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왜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했나? 이승만은 분단의 원흉?

  • 일시 : 2015년 5월 13일 (수) 오전 10시
  • 장소 : 자유경제원 5층 회의실
  • 발제 : 남정욱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 토론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김학은 (연세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조우석 (문화평론가)


이승만은 왜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했나? 그는 분단의 원흉인가?

  • 발제문:
  • 남정욱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1.

박정희에 대해서는 나름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조차 이승만에 대해서는 결사적으로 완고하다. 그 사람, 이미 역사적으로 평가가 끝난 인물 아니에요? 되묻는다. 역사적인 평가가 끝났다니 이 무슨 겸허하지 못한 발언인가. 기원전 3~2세기의 100여 년 동안 로마와 카르타고 간에 벌어진 전쟁을 포에니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묶게 된 것은 그 한참 후의 일이고 17세기 초의 30년 전쟁은 20세기 중반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야 그 의미가 명확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역사까지 들먹이며 평가가 끝났네 어쩌네 하는 것은 심각한 역사 조급증이 아닐 수 없다. 당대의 사건이 지니는 의미는 대부분 훨씬 나중에 밝혀진다. 그 사건이 가져온 모든 파장이 완결된 후에야 그 사건은 온전한 역사가 되는 것이다(해서 역사의 반대말은 ‘기억’이다. 기억은 불분명하고 불완전하며 편파적인데다가 자기중심적이다. 어떤 사실이 역사가 되기 위해서는 일단 그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다 세상을 뜨고 없어야한다.

해서 현재는 대략 50~70년 전 정도까지를 의미하고 그 이후에 역사가 된다). 이들은 단지 이승만의 모든 것이 싫은 것이다. 그래서 이승만의 독립운동조차도 오로지 사리사욕의 영역으로 간주한다. 무장 독립 운동에 대해 반대했다는 사실은 이런 분들에게 절호의 찬스다. 이승만은 이렇게 말했다. “얼마 안 되는 무력을 써버려 장래에 원기를 다 탕비해 놓고 앉아 만 리 같이 창창한 독립운동의 길을 어찌 하고자 하느뇨.” 얼핏 들으면 김을 빼는 발언이다. 그러나 독립운동은 말로, 기개로,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승만은 왜 무장 독립 운동에 반대했는가. ‘1818중립법’이라는 것을 들어 본 사람이라면 이승만 노선에 대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다음은 김학은 교수의 글에 나오는 내용이다. 1818 중립법은 1818년 4월 20일 미국 의회를 통과한 법률이다. 이 법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미국과 평화 관계에 있는 외국 군주의 영토나 지배자를 목표로 그곳에서 수행하려는 어떠한 군사적 원정이나 계획을 시작하거나 착수하거나 그 수단을 제공하거나 준비하는 자는 유죄이다.


(2) 미국 관할 내에서 외국 군주, 식민지, 지역, 또는 국민에 봉사하기 위한 임관을 수락하거나 이의 사령을 한 모든 미국 시민은 중한 범죄를 범한 것으로 간주한다.

(3) 모병하거나, 스스로 입대하거나, 입대할 의도로 관할권을 벗어나는 타인을 고용하거나 구하려는 자는 유죄이다.

(4) 어떤 선박의 장비를 갖춰 무장시키는 자, 이를 시도하는 자, 또는 설비하거나, 개조하거나 무장하는 데 고의적으로 관여하는 자는 유죄이다.

(5) 이러한 군함, 순양함, 기타 무장 선박의 화력을 증대, 증강시키는 자, 증대되거나 증강하도록 조달하는 자, 또는 증대시키거나 증강시키는 데 고의로 관여한 자는 유죄이다.

(6) 세관원은 명백히 군사목적으로 건조됐거나 장비를 갖춘 모든 선박은 압류한다.


정리해보자. 당시 일본 국왕은 미국과 평화관계에 있으므로 그를 목표로 한 군사적 행동은 안 된다는 것이다. 당연히 군사를 모으는 것도 불가다. 훈련 시켜도 싣고 갈 수가 없다. 아무런 대안이 없는 것이다. 미국은 왜 이런 법을 통과시켰을까. 미국은 여러 민족이 모여 있는 나라다. 민족마다 자기 사정을 내세워 군대를 만들 수 있도록 허용하면 미국이라는 나라의 단결이 깨진다. 그게 이유였던 것이다. 게다가 당시 미국에는 나라가 없는 민족이 우리뿐이 아니었다. 아일랜드민족, 체코민족, 슬로바키아민족, 아르메니아민족, 폴란드민족, 헝가리민족 등이 나라 없는 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럼 방법은 하나뿐이다. 모병금지법을 채택하지 않은 국가를 골라 무장 투쟁을 모색하는 것이다. 소련과 중국이 일차 후보였다. 그러나 국제 정치의 냉혹함과 국가 이기주의는 두 나라라고 다를 까닭이 없었다. 법으로 금지하지만 않았을 뿐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얘기다. 실제로 소련은 1차 세계대전 와중에 소련에 주둔하던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무장해제를 명했다. 중국도 만주에 있는 조선인에게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당시 대부분의 유럽 국가는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고 가재는 결국 게 편인 것이 세상의 인심이었다. 이 상황에서 무장 독립 투쟁은 전망이 없는 단기적 이익을 노린 기회주의에 불과했다. 이승만이 외교독립론을 주창한 까닭이다.


2.

이승만 폄하 주장은 분단 책임론으로 이어진다. 이 책임론의 앞부분에는 미국 책임론이 먼저 등장한다. 미국이 군사 분계선으로 38선을 확정한 것은 사실이다. 물론 이에 동의한 소련의 책임도 있지만 먼저 제의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사실 한반도의 분할 논의는 오래전부터 주변 강대국들 사이의 협상 단골 메뉴였다. 힘의 균형이 팽팽해 사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으면 어김없이 조선의 분할이 식탁 위로 올라왔다. 159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 중 명나라에 국서를 보내 조선 분할을 타진했다. “조선 8도 중 남쪽 4도를 우리에게 준다면 전쟁을 그치겠다.” 1894년에는 영국 외무장관 존 킴벌리가 청나라와 일본에게 서울을 경계로 조선을 나눠 가지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1896년 일본 특사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러시아에게 39도선을 경계로 조선을 쪼개자고 제의했다. 1903년에는 주일 러시아 공사 로마노비치 로젠이 일본에 한반도 분할을 요청했다. 정말 짜증난다. 우리는 완전히 ‘밥’이었다. 홍어생식기의 가치에도 미달하여 그것의 열 배는 만만한 게 조선이었고 그 불쌍한 땅은 당시 주변국들이 필요에 따라 나눠 갖는 깍두기 같은 존재였다. 하긴 피터지게 싸우느니 그 편이 외교적으로 아름답긴 했을 것이다. 그게 현실이 된 것이 48년 분단인 것이다.

분단과 관련된 48년 이전 상황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43년 무렵 연합국측은 전쟁이 승리로 끝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종전 이후의 상황을 논의하기 위해 연합국 대표들이 모인 것이 43년 카이로 회담이다. 여기서 한반도 문제가 처음 논의된다.


