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협상(南北協商)은 북한에서는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全朝鮮諸政黨社會團體代表者連席會議)라 부르며, 1948년 남한의 5.10 총선거 직전인 4월 말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김구, 김규식 등 2~3백명이 북한을 방문하여 북측 인사들과 남북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협상을 벌인 것을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예견한대로 협상은 실패로 돌아가고, 이로 인해 남한에 여론 분열과 갈등만 초래했으므로 방북한 사람들은 소련과 북한에 이용당한 것이다.

1948년 4월 김구, 김규식이 남북협상을 위해 북으로 출발하기도 전에 북한은 두 사람이 이미 항복했다고 선전하고 있었다. 1948년 04월 15일자 현대일보 기사

관련 링크


협상단 방북 당시의 사정

남북협상이 거론되던 시점에 제주도에서는 5.10총선을 방해할 목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이 4.3폭동을 일으켜 진행되고 있었고 다수의 희생자들이 발생하고 있었다.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비상시국임에도 불구하고 방북해서 공산주의자들과 협상을 벌여 건설적인 합의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현실을 도외시한 순진한 발상으로,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무책임해 보이기까지 하다.

더구나 김구, 김규식 등 평양에 간 남한 인사들이 김일성, 김두봉 등과 함께 남북협상을 한창 벌이던 바로 그 시점인 1948년 4월 24일 모스크바 교외에 있는 스탈린 별장에서는 스탈린, 몰로토프(1890~1986), 즈다노프(1896~1948)가 참석한 가운데 북한의 헌법을 결정했으며, 이 자리에는 북한 요인은 한 사람도 참석하지 않았다.[1]

같은 때 모스크바에서는 북한 단독 정권 수립을 위한 헌법을 결정하고 있었다는 것은 남북협상 자체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논의 목적이 아니라 이를 통해 남한의 5.10 총선거를 방해할 목적이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김구 등 남한 방북단은 소련과 김일성의 계략에 이용 당하고 놀아난 것이다.

양김씨 방북 이전 북한 상황

양김씨의 방북 이전에 남한의 언론은 북한이 이미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취한 중요한 조치들을 보도하고 있었다. 이런 신문 기사를 보고도 협상을 통해 통일 정부 수립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고 방북을 강행한 사람들이 딱하다.

第五章 地方主權機關(二面에서 繼續) 新民日報 1948.02.29 4면
北朝鮮傀儡政府(북조선괴뢰정부)의 臨時憲法草案(임시헌법초안) (2) 1948.02.21 동아일보 2면

아래 문건들은 김구 일행이 남북협상차 방북하려던 시기에 스탈린은 북한 단독의 정부수립에 대한 지침을 이미 내려보냈다는 것을 보여준다.

1948년 4월 12일자 문건. "김일성 동무에게 보내는 충고"
1948년 4월 24일자 문건. "조선의 헌법문제에 대하여"

김일성의 해방 1주년 기념사에서 남한 적화통일 의지 표명

1946년 8월 15일 해방 1주년 기념사에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장이었던 김일성이승만, 김구등 남한의 정치인들과 미군정을 비방하면서 남한 적화통일에 대한 의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하였다. 소련과 김일성은 처음부터 북한에 공산정권이 확고하게 수립되면 이어 남한까지 적화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처럼 소련군정이나 김일성은 애초에 남북협상을 통해 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 의사는 전혀 없었고, 북한의 이런 분위기를 김구김규식도 방북하기 전에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1950년 6.25 남침은 이런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방북한 남북협상론자들은 남한에 혼란을 조성하겠다는 저들의 음모에 이용당한 것이다.

八.一五 一週年을 記念하면서 朝鮮同胞에게 告함 : p.28

남북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의 공동성명서

방북한 인사들은 북측 인사들과 회합한 후 4월 30일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 대체로 소련과 북한 측 주장을 수용한 내용이며, 미군정도 이를 수용해야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2항에는

북 정당 사회단체 지도자들은 우리 강토에서 외국 군대가 철퇴한 후에 내전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며, 또 그들은 통일에 대한 조선 인민의 지망에 배치하는 여하한 무질서의 발생도 용허하지 않을 것이다. 남북 정당사회단체들 간에 전취 약속은 우리 조국의 완전한 질서를 확보하는 튼튼한 담보이다.

라고 하였지만, 이 말이 무색하게 1949년 미군이 철수하자마자 북한은 곧바로 남침 전쟁을 개시하였다.

방북한 인사들은 자신들의 헛된 망상으로 국민들을 속인 것이다.

방북 인사들 상당수는 북한에 잔류

레베데프 비망록에 의하면 당시 남한에서 방북했던 인사는 226명이라고 했는데, 이중 1/3 가량인 홍명희(洪命憙, 1888 ~ 1968), 김원봉 등 70여명이 돌아오지 않고 북한에 남았다.[2] 월북자들이 당당하게 북한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둘러리나 서 준 꼴이다. 유어만(劉馭萬) 중국 총영사의 4월 20일자 전문에 의하면 방북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돌아오지 않을 것으로 예견하고 있었다.[3] 과연 김구, 김규식은 이런 것도 모르고 방북을 강행한 것일까?

이들의 방북은 소련과 북한이 의도한대로 남한의 여론만 분열시키고, 종내 자신들의 운명도 파국적인 결말을 맞은 것 외에 아무런 긍정적인 효과도 얻은 것이 없다.

