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金聖柱), 김성주(金成柱), 김성주(金誠柱) 등으로 기록에 나타나고, 1930년 경에 김일성(金一成), 김일성(金一星) 등의 별명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1938년경부터 한자로 金日成이라 쓰는 이름을 사용한 것이 확인되나, 동북항일연군에서 중국인들 틈에 섞여 활동하며 이름을 김일성 아닌 중국어 발음으로 읽었으며, 1940년 10월 소련으로 도주한 이후 해방될 때까지 소련군에서의 공식적 이름은 金日成의 중국어 발음을 러시아어로 표기한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또는 Цзин Жичэн, Jing Zhichen)이었다. 해방 직후 원산항으로 입북할 때는 자신을 본명 김성주로 소개했고, 평양에 와서는 또다른 가명 김영환(金永煥)을 사용하다 1945년 10월 14일 평양의 대중 앞에 김일성 장군의 이름으로 처음나섰다.

하지만 당시 그의 정확한 신분은 소련군 진지첸 대위였을 뿐 해방전 어디에서도 그가 김일성 장군으로 불렸던 적은 없다. 국내인들은 소련군이 데려와 지도자로 내세운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다 온 사람인지 아무도 몰랐으며, 진지첸 자신도 해방직전 5년간 항일투쟁을 한 것이 아니라 소련군에서 복무하다 왔다는 사실을 끝까지 숨겼다. 또 국내에서 완전한 무명인사였던 약점을 감추기 위해 1920년경부터 조선인들 사이에 유명했던 실체가 불분명한 전설적인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여 가짜 김일성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된다.

본명

북한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로 알려져 있지만, 이의 정확한 한자 표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북한에서는 김성주(金成柱)라 주장하고, 남한에서도 이를 따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일제시대 또는 해방 직후 기록에 나타나는 본명 김성주의 한자 표기는 김성주(金聖柱), 김성주(金成柱), 김성주(金誠柱), 김성주(金成周) 등 여러 가지가 있고, 어느 것이 옳은지는 명확하지 않다. 김성주(金誠柱)나 김성주(金成周)는 오기로 보이고, 김성주(金聖柱)와 북한에서 주장하는 김성주(金成柱) 중 어느 것이 맞느냐가 주된 논란의 대상이다. 호적이나 학적부 등에 정확한 한자 표기가 나올 것으로 보이나 현재 공개된 것이 없어 확인이 불가능하다.

◆도대체 金日成(김일성)은 八·一五(팔일오) 解放(해방) 후 처음으로 國民(국민) 앞에 나타났을 때부터 어두운 그늘을 지니고 있었다. 가짜 金日成(김일성)이라는 衆論(중론)에 대해 진짜라고 줄곧 우겨대왔었는데 마침내 감출 길이 없었는지 本名(본명)이「金成柱(김성주)」라는 것은 是認(시인)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것도 造作(조작)이고 實名(실명)은「金聖柱(김성주)」라는 異論(이론)도 一部(일부)에는 있다고 한다. 하여간 자기 이름 석字(자)부터 分明(분명)치가 못한 爲人(위인)이다.

