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번째 줄: 61번째 줄:
* 신복룡,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02&nNewsNumb=002373100010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 홍명희가 북한에 남은 이유] [광복 70주년 특집 |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 [주간조선 2373호] 2015.09.07
* 신복룡,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02&nNewsNumb=002373100010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 홍명희가 북한에 남은 이유] [광복 70주년 특집 |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 [주간조선 2373호] 2015.09.07
{{인용문|엄혹하던 반공국가의 시절에 남한의 우익들은 홍명희의 딸이 김일성의 소실이었다느니 김일성의 집안 식모였다느니 별 험한 소리를 다했지만 사실이 아니다. 이는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낳은 아픈 가족사의 단면이다. 그러나 그가 어떤 형태로든 엄마를 잃은 김정일을 보살핀 것만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이 이야기는 내가 평양에 갔을 적에 김일성대학에서 홍명희를 연구한 교수로부터 들은 것이다.}}
{{인용문|엄혹하던 반공국가의 시절에 남한의 우익들은 홍명희의 딸이 김일성의 소실이었다느니 김일성의 집안 식모였다느니 별 험한 소리를 다했지만 사실이 아니다. 이는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낳은 아픈 가족사의 단면이다. 그러나 그가 어떤 형태로든 엄마를 잃은 김정일을 보살핀 것만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이 이야기는 내가 평양에 갔을 적에 김일성대학에서 홍명희를 연구한 교수로부터 들은 것이다.}}
: 정치학자라는 사람이 조금만 맘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엄혹하던 반공국가의 시절" 타령하는 것도 병이다. 반공하지 않고 간첩들 마음대로 활동하게 해서 공산화된 나라에서 살고싶다는 말인가? 아니면 반공 하려고 우익들이 일부러 그런 말을 지어내 퍼뜨리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 정치학자라는 사람이 조금만 맘에 안드는 일이 있으면 "엄혹하던 반공국가의 시절" 타령하는 것도 병이다. 반공하지 않고 간첩들 마음대로 활동하게 해서 공산화된 나라에서 살고싶다는 말인가? 아니면 반공 하려고 우익들이 일부러 그런 말을 지어내 퍼뜨리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 [https://books.google.co.kr/books?id=SJyP6xNy8N4C&pg=PA578&lpg=PA578&dq=%EC%98%A4%EB%9E%98+%EC%A7%80%EC%86%8D+%EB%90%98%EC%97%88%EB%8B%A4+%EB%8A%94+%ED%92%8D%EB%AC%B8+%EC%9D%B4+%EC%9E%88+%EC%97%88%EC%9C%BC%EB%A9%B0+,+%EC%9D%BC%EB%B6%80&source=bl&ots=7BF7-pCD3Z&sig=sfl-1Z9EhdGHb2BMiINWi93UlDk&hl=ko&sa=X&ved=0ahUKEwjkg5iwvJHTAhXBr48KHc9vDxQQ6AEIEzAA#v=onepage&q=%EC%98%A4%EB%9E%98%20%EC%A7%80%EC%86%8D%20%EB%90%98%EC%97%88%EB%8B%A4%20%EB%8A%94%20%ED%92%8D%EB%AC%B8%20%EC%9D%B4%20%EC%9E%88%20%EC%97%88%EC%9C%BC%EB%A9%B0%20%2C%20%EC%9D%BC%EB%B6%80&f=false 강영주, 벽초 홍명희 연구] (창작과 비평, 1999) pp.578~579 주 49
* [https://books.google.co.kr/books?id=SJyP6xNy8N4C&pg=PA578&lpg=PA578&dq=%EC%98%A4%EB%9E%98+%EC%A7%80%EC%86%8D+%EB%90%98%EC%97%88%EB%8B%A4+%EB%8A%94+%ED%92%8D%EB%AC%B8+%EC%9D%B4+%EC%9E%88+%EC%97%88%EC%9C%BC%EB%A9%B0+,+%EC%9D%BC%EB%B6%80&source=bl&ots=7BF7-pCD3Z&sig=sfl-1Z9EhdGHb2BMiINWi93UlDk&hl=ko&sa=X&ved=0ahUKEwjkg5iwvJHTAhXBr48KHc9vDxQQ6AEIEzAA#v=onepage&q=%EC%98%A4%EB%9E%98%20%EC%A7%80%EC%86%8D%20%EB%90%98%EC%97%88%EB%8B%A4%20%EB%8A%94%20%ED%92%8D%EB%AC%B8%20%EC%9D%B4%20%EC%9E%88%20%EC%97%88%EC%9C%BC%EB%A9%B0%20%2C%20%EC%9D%BC%EB%B6%80&f=false 강영주, 벽초 홍명희 연구] (창작과 비평, 1999) pp.578~579 주 49

