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글편집 요약 없음
 
(같은 사용자의 중간 판 8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1번째 줄: 1번째 줄:
이범석(李範奭, 1900년 10월 20일 ~ 1972년 5월 11일)은 대한민국의 군인, 독립운동가이다. 일본의 조선지배 당시 북로군정서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청산리대첩에도 참전한 바 있다. 해방 후 조선민족청년단을 설립하고 정부 수립 후 초대 [[국무총리]] 겸 초대 국방장관으로 임명됐다.
{{다른 뜻|이범석 (동명이인)}}
 
'''이범석'''(李範奭, 1900년 10월 20일 ~ 1972년 5월 11일)은 대한민국의 군인, 독립운동가이다. 일본의 조선지배 당시 북로군정서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청산리대첩에도 참전한 바 있다. 해방 후 조선민족청년단을 설립하고 정부 수립 후 초대 [[국무총리]] 겸 초대 국방장관으로 임명됐다.


==생애==
==생애==
5번째 줄: 7번째 줄:


==8.15 해방 직후 입국 시도==
==8.15 해방 직후 입국 시도==
* [http://e-gonghun.mpva.go.kr/portal/url.jsp?ID=PV_DO_0006_003.003.002.002 독립운동사 제6권 : 독립군전투사(하) - 2. 국내 정진과 사태 변동] 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1945년 8월 15일 일본 항복 직후 이범석은 중국 서안에서 비행기를 타고 8월 18일 서울 여의도 공항에 도착하여 입국을 시도했으나 일본측의 완강한 거부로 되돌아가야 했다.
* [http://e-gonghun.mpva.go.kr/portal/url.jsp?ID=PV_DO_0006_003.003.002.002 독립운동사 제6권 : 독립군전투사(하) - 제3편 광복군의 후기 활동 / 제3장 8·15해방과 확군 / 제2절 광복군의 국내 정진 / 2. 국내 정진과 사태 변동] 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인용문|8월 16일 곤명(昆明)으로부터 ‘언제 진입하게 될는지 아직 유동적이니 일단 서안 비행장에서 대기하라’는 미국측 통고를 접한 우리 광복군 정진(挺進) 대원들은 다시 비행장으로 달려가 대기 상태에 들어갔다. 그런데, 미군측은 인원을 두 사람 줄이고 무기 탄약을 제외한 모든 휴대품은 탑재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국 영공(領空)이 아직 위험하여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니 가능한 한 기체를 가볍게 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br>
따라서, 정진군 선발대는 이범석(李範奭) 장군과 김준엽(金俊燁)·노능서(魯能瑞)<ref name="roh">[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657 노능서(魯能瑞, 1923~2014)] 보훈처 독립유공자 공적조서</ref>·장준하(張俊河) 등 4명으로 결정을 보았으며 미국측도 인원을 줄여 전원 22명으로 다시 조정되었다.<br>
18일 새벽 3시 30분경, 정진군을 실은 항공기는 다시 서안 비행장을 이륙하여 일로 기수를 동쪽으로 향해 전진하였다. 황해 바다가 시야에 들어오자 이범석 장군은 붉어진 눈에 몇번인가 손수건을 가져다 대기도 하였다. 조국을 떠난 지 30년만에 지금 해방된 땅을 밟게 되는 감격에 어린 눈물이었을 것이다.<br>
그리고, 이범석 장군은 다음과 같은 즉흥시(卽興詩)를 읊었다.<br>
:보았노라 우리 연해의 섬들을,
:왜놈의 포화(砲火) 빗발친다 해도
:비행기 부서지고 이 몸 찢기워도
:찢긴 몸 이 연안(沿岸)에 떨어지리니,
:물고기 밥이 된들 원통하지 않으리
:우리의 연해 물 마시고 자란 고기들
:그 물고기 살찌게 될 테니…….<br>
 