김성주(金聖柱)로 나오는 문헌

"육문학교(毓文學校) 생도(生徒) 김성계(金聖桂)"가 바로 북한 김일성이며, 김성주(金聖柱)를 잘못 적은 것이다. 이것이 김성주가 일본측 기록에 나오는 최초의 사례이다
자서전 서두에 필자가 50년전 1900년에 출생했다고 하여 1950년 경 집필한 것임.
조혁군(朝革軍)은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1]을 말한다.
[pp.6 ~ 7] 내가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의 중앙간부(中央幹部)가 되고 조혁군(朝革軍)의 참모장(參謀長)이 됨에 이르러서는 나는 그들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들과 격렬(激烈)한 정면(正面) 충돌(衝突)을 불면(不免)케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나의 동지(同志)들을 많이 죽이고 또 나를 죽이려고 많이 힘썼다. 또 나도 나의 직권(職權)이 있는 한도내(限度內)에서 그들과 여하(如何)한 투쟁(鬪爭)도 불사(不辭)하여 처음에 이론(理論)으로부터 나중에는 실제행동(實際行動)에 이르기까지 치열(熾烈)한 투쟁(鬪爭)을 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실제행동(實際行動)이라 함은 물론(勿論) 서로 총칼을 가지고 상쟁(相爭)하였음을 말함이며, 그때 그들은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책임자(責任者) 현익철(玄益哲), 조혁군(朝革軍) 총사령(總司令) 양세봉(梁世奉)[2], 동참모장(同參謀長) 나를 가리켜 「삼대살인반동영수(三大殺人反動領袖)」라고 불렀던 것이다.
지금 북한(北韓)의 괴수(魁首) 김일성(金日成)은 그의 원명(原名)이 김성주(金聖柱)인 바, 그가 어렸을 때에 그의 집은 장백(長白)에 있었고 그의 부친(父親)은 우리 민족진영(民族陣營)의 일원(一員)이었다. 우리 정의부(正義府)에서 학비(學費)를 공금(公金)으로 주어 길림(吉林) 육문중학(毓文中學) 2학년(學年)까지 공부를 시켰는데, 그 후 그는 조혁군(朝革軍) 제(第)1중대(中隊) 이종락(李鍾洛) 대장(隊長) 아래 있다가 공산주의(共産主義)로 사상(思想)을 전환(轉換)한 것이다. 1929년(年) 내가 길림(吉林)에 어떤 대표(代表)로 가서 있을 때에 그는 상기(上記) 육문중학(毓文中學)에서 공부하면서 길림(吉林)에 있는 소년(少年)들을 몰아가지고 소년대(小年隊)를 조직(組織)하고 그가 대장(隊長)으로 있으면서 나를 찾아 다니던 것이 기억(記憶)되며, 내가 참모장(參謀長)으로 1932년(年) 하(夏) 당취오군(唐聚五軍)과 같이 통화(通化)에 사령부(司令部)를 설치(設置)하고 있을 때 그는 무송(撫松)으로부터 한국공산청년(韓國共産靑年) 수십명(數十名)을 데리고 중국인(中國人) 유본초(劉本初)라는 사람과 동행(同行)하여 통화성(通化城)에 있는 양사령(梁司令)[2]과 나를 찾아와, 자기(自己)네도 항일(抗日)할 터이니 무기(武器)를 달라고 요구(要求)하던 생각이 난다. 그러나 나는 그가 이미 사상적(思想的)으로 우리와는 적대진영(敵對陣營)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치지불리(置之不理)해 보냈던 것도 생각난다. 공산주의(共産主義)는 그의 기도(企圖)가 세계(世界)를 정복(征服)하는데 있기 때문에 그들과 우리와는 언제든지 양립(兩立)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과 타협(妥協)이니 하는 것은 호상(互相) 자기(自己)네의 정략전략(政略戰略)에 의한 일종(一種) 시간(時間)을 쟁취(爭取)하는 수단(手段)에 불과(不過)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p.94, p.103, p.109, p.152 에 김일성의 창덕학교(彰德學校) 급우나 만주에서 그를 알았던 지인 등이 그의 본명이 「金聖柱」라고 하는 증언이 나온다.

김성주(金成柱)로 나오는 문헌

  • 1930년 3월 14일 국민부(國民府)는 산하의 남만한인청년총동맹(南滿韓人靑年總同盟), 남만농민동맹(南滿農民同盟), 남만여자교육회(南滿女子敎育會) 등 3개 단체를 통합시켜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東省朝鮮人農民總同盟)을 조직한다. 이 동맹의 무송(撫松)·안도(安圖) 지방을 담당할 지부동맹조직위원(支部同盟組織委員)으로 북한 김일성(金成柱)이 선출되었다.[3]
  • 1931년 3월 24일에 김일성(金成柱)이 세화군(世火軍)[4] 군정위원회(軍政委員會) 위원(委員)으로 선임되었다는 일제의 기록이 있다.[5]
함경남도 국경지대 압록강 대안(對岸)에 반거(蟠踞)하는 소위 김일성(金日成) 일파라 칭하는 무장단(武裝團)은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第1路軍) 제2군(第2軍) 제6사(第6師)로서 김일성(金日成)을 사장(師長), 위민생(魏民生)을 정치위원(政治委員)으로 하는 한인(韓人) 중국인(中國人) 혼합의 무장단이다. [김일성(金日成)의 신원(身元)에 대하여는 여러 설(說)이 있으나 본명(本名) 김성주(金成柱), 당 29세(當 29歲),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平安南道 大同郡 古坪面 南里) 출신(出身)으로 어릴 때 실부모(實父母)를 따라 간도(間島) 방면으로 이주하여 그 지방에서 성인(成人)이 되어 무장단(武裝團)에 투신(投身)한 한인(韓人)이라는 것이 가장 확실하며, 그의 실모(實母)는 생존해 있는 모양이다.] ≪사상휘보(思想彙報) 제20호 (1939.09.01) pp.8~9.≫[6]
북한 김일성을 보천보 사건 당사자라 하고, 본명을 金成桂라 하였다. (桂는 柱의 오기)

