]]}}
*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평양의 자유는 건준과 함께 마감|북한의 자유는 소련군 진주와 함께 해방 10일만에 마감]]}}


==당시 상황을 기록한 문헌들==
==당시 상황을 기록한 문헌들==

2020년 8월 14일 (금) 12:53 판

8.15 해방 직후 평양이 자유롭던 시기는 단 열흘을 넘기지 못했다.[1] 소련군이 진주해 오면서 일제시대보다 더 못한 상황으로 전락해 갔다. 소련군은 도처에서 재물을 약탈하고 부녀자들을 겁탈했다.[2] 하루에도 수십명이 "동무 잠깐 봅시다"라는 한마디에 끌려나가 행방불명되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문헌들

남한 언론의 기사

투옥지사(投獄志士) 2천명(二千名), 백미 1두(白米一斗)엔 2천원(二千圓), 보라! 처절처절(悽絶悽絶)한 이 현상(現狀)을
북한의 선전이 사실인 줄 알고 속아 월북했다 천신만고 끝에 귀환한 학생의 체험담이다. 북에서 지인이었던 이기영 (李箕永, 1895~1984)을 만났는데, 본인은 물론 이강국 (李康國, 1906~1956)도 월북을 후회한다더라고 했다.
棄權(기권)은 國民(국민)의 義務(의무)를 拋棄(포기) 1948.04.30 동아일보 3면
월남한 북로당원 유재민, 이북실정 폭로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일요인이며 북로당원의 일인인 柳在敏은 북조선의 金日成정책이 비민족적임을 지적하고 25일 월남하여 시내 모 여관에 여장을 풀고 있는데 氏는 왕방한 기자와 다음과 같은 문답을 하였다.
(問) 귀하가 월남한 이유는 무엇인가?
(答) 나는 북로당원의 일원이며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일인이다. 그러나 그들의 목표는 조선을 적화하려는 소련의 의도를 그대로 계승하여 인민의 생활문제를 도외시하고 있어 인민들은 의식주 안정을 찾기 위하여 남하하는 것이다. 나도 유엔조위의 來朝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북조선의 유엔위원단에 대한 북협조에 불만을 품고 그리운 고향을 뒤로 남하하였다.
(問) 이북동포들은 남북협상을 어떻게 보는가?
(答) 이북동포들은 남북협상에 하등 기대를 가지지 않고 있는데 도리어 남조선 동포들이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기괴한 일이다. 하여간 이북동포들은 여러번이나 북조선인민위원회의 모략 선전에 속아왔기 때문에 이번 남북협상도 기대하지 않고 솔직히 말하면 총선거의 반대 공작이라는 것은 이북동포들도 잘 알고 있다.
(問) 金九씨는 현재까지 공산주의자들과 적대시하여 왔으며 북조선인민위원회에서는 金九타도라는 구호를 부르짖어왔던 것인데 최근의 金九씨 태도를 이북동포는 어떻게 보는가?
(答) 남조선동포들은 북쪽 동포를 전부 공산주의자들이라고 보는 듯하나 이북동포의 90%가 李박사 노선을 지지하는 우익이고 나머지 10%가 공산주의자들이다. 그리하여 이 90퍼센트에 달하는 우익적 동포들은 李承晩·金九 양씨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숭배하여 왔다. 金九타도라는 구호에 우리 우익에서는 반감을 가지고 왔던 것인데 이제와서 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전조선에 공산주의정책을 감행하려는 金日成파의 책동에 추종한다면 3천만을 지도할 영도자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問) 이북동포들은 5월 10일 실시될 총선거를 어떻게 보는가?
(答) 이에 대하여서는 이북에서 일체 보도도 없고 언론자유가 보장되지 못한 관계상 자세한 내용을 모르고 있으나 유엔위원단 입경을 거절한 소련군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으며 하루바삐 국제무대에서의 우리 독립국가가 실현될 방법을 갈망하느니만치 이번 선거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동아일보 1948년 04월 30일

Pauley 보고서

  • Pauley 보고서 : 1946년 6월 - 트루먼 대통령의 특사로 북한점령 소련군 사령관 치스차코프의 허락을 얻어 1946년 5월 29일 ~ 6월 4일 기간 북한 지역을 돌아보고 대통령에 올린 보고서
Edwin Wendell Pauley, Report on Japanese Assets in Soviet-occupied Korea to the President of the Unites States June, 1946.

[p.6] (b) Throughout the cities and in every factory visited the walls were virtually covered with propaganda posters praising Kim Il Sung, Stalin and the Liberating Red Army, and denouncing Kim Koo and Dr. Syngman Rhee. The most prominent poster displayed was one showing a skull with two snakes coming out of the eye sockets, signifying Rhee and Kim Koo. Hundreds of small posters written in Korean were observed in railroad stations and on the walls of buildings praising Kim Il Sung as a great hero and patriot.
George M. McCune(1908~1948), Korea Today : 북한에서 소련군의 산업시설 철거 반출이 별로 없었다는 Pauley의 보고서에 의문을 표함.

미군정의 기록 문서

p.1 : 1항 - 군대조직 100만 - 김일성 부하들과 일본군 경력 2년 이상자를 훈련시켜 장교로 임용. 만주와 북중국의 일본군 하급병사 출신이 많음.
p.3 : 4항 - 패한 8로군이 북한으로 들어옴. 강계와 평북 주둔. 1946년 9월 3만6천명., 10월 6만명.
p.5 : 13항 - 막대한 농업현물세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 : 현물세 25%는 말 뿐이고, 70~80%도 많이있고, 평균 50%는 됨. 곡물을 소련으로 반출함.
p.8 : 26항 - 북한 전역에 김구와 이승만이 민족반역자 우두머리라는 포스터를 붙임.


North Korea Today, for American Eyes Only (G-2,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August, 1947) : An Anthology of Selected Pieces From the Declassified File of Secret U.S. Materials on Korea Before and During the Korean War (Volume 1), (Seoul, National Unification Board, 1981) pp.1 ~ 40.
pp.9~10 - 김일성 경력

참고 자료

《蘇軍政下의 北韓: 하나의 證言》 국토통일원, 1983 (복간본) - 세로쓰기에서 가로쓰기로 판형을 바꿈.

함께 보기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