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욱(鄭容郁, 1960 ~ )은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이다. 서울대가 한국현대사 전공 교수로는 처음으로 임용했다고 한다.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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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에 미군정에 대한 그의 인식이 어떤지 잘 드러난다. 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 때문에 남북분단이 된 것처럼 말하며 소련과 김일성의 책임은 거론하지 않는다. 해방정국의 남북 문제에서 모든 나쁜 책임은 미군정과 이승만에게 돌린다.

'존 하지와 미군 점령통치 3년'낸 정용욱 교수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흥미로운 사실들도 많다. 미군정은 정보 조작을 통해 반탁운동을 유도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하지는 1946년 12월 이승만(李承晩)의 도미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권유했다는 것. 또 한때 좌익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중도우파인 김규식(金奎植)을 이승만 대신 대통령으로 앉힐 생각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하지는 ‘실패한 정치가’였습니다. 한국인들과의 상호 이해나 친선교류보다는 일방적 점령통치로 일관해 훨씬 우호적일 수 있었던 길을 포기했고, 결과적으로 분단의 씨앗을 뿌렸기 때문이죠.”

미군정이 정보 조작을 통해 반탁운동을 유도했다는 건 정용욱의 엉터리 연구에서 나온 결론일 뿐이다. 미군정은 찬탁, 반탁 운동을 다 허용했지만 소련이 반탁은 불허하고 찬탁만 허용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소련은 1946년 1월 2일 김일성, 김두봉 등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이 모스크바 3상회의 결의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게 하고, 신탁통치 반대의사를 굽히지 않는 조만식을 1월 5일 고려호텔에 연금하였고, 일체의 반탁운동을 불허했다. 2월 8일에는 사실상 북한의 임시정부인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까지 출범시키고, 남한에는 찬탁, 반탁 대립의 혼란을 조성하는데 성공하여 신탁통치 논란의 최대 수혜자는 소련과 김일성이다.

이승만은 도미했다 미국의 귀국 방해로 억류될 뻔했고, 귀국 후에도 한때 가택연금도 당했다. 미군정은 줄곧 이승만김구는 배척하고 여운형김규식의 좌우합작 정부를 시도했다. 그러다 1947년 7월 여운형이 암살되고,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한국문제를 UN으로 가져가서 UN 감시하의 총선거 방식으로 결정하는데, 김규식마저 김구와 함께 이에 반대하면서 결국 이승만을 지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리게 된다.

미군정이 이승만을 멀리하려 한 것은 여러 기록에 나온다.

Rhee Syngman, the most ardent exponent of the anti-Soviet and antiCommunist feeling of the Right, had been consistently ignored by the Military Government since his removal from the chairmanship of the Representative Democratic Council in March 1946, because of his personal recalcitrance and intense hatred of Soviet Communism. The Democratic Council then replaced Rhee with the moderate Rightist, Kim Kiu Sik, at the instance of US officials who were trying to clear the air for the Joint Commission meeting. After the deposition of Rhee the extreme Right continued to campaign for immediate independence and against trusteeship, but it was not until recently that this campaign turned against the US Military Government.

신탁통치 정국에 대한 주장

{{이 충격적인 뉴스는 12월 27일자 도하신문에 일제히 크게 보도되었다. 『조선일보(朝鮮日報)』는 1면 제호 옆에 “신탁통치설을 배격함”이라는 내리닫이 사설과 함께 4단 머리기사로, 『동아일보(東亞日報)』와 『자유신문(自由新聞)』, 『신조선보(新朝鮮報)』 등은 1면 머리기사로, 『서울신문』과 『중앙신문(中央新聞)』 등은 1면 중간 톱이나 2단박스기사로 다루었다. 부산에서 발행되는 『민주중보(民主衆報)』도 같은 기사를 3단 머리기사로 다루고 있는 것을 보면 전국 중요도시의 신문들이 대부분 이 합동통신 기사를 크게 다루었을 것이 틀림없다. 좌익신문들은 좌익정당들의 압력으로 조선통신이 UP통신 기사 배포를 보류했기 때문에 보도하지 않았다. 『조선인민보(朝鮮人民報)』의 사장 홍증식(洪增植)은 중대한 기사를 임의로 보도했다고 합동통신에 항의하기까지 했다. 좌익정당들이 이 기사를 보도하지 못하게 한 것은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는 것이 국민들의 큰 반발을 살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이 기사의 파장이 얼마나 컸던가는 하지 사령관이 군정청의 보도부장을 합동통신사로 보내어 AP통신 원문을 요구한 사실로도 짐작할 수 있다.6) UP통신 기사는 12월 26일자 『워싱턴 타임스 헤럴드(The Washington Times Herald)』에도 실렸고, 일본 도쿄에서 발행되던 『스타즈 엔드 스트라이프스(The Stars and Stripes)』 태평양판은 12월 27일자에 AP와 UP의 기사를 종합해서 보도했다.7)

6) 『合同通信三十年』, 合同通信社, 1975, p. 12.
7) 『東友』(동아일보 사보), 2005, 2. 3,「‘음해’ 바로잡을 史實 드러나」. }}