비행기가 황해를 건너는 동안, 매 5분마다 일본의 조선군 사령부에게 ‘미국 군사 사절단 한국 진입 중’이라고 타전하였다. 그리고, 한강(漢江) 줄기를 따라 영등포(永登浦) 상공에 이르러서야 ‘여의도(汝矣島)에 내려라’는 신호를 처음 받았다.<br>
영등포를 지나 기수를 낮추며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한 때는 11시 18분, 비행시간 7시 18분이 소요된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비행장 주변에는 돌격 태세의 착검(着劍)한 일본군이 완전히 포위하고 있는 것이었다. 방독면(防毒面)을 뒤집어 쓴 일본군이 점차 비행기를 중심으로 하여 원거리 포위망을 줄여오고 있었다.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토록 그립던 조국 땅을 밟는 순간 일행은 눈빛을 무섭게 빛내면서 사주(四周) 경계를 해야 했다.<br>
..........<br>이로부터 일본군의 살벌했던 분위기가 누그러졌으며 제법 친절하게 우리측 일행을 비행장 장교 숙소에 안내해 주어 저녁에는 간단한 주연(酒宴)까지 마련해 주었다.<br>
8월 19일 아침,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번즈 대표의 말이었다. 광복군 정진군 역시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 미군측과 행동을 같이 하기로 결정하였다.}}


* [https://www.joongang.co.kr/article/3962303 조선의용군 정예 1500명, 조국에서 쫓겨나다] 중앙선데이 2010.01.11
{{인용문|1945년 8월 16일과 18일, 이범석이 지휘하는 광복군 국내정진군은 국내 진입을 시도했다. 미군 군용기를 얻어 타고 시안(西安)을 출발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첫 번째는 중도에 회항했고 두 번째는 여의도에 착륙은 했지만 일본군의 저항이 완강했다.}}


* 김찬승(金燦承) 외, [https://dl.nanet.go.kr/search/searchInnerDetail.do?controlNo=KINX1976016876 《신문기자(新聞記者)가 겪은 8·15 <좌담(座談)>》], 『신천지(新天地)』, 제3권 제7호 (서울신문사, 1948년 8월) pp.74-81
* 김찬승(金燦承) 외, [https://dl.nanet.go.kr/search/searchInnerDetail.do?controlNo=KINX1976016876 《신문기자(新聞記者)가 겪은 8·15 <좌담(座談)>》], 『신천지(新天地)』, 제3권 제7호 (서울신문사, 1948년 8월) pp.74-81
16번째 줄: 33번째 줄:


*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2678 정운수(鄭雲樹, 1903~1986)] 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2678 정운수(鄭雲樹, 1903~1986)] 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인용문|광복 후 그는 버드중령을 단장으로 미국군 장교 19명, 이범석·김준엽·노능서<ref>[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657 노능서(魯能瑞, 1923~2014)] 보훈처 독립유공자 공적조서</ref> 등 도합 24명으로 구성된 인원과 함께 C-26비행기를 타고 1945년 8월 17일 중국 서안을 떠나서 서울 여의도 비행장 C-16상공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위협으로 다시 서안(西安)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인용문|광복 후 그는 버드중령을 단장으로 미국군 장교 19명, 이범석·김준엽·노능서<ref name="roh"/> 등 도합 24명으로 구성된 인원과 함께 C-26비행기를 타고 1945년 8월 17일 중국 서안을 떠나서 서울 여의도 비행장 C-16상공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위협으로 다시 서안(西安)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http://www.jjan.kr/news/articleView.html?idxno=161413 <nowiki>[이치백의 一日一史]</nowiki> 광복군 국내 정진대 입국좌절] 전북일보 2005.08.18
{{인용문|8·15 해방과 더불어 한민족의 새 역사는 시작되었으며 우리의 감격은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
이해 8월18일엔 ‘미국의 소리’방송이 중계되었다. 영어 투의 억양과 잡음으로 잘 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런 대로 세계정세와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또한 이날 한국 광복군 참모장 이범석(李範奭) 장군이 국내정진(挺進)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김준엽(金俊燁, 학병 탈출·전 고려대 총장), 장준하(張俊河, 고인·학병탈출·전 국회의원·사상계 사장), 노능서(盧能瑞) 등을 대동하고, 미국진주의 기초조사를 위하여 중국전구 미군사절단과 함께 미군기 편으로 여의도 공항에 착륙했으나 일본군의 입국거부로 19일 되돌아갔다.
이 같은 이범석 일행의 입국목적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정식 입국할 때까지 모든 행정·군사에 관한 기초준비를 미군과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함께 보기==
==함께 보기==

2023년 9월 10일 (일) 16:27 기준 최신판

동음이의.png 다른 뜻에 대해서는 이범석 (동명이인) 문서를 참조하세요.

