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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최근 수정 : 2019년 9월 17일 (화) 12:53
성공회

성공회(聖公會, 영어: Anglicanism, Episcopal Church) 또는 세계성공회공동체(Anglican Communion)는 전 세계 165여 개국, 40개의 독립적이고 자치적인 성공회(관구)로 이루어진 기독교 교파이며, 신자는 약 1억명으로 추산된다.

하나이고, 거룩되고, 공번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임을 믿는다

성공회라는 명칭은 이 교리에서 한글자씩 따서 만들어졌다.


영국의 성공회

영국의 특징

우리가 영국이라 말하는 정식 국가 명칭은 그래이트 브리튼(Great Britain) 혹은 연합 왕국(United Kingdom /약어로 UK)이다. 연합 왕국은 잉글랜드(England), 웨일스(Wales), 스코틀랜드(Scotland), 북 아일랜드(Northern Ireland) 네 개의 구성 국으로 이루어진 연합 국가이다. 오래 전, 브리튼 섬에 게르만족인 앵글로 족과 색슨 족이 침입하여 그곳에 살고 있던 켈트 족을 남서쪽 산악지대로 그리고 북쪽 산악지대로 몰아내고 그들은 기후가 온화한 평야지대를 차지하였다. 이들 나라들이 지금의 웨일스(남서쪽)이고 스코틀랜드(북쪽)이며 중부와 남쪽을 잉글랜드가 차지하였다.

한편, 잉글랜드는 이웃인 아일랜드를 750년 동안 식민지로 지배하였고 신 교도인 브리튼 섬의 사람들을 정책적으로 이주 시켜 가톨릭신자인 아일랜드인들을 지배하였다. 그 가운데 북쪽 얼스터 지방의 신교도들이 20세기 초 아일랜드가 독립한 뒤에 자치를 유지하면서 독립한 나라가 북 아일랜드이다. 재미있는 것은, 올림픽은 브리튼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를 이루나 축구 월드컵, 럭비 월드컵과 같은 단일 종목 대회는 4개의 나라로 각기 출전하여 서로가 겨룬다. 스코틀랜드가 과거에 잉글랜드의 잦은 침략과 전쟁으로 인한 많은 피해를 입고 이에 한이 맺혀있어 종종 연합 왕국에서 독립하려 하였으나 번번히 주민 투표에서 실패하곤 하였다. 스코틀랜드의 분리 독립파는 “스코틀랜드인은 축구나 럭비와 같은 경기에서나 애국심을 발휘 할 뿐이라”고 안타까워한다. 이들은 국왕(지금은 엘리자베드 2세 여왕)을 중심으로 굳게 뭉쳐 살아가고 있다.

잉글랜드의 국 교회는 앵글리칸 처치(Anglican Church / 정식 이름은 Church of England, 우리는 흔히 성공회라 함)이고, 웨일스는 감리교회를 비롯하여 다른 개신교 교파(흔히 비 국교라 함)의 교세가 강하며, 스코틀랜드의 지배적인 교회는 장로교이다. 북 아일랜드는 스코틀랜드 주민이 많이 이주하여 살고 있어 장로교와 앵글리칸의 비율이 비슷하며 원래 주민인 아이랜드 사람들은 가톨릭이다. 이 네 개의 구성 국은 모두 개신교로 교파는 다르나 앵글리칸 처치의 영향 아래 있다. 영국은 산업혁명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면서 19세기 전반부터 약 100년에 걸쳐 세계를 지배한 최 강대국의 지위를 누리다 세계 2차 대전 이후에 그 지위가 과거의 그들이 식민지로 건설한 미국으로 넘어 가게 된다. 우리가 가장 친근한 나라는 미국일 것이다. 유럽 국가 가운데는 독일과 프랑스가 영국보다 우리에게 더 알려져 있고 영국은 이들 나라 보다 덜 익숙하다. 알고 보면, 우리의 주변의 대부분의 것들이 영국적이거나 영국의 영향 아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 이유는 현재 온 세계의 시스템을 포멧(formate)한 나라가 영국이고 사상과 문화, 과학, 종교에서 우리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나라가 영국인 것이다.