김성주(金誠柱)로 나오는 문헌

최동오(崔東旿, 1892~1963)는 월북한 최덕신(崔德新, 1914~1989)의 부친으로 김일성이 1926년 봄 정의부(正義府)에서 세운 만주 화전현(樺甸縣)의 화성의숙(華成義塾)[7]을 3개월여 다닐 때 숙장(塾長)이었다. 1948년 4월 남북협상 당시 제자 김일성을 만난다며 평양을 다녀왔는데, 6.25 때 납북 당했다고 하나 월북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김성주(金成周)로 나오는 문헌

1930년 6월 27일에 국민부 소년단(國民府 少年團)이 창립되었는데, 단원 52명으로 총대장 이윤홍(李允洪) 아래 제3분대장으로 김성주(金成周)가 나온다. 김성주(金成周)라는 이름은 다른 기록에는 보이지 않으므로 周는 아마도 柱의 오기로 추정되며 북한 김일성이 맞을 것이다.

공개가 금지된 소학교 학적부

김일성 본명의 정확한 한자를 알 수 있는 공신력이 높은 자료로 만주 장백현(長白縣)에서 소학교를 다닐 때의 학적부가 남아 있다고 하는데, 공개가 금지되어 있어 불행히도 아직은 확인할 수 없다.

대외 열람이 불가능한 자료이기는 하지만 金日成이 어린 시절 장백에서 학교를 다닐 때 학사기록부가 남아 있다.

별명

유격대에 투신하기 전인 1931년 경에 그는 본명 김성주 외에도 김일성(金一成) 또는 김일성(金一星)의 별명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金一成)

이종락(李鐘洛, 1907~1940)의 부하 김일성(金一成)이 체포되었다는 1931년 3월 및 5월 동아일보 기사

김일성(金一星)과 한별

일성(一星)은 북한 김일성이 1930년 말 ~ 1931년 초 만주 회덕현 오가자(懷德縣 五家子)에 머물던 시절에 최형우(崔衡宇, 1905~1950)가 지어준 별호이다.

  •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新文化社, 1974) pp.122~124.
이명영, 진위 김일성 열전 (9) 김성주의 별명도 김일성 중앙일보 1974.04.15 종합 3면
어느날 삼성학교선생 최형우(당시33∼34세·정주사람)가 김성주에게 『만주에서는 중국사람식으로 당호(별호)란 게 있어야 하는데 자네도 당호 하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랬더니 김성주는 좋은 당호 하나를 지어 달라고 최형우에게 부탁했다.

최형우는 당호 몇개를 지어보이면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라고 했다. 김성주는 여러 개의 당호 가운데서 「일성(一星)」두 글자가 마음에 든다고 하면서 자기도 한번 장군이 되고싶다고 했다.

그래서 최형우는 『그래, 그럼 우선 별 하나만 달아보자』하며 「일성(一星)」이란 당호를 써주었다.
동지들은 그의 장래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일성(一星)」이라는 아호(雅號)의 선물을 주었다.

북한은 김혁(金赫)이라는 시인이 "한별"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동지들이 이를 한자로 "一星"이라 적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주장하며, "조선의 별"이라는 영화까지 만들어 이를 선전했다.[8][9] 그러나 이런 주장은 사실로 보기 어렵다. 김혁의 본명은 김근혁(金根赫)으로 김일성이 알던 인물이기는 하나 그보다 7~8년 이상 연장자이고 선배격이었다.[10] "한별"은 북한 김일성이 아니라 김인묵이라는 인물의 이름이라는 주장도 있다.[11][12]

오가자(五家子)의 살인범 홍종환(洪鍾煥)은 누구인가?

