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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협상]] 당시 [[김구]]의 평양행을 설득==
==[[남북협상]] 당시 [[김구]]의 평양행을 설득==
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은 해방직후부터 [[6.25]] 때 월북하기 전까지 서울에 있었고, 경교장에도 자주 출입하며 [[김구]]와 면담도 했는데, 1948년 4월 [[남북협상]] 당시 [[김구]]의 북행 강행 배경에는 홍명희의 역할이 컸다고 말한다. 홍명희도 이때 평양에 가서 돌아오지 않고 눌러 앉았다. 해방 후 홍명희는 비밀리에 몇 차례 북한을 다녀오고, 김일성을 만나기도 했다고 하므로, 북한에 포섭되어 서울에서 정보요원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의심된다.
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은 해방직후부터 [[6.25]] 때 월북하기 전까지 서울에 있었고, 경교장에도 자주 출입하며 [[김구]]와 면담도 했는데, 1948년 4월 [[남북협상]] 당시 [[김구]]의 북행 강행 배경에는 홍명희의 역할이 컸다고 말한다. 홍명희도 이때 평양에 가서 돌아오지 않고 눌러 앉았다.  
 
해방 후 홍명희는 비밀리에 몇 차례 북한을 다녀오고, 김일성을 만나기도 했다고 하므로, 북한에 포섭되어 서울에서 정보요원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의심된다.


* [https://news.joins.com/article/2432040 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 / 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61] 중앙일보 1990.01.26 종합 3면
* [https://news.joins.com/article/2432040 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 / 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61] 중앙일보 1990.01.26 종합 3면

2022년 4월 10일 (일) 17:56 판

홍명희(洪命憙, 1888년 5월 23일 ~ 1968년 3월 5일)는 일제시대 조선의 작가이며, 조선일보에 소설 《임꺽정》(林巨正)[1]을 연재하여 유명해졌다. 해방 직후 서울에서 정치활동을 하다 1948년 4월 남북협상 때 월북하였다. 북한에서 부수상 등을 지냈으며, 딸이 김일성과 결혼하였으나 일찍 죽어서 잘 알려지지 않았다.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호는 벽초(碧初)이다.

생애

남북협상 당시 김구의 평양행을 설득

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은 해방직후부터 6.25 때 월북하기 전까지 서울에 있었고, 경교장에도 자주 출입하며 김구와 면담도 했는데, 1948년 4월 남북협상 당시 김구의 북행 강행 배경에는 홍명희의 역할이 컸다고 말한다. 홍명희도 이때 평양에 가서 돌아오지 않고 눌러 앉았다.

해방 후 홍명희는 비밀리에 몇 차례 북한을 다녀오고, 김일성을 만나기도 했다고 하므로, 북한에 포섭되어 서울에서 정보요원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의심된다.

◎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대립 / 백범 종종 조만식 밀서 받아 / 남로당선 홍명희 통해 접근 시도하기도
특히 백범은 평양의 조만식으로부터 밀서를 종종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북동포가 전부 자기를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에 백범이 측근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평양에 간 것도 이같은 믿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중요한 배경은 평양의 김일성이 5·10선거를 파탄시켜 이승만 정권을 수립 못 하게 하기 위해 백범이 평양의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해주면 남조선에서 비록 단독정부를 수립해도 이북에서는 이에 대항하는 정부를 수립하지 않겠다는 밀서를 보내온 것이었다.

남로당에서도 홍남표가 홍명희를 시켜 백범에게 공작도 했었다. 백범은 황해도 출신이기 때문에 북한에 대한 관심과 애착이 굉장했었다.
◎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 대립/김일성 당ㆍ군ㆍ정 3권 장악/분단책임 미­이승만에 전가… 공산정권 수립
백범은 남북통일선거를 하면 자기가 정권을 쥔다고 믿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도 그럴만한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조만식계의 북조선 민주당계나 기타 북조선 인사들이 서울에 오면 돈암장보다 경교장을 먼저 찾아가기 때문이었다.