사상에서 우리는 과학 철학에 기초한 경험론관념론으로 대변되는 독일 철학보다 익숙하며, 과학에서는 존 뉴톤과 찰스 다윈, 문학에서는 윌리엄 세익스피어, 특히 한국의 장로교감리교를 포함한 개신교회들의 대부분이 영국에서 시작된 교파들이다. 우리가 예배에서 회중이 부르는 찬송가와 성가 곡의 대부분이 영국 음악이거나 그 영향 아래 있는 미국 음악인 것이다. 이런 관계는 영국과 미국의 사이를 아버지와 아들에 비유할 수 있다. 연로한 아버지 영국과 젊은 아들 미국이다. 힘에서는 젊은 미국이며 지혜에서는 늙은 영국이다. 미국이 현재 국력과 과학, 경제에서 영국을 압도하고 있으나 영국과 서로 의존 관계이며 문화와 교회에서는 영국이 미국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영국 국교회의 시작

잉글랜드의 옥스포드대학 교수인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가 교황의 부패와 가톨릭 교리를 비난하면서 종교개혁운동을 시작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는 옥스포드 교수직에서 물러 나게 되었고, 그 뒤에 그의 동료들과 함께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였다. 이 영어 성경은 루터의 독일어 성경 보다 14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그의 개혁 사상이 뒤에 보헤미아(체코)의 종교 개혁가인 얀 후스(1369-1415)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는 진정 종교개혁의 선구자이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은 로마 교황으로부터 무사했으나 죽은 지 44년 뒤에 교황의 명에 따라 그의 시신이 부관 참시되어 옥스포드 근처 강에 그의 빼가 화장되어 버려지게 되었다.

영국의 종교개혁을 시작 한 헨리 8세(1491-1547)는 딸 하나만 있었고 6살 위인 연상의 왕비는 갱년기에 접어든 상태였다. 왕은 아들로 자신의 뒤를 이어 왕권을 강화하려는 욕심에서 왕비와 이혼을 결심하는 데 교황의 허락을 얻지 못하자 로마와 결별하게 된다. 당시, 영국의 종교개혁은 왕이 영국교회의 수장(교황)이 되는 것 외에는 가톨릭교리와 달리하는 신교도들을 이단 죄로 탄압하였다.

헨리가 죽고 신교도들에게 교육받은 그의 어린 아들 에드워드 6세가 9살에 왕이 되면서 신교도 섭정들의 도움으로 본격적인 종교 개혁이 시작된다. 당시 개혁의 주체인 대 주교인 토마스 크렌머는 온건한 루터 사상보다 개혁교회 사상을 받아 들여 개혁을 추진하다 어린 왕이 재위 6년 만에 죽고, 철저한 가톨릭 교도인 헨리의 맏딸인 메리 여왕이 즉위하면서 종교 개혁이 끝나게 된다.

메리 여왕은 잉글랜드의 국교를 가톨릭교회로 복귀시키고 신교도들을 박해하여 300명에 가까운 신교도들을 이단 죄로 처형하였다. 그로 인해, 그녀는 피의 메리(Bloody Mary)라는 오명을 얻게 되었다. 메리 여왕이 즉위 5년 만에 암으로 죽고, 헨리의 둘째 딸인 엘리자벧스 1세 여왕이 즉위하게 된다. 메리 치하에서 살아남기 위해 카톨릭교도로 처신한 엘리자벧스 여왕은 철저한 신교도였다. 그녀의 어머니 엔 볼린과 친척 그리고 그녀를 보위하던 사람들 모두가 신교도였다. 당시 백성들의 대부분은 오래 전부터 내려오던 가톨릭 신앙의 형태에 익숙하였고, 한편에서는 과격한 개혁을 요구하는 청교도 사이에서 중도의 노선을 택하였다. 여왕은 교리의 논쟁이 서로간에 치열해 지자 10년간 설교를 중지 시키면서 갈등을 무마하고 수습하였다.

한편, 대륙에서 프랑스 신교도인 위그노 교도에 대한 대규모 학살과 교황의 여왕에 대한 파문에 따른 결과, 가톨릭교도에 대한 강경한 자세를 보였다. 당시 왕이 파문을 당하면 외국의 침략이나 누구에게 암살 당할지 모르는 엄중한 사태였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교회의 전통과 개혁교회 교리를 적절히 받아드리는 선에서 교회의 개혁을 이루어 잉글랜드의 국 교회(Church of England)가 확립되었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잉글랜드교회는 루터교회와 함께 교회의 전통과 신교 교리가 조화를 이룬 교회로 남게 되었다. 그 당시 가톨릭 교도들은 여왕과 영국에 대한 무력 항쟁도 마다하지 않는 적대적 태도와 청교도들의 과격한 개혁 요구와 교리 논쟁으로 이들 모두 국가로부터 탄압을 받았다.