결론은 ‘전쟁이 끝난 다음 조선을 바로 독립시키지 않는다. 대신 신탁통치를 실시한다.’였다. 다른 사안도 많은데 오래 다루지도 않았을 것이다. 뭐 영양가 있는 나라라고. 45년 얄타 회담에서도 조선 문제가 나왔지만 결론은 예전 의결안 그대로 통과. 아, 조금 논의가 발전된 내용도 있다. 신탁 통치 기간이다. 루스벨트는 한 20~30년 어때? 라고 말했고 스탈린은 좀 길지 않아? 대꾸했다. 루스벨트 발언의 20~30년은 나름대로 계산의 결과가 아니라 무관심이 그 본질이다. 어쩌면 한 백 년 어때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회담 말미에 루스벨트는 일본이 극성스럽게 버티니 독일이 항복해서 여유가 생기면 대일본전에 참전해 달라고 요청한다. 스탈린은 독일이 항복하면 두 달 후에 참전하겠다고 약속한다. 45년 5월 독일이 항복한다. 그 사이 미국의 사정에 변화가 생겼다. 원자폭탄 실험에서 성공을 한 것이다. 굳이 대일전에 소련을 끌어들일 필요가 없어졌다. 그렇다고 지난번에 말한 거 없었던 일로 해도 돼, 하기는 좀 그랬겠지만.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리틀 보이’가 떨어진다. 다음 투하 계획은 8월 9일이었다. 스탈린은 다급해졌다. 8월 9일에 2차 폭탄이 떨어지고 바로 일본이 항복을 해 버리면 자기들의 주장할 몫이 줄어들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이미 항복을 준비 중인 일본에 서둘러 선전포고를 한다. 8월 8일의 일이다. 말은 이랬을 것이다. 약속대로 독일 항복 후 두 달 후 참전했음.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팻 맨’이 떨어지는 동안 소련군은 외몽고, 만주, 한반도 동북단, 남부 사할린, 쿠릴 열도 등에서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왔다. 일본은 독일의 경우처럼 분단만은 막아야 한다는 절박함에 8월 10일 전격 항복한다. 초조해 진 것은 미국이다. 소련의 진격이 예상보다 훨씬 빨랐던 것이다. 소련이 한반도를 단독으로 점령하는 사태를 막기위해 미국은 8월 11일 ‘일반명령 1호’를 공표하고 소련, 영국, 중국 등에 통보한다. 정확히는 미국이 아니라 연합국 사령관의 명령이 일본군 대본영을 통해 자국 군대에 하달됐다. ‘일반 명령 1호’의 내용은 38선을 경계로 미군과 소련군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는, 그러니까 38선 이북의 항복은 소련이 받고 그 밑으로는 미군이 일본으로부터 받는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 공표를 통보해놓고 미국은 속을 태웠다. 스탈린이 웃기시네 싫어, 하면 그냥 끝나는 문제다. 뭘 그리 바쁘게 오나, 일단 내가 항복은 다 받아 놓을게, 하면 소련을 상대로 전쟁을 하지 않는 이상 되돌리기 어려운 것이다.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스탈린이 미국의 제안을 전격 수용한 것이다. 대신 일본 홋카이도 북부 지역을 소련이 점령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조건을 단다. 미국은 거부한다. 겨우 며칠 전쟁을 해 놓고 점령군 행세가 너무 심하지 않느냐는 강공을 편다. 스탈린은 더 이상 우기지 않는다. 8월 6일부터 8월 11일까지 6일 동안, 일주일도 채 못 되는 사이에 절묘한 드라마가 펼쳐졌다. 분단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일차적으로 미국이다. 그럼 미국은 악의에 넘쳐 한반도의 분단을 획책했는가. 바보가 아니라면 다 안다. 분단은 전쟁 말미에 벌어진 냉혹한 국제 정치의 피할 수 없는 산물이었다. 소련은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공범이다. 다음은 분단을 제안했더라도 이를 협상으로 되돌리려 했으니까 이를 깬 나라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 미국, 소련의 공동책임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몇 가지만 덧붙이자. 남쪽에 미군이 북쪽에 소련이 진주했다고 해서 바로 그게 분단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군사 분계선이 바로 국토 분단선은 아니라는 얘기다. 군사 분계선이 어떤 특정 국가의 국토에서 활동하는 외국 군대들 간의 군사 활동 분계선으로만 멈추고 해당 지역 거주민들의 생활이나 정치활동의 분리선으로 변질되지 않는 한 그것이 바로 국토 분단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2차 대전 종전 직후 서독 지역에서의 미ㆍ영ㆍ불 3개국 간의 군사 분계선은 분단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에서의 미ㆍ소ㆍ영ㆍ불 4개국의 군사 분계선도 말 그대로 군사 분계선으로 끝났다. 군사 분계선이 국토의 분단을 초래하는 것은 외국 군대가 이 군사 분계선을 기준으로 자기들이 관할하는 지역 주민들의 삶을 나머지 지역과 확연하게 갈라놓을 때이다. 미국이 38선을 순수한 군사 분계선으로 유지한 반면 소련은 이 선을 통치 분계선으로 바꿔 놓았다. 통신과 교통이 끊겼다. 남쪽으로 내려올 수도 올라갈 수도 없었다. 소련은 김일성을 앞세워 토지 개혁을 시행했고 산업을 국유화했으며 교육 정책을 새로 올렸고 주민 사상 개조 운동을 실시했다. 남쪽의 주민과 북쪽 주민의 생활은 완전히 달라졌다. 미국은 통신, 교통의 재개와 주민의 자유왕래를 요청했으나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그 땅에 대한 물리적인 지배를 원하는 점령국과 땅에 대한 물리적인 욕심이 없는 나라 사이의 차이였다. 군사 분계선은 어느 사이 통치 분계선으로 바뀌었다. 오로지, 변명의 여지없이 철저하게 소련의 성과다.


미국이 남한을 군사기지화하려 했다는 주장이 있다. 복잡하게 사실 관계를 따질 필요도 없는 문제다. 일단 당시 제국주의 세력은 영토 접수가 공리적으로 타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시장이었지 영토가 아니었다. 경제적으로 자립한 나라에서 자신들의 상품을 구매해 주길 바랐지 그 나라에 공장을 세워 물건만들 생각은 안 했다. 1차 대전 종전 후 독일에 엄청난 배상금을 안기는 문제에 대해 케인즈는 독일의 구매력이 떨어지면 이웃 나라들의 매출까지 동반 하락한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그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이 2차 대전 후의 마샬 플랜이다. 독일 시장을 살리는 것이 유럽 경제를 살리는 일이었다. 식민지를 독립시키고 그 식민지가 자립할 수 있도록 해주자는 주장은 휴머니즘의 발상이 아니라 철저한 국가 이익의 논리였던 것이다. 아담 스미스는 “아메리카 대륙을 독립시키면 대영 제국은 그의 평화를 유지하는데 드는 비용에서 헤어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자유 통상으로 평화를 이룩할 것이다”라고 경제학적인 진단을 내렸고 벤담은 같은 이유로 영국을 필두로 하여 모든 식민 모국이 과감하게 식민지를 청산할 것을 철학적인 논지에서 설파했다. 총칼 들고 쳐들어가서 식민지를 세우는 것은 그리스ㆍ로마 시대에나 통용되는 낡은 발상이란 이야기다. 그래서 그들은 유감없이 떠났다. 1949년 6월 29일 미국은 홀가분하게, 오로지 시원하게 한반도에서 발을 뺐다. 여기에 무슨 식민지 건설이니 군사기지화니 같은 이야기가 끼어들 틈이 있다는 말인가. 오히려 붙잡아야 할 사람은 남한이었다. 미국이 그대로 주둔하고 있었더라도 6ㆍ25가 터졌을까. 미국의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획책했다는 주장도 있다. 획책은커녕 저지하려고 노력했다. 미국은 단독 정권을 수립하려는 이승만과 김구를 정계에서 빼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이승만과 김구를 대체할 수 있고 공산당과도 타협적으로 잘 지낼 수 있는 제 3의 중도 세력을 육성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 했다. 좌우합작 종용, 조미위원회, 과도입법의원 등이 그 노력의 산물이다. 1947년 4월에는 이승만을 연금까지 시켰다. 미국이 입장을 선회한 것은 제 2차 미소공위가 결렬에 빠진 1947년 9월 이후이다. 이런데도 미국의 남한 식민지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세계사의 흐름에 완벽하게 무지하거나 역사적 사실들을 입맛에 맞게 재단하려는 악질적인 선동일 뿐이다.


3.

드디어 이승만의 정읍 발언 차례다. 단독 정부 수립을 공식적으로 주장했다는 문제의 발언이다. 그런데 실은 이전에도 같은 내용의 발언이 여러 차례 있었다. 이승만의 정읍 발언은 아시다시피 6월 3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앞선 5월 8일, 이미 같은 요지의 발언을 던진 바 있다. 3만 여 명이 모인 목포 산수초등학교 연설에서 이승만은 남조선에 단독 정부를 세우는 문제를 공식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당시 현장을 취재한 <청년해방일보>는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이승만은 자신의 주장을 하지 중장에게 전하여 자기 소망이 관철되지 않으면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되고 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 남조선에 단독 정부를 세워 병력으로써 38선을 깨뜨리고 소련군을 내어쫒고 북조선을 차지하겠다는 주장을 펼쳤다.” 거의 한 달 앞서 야욕(!)을 드러낸 발언을 무려 3만 여 명 앞에서, 그것도 소련군 퇴치와 북진통일까지 섞어 공언한 것이다. 이 발언이 문제가 되지 않은 이유는 당시 미소공위가 한참 진행 중이라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상황을 좀 더 들여다보자.