만주 공산 유격대의 김일성과 김일선

북한 김일성이 1932년말 경 유격대에 투신한 초기에 어디서 무슨 활동을 했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북한에서 주장하는 엄청난 전과들은 믿을만한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김일성의 유격대 투신 초기인 1932년에서 1936년까지 관련 기록을 가장 많이 찾아내어 검토한 사람은 허동찬(許東粲, 1932 ~ )이다.[13] 그가 찾아낸 기록들을 보면 유격대 내에 약간의 지위를 가진 인물로 김일성(金日成), 김일성(金一成), 김일성(金一星), 김일선(金一善), 김일선(金日善) 등의 이름이 어지럽게 나오는데 누가 누구인지 정확히 판별하기 어려우나 적어도 이런 이름의 사람이 둘 이상이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김일선은 김일성과 관계없는 이름처럼 보이지만, 김일성의 이칭으로 명기된 기록들이 있기 때문에 같이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북한 김일성이 유격대 시절 초기에 어떤 이름을 썼는지도 명확하지 않으므로 이런 기록들 중에 실제 북한 김일성이 들어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허동찬은 이런 기록들 속애서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과 북한 김일성을 분간해내려 시도하고 있으나, 이름만 보고 이들을 구분하는 것은 어려운 것 같다. 이종석은 항일 유격대 내에서 김일성이란 이름을 쓴 사람은 북한 김일성 한 사람뿐이라면서 허동찬을 맹비판하고 있다.[14] 그러나 이 시기의 기록들에 항일유격대 내에 2명 이상의 김일성(김일선)이 존재하는 것이 명백히 확인된다.

  • 이청천(李靑天), 양세봉(梁世奉, 梁瑞鳳) 등 계열의 한인 독립군 각파 회의에 고이허(高而虛)파 대표로 김일성(金一成)이란 인물이 참석했다는 1934년 8월 17일자 조선신문(朝鮮新聞) 보도가 있는데, 이 김일성이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다. 북한 김일성이 이 무렵까지 국민부(國民府)와 관계를 맺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고이허는 회덕현 오가자(懷德縣五家子)의 삼성학교 교사를 지냈고, 1930년 초에 국민부 산하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東省朝鮮人農民總同盟)의 상무집행위원이었는데, 당시 김일성(金成柱)은 그 아래 무송(撫松)·안도(安圖) 지방을 담당한 지부동맹조직위원(支部同盟組織委員)이었다.[3]
  • 검거된 김일성은 명백히 다른 인물
  • 조선총독부 경무국(朝鮮總督府警務局)이 1938년(昭和 13年) 발간한 《최근에 있어서의 조선치안상황(最近に於ける朝鮮治安狀況)》의 1938년 12월말 현재 대안비적현세표(對岸匪賊現勢表)에는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이 임강현(臨江縣, 부하 200 명)과, 무송현(撫松縣, 부하 300 명) 두 곳에 나온다.[15] 2명의 김일성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아마도 1명은 전사한 6사장 김일성이고, 다른 1명은 이후 그와 같은 이름을 쓰던 제2방면군장 김일성으로 보인다. 북한 김일성이 제2방면군장이 된 것은 1938년 11월의 일로 알려져 있다.

동북항일연군 시기

조국광복회와 김동명

오늘날 북한은 김일성이 1936년 5월 김동명이란 가명으로 이동백(리동백), 여운형(려운형)과 같이 주도하여 조국광복회(祖國光復會)라는 단체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16][17] 그러나 북한이 말하는 이런 단체는 어느 기록에도 나오지 않으며, 실존한 적이 없다. 김동명이란 가명도 후대에 만들어낸 것이지 실제로 당시에 쓰던 가명으로 보기 어렵다.

조국광복회는 동북항일연군 제2군의 주요 간부인 오성륜(吳成崙, 1900~1947 ?)·이상준(李相俊, 李東光, 1904~1937)·엄수명(嚴洙明)[18] 등이 주도해 만든 재만한인조국광복회(在滿韓人祖國光復會)[19][20]를 흉내내어 김일성이 만들었다고 날조한 것이다.

보천보 사건의 김일성(金日成)

보천보 사건의 주역인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2군 6사장 김일성(金日成)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으며, 북한 김일성과는 명백히 다른 인물이다.

1로군 제2방면군장 김일성(金日成)

1939년 ~ 1940년간에 활동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장 김일성(金日成)은 북한 김일성이 맞는 것으로 확인된다. 이 기간에 국내 신문에 김일성(金日成)으로 보도된 사람도 북한 김일성이 맞는 것으로 판단된다. 대부분 양민에 대한 약탈과 관련한 것이며, 후면에 단신으로 처리된 것이어서 크게 주목받을만한 기사는 없다.