영국 교회의 개혁운동

유럽 대륙에서 30년 전쟁 뒤에 루터교회에서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난 것과 같이 영국교회 역시 자체 개혁을 위한 복음주의 운동이 웨슬리 형제에 의해 옥스포드대학을 근거로 하여 시작된다. 영국에서 최초로 사용된 복음주의라는 말은 종교 개혁시대에 청교도들이 성서 가운데 복음서를 강조하고 중요시 한데서 시작된 말로 웨슬리 시대의 복음주의와는 그 의미가 다르다.

웨슬리 시대의 복음주의 운동은 자유주의적이고 개신교 사상이 강하며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에 대한 관심과 당시 열악한 감옥의 제도 개선 그리고 노예해방 운동과 같은 사회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많은 결실을 보았다. 19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 영국사회를 지배한 사회 철학과 윤리의 중심에 복음주의가 큰 부분을 담당하였다. 복음주의 신앙이 영국 사회에 물려준 도덕적 기풍은 근면과 노동을 신성하게 여겼고, 점잖음, 절제, 검약, 등의 도덕적 가치를 사회 전반에 걸쳐 유포했다.

요한 웨슬리(John Wesley)와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는 두 사람 모두 영국교회 목사로 그들은 영국교회 성직자임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동생인 찰스 웨슬리는 영국 찬송가 작가로 크게 공헌하였다.

복음주의는 심오한 사상을 전파하기보다는 영혼 구제에 관심을 쏟았고 감정주의의 특징을 가지고 있어 이에 반대되는 옥스포드 운동(Oxford Movement / 옛 교회의 전통을 회복하자는 운동)이 시작하게 되었다. 옥스포드운동의 주창자들은 옥스포드대학의 학자이자 목사들로 잃어버린 기독교 신앙의 전통을 회복하고 영국교회에 예전과 신학을 포함 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인 “내 갈길 멀고 밤은 깊은 데”의 찬송 작가인 존 헨리 뉴먼은 가톨릭 교회에 대한 반발이 아직 심한 나라에서 가톨릭교회로 개종하여 신앙의 배신일 뿐 아니라 이성의 배반으로 받아들여져 이를 계기로 옥스포드운동은 끝나게 된다. 이 옥스포드운동은 예배의식과 예배음악 그리고 교회 건축에 가시적인 유산을 남김으로 영국교회가 복음주의로 인한 쏠림 현상에서 균형을 잡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특별히 예배에서 오르간 사용을 적극 권장하였다.

이 운동의 결과, 영국교회에서 고교회(high church 예배의식과 교회 전통을 중시하는 교회)파로 불리는 앵글로 가톨릭(Anglo-Catholic) 교회가 시작되었다.

앵글로 가톨릭(Anglo-Catholic) 교회

앵글로 가톨릭 교회는 앵글리칸 가톨릭(Anglican Catholic) 교회라 불리기도 하는 데 이 교회는 위에서 설명한 옥스포드운동의 결과물이다. 이 교회는 영국교회안의 복음주의 교회(low church) 그리고 자유주의 성향의 광교회(broad church)파와 함께 하나의 분파로 우리 말로는 고 교회(High Church)라 하는 데 그 이유는 예배의식과 예배음악에서 교회 전통을 철저히 따르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국의 교회 예배에 참석하여 그 교회의 성향을 파악하기는 매우 어렵다. 영국에서는 분파 사이의 특징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미국의 동부를 중심으로 앵글로 가톨릭교회가 아직 꾀 남아 있다.

앵글로 가톨릭교회는 한국의 성공회도 관계가 있다. 앵글로 가톨릭교회는 외형적으로 로마 가톨릭교회와 구분이 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개신교 교리를 따르는 영국교회이다.