이범석(李範奭, 1900년 10월 20일 ~ 1972년 5월 11일)은 대한민국의 군인, 독립운동가이다. 일본의 조선지배 당시 북로군정서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청산리대첩에도 참전한 바 있다. 해방 후 조선민족청년단을 설립하고 정부 수립 후 초대 국무총리 겸 초대 국방장관으로 임명됐다.

생애

8.15 해방 직후 입국 시도

1945년 8월 15일 일본 항복 직후 이범석은 중국 서안에서 비행기를 타고 8월 18일 서울 여의도 공항에 도착하여 입국을 시도했으나 일본측의 완강한 거부로 되돌아가야 했다.

8월 16일 곤명(昆明)으로부터 ‘언제 진입하게 될는지 아직 유동적이니 일단 서안 비행장에서 대기하라’는 미국측 통고를 접한 우리 광복군 정진(挺進) 대원들은 다시 비행장으로 달려가 대기 상태에 들어갔다. 그런데, 미군측은 인원을 두 사람 줄이고 무기 탄약을 제외한 모든 휴대품은 탑재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국 영공(領空)이 아직 위험하여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니 가능한 한 기체를 가볍게 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따라서, 정진군 선발대는 이범석(李範奭) 장군과 김준엽(金俊燁)·노능서(魯能瑞)[1]·장준하(張俊河) 등 4명으로 결정을 보았으며 미국측도 인원을 줄여 전원 22명으로 다시 조정되었다.
18일 새벽 3시 30분경, 정진군을 실은 항공기는 다시 서안 비행장을 이륙하여 일로 기수를 동쪽으로 향해 전진하였다. 황해 바다가 시야에 들어오자 이범석 장군은 붉어진 눈에 몇번인가 손수건을 가져다 대기도 하였다. 조국을 떠난 지 30년만에 지금 해방된 땅을 밟게 되는 감격에 어린 눈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범석 장군은 다음과 같은 즉흥시(卽興詩)를 읊었다.

보았노라 우리 연해의 섬들을,
왜놈의 포화(砲火) 빗발친다 해도
비행기 부서지고 이 몸 찢기워도
찢긴 몸 이 연안(沿岸)에 떨어지리니,
물고기 밥이 된들 원통하지 않으리
우리의 연해 물 마시고 자란 고기들
그 물고기 살찌게 될 테니…….

비행기가 황해를 건너는 동안, 매 5분마다 일본의 조선군 사령부에게 ‘미국 군사 사절단 한국 진입 중’이라고 타전하였다. 그리고, 한강(漢江) 줄기를 따라 영등포(永登浦) 상공에 이르러서야 ‘여의도(汝矣島)에 내려라’는 신호를 처음 받았다.
영등포를 지나 기수를 낮추며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한 때는 11시 18분, 비행시간 7시 18분이 소요된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비행장 주변에는 돌격 태세의 착검(着劍)한 일본군이 완전히 포위하고 있는 것이었다. 방독면(防毒面)을 뒤집어 쓴 일본군이 점차 비행기를 중심으로 하여 원거리 포위망을 줄여오고 있었다.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토록 그립던 조국 땅을 밟는 순간 일행은 눈빛을 무섭게 빛내면서 사주(四周) 경계를 해야 했다.
..........
이로부터 일본군의 살벌했던 분위기가 누그러졌으며 제법 친절하게 우리측 일행을 비행장 장교 숙소에 안내해 주어 저녁에는 간단한 주연(酒宴)까지 마련해 주었다.

8월 19일 아침,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번즈 대표의 말이었다. 광복군 정진군 역시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 미군측과 행동을 같이 하기로 결정하였다.


[p.79] 8.15직후의 정치정세(八.一五 直後의 情勢)
.....17일(十七日)부터는 조선인(朝鮮人)의 흥분(興奮)도 좀 꺽기고 18일(十八日)에 이범석장군(李範奭將軍)이 왓다갓다는 것도 쎈프란씨스코 방송(放送)으로 겨우 나중에야 알앗섯습니다.
광복 후 그는 버드중령을 단장으로 미국군 장교 19명, 이범석·김준엽·노능서[1] 등 도합 24명으로 구성된 인원과 함께 C-26비행기를 타고 1945년 8월 17일 중국 서안을 떠나서 서울 여의도 비행장 C-16상공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위협으로 다시 서안(西安)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함께 보기

각주

  1. 1.0 1.1 노능서(魯能瑞, 1923~2014) 보훈처 독립유공자 공적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