2022년 4월 10일 (일) 20:06 판

홍명희(洪命憙, 1888년 5월 23일 ~ 1968년 3월 5일)는 일제시대 조선의 작가이며, 조선일보에 소설 《임꺽정》(林巨正)[1]을 연재하여 유명해졌다. 해방 직후 서울에서 정치활동을 하다 1948년 4월 남북협상 때 월북하였다. 북한에서 부수상 등을 지냈으며, 딸이 김일성과 결혼하였으나 일찍 죽어서 잘 알려지지 않았다.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호는 벽초(碧初)이다.

북한 초대 내각 구성원들 사진 : 앞줄 수상 김일성의 왼편이 부수상 홍명희이다.

생애

남북협상 당시 김구의 평양행을 설득

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은 해방직후부터 6.25 때 월북하기 전까지 서울에 있었고, 경교장에도 자주 출입하며 김구와 면담도 했는데, 1948년 4월 남북협상 당시 김구의 북행 강행 배경에는 홍명희의 역할이 컸다고 말한다. 홍명희도 이때 평양에 가서 돌아오지 않고 눌러 앉았다.

해방 후 홍명희는 비밀리에 몇 차례 북한을 다녀오고, 김일성을 만나기도 했다고 하므로, 북한에 포섭되어 서울에서 정보요원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의심된다.

◎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대립 / 백범 종종 조만식 밀서 받아 / 남로당선 홍명희 통해 접근 시도하기도
특히 백범은 평양의 조만식으로부터 밀서를 종종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북동포가 전부 자기를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에 백범이 측근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평양에 간 것도 이같은 믿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중요한 배경은 평양의 김일성이 5·10선거를 파탄시켜 이승만 정권을 수립 못 하게 하기 위해 백범이 평양의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해주면 남조선에서 비록 단독정부를 수립해도 이북에서는 이에 대항하는 정부를 수립하지 않겠다는 밀서를 보내온 것이었다.

남로당에서도 홍남표가 홍명희를 시켜 백범에게 공작도 했었다. 백범은 황해도 출신이기 때문에 북한에 대한 관심과 애착이 굉장했었다.
◎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 대립/김일성 당ㆍ군ㆍ정 3권 장악/분단책임 미­이승만에 전가… 공산정권 수립
백범은 남북통일선거를 하면 자기가 정권을 쥔다고 믿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도 그럴만한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조만식계의 북조선 민주당계나 기타 북조선 인사들이 서울에 오면 돈암장보다 경교장을 먼저 찾아가기 때문이었다.

백범은 이북동포들에게 자기의 얼굴을 꼭한번 보일 필요를 느꼈기 때문에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평양에 갔는데 김일성은 백범이 회의대표들과 충분히 인사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백범의 방북보고서를 보면 (이것은 당외비였는데 남로당 수중에 한 부 들어왔다) 아주 불만에 차 있었다.

북한에서의 김일성 시책을 다 부정적으로 보았고 긍정적으로 본 것은 「혁명가 유가족 학원을 지어 혁명가 유가족을 우대하고 있다」는 단 한가지뿐이었다.

백범은 평양행은 결과적으로 미국과 이승만에게만 타격을 주었을뿐 김일성은 오히려 덕을 보았으며 백범 자신은 잃은 것만 있지 얻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백범과 심산(김창숙)이 믿고 있던 벽초(홍명희)는 평양연석회의에 가서는 김일성에 밀착하여 서울을 버리고 평양에 영주하기 위해 가족을 다 불러갔다.

9월에 김일성정권이 수립되자 벽초는 부수상에 등용되었다. 그는 감격해 쌍둥이딸 둘을 김일성집 가정부로 보냈다. 큰아들 기문은 과학원원사로 한글을 연구하고 둘째아들 기무는 38선을 왔다갔다 하다가 행방불명되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평양에서 벽초를 만난 사람들의 얘기로는 역시 속으로는 불평불만이 가득차 서울을 그리워하고 있더란 것이었다.

홍명희는 북한에서 최고 권력층이 되었지만, 서울을 그리워 했다니 북한 생활에 그렇게 만족하지는 못했던 듯하다.