  • 첫째, 이 교회의 성직자는 목사가 아닌 신부(father)라 부른다. 그러나 이들은 성공회 목사이다. 목사가 아닌 신부라 불리나 가톨릭과 달리 독신이 아닌 결혼 할 수 있는 성공회 성직자이다.
  • 둘째, 미사나 아침, 저녁 기도회에서 가톨릭교회 전통을 따르며 음악 역시 단 선율의 그레고리안 찬트를 주로 사용한다. 시편을 노래 할 때도 오르간 반주에 화성을 붙여 노래하는 앵글리칸 찬트가 아닌 가톨릭교회 전통의 단선율의 무반주 시편창으로 노래한다.

미국에서 가톨릭교회 전통의 수준 높은 미사나 아침, 저녁 기도회를 경험하기 위해서 앵글로 가톨릭교회 예배에 참석하면 된다. 그 만큼 일반 가톨릭교회보다 더한 예배 의식과 음악이 더 엄중하고 성가대의 수준이 높기 때문이다.

미국의 성공회

우리는 미국을 청교도의 국가로 알고 있으나 정확히 말하면 영국의 국교도와 청교도들이 함께 세운 개신교 국가이다. 영국에서 1673년 반 가톨릭법인 심사령이 발효되면서 국교도가 아닌 가톨릭교도와 비국교도(국교도를 제외한 개신교도)는 공직을 맡지 못하도록 규정되었고, 옥스포드와 캠브리지대학 진학마저 제한되었다. 영국에서 이러한 차별로 많은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이주하였고, 한편으로는 영국의 식민지인 미국에 지도자와 관료로 국교도와 성직자들이 함께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미국의 대통령 45명 가운데1/4인 12명, 의회의 의원과 연방 대법원 판사의 거의 반에 이르는 사람들이 성공회 교인이라고 한다.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 전쟁에서 승리한 뒤에 미국의 영국교회 이름이 바뀌게 된다.

영국교회의 수장(교황)이 영국의 왕이고, 당시 서로 간의 전쟁이 막 끝난 상태에서 감정이 격화되어 미국인 감독(주교 / Bishop)을 뽑는 데 영국이 거부하였다. 이에 스코틀랜드 성공회(Scottish Episcopal Church)가 미국 성공회의 감독을 선임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를 계기로 미국 성공회가 스코틀랜드 성공회의 명칭을 빌어 Episcopal Church(감독교회라는 뜻)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보통 성공회라는 이름으로 영국교회를 부르고 있는 데 영국을 포함 한 영연방(영국 왕이 형식적이나 국가의 원수인 나라)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등에서는 앵글리칸 처치라 하며 그 외의 국가는 성공회(Episcopal Church)라 한다.

한국의 성공회

서울 성공회 성당

한국 성공회는 1890년 무렵 한반도에 보급되었으며, 탤런트 사미자, 한화그룹 창업주 김종희 회장과 김승연 회장 등이 성공회 신자로 알려져있다.[1] 가톨릭적 전통을 강조하는 선교 단체인 U.S.P.G 에 의해 시작되어 교회조직, 신앙태도, 예전등에서 가톨릭적 영국교회(Anglo-Catholic)로 개신교의 이미지보다 가톨릭교회 경향이 두드러지게 보이는 교회로 성장해왔다. 이러한 배경에서 목사를 신부로 부르며 개신교 용어인 감독보다 주교라는 명칭등 가톨릭 교회 용어를 많이 사용한다. 교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은 신부가 결혼하는 교회라고 이해하고 있는 정도이다.

한국 성공회에 관한 한겨레신문 기사에서 성공회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중간 정도의 교회로 정의했다.[2] 성공회는 교리에서 개신교이며 예배 의식은 교회 전통을 따르고 있는 데서 한국 성공회가 오해받고 있다. 한국 성공회교회는 교세가 약해 기대하기는 어려우나 다른 나라의 영국교회와 성공회교회는 예배와 예배음악에서, 특별히 높은 수준의 성가대로 모범을 보이며 다른 교파 교회의 교회 문화에 영향을 주고 그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한국 성공회의 좌편향

한국 성공회는 정치와 사회운동에 과도하게 참여하여 교회의 발전과 내실을 기하지 못하고있다. 소위 진보라고 하는 사회주의 이념을 가진 사람들의 온상이 한국 성공회의 현실이다. 특히 성공회대학교은 좌편향 되어있는 대학교로 알려져있다.

같이보기

성공회대학교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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