이승만의 단독 정부 수립 발언은 이른바 남선순행南鮮巡行으로 알려진 1946년 4월부터 6월까지의 지방 순회 여행에서 나왔다. 이 남선순행은 이승만의 정치적인 기반이 강화된 결정적인 사건으로 처음 이승만은 암살 위험을 이유로 여행을 꺼렸다. 실제로 그가 서울을 떠난 직후인 4월 19일 대전에서 이승만 암살 사건을 음모한 범인 7명이체포되기도 하였다. 4월 15일 서울을 출발한 이승만은 충청남도ㆍ경상남북도ㆍ전라남북도의 순으로 반탁 강연을 이어나갔다. 이승만의 남선순행은 예상보다 훨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일단 그의 방문을 계기로 지방의 우익들이 결집했고 독촉국민회 지회가 연달아 결성되었기 때문이다. 결성된 지회들은 모두 이승만의 정치적인 기반이 되었다. 남선순행은 두 단계로 나뉜다. 4월 15일부터 5월 9일까지의 1차, 6월 3일부터 9일까지의 2차다. 중간의 공백은 미소공위 무기 휴회에 대한 대책을 협의하기 위해 급히 상경한 기간이다. 강경한 다음 날인 5월 10일, 이승만은 서울에서도 같은 요지의 발언을 했다. 동아일보 46년 5월 12일자를 보면 “(이승만은 미소공위의 휴회가 유감천만이며 공위가 속개될 것을 기대한다고 했지만)자율적인 정부 수립에 대한 민성이 높은 모양이며 하루라도 빨리 정부가 수립되길 갈망 한다”고 되어있다. 남선순행을 재개한 후인 정읍 발언이후에도 전주(6월 4일), 이리(6월 5일), 군산(6월 6일)에서도 연달아 정읍 발언을 재확인했다. 그러니까 목포에서 최초로 단독정부 수립 의지를 밝힌 후 정읍 발언까지 포함하여 모두 4회나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이승만의 남선순행은 마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대중 설득 집회로 보일 지경이다. 정읍 발언은 엄청난 정치적 후폭풍을 몰고 왔다. 한민당을 제외한 좌ㆍ우익 대부분이 이승만의 남한 단정안을 비판했다. 한발 물러선 듯 이승만은 6월 11일 독촉국민회 연설에서 정읍 발언을 철회하는 듯한 뉘앙스의 발언을 했지만 실제로는 여론 무마용이었다. 이 이야기는 이승만이 단정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추진했다는 말이 된다. 그는 왜 이런 정치적인 모험을 했을까. 그 이유는 남쪽이 아니라 북쪽에 있다.


이승만의 정읍 발언을 보자.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 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치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야야 할 것이다.” 죄송하지만 말씀을 좀 잘 못하셨다. 서두는 이렇게 꺼냈어야 했다. “늦었지만 이제 우리 남쪽도...” 무슨 얘기냐. 1946년 2월 소련군과 북조선공산당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설립한다. 해방 후 겨우 반년이 지난 시점인데 이미 국가 기구를 만든 것이다. 이 기구는 얼마 안 가 이름에서 ‘임시’를 떼고 정식으로 활동하는데 남한보다 훨씬 빨리 헌법 논의를 시작했고 군대도 창립했다. 이 위원회는 북조선의 인민, 시회단체, 국가기관이 실행할 임시 법령을 제정하고 발포할 권한을 갖는다고 밝혔다. 토지개혁까지 강행하여 무상몰수를 했으니 사실상의 정부라는 반증이다. 게다가 북쪽은 중국 국공 내전의 후방 병참기지 역할까지 맡고 있었다. 이승만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피력하는 동안 이미 북쪽에서는 차근차근 정권이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인이 아니면서 최초로 남한 단정을 언급한 사람은 하지의 특별 정치 고문이자 이승만의 친구였던 굿펠로우였다. 굿펠로우는 1946년 5월 24일 귀국을 앞두고 “소련이 조속히 무산된 제 1차 미소공위를 재개시키지 않는다면 미국은 남한 단독정부의 구성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자유신보 5월 25일자). 마치 5월 6일에 나온 이승만의 발언을 지지하는 모양새다. 혹시 친구라서? 이승만과 굿펠로우는 정치 조폭이 아니다. 굿펠로우는 이승만의 친구인 동시에 미군정의 입장을 이승만에게 전달하는 통로였다. 실제로 1946년 초 이승만에게 미소공위의 실패와 대소 타협의 불가능을 넌지시 알려준 것은 미군정이었다. 그게 누구의 입을 통하여 전달되었는지는 굳이 따져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상황 변화에 따른 미군정의 입장은 다소 불명료한 부분이 있다. 일단 하지는 단정을 목표로 하지 않았지만 전체 한반도 차원에서 미국식 정부를 수립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미국식 정부의 성격이 대소 봉쇄적이고 반공적이며 공격적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이를테면 북한의 민주기지론과 정면으로 대립하는 반공ㆍ자유기지론인 셈이었고 미군정의 통제 하에 수립되는 ‘임시한국정부’를 북한 지역까지 확대하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지는 북한에 파견된 소련 군사 고문단과는 달리 정치군인이 아니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전술적으로만 파악했지 정치공학적인 측면에서 녹여낼 역량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승만 같은 노회한 정객의상대가 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미군정의 의지와 실천 사이의 간극을 좀 더 살펴보자.


앞서 말한 대로 미군정은 이승만을 정계에서 퇴출시키는 방안을 연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그 대안은 없었다. 미소공위 제 5호 성명이 발표된 직후 미군정은 반탁 진영을 설득해 제 5호 성명에 대한 동의를 구하려고 했지만 창구는 결국 이승만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남선순행 기간인 4월 21일 굿펠로우가 대전을 방문했고 유성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에게 협조를 구했다. 5호 성명은 미소공위가 협의할 정당ㆍ사회단체의 범위를 규정하면서 공위에 협력하겠다고 서명만 하면 협의 대상이 된다고 규정했다. 하지는 찬탁, 반탁에 대한 입장과 무관하게 5호 성명에 서명만 하면 미소공위의 협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나중에 반탁을 해도 무방하다고 말했다. 굿펠로우를 통해 하지의 입장을 전달받은 이승만은 4월 23일 대구에서 반탁 진영도 미소공위에 참가하자며 5호 성명을 지지했다. 미워도 같이 갈 수 밖에 없는 동반자 관계, 그것이 미군정과 이승만의 미묘한 관계였다. 단독 정부쪽으로 가닥이 잡힌 후에도 이승만과 하지의 입장은 뚜렷하게 갈렸다.


둘의 공통점은 미소공위를 통한 임시정부 수립 방안 대신 남한에 우익 중심의 미국식 정부를 세우는 것이었다. 둘의 차이는 이승만의 단독정부가 좌파를 일체 배제하고 남한에만 국한되는 것이었던 것에 반해 하지의 그것은 과도정부로 타협적인 남한 좌파와 북한의 일부 세력까지 포함해 과도정부를 북한까지 확장하는 것이었다. 하지는 이를 위해 이승만에게 이 과도 정부에 참여하지 않기를 종용했다. 과도정부에 대한 북한과 소련의 동의를 얻기 위해서 이승만의 존재는 껄끄러웠던 것이다. 하지는 이승만 대신 김규식을 내세우고 싶었다. 김규식을 앞세워 남한우익이 중심이 된 좌우합작 정부를 만들어 이를 북한 지역까지 확장한다는 계획이었지만 이는 누가 봐도 순진무구한 발상이었다. 북한과 소련이 이를 받아들일 만큼 어리숙하지도 않았지만 이승만 역시 만만치 않았다. 동의하는 척 했던 이승만은 바로 반격에 들어간다. 46년 6월 12일 독촉국민회 전국대회에서 결성한 민족통일총본부를 통해 좌우합작을 폐기시키기 위한 작전에 돌입한 것이다. 이는 공산주의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있던 정치가와 순진한 군인 행정가 사이의 좁힐 수 없는 차이였다.