6.25 전범

홍명희가 6.25 남침의 주범이라 할 수는 없지만, 부수상이라는 직위상 일찍부터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알았을 것으로 보인다. 1949년 3월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침 전쟁에 대한 승인을 얻기 위해 소련을 방문했을 때 그를 수행했으며, 1950년 남침 전쟁 개시 직후인 6월 26일 만들어진 전쟁 최고 지휘부인 7인 군사위원회의 구성원이기도 했으므로 전쟁에 대해 상당한 책임이 있다.

그의 생모 은진 송씨(恩津 宋氏, 1871~1890)는 그가 두 살때인 1890년 세상을 떠나, 계모 조경식(趙璟植, 1876~1950)이 그를 양육했다. 하지만 1948년에 노모만 고향 괴산에 남겨 두고 그의 일가족 전체와 계모 소생의 동생까지 월북하였다. 이어 6.25 남침이 발발하자 괴산의 계모는 우익 인사들에게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이는 그가 북한의 고위직 인물이 된 것과 무관할 수 없으므로, 그는 계모에게 말할 수 없는 불효를 한 것이다. 월북하려면 노모를 모시고 가든가, 아니면 월북하지 말든가, 그도 아니면 기필코 전쟁이라도 막든가 했어야 했다.

김일성과 홍명희의 딸들

홍명희의 자녀로는 아들 홍기문(洪起文, 1903~1992), 홍기무(洪起武, 1910~?)와 쌍둥이 딸 홍주경(洪姝瓊, 1921~?), 홍무경(洪茂瓊, 1921~?) 및 셋째 딸 홍계경(洪季瓊, 1926~?)이 있었다고 한다.

홍명희의 딸과 관련한 루머

홍명희의 일가족이 모두 월북한 후 그의 딸들과 김일성과의 관계에 대해서 남한에서는 여러 가지 루머들이 돌았다.

엄혹하던 반공국가의 시절에 남한의 우익들은 홍명희의 딸이 김일성의 소실이었다느니 김일성의 집안 식모였다느니 별 험한 소리를 다했지만 사실이 아니다. 이는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낳은 아픈 가족사의 단면이다. 그러나 그가 어떤 형태로든 엄마를 잃은 김정일을 보살핀 것만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이 이야기는 내가 평양에 갔을 적에 김일성대학에서 홍명희를 연구한 교수로부터 들은 것이다.
정치학자라는 사람이 조금만 맘에 안드는 일이 있으면 "엄혹하던 반공국가의 시절" 타령하는 것도 병이다. 반공하지 않고 간첩들 마음대로 활동하게 해서 공산화된 나라에서 살고싶다는 말인가? 아니면 반공 하려고 우익들이 일부러 그런 말을 지어내 퍼뜨리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항간에는 홍명희의 딸이 '김일성의 첩'이었다든가 , 홍명희가 '김일성의 장인'이었던 관계로 그의 정치 생명이 오래 지속 되었다는 풍문이 있었으며 , 일부 학술서적도 이를 사실로 간주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김정원, 분단한국사, 동녘 1985, 366면). 그러나 인척으로서 당시 북한에서도 홍명희 일가와 내왕이 있던 이구영(李九榮, 1920~2006) 선생은 이것이 전혀 사실무근한 일이라고 증언하였다. (1996.9.6. 면담). 스칼라피노와 이정식 교수의 한국공산주의운동사에서는 “일설에 의하면 그의 딸은 김일성의 첫 아내가 아기를 낳다가 죽자 1945년 이후 김일성의 가사를 돌보아주었다고 한다”(제3권, 한홍구 옮김, 돌베게 1987, 600면)고 했는데, ‘김일성의 첩’ 운운은 이것이 와전된 것이 아닌가 한다.
  • 나무위키의 "홍명희" 문서에는 시인 김소월(金素月, 1902~1934)이 그의 사위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1921년 생인 홍명희의 맏딸도 결혼할 상대가 되지도 않으므로 사실 무근이다.

진실은 무엇인가?

위에서 본 대로 박갑동은 홍명희가 부수상이 되자 감격해서 쌍둥이 딸을 김일성 집에 가정부로 들여보냈다고 한다.[4] 이 말은 사실일 가능성이 크며, 김일성의 처 김정숙이 1949년 9월 사망한 직후의 일로 보인다. 김일성도 자녀와 가사 일을 맡아줄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다.