김일성 이름의 발음

소련군 문서에 러시아어로 적힌 김일성의 이름 진지첸(Цзин Жи-чэн).[21]

북한 김일성의 이름은 시기에 따라 한자로 金一成, 金一星, 金日成 등으로 나타나는데, 이 이름의 한국어 발음은 모두 같은 김일성이라서 같은 이름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중국어나 일본어 발음은 전부 달라서 같은 이름이 아니다. 북한 김일성은 어려서 만주로 이주하여 거기서 성장하며 중국인 학교를 주로 다녔기 때문에 그의 모국어는 중국어에 가까우며, 해방 당시 한국말은 상당히 서툴고 더듬거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이름 金日成도 김일성 아닌 중국어 발음 [예를 들면 Jīn rì chéng 등] 으로 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인들끼리 말할 때는 김일성으로 했을 수도 있겠지만, 항일연군의 조선인들은 중국에 거의 동화된 사람들이 많아 자기들끼리 대화도 중국어로 할 때가 많았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일본군의 토벌에 쫓겨 1940년 10월 23일 소련으로 도주한 이후 소련군 문서에 러시아어로 적힌 그의 이름에서 확인이 된다.

소련군 88여단 진지첸 대위

해방 직후

원산항 입북 당시 본명 김성주로 소개

김일성은 해방 후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코예 마을의 88여단을 떠나 1945년 9월 19일 소련군함 푸가초프호로 원산항에 입북할 때 배에서 내리면서 마중나온 인사들에게 자신을 본명 김성주로 소개했다고 한다. 소련의 고려인으로 해방 후 북한의 문화성 부상을 지낸 정상진(鄭尙進, 1918~2013)의 증언이다.

정상진(鄭尙進)씨는 당시를 이렇게 기억한다.
『45년 9월18일 원산주둔 소련군 사령부의 대좌로부터 「내일 김일성이 원산항에 도착하니 함께 나가 통역을 맡아달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다음날인 19일 오전 소련군 사령부 고위장교 2명과 함께 부두에 나갔지요. ...........』
............

정씨의 증언도 비슷하다.

『김일성은 배에서 내린 후 환영인사들과 인사를 나눌때 「김성주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하더군요.』

평양에 와서 가명 김영환(金永煥)으로 행세

원산항으로 입북한 김일성은 9월 22일에 기차로 평양에 도착한 이후로 한동안 비밀리에 잠행하며 김영환(金永煥)이라는 새로운 가명을 사용하였다.[22][23][24] 박갑동(朴甲東, 1919~ )은 그가 김동환(金東煥)이란 가명을 썼다고 했으나[25][26] 김영환(金永煥)의 착오인 듯하다.

소련군 문서에 1945년 10월 2일부터 진지첸을 김일성으로 바꾸어 적어

가브릴 코로트코프의 증언에 의하면 소련군 문서에는 북한 김일성의 이름은 1945년 10월 1일까지 진지첸(Цзин Жи-чэн 또는 Цзин Жи Чен, Jing Zhichen)으로 적혀 있고, 10월 2일부터 김일성(Ким Ир Сен, Kim Ir-sen)으로 바꾸어 적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코로트코프박사는 소련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간 후인 지난해 10월 당시 국방장관 샤포슈니코프 원수(현재 독립국가연합 통합군 총사령관)로부터 "한국전쟁에 관한 진실을 규명, 공식적인 입장을 정립하라"는 특별지시를 받고 93년 7월까지 작업완료를 목표로 자신을 팀장으로 한 5명의 연구원이 현재 비밀문건들을 연구중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 과정에서 불법화된 공산당 중앙위원회 소속 중앙문서보관소에 가장 가치있는 관련 자료들이 비장돼 있음을 알게 됐으며 여기서 金日成(김일성)의 개인신상과 한국전쟁에 관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비밀 내용들을 파악하게 됐다고 말했다.

金日成(김일성)의 이름과 관련, 1945년 10월 1일까지 작성된 모든 문건에는「진지첸」이란 中國(중국) 이름으로 표기됐으나 스탈린에 의해 북한 지도자로 최종 선택된 10월 2일부터는 현재의 이름이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그는 말했다.

이는 소련군 진지첸 대위가 1945년 10월 2일부터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했음을 증명한다.

전설의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을 사칭

1945년 10월 14일 오후 1시 평양 기림리 공설운동장에서 개최된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소련군 진지첸(Цзин Жи-чэн 또는 Цзин Жи Чен, Jing Zhichen) 대위"는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처음으로 대중들 앞에 나섰다. 33세의 그가 1920년 무렵부터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니 사람들은 나이가 맞지 않은 것을 금방 알아차리고 가짜라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대회가 끝나자 단상으로 몰려가 항의하는 사람들을 몽둥이를 휘둘러 쫓기도 했고, 총소리도 들렸다고 한다.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처음으로 대중앞에 나선 김일성. 가슴에 소련군 적기훈장을 달고 있다. 김일성의 왼편은 소련군 강미하일 소좌 (소련의 고려인)이고, 뒷줄 소련군 장성들은 맨 오른 쪽부터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 안드레이 로마넨코 소장, 25군 사령관 이반 치스차코프 상장이다.