이승만이 남한에 단독 정부를 수립하려고 했던 것은 이미 북한에서 소련에 의한 공산주의가 틀을 잡았으며 남한까지 공산화하려는 의지를 보이는 가운데 남한만이라도 공산화를 면하게 하겠다는 발상이었다. 하지의 입장에서는 이승만이 자기 의지의 관철만이 유일한 관심사인 ‘늙은 악당’이었지만 세계사적 흐름과 공산주의의 본질을 파악한 이승만에게는 양보하거나 타협할 수 없는 사안이었던 것이다. 이는 같은 기간 동안 북한에서 벌어진 일을 살펴보면 더욱 뚜렷하게 알 수 있다. 김일성은 46년 2월 20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1차 회의에서 “지난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됨으로써 우리 인민은 우리나라 력사상 처음으로 진정한 중앙정권기관을 가지게 되었다”는 연설을 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사실상의 단독정권이었던 사실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이어 46년 11월에는 도ㆍ시ㆍ군인민위원회 선거를 실시했으며 47년 2월과 3월에는 리ㆍ면까지 인민위원회를 확장했다. 이를 기반으로 47년 2월 국회에 해당하는 북조선인민회의가 만들어졌으며 이 북조선인민회의는 행정부에 해당하는 북조선인민위원회를 구성했다. 정리하자면 북한에서는 남한에서의 단독 선거인 5월 10일 선거가 실시되기 1년 전에 이미 단독 선거를 실시하고 단독 국회를 구성하고 단독 정부를 만든 것이다. 이처럼 이미 북한에서 모든 행정 절차가 마무리된 다음 (이는 명백한 분단 확정이다. 전술한대로 군사 분계선이 국토의 분단을 초래하는 것은 외국 군대가 이 군사 분계선을 기준으로 자기들이 관할하는 지역 주민들의 삶을 나머지 지역과 확연하게 갈라놓을 때이다) 뒤늦게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것을 두고도 이승만을 분단의 원흉으로 모는 것은 한 쪽의 기록을 완전히 배제한, 말 그대로 악의적인 왜곡이 아닐 수 없다. 분단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실은 이 질문을 공론화시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동네 깡패들에게 얻어터지고 들어와서 누구에게는 어디를 맞았고 또 누구에게는 저기를 줘 터졌고 자랑하는 식이다. 이런 인간을 등신이라고 부른다. 책임은 오로지 우리에게 있다. 우리가 못나서 허리가 잘린 것이다. 이 못난 짓에는 나라를 세우는 일에 한마음으로 노력하지 않은 분열까지 포함된다. 미국이 주범이니 소련이 주범이니 둘이 공범이니, 다 쓸데없는 말이다. 당시 미국과 소련은 각자의 국익에 충실했을 뿐이다. 개인은 대체로 이기적이고 가끔 이타적이다. 그런데 집단이 되면 문제가 달라진다. 개인의 이타심에 견줄 수 있는 집단의 이타심은 찾기 어렵다. 더구나 문제가 국제 차원이 되면 집단은 오로지 순정 이기파가 된다.



4.

찬탁이 옳았는가 반탁이 옳았는가는 까다롭고 예민한 문제다. 여기에 이승만의 정치적 행보를 섞으면 더 복잡해진다. 무슨 말이냐. 이승만의 안목은 어디까지 내다보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이승만은 반탁을 했다. 이승만은 단순히 민심을 얻고 좌익에게 밀리던 정치 지형도를 바꾸기 위해 반탁 선택을 한 것일까. 사실 찬탁과 반탁이 예민한 문제가 된 것은 오로지 동아일보의 오보 때문이다.

이제 와서 책임을 물을 수는 없겠지만 사실 관계는 명확히 해야 하는 까닭으로 동아일보 오보 사태를 들여다보자. 1945년 12월 27일자 동아일보 1면에 모스크바 삼상회의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내용을 보자.


“막사과(모스크바)에서 삼국 외상 회의를 계기로 조선 독립 문제가 표면화 하고 있지않은가 하는 관측이 농후하여가고 있다. 즉 번즈 미국 국무장관은 출발 당시에 소련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하여 즉시독립을 주장하도록 훈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삼국 간에 어떠한 협정이 있었는지는 불명하나 미국의 태도는 카이로 선언에 의하여 조선은 국민 투표로써 그 정부의 형태를 결정할 것을 약속한 점에 있는데 소련은 남북 양 지역을 일괄한 일국 신탁통치를 주장하여 삼십팔도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다고 하고 있다.”


짙게 표시한 부분은 신문기사로서는 함량미달인 부분이다. ‘팩트’가 아니라 ‘추측’을 태연하게 기사에 넣고 있다. 하나같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내용들이다. 더 중요한 것은 기사가 아니라 헤드라인이다. 동아일보는 “외상회의에서 논의된 조선독립 문제,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소련의 구실은 삼팔선 분할 점령,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이라는 제목으로 헤드라인을 뽑았다. 마치 소련은 신탁통치주장, 미국은 즉시독립 주장을 하는 것처럼 독자의 판독을 유도하고 있다. 이 기사에 전 국민이 분노로 일치 단결했다. 겨우 해방을 맞았는데 또 누군가의 지배를 받는다고? 12월 30일 모스크바삼상회의의 실제 합의사항이 보도된다. 어떤 것이었을까.


① 독립국가로 재건설하기 위해 임시 조선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할 것

② 그러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이하 미소 공위)를 열 것

③ 최고 5년 기한으로 미ㆍ영ㆍ소ㆍ중 4국의 신탁통치를 실시하되 그 방안은 미소공위가 조선임시정부와 협의할 것

④ 남북의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2주내로 미소공위를 열 것


보시다시피 신탁통치 이야기도 나오기는 하지만 삼상회의의 핵심 결정 사항은 임시정부 수립이었다. 뒤늦게 제대로 된 보도가 나왔지만 이미 화끈하게 돌아선 국민 정서는 그 결정사항의 경중을 따질 겨를 없이 반탁으로 몰려갔다. 만약 신문 기사가 이렇게 나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임시정부수립 결정, 그 기간 동안 임시정부와 협의하여 신탁통치 5년 실시.”


1차적으로 임시정부수립이라는 프레임이 작동하고 있으니 짐작컨대 ‘5년은 길다’ 혹은 ‘3년이면 받아주겠다’ 식으로 여론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좌익은 반탁에 일시 참여했다가 찬탁으로 돌아섰다. 조선공산당은 모스크바의 지령에 따라 다음 해 1월 2일 찬탁지지를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찬탁을 주장하는 것은 민족 반역자!”라는 우익의 선동은 대중의 정서를 제대로 읽은 것이었고 조선공산당은 이를 계기로 해방 초기에 가졌던 유리한 입지를 일시에 상실한다. 신탁통치가 실시되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좋은 결과를 낳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미 좌우갈등도 심하고 분열은 일상이었다. 그랬더라도 내전 정도를 치루는 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적어도 3년씩이나 전쟁을 치르지는 않았을 것이고 남ㆍ북간에 극단적인 증오가 싹 틀 일도 없었을 것이다. 동독과 서독은 갈려 있었지만 사이가 원만했다. 서로 편지도 주고받았다. 우리는 항상 최악의 경우만 골라서 갔다.


결국 찬탁이 옳았던 것일까. 여기서부터는 사실 if~의 영역이자 지극히 개인적인 가치 판단의 문제다. 신탁통치가 끝난 후 우리민족이 걷게 될 길은 거의 확실하게 공산주의였다. 당시 대중적인 선호도가 사회주의>공산주의>자본주의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양동안 선생의 if~를 보면 이런 식이다. 신탁통치를 실시했다면 좌익 세력은 폭동 따위를 일으켜 지지율 하락을 자초하지 않았을 것이고 통일임시정부가 구성되었을 경우 좌익과 중도파 그리고 우익의 김구-임정계가 참여하는 연합세력이 집권하고 이승만과 한민당은 야당이 되었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이어 그 집권 세력은 북한에서 46년 실시한 것과 동일한 형식으로 토지개혁과 산업국유화를 전 국토에서 시행했을 것이며 결국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 되었을 것이라는 논리가 이어진다. 그랬다면 우리의 지금은 현재의 모습이 아닐 것이다. 공산주의는 개인을 말살하는 참혹한 전체주의다. 그 일당 독재 전체주의 정권 하에서 우리는 숨 막히는 고통을 받았을 것이고 동구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함께 무너져 내렸거나 아니면 끈질기게 버티면서 질곡의 삶이 십 수 년 더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이래도 상관없다면 신탁 통치의 수용이 옳았다 쪽에 표를 던질 것이고 남한만이라도 공산화되지 않은 것이 우리 민족에게는 복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남한이 그것을 수용하지 않은 것이 잘한 결정이라고 할 것이다. 이승만은 확대되는 냉전의 기류를 읽었던 사람이다. 그는 분단이 되더라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이 땅에 이식하는 것이 바른 길이라고 믿었다. 나는 그 판단에 동의한다. 비록 분단이 되었지만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확립한 대한민국이 통일을 주도하는 상황이 된 것은 결국 민족의 이익에 부합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빼놓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남북이 갈라져 각자 다른 길을 갔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전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1948년 9월 10일 북한최고인민회의에서 발표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정강’에서 이렇게 말했다. “공화국 정부는 북조선에서 실시한 토지개혁, 산업 국유화, 노동 법령, 남녀평등권 법령과 같은 민주개혁들을 더욱 공고히 발전시킬 것이며 그것을 전 조선적으로실시하기 위해 투쟁할 것입니다.” 남한을 공산화하려는 의지가 명확했다는 얘기다. 북한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남쪽보다 북쪽에 앞서 단독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사실을 이렇게 호도한다.