김정숙이 사망한 4개월 후인 1950년 1월에 남한의 다수 신문들이 김일성이 부수상 홍명희(洪命憙)의 딸 홍영숙(洪永淑)과 결혼했다고 보도 했다.[5] 미군의 기록에도 그런 말이 나오며[6], 6.25 때 체포된 김일성의 전속 간호사 조옥희(趙玉姬)도 같은 증언을 했고,[7] 6.25 때 포로가 된 인민군 소좌 출신 주영복도 같은 말을 했으니[8] 이는 사실일 것이다. 딸들이 김일성 집의 가사 일을 돌보다가 둘 중 한 명이 결혼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커 보인다. 조옥희는 김일성의 부인이 된 홍명희의 딸이 심장이 약하다고 했으므로 아마 결혼 초에 일찍 사망하여 김일성과의 결혼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쌍둥이 딸 홍주경(洪姝瓊, 1921~?), 홍무경(洪茂瓊, 1921~?) 중 한명일 것이나, 신문에 보도된 이름과는 왜 다른지 이유는 미상이다.

월북한 문인들이 대부분 숙청 당해 처형되거나 비참한 말로를 맞았지만 홍명희와 그 일가가 고위직에서 승승장구한 것도 그가 한때 김일성의 장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탈북자들이 주장하는 홍명희 딸 관련 새로운 루머

황장엽과 함께 남한으로 귀순한 김덕홍은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홍명희선생에게는 홍귀원이라는 딸이 있었는데 그는 1956년경에 김일성의 처 김성애의 개인비서로 발탁되었다. 그런데 홍귀원은 김성애가 김일성의 막내아들을 임신하고 있는 기간에 김일성과 관계해서 그의 아이를 임신을 하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해 홍귀원은 과거에는 뼈대 있는 충청양반가문의 후손이었고, 당시는 북한사회학계에서 가장 존경받았던 아버지 홍명희의 얼굴에 똥칠을 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임신해 있은 전 기간 심한 괴로움과 우울증에 시달렸다. 아버지를 볼 낯이 없다며 출산하는 날까지 한 번도 집에 오지 않았던 홍귀원은 결국 김일성의 자식을 낳던 도중에 아이와 함께 사망했다.

홍기문은 연신 손등으로 눈가의 물기를 닦으면서 그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고는 다음과 같은 한탄의 말을 내뱉었다.

“그 애도 불쌍하고……, 슬픔이 크면 빨리 늙는다고 했던가? 아버지도 그 일을 겪은 뒤부터는 폭삭 늙더라.”

위에서 본대로 홍명희의 딸이 김일성과 결혼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런 일이 또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홍명희의 아들 홍기문에게 직접 들은 말이라니 믿지 않기도 어렵고....

각주

  1. 임꺽정 (소설) 위키백과
  2. 송종환, 6·25 전쟁 50년의 再照明 ⑧ - 舊소련 비밀문서에 나타난 전쟁의 起源 : 스탈린은 6·25 전쟁을 기획하고 연출한 총감독이었다 월간조선 1999년 11월호
  3. Regarding the organization of the military committee .군사위원회 조직에 관하여(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북한자료센터) 6.25 전쟁 납북인사 가족협의회
  4. 전 남로당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 / 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110 중앙일보 1990.05.28 종합 5면
  5. 홍명희(洪命熹) 맏딸과 김일성(金日成) 재혼(再婚) 연합신문(聯合新聞) 1950.01.25
    김일성(金日成)이 재혼(再婚), 홍명희(洪命熹) 맏딸 영숙(永淑)과 자유신문 1950년 01월25일 2면 10단
    김일성(金日成) 재혼(再婚) 한성일보(漢城日報) 1950.01.25
    깨여지는 괴뢰(傀儡)의 백일몽(白日夢) 치열화(熾烈化)한 반소반공운동(反蘇反共運動) 1950.01.25. 경향신문 2면
  6. History of the North Korean Army U.S. Army Far East Command, July 31, 1952; 원문 pp.90~91 (pdf pp.144~145) : In January 1950, he (KIM Il Sung) is said to have married a daughter of HONG- Myong Hui, a Vice Premier of the North Korean Regime.
  7. 金日成 전속 간호부 趙玉姬, 체포 후 기자회견 부산일보 1951년 03월 01일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金日星(김일성)의 看護婦(간호부) 合同搜査本部(합동수사본부)서 逮捕(체포) 부산일보 1951-03-01
  8. 6.25 北(북)에서 본 證言(증언) <16> 제4부 開戰準備(개전준비) 진행 (1949년) 1980.07.03 경향신문 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