함께 보기

각주

  1.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 백과사전
  2. 2.0 2.1 양세봉(梁世奉, 梁瑞鳳, 梁世鳳) 위키백과
  3. 3.0 3.1 東省朝鮮人農民總同盟組織에 관한 件 1930-06-25 일자로 길림(吉林) 주재 일본 총영사(總領事)가 외무대신에게 올린 보고서
  4.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朝鮮革命軍 吉江指揮部) - 위키백과
  5. 세화군(世火軍) 군정위원회(軍政委員會) 위원 김성주(金成柱) 외사경찰보(外事警察報) 제124호(1932년 11월)의 기사.
  6. 6.0 6.1 咸鏡南道國境地帶思想淨化工作槪況 / 第一. 所謂 惠山事件の 槪要 사상휘보(思想彙報) 제20호(朝鮮總督府 高等法院 檢事局 思想部, 1939.09.01) pp.8~9.
  7. 화성의숙(華成義塾) 터 - 국외독립운동사적지
  8. 조선의 별(朝鮮─)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9. 조선의 별 위키백과
  10. 남만한인청년총동맹 - 위키백과
  11. 김일성의 이름은 어떻게 신화가 됐을까 rfa 2017. 2. 24
  12. 한별 김인묵은 [연변 녀성운동의 선구자 — 김영신 (1905―1932)]의 남편이라고 한다.
  13. 허동찬(許東粲), 『김일성 평전 [속] (金日成 評傳 [續])』, 북한문제연구소(北韓問題硏究所), 1988년 4월 1일.
  14. 이종석, 새로 쓴 현대 북한의 이해 (역사비평사, 2000) pp.442~444.
  15. 1938년 12월말 현재 대안비적현세표(對岸匪賊現勢表) : 《最近に於ける朝鮮治安狀況 : 昭和8年·13年》 / 朝鮮總督府警務局 編
  16.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4권 / 제12장 광복의 새 봄을 앞당겨 (1936년 3월 ~ 1936년 5월) / 5. 조국광복회』
  17.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6권 / 제18장 중일 전쟁의 불길 속에서 (1937년 7월 ~ 1937년 11월) / 6. 《혜산 사건》을 겪으면서』
  18. 엄수명(嚴洙明)은 동북항일연군 1로군 군수처장이었던 엄필순(嚴弼順, ? ~ 1936)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19. 「昭和十二年度に於ける鮮內思想運動の狀況」 사상휘보 제14호 1938-03-01
  20. ≪中國 共産黨の 朝鮮內 抗日人民戰線 結成および日支事變 後方攪亂 事件≫ : 강덕상(姜徳相) 편, 『현대사 자료(現代史資料) 30 : 朝鮮 6』(東京, みすず書房, 1976) p.265
  21. [이제는 말할 수 있다 048회] 김일성 항일투쟁의 진실 (MBC 2002.02.03 방영) youtube
  22. 한재덕(韓載德), 金日成將軍 凱旋記 : 빗나는 革命家의 집 p.84 - 『문화전선(文化戰線)』, 창간호, 북조선예술총연맹(北朝鮮藝術總聯盟) 1946.7.25 ; 이듬해 간행된 한재덕의 저서 『金日成 將軍 凱旋記』 (平壤, 民主朝鮮出版社, 1947.11.20)의 같은 글에는 김영환이란 가명을 썼다는 말이 삭제됨.
  23. 한재덕(韓載德), 김일성(金日成)을 고발(告発)한다 (27) 1962.06.01 동아일보 2면 [1959년 한국으로 귀순 후 쓴 글]
  24. 황장엽, 북한의 진실과 허위 (시대정신, 2006.04.15) p.134.
  25. 박갑동, 『박헌영 ─ 그 일대기를 통한 현대사의 재조명』, 인간사, 1983, p. 144~145
  26. (49) 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 - 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 대립 중앙일보 1989.12.22 종합 5면
    『통곡의 언덕에서 : 남로당 총책 박갑동의 증언』 (서당, 1991년) p.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