38도선 이남에서의 분단국가가 이북 정치세력과의 협상을 거부하면서 성립되었다면 이북에서의 단독정부는 계속 이남 정치세력과의 협상을 표방하면서 성립되었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 강만길, 한국 현대사(창작과 비평사) 174p -


북한 정권이 협상을 표방하면서 성립되었다고? 그렇다면 그 협상이란 게 잘 안 되서 전쟁을 일으켰다는 이야기인가. 협상 다음의 수순은 상대를 죽이는 일인가. 정말이지 어이없는 인간들이다. 분단이 필연적으로 전쟁을 불러왔을 거라고 주장하는 것은 북한의 남침이 김일성의 모험주의적인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희석시키고 민족에게 고통을 안겨준 전쟁에 대한 책임이 있는 김일성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간악한 발언이다. 이승만의 위상과 역할에 대해 가장 명료한 발언을 한 사람을 꼽으라면 김영호 선생이다. 일부 발췌하여 올리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국가를 건설하고 유지하는 지도자의 역량을 ‘비르투 Virtu’라고 규정한다. 이것은 흔히 미덕virtue이라고 하는 중세적 용어와는 다른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다. 이것은 제대로 된 해결책을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국가 건설의 가능성을 찾아가는 지도자의 영웅적 행위를 의미한다. 상황에 수동적으로 떠밀려 가는 것이 아니라 비전을 세우고 능동적으로 선택의 범위를 넓혀가는 지도자의 역량은 국가 건설에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해방에서 건국에 이르는 3년은 국내 정치세력 사이의 권력투쟁이 국제적 차원에서 전개된 미국과 소련 사이의 냉전에 맞물려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도자들이 건국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것은 바로 비르투였다. 이승만은 미국과 소련 사이의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인식했다. 그리고 미국 정부와 미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단독정부론을 제창하여 대한민국 건국을 앞당기는 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했다. 새로운 국가 건설은 자연발생적 과정이 아니라 비르투에 입각한 지도자의 인위적 노력의 결과라는 마키아벨리의 주장은 건국 과정에서 이승만과 건국의 주역들의 역할을 설명하는데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분단의 원흉은 이승만이 아니라 스탈린

  • 토론문-김용삼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지하에 있는 이승만은 억울할 것이다. 왜냐.

도대체 자신이 건국한 나라의 사람들이, 자신이 행한 모든 것을 다 뒤집어서 매국노, 역적이라고 손가락질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비판의 손가락질이 정당한 근거에 의해,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을 가지고 하는 것이라면 그도 자신의 과오를 탓하며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을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을 향한 비판과 비난은 전혀 근거도 없고, 역사적 사실과도 어긋나며, 왜곡과 거짓으로 도배질 되어 있다. 이승만을 ‘분단의 원흉’으로 비난 매도하는 것은 불과 65~70년 전의 역사를 송두리째 뒤집어 엎어버리려는 특정 세력들의 역사 날조다.

남정욱 교수의 발제문은 이승만을 ‘분단의 특정 세력들의 날조를 ‘역사적 사실’들을 근거로 들어 낱낱이 바로잡고 있어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우리가 특정 세력들의 현대사에 대한 날조된 공격을 분쇄하는 길은 ‘역사적 사실’들을 발굴하여 그런 주장들이 완전 허구이자 날조된 사기극이라는 사실을 밝혀내는 작업이어야 한다. 나는 남 교수의 발제문을 보면서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우리 근현대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남한과 북한만을 들여다봐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을 떠올렸다. 제2차세계대전의 전후에 한반도에서 일어난 일련의 일들은 전 세계적 질서가 냉전으로 치닫는 과정에서 파생된 것이다. 따라서 세계적인 안목을 가지고 남북문제를 들여다봐야 정답이 도출되는데, 우리는 그 동안 너무 남북 관계라는 울타리 안에서 분단의 원인을 찾아내려는 좁은 시야를 가지고 있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관점에서 남 교수의 발제에 몇 가지 개인적 견해를 덧붙이고자 한다.


38선에 대하여

만약 1945년 8월 14일에 미국이 38선을 제안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한반도 전역을 소련이 점령했을 것이고, 곧바로 공산화가 되었을 것이란 점이다. 그렇다면 미국이 38선을 제안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정식 교수는 폴란드를 점령한 소련의 행태를 보면서 미국이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독일과 소련의 공격으로 항복한 폴란드는 요인들이 런던에 망명하여 망명정부를 구성하고 있었다. 독일이 점령했던 폴란드 영토를 다시 빼앗은 소련은 폴란드 정부 수립 과정에서 연립정부를 출범시킨 후 우익 인사들을 모조리 숙청한 다음 폴란드를 공산화했다.


미국은 폴란드 사태를 지켜보면서 소련이 점령한 지역에서는 소련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공산정권이 수립되는 것을 막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했다. 8월 9일 소련군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걷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한반도 북쪽 지역을 점령해 가자 미국은 한반도 전체를 소련군이 점령하는 것을 막기 위해 8월 14일 38선 설정을 제안한 것이다. 소련은 마음만 먹었다면 한반도 전역을 단독 점령하는 것도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불과 6일 동안의 전쟁으로 만주와 한반도 북쪽에 지배권을 행사하게 됐으니 38선을 받아들이는 것도 손해 보는 거래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38선은 남북을 분단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이 38선 이남의 지역만이라도 소련 점령을 막기 위해 내놓은 것이란 점을 분명히 각인시킬 필요가 있다. 결과적으로 38선으로 인해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는 것을 저지한 결과 남한의 공산화를 막았기 때문이다.


분단의 원흉은 스탈린

일본이 항복한 지 정확하게 한 달 후인 1945년 9월 15일부터 10월 2일까지 런던에서 미, 영, 소, 중, 프랑스 등 5개 전승국 외상들이 모여 전후 처리 문제를 위한 회의를 열었다. 말하자면 전쟁이 끝났으니 전리품을 나누는 자리였다.

소련은 전후(戰後) 일보 통치에 소련이 참여하고 홋카이도 북부의 할양을 요구했으나 미국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됐다. 그러자 지중해 진출을 위해 이탈리아 식민지였던 리비아의 트리폴리타니아(트리폴리) 지역의 양도를 요구했다. 이 안건도 영국의 반대로 무산됐다.

스탈린은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주의를 패배시킨 대가로 동유럽과 지중해 등 여러 지역에서 소련의 영향권을 확장하기 위해 노렸던 지역을 차지하는 데 실패하자 소련군 점령지인 만주와 한국으로 눈길을 돌렸다.

런던에서 외상회의가 한창 진행 중이던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은 극동전선 총사령관 알렉산드르 바실레프스키와 연해주 군관구 군사회의 및 제25군 군사평의회 앞으로 “북한에 반일적인 민주주의 정당 및 조직의 광범한 블록(연합)을 기초로 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확립하라”는 암호지령을 발송한다. 북한에 공산 단독정부를 수립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37일 만에 내려진 이날 지령은 해방 후 한반도에서 미소관계의 진전과 아울러 한국 현대사 전반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스탈린의 비밀지령이 내려진 이후 북한에서는 공산 단독정권 수립을 위한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시작됐다. 소련의 점령군 사령부는 10월 8일부터 10일까지 평양에서 북한 지역의 행정을 담당할 한국인 중앙행정기구를 창설하기 위해 ‘북조선 5도 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를 소집했고, 10월 28일에는 북조선 5도 행정국을 설립했다. 10월 10일부터 13일까지 평양에서 ‘조선공산당 서북 5도 책임자 및 열성자대회’(약칭 5도대회)를 열고 마지막 날 조선공산당의 북조선 분국을 만들었다.

이날 김일성은 “오늘의 조선에는 미국이나 영국식 민주주의가 맞지 않는다. 서구라파 민주주의는 이미 시대에 뒤떨어졌기 때문에 조선 실정에 부합하는 새로운 진보적 민주주의 제도를 세워야 한다”고 연설했다. 김일성이 말하는 진보적 민주주의란 ‘인민민주주의’,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였다.


10월 14일에는 소련에 의해 북한 지도자로 선출된 김일성이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김일성 장군 환영 평양시 민중대회’를 통해 군중들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날부터 소련군 사령부는 김일성을 “항일유격대의 장군”이자 “민족의 영웅”, “영명한 지도자”로 떠받드는 선전선동에 돌입했다.

1945년 12월 25일에는 소련군 총정치국장 슈킨 보고서가 등장한다. 슈킨은 “1945년 9월 21일자 최고사령부의 훈령에 언급된 북조선에서의 민주정당 사회단체들의 광범한 블록에 기초한 부르주아 민주개혁이 너무 느리게 진행되고 있다”면서 “소련의 국가이익을 보장할 수 있는 굳건한 정치 경제적 교두보를 세우라”고 지시했다. 그러니까 공산 단독정권 수립을 위한 제반 조치가 너무 느리다는 질책이었다.