박헌영 외신 인터뷰 사건에 대한 엉터리 주장

그는 여러 글에서 박헌영 외신 인터뷰 사건에 대한 엉터리 주장을 내놓았다. 제대로 사료 조사도 하지 않은채 남들의 엉터리 선행 연구를 따라가다 보니 더 엉터리 연구를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샌프란시스코 방송은 보도되지도 않은 기사를 방송함으로써 이 회견 내용에 잠잠하던 국내 언론을 자극하였고, 국내 우익 계열 신문들은 이 기사를 산사태처럼 쏟아 냈다.1) 신문들은 존스턴의 논조를 확대 과장함으로써 박헌영과 공산당에 대한 비난을 강화했고, 박헌영의 정적들은 그의 목에 30만 엔의 현상금까지 내걸었다. 박헌영의 신망은 이 사건으로 몹시 손상되었다. 그는 좌익들 사이에서까지 구제 불능의 친소주의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존스턴은 박헌영을 다시 만났을 때, 이 기사가 『뉴욕 타임즈』에 실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기사 정정은 뉴욕 타임즈에 요청하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는 한국인들이 기사의 게재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는 사정을 이용하여 그의 윤색된 기사를 기정사실로 만들었고, 또 그 책임을 천연덕스럽게 뉴욕 타임즈 본사로 미루었다. 그리고 하지 및 주한 미군 사령부 정보부와 공보부는, 막상 기자 회견 직후 국내 보도에서는 문제되지 않았던 기사를 열흘 가까이 지난 시점에서 윤색된 내용 그대로를 국내에 보급, 확대시키는 역할을 하였고, 그 기사가 국내 여론에 미치는 파장을 지켜보았다.

주한 미군 사령부 군사실이 편찬한 『주한 미군사』는 존스턴 기자 회견이 “(미 군정이)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조 관계를 끝맺게 하는 시초가 되었다.”고 서술했으나 사실은 존스턴이 박헌영과의 회견을 왜곡하고, 미 군정이 재차 의도적으로 왜곡 보도를 널리 유포함으로써 공산당은 소련의 괴뢰라는 인식을 확산한 것이다. 미 군정과 존스턴은 『뉴욕 타임즈』의 권위를 빌려 정작 보도되지도 않은 기사를 국내에서 기정사실로 만들었고, 그 기사가 국내에 확산되는 데에는 정체 불명의 샌프란시스코 방송이 큰 역할을 했다.

방선주[1]는 이 사건을 미국 신문계에서 간혹 볼 수 있는 ‘의도적 오보’가 작용한 것으로, 또 한국인들의 반탁 운동으로 곤욕을 치르던 미 군정이 묘수(妙手)를 부린 것으로 평가했다. 이 기술은 사건의 배경과 의도를 정확히 지적했지만, 한편으로 미 군정은 반탁 운동의 정치적 효과를 만끽했고, 반탁 운동의 수혜자였다는 점을 간과했다. 공산당이 반탁 입장에서 삼상 회의 결정 지지로 방향을 선회한 데에는 소련의 입김이 작용했고, 2) 이러한 방향 선회를 주시하던 미 군정은 박헌영-존스턴 회견을 여론 공작 차원에서 적극 활용함으로써 국내의 반탁 운동을 반소⋅반공 운동으로 각인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1) 샌프란시스코 방송은 그 정체가 매우 의심스럽다. 1945년 10월 국무부 극동국장 빈센트의 신탁 통치 발언이 국내에 전달될 때에도, 통신 기사는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하였다. 해방 정국에서 출처가 의심스러운 외신 기사는 대부분 샌프란시스코 발이었다.
서울대 교수라는 사람이 뉴욕타임스 기사는 찾아보지도 않고, 남들의 주장을 따라 존스턴의 기사는 없는 것이라 단정하고, 당시 한국에서 청취 가능한 "샌프란시스코 방송"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단파로 송출하는 VOA(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을 서울중앙방송이 수신하여 중계하는 것이었다는 사실도 모르고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고 있다. 기초적 조사도 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정용욱, 《존 하지와 미군 점령 통치 3년》 (중심, 2003년 08월 05일) pp. 72~73에 정리해 놓은 이 사건의 경과
정용욱, 『해방전후 미국의 대한정책』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3) pp. 171~176.
  • 정용욱의 엉터리 연구를 사실로 알고 잘못 인용한 사례
김기협, 우익의 공세…"박헌영을 공격하라!" [해방일기] 1946년 1월 19일 프레시안 2011.01.19.

각주

  1. 방선주(方善柱, 1933~ ), 「美國 第24軍 G-2 軍史室 資料 解題」 『아시아文化』 3호 (翰林大學校 아시아文化硏究所, 1987) 중 pp. 184~188 의 『A. Johnston 記者의 朴憲永 發言 ‘誤引’ 事件』
  2. 상항(桑港, 샌프란시스코)으로부터 국어방송(國語放送) 중계(中繼) 1945-12-02 영남일보(嶺南日報) 2면
  3. 라디오 신조선보[新朝鮮報] 1946년 01월 16일 2면8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