백범은 이북동포들에게 자기의 얼굴을 꼭한번 보일 필요를 느꼈기 때문에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평양에 갔는데 김일성은 백범이 회의대표들과 충분히 인사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백범의 방북보고서를 보면 (이것은 당외비였는데 남로당 수중에 한 부 들어왔다) 아주 불만에 차 있었다.

북한에서의 김일성 시책을 다 부정적으로 보았고 긍정적으로 본 것은 「혁명가 유가족 학원을 지어 혁명가 유가족을 우대하고 있다」는 단 한가지뿐이었다.

백범은 평양행은 결과적으로 미국과 이승만에게만 타격을 주었을뿐 김일성은 오히려 덕을 보았으며 백범 자신은 잃은 것만 있지 얻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백범과 심산(김창숙)이 믿고 있던 벽초(홍명희)는 평양연석회의에 가서는 김일성에 밀착하여 서울을 버리고 평양에 영주하기 위해 가족을 다 불러갔다.

9월에 김일성정권이 수립되자 벽초는 부수상에 등용되었다. 그는 감격해 쌍둥이딸 둘을 김일성집 가정부로 보냈다. 큰아들 기문은 과학원원사로 한글을 연구하고 둘째아들 기무는 38선을 왔다갔다 하다가 행방불명되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평양에서 벽초를 만난 사람들의 얘기로는 역시 속으로는 불평불만이 가득차 서울을 그리워하고 있더란 것이었다.

홍명희는 북한에서 최고 권력층이 되었지만, 서울을 그리워 했다니 북한 생활에 그렇게 만족하지는 못했던 듯하다.

김일성과 홍명희의 딸들

김정숙이 사망한 4개월 후인 1950년 1월에 남한의 다수 신문들이 김일성이 부수상 홍명희(洪命憙)의 딸 홍영숙(洪永淑)과 결혼했다고 보도 했다.[2][3][4] 그러나 딸이 결혼 초에 일찍 사망하여 김일성과의 결혼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홍명희는 월북하기 전에 쌍둥이 딸 주경(姝瓊), 무경(茂瓊)과 3녀 계경(季瓊)을 두고 있었다고 하므로, 김일성과 결혼한 사람은 쌍둥이 딸 중 한명일 것이나, 신문에 보도된 이름과는 왜 다른지 이유는 미상이다. 월북한 문인들이 대부분 숙청 당해 처형되거나 비참한 말로를 맞았지만 홍명희와 그 일가가 고위직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것도 그가 한때 김일성의 장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북한 부수상 재직 당시 사진

각주

  1. 임꺽정 (소설) 위키백과
  2. 홍명희(洪命熹) 맏딸과 김일성(金日成) 재혼(再婚) 연합신문(聯合新聞) 1950.01.25
    김일성(金日成)이 재혼(再婚), 홍명희(洪命熹) 맏딸 영숙(永淑)과 자유신문 1950년 01월25일 2면 10단
    김일성(金日成) 재혼(再婚) 한성일보(漢城日報) 1950.01.25
    깨여지는 괴뢰(傀儡)의 백일몽(白日夢) 치열화(熾烈化)한 반소반공운동(反蘇反共運動) 1950.01.25. 경향신문 2면
    History of the North Korean Army U.S. Army Far East Command, July 31, 1952; 원문 pp.90~91 (pdf pp.144~145) : In January 1950, he (KIM Il Sung) is said to have married a daughter of HONG- Myong Hui, a Vice Premier of the North Korean Regime.
  3. 金日成 전속 간호부 趙玉姬, 체포 후 기자회견 부산일보 1951년 03월 01일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金日星(김일성)의 看護婦(간호부) 合同搜査本部(합동수사본부)서 逮捕(체포) 부산일보 1951-03-01
  4. 6.25 北(북)에서 본 證言(증언) <16> 제4부 開戰準備(개전준비) 진행 (1949년) 1980.07.03 경향신문 3면
  5. 송종환, 6·25 전쟁 50년의 再照明 ⑧ - 舊소련 비밀문서에 나타난 전쟁의 起源 : 스탈린은 6·25 전쟁을 기획하고 연출한 총감독이었다 월간조선 1999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