1946년 2월 8일에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창설됐다. 다음날 위원장 김일성, 부위원장은 김두봉, 서기장은 강양욱 등 총 23명으로 구성된 임시인민위원회 명단이 발표됐다. 이들은 행정과 입법 권한을 가지는 독재적 기관으로서 “임시인민위원회는 우리의 정부”라고 선언했다. 북한이 일방적으로 단독정부를 설립하고 이를 공표한 것이다. 이로부터 1년 후인 1947년 2월 21일, 저들은 ‘임시’라는 간판을 떼어버리고 명실상부한 북조선 단독정부인 ‘인민위원회’가 등장했다. 임시인민위원회 발족과 동시에 북한에서는 정부 수립 절차가 전광석화처럼 진행됐다. 우선 10개 부처로 된 정부조직과 공산주의 공안기관 설치(2월 10일), 토지개혁(3월 5일), 중앙은행 설립과 화폐 발행(7월 1일), 주요산업 국유화(8월 10일) 등이 단행됐다. 1946년 말 북한 공업시설의 90% 이상이 국유화되어 북한은 사회주의적 계획경제로 변모했다. 이 과정에서 토지나 사업체를 빼앗긴 지주나 자본가, 친일파로 낙인찍힌 지도자급 인사들, 기독교인이나 공산화에 걸림돌이 되는 지식인들은 탄압을 피해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탈출했다. 월남한 사람들의 수는 1948년까지 약 100만 명, 이는 북한 전체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엄청난 인구였다. 북한은 이 때 우수한 인적 자원을 너무 많이 잃어 큰 타격을 받게 된다.

이승만의 정읍 발언

2차 세계대전 후 소련군이 점령한 동유럽 국가들은 오스트리아를 제외하고는 좌우합작 방식을 통해 3~4년 내에 모두 공산화됐다. 그 과정도 거의 비슷하다. 먼저 착취자들의 재산을 무산대중에게 돌려준다는 선전과 함께 토지개혁을 실시한다. 그리고 기존의 공산당과 여타 정당 사이의 합당으로 노동당을 출범시켜 연립정권을 수립한다. 이후 연립정권에 참여한 인물들을 암살, 사고사, 의문사 등으로 숙청하여 친소 성향의 공산주의자들만 남는다. 이들이 최종적으로 친소 단일정당을 수립하고 예전의 노동당은 다시 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꾼다. 북한에서도 이런 일들이 거의 유사하게 나타났다.


국제정치학 박사로서 국제정세의 흐름에 정통했던 이승만은 미국 저널과 언론을 통해 동유럽이 공산화되는 과정을 냉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이 와중에 정치라고는 아무 것도 모르는 미군정은 사사건건 자신들과 충돌하는 이승만을 퇴출시키고 김규식과 여운형을 동원하여 좌우합작으로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한 공작을 시도했다.

이승만은 이북의 소련 점령지역에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라는 공산 단독정부가 수립된 마당에 남한에서 좌우합작이 추진되면 북한의 공산세력과 남한의 공산세력이 힘을 합쳐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판단했다. 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이승만은 난국타개를 위한 승부수를 던진 것이 6월 3일, 정읍 발언이다. 남한에서 단선정부 수립을 촉구한 이승만의 정읍 발언을 한 마디로 해석한다면 “언제까지 우리가 미국을 믿고 기다려야 하는가? 언제까지 우리의 현재와 앞날을 미국과 소련의 화해에 걸고 기다릴 것인가? 우리는 남한에서만이라도 주권을 되찾아서 우리의 장래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분단의 진짜 원인제공자는 1946년 6월 3일의 이승만의 정읍 발언이 아니라 그보다 8개월 전에 내려진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의 비밀 지령이다.

이승만과 김구

오늘날 우리 사회는 건국 지도자 이승만은 분단의 원흉이라고 매도하며 역사의 감옥에 가두고, 건국에 반대한 김구를 민족의 영웅처럼 받들고 있다. 불행하게도 김구는 국제정세의 흐름에 어두웠다. 그는 미국이 중대한 국제문제에 직면해 있으며, 한국문제도 미국의 세계전략에 맞춰 풀어갈 것이라는 이승만의 주장을 납득하지 못했다. 김구는 거시적 안목이 부족했고, 미국의 세계전략에 따라 한국문제가 영향 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김구는 임정의 권위를 업고 쿠데타를 통해 미군정을 무너뜨리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다.

김구는 남북 협상을 통해 통일정부 수립이 가능할 것이라는 비현실적 몽상에 사로잡혀 북에 남북 협상을 제안했고, 북한에 가서 김일성과 회담도 했다. 그러나 이미 북한은 실질적인 공산 단독정권을 수립해 놓은 상황에서 김구김규식 일행을 실컷 이용하하다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노선과 김구의 ‘남북협상’ 노선은 정치에 있어서 이상과 현실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허정은 자신의 회고록 ‘내일을 위한 증언’에서 이승만과 김구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을 내놓았다.

‘요즘도 간혹 백범(김구)의 노선에 따랐더라면, 남북 분단의 장기화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고 결국은 어떠한 형태로든 통일정부가 수립되었을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나의 입장을 말한다면 당시의 정세로 보아 남한 단독정부수립은 최선의 길이었다. 그때 만일 남한에 민주정부가 수립되지 않았더라면, 우리나라의 공산화는 필연적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지금도 굳게 믿는다.… 백범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상에만 충실하려는 고집을 버리지 않았다. 하기는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길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만일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들이 무조건 백기를 들고 공산주의자들 앞에 항서(降書)를 썼더라면, 공산정권의 수립으로 적화 통일의 길이 있었을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이 요구하고 있던 것은 민주 진영의 무조건 항복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이상적으로 말한다면 남북 분단의 비극을 막기 위해 우선 어떤 형태로든 통일정부를 수립하고 민주주의냐 또는 공산주의냐 하는 이데올로기의 선택은 그 다음으로 미루어 민의(民意)에 맡기거나, 또는 민주 진영과 공산당의 연립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최선의 길처럼 생각될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시기의 늦고 빠름은 있더라도 공산화라는 결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은 2차 대전 후의 동구 제국(諸國)이 보여준 역사적 교훈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백범이 추구하던 노선이었다. 당시의 현실을 괄호 속에 묶어두고 이상만을 앞세운다면 분명히 이것은 최선의 길이었을 것이다.

백범은 현실을 외면한 채 이상만을 추구하려고 했으나 우남(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남한 단독정부안 지지자들은 현실을 중요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의 소망은 다만 통일정부 수립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민주적 통일정부의 수립”에 있었기 때문이다.… 백범은 이상을 위해 현실을 버릴 수 있는 스타일의 정치가였다면, 우남은 현실을 위해 이상을 유보할 수 있는 스타일의 정치가였을 뿐이다.’ 김구김규식이 주장한 통일우선주의는 심금을 울리는 고귀한 감정의 표현이었지만 그 소망은 실현될 수 없는 꿈이었다. 스탈린의 9‧20 지령이 민족통일의 길을 모두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꿈을 실현해보기 위해 주권의 회복을 지연시킬 경우 부지하세월로 외국의 통치를 연장시켜야 했다. 역사를 돌아볼 때 과연 누구의 판단이 옳았을까.

토론문-김학은

김학은 연세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1.

남 교수의 발제문은 두 부분이다. 첫째 부분은 이승만의 외교독립방략에 대한 설명이다. 이에 대해서는 토론자의 글을 인용하였으므로 생략하겠다. 다만 한 개만 추가하겠다. 일제는 인구정책을 획책하였다. “조선에는 아직도 2천만 인구를 이식할 수 있다. 국경에 출몰하는 서적을 걱정할 것 없이 해마다 내지[일본]로부터 [조선으로] 들여 미는 것이 양책이다.” 1928년 일본의 각 省은 조선총독부와 협의하여

“1. 조선은될 수 있는 한 조선에서 화전 관개 등의 사업에 종사케 할 방침을 취할 일. 2 漫然도항을 제한할 일. 3. 조선인 특유의 직업소개소를 신설하지 않을 일” 등을 새로이 정하였다.

그 목표는 일본인의 조선유입은 장려하며 조선인의 일본유입은 막고 조선에 남은 조선인은 동화시키는 정책이다. “조선에 이르러서는 이미 구미제국에서 원칙상 포기된 동화주의로서 조선에 임하고 있나니 전 세계에 이만한 민족으로서 이러한 정책 하에 지배되고 있는 예가 조선 이외에 없다는 의미에서 조선은 세계적 특수부락의 칭호를 받는 것이다.” 토지를 빼앗겨 만주로 떠나는 조선인에게는 일본국적법에 적용되지 않아 국적을 포기할 수도 없게 만들어 중국국적 취득도 어렵게 만들었다. 사실상 유민을 만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중국에서 토지를 매입하기 어렵게 되었다. 중국에서 무장투쟁이 어려웠던 이유가 된다.

2.

식민지 해방과 더불어 분단의 문제를 안게 된 것은 한국만이 아니다. 아일랜드가 있다. 아일랜드는 최근까지도 북아일랜드의 해방을 위해 저항해 왔다. 많은 사람이 대의를 위해 죽었지만 세계는 이에 대하여 냉담하다. 아일랜드의 분단문제는 자치시대 부터 아일랜드를 둘로 양분시켰다. 결국 내란으로 이어졌다. 초대 대통령과 초대 수상을 거쳐 일생을 대통령과 수상을 교대로 여러 차례 역임한 건국대통령 드 바레라는 북아일랜드 문제를 남겨 두고 아일랜드를 독립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다른 영연방국가들과 달리 영국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고 영연방에 머무르는 반대파와 내란을 치렀다. 아일랜드는 이 문제에 대해 드 바레라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 그것이 당시로서는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세계 최강 영국으로부터 독립한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과거 700년 동안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 교수가 적절히 지적했듯이 이것은 지도자의 냉철한 판단의 문제이다. 더욱이 국제정세를 만들어갈 수 없는 약소국의 선택의 폭이 크지 않은 점을 생각해야 한다. 이점에 있어서 영국과 그의 우방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없었던 아일랜드의 선택과 비교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벤 구리온이 떠오른다. 그는 유대인들이 원래 생각하던 땅 보다 훨씬 작은 국토에서 이스라엘을 건국하였다. 당시 국제정세가 그렇게밖에 허락하지 않았던탓이다. 그의 후임자들이 오늘날의 이스라엘로 확장하였다. 그보다 시오니즘의 아버지 헤르츠는 아프리카에 이스라엘을 건국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도 오늘날 이스라엘건국의 아버지 가운데 하나로 추대 받고 있다. “너의 시작은 미미하나 그 끝은 창대하다.”라는 잠언의 한 구절은 이 경우에 적절하다. 국제정세로 인해 남한에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은 드 바레라, 벤 구리온과 비교했을 때 그의 업적이 결코 작지 않다.


單政 누명 자체가 반 대한민국적 발상 -건국 대통령 우남 이승만을 위한 옹호

  • 토론문-조우석
  • 조우석 문화평론가

건국 대통령 우남 이승만의 제자리 찾아주기를 위해 그를 둘러싼 누명 벗겨주기 연속토론회가 자유경제원에서 마련된 걸 환영한다. 이 작업이 우남에 대한 재인식의 대중화 계기가 되길 희망하는데, 첫 회 주제를 ‘우남=민족분단의 원흉’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는 작업인 것도 자연스럽다. 남정욱 교수의 발제는 설득력이 있는데, “우남에게 분단의 책임을 묻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인가를 효과적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견이 있을 리 없다. 기회에 필자는 부분적 보완차원에서 두 가지를 지적하는데, 첫 회에 걸맞게 다소 포괄적 접근을 하려한다.

첫째 한국정치에서 고질로 남아있는 전임 대통령 흠집 내기 풍토다. 언제까지 후임자가 전임 지도자를 부정해 정치적 반사이익을 챙기려는 관행을 계속할 것인가를 묻지않을 수 없는데, 우남 이승만에 씌워진 각종 누명이란 일단은 이런 풍토 탓이다. 여기에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적 가치를 애써 외면하려는 당파적이고 정치적 견해가 그동안 한국 지식사회에 지배적 담론으로 작동해왔다. 전임 지도자 죽이기와 좌편향의 담론, 이 두 개가 겹쳐진 결과 우남은 ‘몹쓸 지도자’로 색칠돼왔는데, 이 과정을 음미해보려 한다.

둘째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공헌한 두 개의 기둥으로 건국혁명과 부국혁명의 의미를 부각시키려 한다. 남정욱 교수는 “당시 세계사의 흐름에 완전히 무지하거나, 악질적 정치선동에 휘둘리지만 않는다면” 우남에 대한 괜한 돌팔매질이나, 이 나라의 해방 이후 미국의 역할에 대한 의도적인 곡해란 철두철미 바보짓이라고 말했는데, 그게 올바른 판단이다. 즉 대한민국 건국에 담긴 세계사적 차원의 의미는 사회주의 체제를 선택한 북한의 참혹한 역사 실패와 너무도 대조적인데, 지금도 우남을 분단의 주범으로 모는 시각은 국가 만들기(nation building)의 역사적 무게를 등한시한 단견에 불과하며, 수정주의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지금 앞으로 더욱 설득력을 잃게 될 것이다.

우선 한국정치에서 고질인 전임 대통령 때리기 풍토를 지적해야 한다. 이 문제야말로 한국적 조급주의 내지 근시안적 시야의 차원인데, 당장 이웃 중국의 대륙적 마인드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름대로라면 ‘덩씨 성을 가진 작고 평범한 사람’에 불과한 덩샤오핑이야말로 중국적 지혜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에겐 확실히 계왕개래(繼往開來)의 대륙적 마인드가 읽혀진다. 계왕개래, 옛것을 이어받아 내일의 변화를 열어간다는 이 사자성어는 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으로 이어지는 역대지도자들이 즐겨 쓴다. 그만큼 저들은 유연한데, 실제로 덩샤오핑은 1978년 재집권하자 우향우로 내달렸다. 하지만 마오쩌둥을 전면 부정하는 ‘중국판 역사 바로세우기 운동’ 을 벌이는 바보짓은 하지 않았다. 그건 절묘한 선택인데, 개혁개방을 하되 중국의 분열 가능성은 막자는 차원이었다. 그건 실로 지혜로웠다. 마오쩌둥에게 대약진운동, 문화혁명 등 과오는 너무도 끔찍했지만, 대륙 통일과 현대중국 건국의 공적은 기꺼이 인정하자는 쪽이었다. 현대중국 건국의 지도자 마오쩌둥의 신화를 깰 경우 중국이 무너질까 걱정스러웠다는게 덩샤오핑의 솔직한 판단이며, 현재 중국에서 이와 관련한 논쟁은 거의 없다.

우리는 중국 쪽 분위기와 많이 다른데, 체제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정치사회적 신화 마저 허물어뜨리는 걸 일삼는다. 그걸 과단성 내지 리더십으로 포장하고, 눈먼 언론과 대중들은 박수를 쳐준다. 당장 덩샤오핑과 대비되는 이른바 문민정부의 김영삼 대통령이 그러했는데, 그들은 역대 정권과 다르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주요 정책목표에 신(新)자 붙이길 아주 즐겨했다. 그게 끝내 섣부른 역사 바로 세우기로 치달았는데, 그때부터 한국사회의 해체가 시작됐다는 게 많은 이들의 판단이다.

이후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더 했다. 김대중 정부는 걸핏하면 제2의 건국이란 말을하곤 했다. 미국 같은 사회에서 제2의 건국 같은 섣부른 말이 어디 쉽게 나오던가? 아까 지적대로 김대중 심리의 바탕에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에 승복하기 어렵다는 반대한민국 정서가 은연중 숨어있다. 김대중의 경우 1998년 건국 50주년 행사를 정부 차원에서 했지만, 매우 복합적인 정치적 동기에서 등 떠밀려 시늉만했다. 후임자 노무현 대통령은 더 나간다. 그의 악명 높은 발언 중 하나가 “현대사는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자가 득세하는 시대였다.”인데, 현대사에 대한 저주가 섬찟할 정도다. 필자는 그걸 역사 허무주의라고 규정하는데, 일본식 자학사관(自虐史觀)과는 또 달리 현대사와 역대 지도자에 대한 동시다발적 폄하로 나타난다.

옛것에 토대를 둔 계왕개래의 변화는커녕 앞서의 성취를 맹목적으로 부정하는 짧은 시야 그리고 조급주의 심리는 앞 세대를 먹칠하고,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이중삼중의 폐해를 가져온다. 기회에 다시 물어본다. 우리에게 좋은 대통령이 정말 없었나? 좋은 대통령이 없이 어떻게 대한민국이라는 20세기 기적의 신데렐라 국가가 출현했고, 지금의 번영을 누리고 있는가? 지금까지 역대 대통령은 누구라도 나름의 역할이 없지 않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도 상당수 우파는 내란에 가까운 통치행위를 했다고 공격하지만, 탈권위주의라는 시대적 소명을 일부 갖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도 과단성 있는 리더십, 삼저호황의 국면에서 외채를 갚은 공헌, 선제적 북방정책 등을 높게 평가해야 하는 게 정상이다. 중요한 건 백해무익의 리더십을 보인 사람이나, 그 반대로 백마를 타고 나타난 초인 같은 지도자 역시없다. 2년 뒤 탄생 100주년을 맞는 박정희의 경우도 그러한데, 야박한 평가가 주류다. 그의 공과 과에 대한 실체적 진실을 평가하려는 이들이 그만큼 많지 않은 탓이다. 사후 한세대를 훌쩍 넘긴 지금까지도 박정희하면 부르르 떠는, 못난 무리가 적지않은데, 한국사회에 그만큼 균형 잡힌 지성(知性), 전체를 보는 지성이 부재하다는 걸보여줄 뿐이다.


포괄적으로 말해 부국 대통령 박정희는 건국 대통령인 우남 이승만과 함께 한국현대사의 아주 특별한 이름이다. 우남이 역사의 큰 그림을 그렸던 건국지도자였다면, 박정희는 그렇게 어렵게 탄생한 대한민국호에 청년의 기상과 에너지를 불어넣는데 성공했다. 그래서 두 지도자는 건국혁명과 부국혁명의 위대한 조타수다. 하지만 정말 아쉽게도 생전의 박정희조차 전임 대통령 평가에서는 조금 전 지적했던 짧은 시야와 조급주의를 피할 수 없었다. 특히 쿠데타 집권 초기에 그러했는데, 그 탓에 ‘실물크기의 우남’, ‘건국사 속의 우남’을 읽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서울 남산에 백범 김구 동상을 세우는 행위 등을 그가 앞장서서 했고, 지금의 좌파가 백범의 상해임정을 과대평가하며 건국과정을 부정하는 빌미를 제공한 것도 사실이다. 다행이 박정희는 뒤늦게 우남의 유산을 재확인했다. 그래서 1965년 우남이 타계했을 때 그를 기리는 조사는 가히 명문으로 회자된다. 실제로 조사는 우남을 “건국의 원훈(元勳)”으로 높이 평가했다. 박정희의 부국혁명 역시 우남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토대 위에서 가능했다는 건 상식에 속하는데, 그런 건국지도자와 부국 대통령의 연결이란 헤겔의 레토릭대로 역사의 간계(奸計)가 맞다.


둘째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공헌한 두 개의 기둥 중 하나인 건국혁명의 의미문제다. 이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야말로 우남을 분단의 원흉으로 모는 짧은 인식을 벗겨준다. 그는 그 시대 국내외 지도자 중 세계사적인 시야를 가졌던 사람이고, 그 결과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분명히 하는 대한민국을 출범시키는데 성공했다. 67년 전 건국이란 개항 이래 진통해온 한국사회가 극적인 진화를 했음을 알리는, 실로 역사적 순간이었다. 원로 서양사학자 이인호 교수가 대한민국 건국을 1776년 미국 건국혁명, 1789년 프랑스대혁명과 같은 인류사의 반열에서 음미해야 할 세계사적 사건이라고 말했지만, 그게 맞는 말이다.

미국 건국혁명과 프랑스대혁명이 국민주권의 정치 원리를 최초로 제도화하며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였다. 대한민국 건국은 자유민주주의라는 문명의 파도가 20세기 중반 동아시아와 한반도에 상륙했음을 보여주는 또 한 번의 기념비적 역사로 평가된다. 대한민국 건국에 담긴 세계사적 의미는 사회주의 체제를 선택한 북한의 참혹한 역사 실패 때문에라도 너무도 대조적인 성취가 아니던가? 그럼에도 우남을 향해 분단의 주범을 모는 시각은 현재까지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고 있는 것은 여전한 좌파적 시각의 득세, 그리고 ‘분단=근대민족국가의 미완성’으로 몰아가는 민족주의 정서가 작용한 탓이다.

일테면 “좌ㆍ우파, 보수와 진보 모두에게 욕먹을 객관적인 대한민국사”를 표방한 단행본 『좌우파가 논쟁하는 대한민국사 62』를 쓴 정치학자 김영명(한림대 교수)은 항일투쟁과 건국과정의 정통성은 평양 김일성이 더 있고, 이후 근대화작업의 공헌은 서울 이승만-박정희가 더 있다는 주장을 했다. 세상에 이 따위 편의주의적이고 기계적 구분도 있을까? 사실(史實)과 무관한 이런 판단을 하는 그는 한국정치외교사학회장이다. 먹물 특유의 기회주의 성향에 속물(俗物)근성으로 가득한 현대사 학자와 국내 학계의 다수는 그쪽에 선다.

아니 그런 가짜 중립의 입장을 가진 이도 드문 게 현실이다. 다수의 지식인들은 대한민국 건국과정에 참여하지 않았던 한독당의 김구 식 민족주의 정서를 가졌거나, 운동권 식 NL마인드에서 자유롭지 못할 뿐이다. 상식이지만 해방 1개월을 약간 넘긴1945년 9월 20일 “북한 지역에 부르주와 민주주의 정권을 세우라”는 스탈린 지령이 야말로 사실상 민족분단의 시발점이 아니던가? 그걸 1993년 2월 일본 마이니치 신문이 단독보도했고, 이정식 교수를 포함한 국내외 학자들 사이에 규명이 끝났으며, 수정주의 사관이 얼마나 허깨비인지를 규명했던 게 아닐까?

“스탈린의 지령은 북한 지역에 단독 정부를 세우라는 명백한 지시였다. 조선민족이 일제에서 해방된 지 37일만에 내려진 이 지령은 해방후 북한의 역사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해방 후 한반도에서 미소관계의 진전과 더불어 한국현대사 전반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끼쳤다. 이 지령은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화시키는 것이었고, 남북의 재통합, 즉 민족의 재통일을 위한 모든 논쟁과 노력을 허무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논문‘냉전의 전개과정과 한반도 분단의 고착화-스탈린의 한반도 정책, 1945년’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2권 수록)


상황이 이러한데 아직도 이승만 단정의 원흉으로 모는 이들은 해방 이후 모스크바 지령을 맹목적으로 따르고, 한독당의 김구 식 좌우합작을 지지하려는 음험한 정치적 배경을 가졌음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도 모른 채 분위기에 편승해 그런 주장을 펼친다면 철지난 NL 얼뜨기란 지적을 받아야 옳다. 해방공간에서 좌파의 그런 정치 프로그램을 따랐을 경우 이른바 단독정부는 등장하지 않았으리라. 우남의 능동적이고 선제적 대응노력이 없었을 경우 당시 정치사회의 역학으로 판단하건대 속절없이 그쪽으로 흘러갔을 개연성은 거의 100%였다.


그렇다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꽃 피운 대한민국의 건국사는 존재조차 없었을 것이고, 꽃도 피우기 전에 김일성 전체주의 세력에 흡수됐을 것이라는 가정이 합리적이다. 그 전후에 혹심한 내란상태 경험도 피할 수 없었으리라. 최선의 그림을 그릴경우 지금의 한반도는 어떤 모습일까? 통일베트남의 경제력과 통합력보다 현저하게 떨어지는 수준의 통일조선으로 숨만 쉰 채 연명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 북한지역이 사실상 동북3성의 하나로 사실상 흡수된 상태이지만, 한반도의 유구한 옛 질서였던 ‘오래된 악몽’옛 조선의 정체와 가난의 땟국물에서 멀지 않았을 것도 분명하다. 이런데도‘이승만=단정의 원흉’으로 모는 이들은 뭘까? 역사의 철부지 무리에 불과하지 않을까?

요약:

2차세계대전 끝물에 루즈벨트는 일본 관동군을 너무 과대평가했다. 소련은 동아시아에는 관심이 없고, 유럽에만 관심이 있었는데. 루즈벨트가 소련이 일본 관동군을 소탕하라고 엄청난 지원을 약속. 소련군은 미온적이었는데, 일본에 핵이 떨어지자 마자. 이러다가 동북아에 이권을 놓치겠다고 급하게 소련군이 참전. 만주도 소련군에게 떨어지는데 이게 국공내전에도 큰 영향을 끼침.

하여간 루즈벨트가 이렇게 소련에게 관동군을 소탕하라면서 퍼줬기에 한반도 전체가 소련군의 전리품이 될 수도 있었음. 그나마 38선 이남을 지켜 낸거. 이승만이 정읍발언 하기 전에 이미 북반부에는 소련의 괴뢰정부가 사실상 들어섰음. 미국이 제시한 좌우합작은 현실성이 떨어짐. 좌우합작을 시도한 국가는 모두 공산화됌. 이승만도 이걸 지적함. 이승만은 정읍발언은 도리어 한반도 남반부라도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체재의 정부를 설립하게 한 발언임





각주

  1. 선진국
  2. 좌파쪽에 더 많을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