방북 후 북한에 잔류한 사람들

남북협상에 참여하러 방북한 사람들 중 상당수가 돌아오지 않고 북한에 잔류하였다. 대표적인 월북 인사는 홍명희(洪命憙, 1888 ~ 1968), 김원봉(金元鳳, 1898 ~ 1958), 백남운(白南雲, 1894 ~ 1979), 이극로(李克魯, 1893 ~ 1978), 성주식(成周寔, 1891~1959), 손두환(孫斗煥, 1895~?) 등이다. 이들은 평양에 가서 갑자기 잔류를 결정했다고 보기는 어려우므로, 일찍부터 북한에 포섭되어 서울에서 요인들 방북에 바람잡이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열성적인 공산주의자로 보이지는 않았던 홍명희도 해방 직후부터 비밀리에 서너 차례 북한을 다녀와 북한에 포섭된 인물로 밝혀졌다.[4]

방북인사들의 귀환후 행보

방북 후 귀환한 김구는 북측 인물들과의 회담에서 별 성과가 없었음에도 남한 단독의 총선과 정부 수립을 끝까지 반대하고, 한독당 인사도 참여하지 못하게 하자, 일부는 탈당하여 참여하였다. 김규식은 귀환 후 자신은 총선과 정부수립에도 참여하지 않았으나 측근들의 참여는 막지 않았다.

조소앙의 방북 귀환 후 행보

임시정부 외무부장을 역임했던 조소앙(趙素昻, 1887 ~ 1958)[5]은 여러 사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구, 김규식과 함께 북행하였으나 돌아와 남북협상이 완전히 실패했음을 인정하였다.[6]

이번 방북 길은 완전히 실패다. 우리가 완전히 모욕 당하고 들러리를 섰다.[6]

그는 38선을 넘어온 뒤 여현(礪峴)에서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를 여현성명(礪峴聲明)이라 한다.[7] "남북협상은 완전히 실패다. 이북에 가보니까 김일성이 군사세력을 가지고 완전히 자기 독재정권을 형성해 나가고 있다."고 하였다. 조소앙은 김일성의 의도를 파악하고는 "김일성이 군사력을 바탕으로 단독정권을 세울 준비를 다 끝냈는데, 단독정부 수립을 하지 않겠다는 결의문을 채택했으니, 우리가 완전히 이용당한 것이다."[6] 서울에 와서 그는 남북협상의 실패를 기자와 지인들에게 설명하고 북한(North Korea)은 병영국가화 될것이라며 대한민국 단독정부 수립에 찬성하는 입장을 표시하게 된다.

남북협상 실패 직후 성명과 언론 발표, 강연 등을 통해 남북협상을 정치적 속임수라고 비판하던 그는 김구와 남북협상 실패 문제를 놓고 대립하여 분열하게 되었다.[6] 이후 김구, 김규식 등과 갈등하게 되었고, 한국독립당 내에서도 김구와 의사충돌을 하게 되었다. 결국 조소앙은 김구와 결별하고 임정의 한국독립당에서 떨어져 나와 사회당을 창당하였다.[8][6] 이후 그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지지하였으며, 7월 21일 대한민국 초대 내각 인선 때 그는 총리 예비 후보자로 추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6.25 때 납북 당했다.

여운홍의 방북 귀환담

암살당한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呂運弘, 1891~1973)은 방북 후 서울로 귀환하여 4월 30일 미군정청 사람들에게 북한의 상황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했다.[9]

Lyuh Woon Hong's comment (Situation in North Korea)

Reference Seoul's 281, Apr 29th, Lyuh Woon Hong called on Langdon this afternoon with 2 men who had been with him in North Korea and insisted on handing to Mr Langdon for delivery to Gen Hodge message from North-South conference in Pyongyang, which is in Korean language and is now being translated.
Lyuh commented briefly upon situation in North Korea saying that he would tell Langdon more later (Lyuh seemed reticent to talk too much in presence of 2 men with him). Substance of his remarks is as follows:

  1. Everything in north is very orderly with much industrial activity and factories apparently going full blast. Unquestionably organization of things in North Korea is better than in South Korea, but there is very little freedom. People are very reserved with not so much expression of joy as in South Korea. There is little sign of wealth or goods; No restaurants; and no way of having any fun.
  2. When South Korean representatives move from their hotel or quarters, they must obtain permission and are questioned as to whom they are going to see, etc. The Korean flag is still used.
In conference deliberations, question of constitution was never raised. At moment of Lyuh's departure, 4 Kims here still in secret conference. He expected that Kimm Kiu Sic would be returning in few days.

북한은 질서 정연하고 공장들도 풀로 가동되고 있으며, 일들이 잘 조직화 되어있는 점에서는 남한보다 나은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자유가 거의 없다고 했다. 또 사람들은 남한 사람들처럼 기쁨을 표현하지도 않고 말을 아끼며, 상품이 많고 부유하다는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고 , 식당도 없으며 어떤 재미도 느낄만한 것이 없었다고 했다. 남측 인사들은 호텔에서 움질일 때도 허가를 받아야 했으며, 누구를 만나는지 조사를 받아야 했다고 하니, 북한 사람들도 저 당시 이미 거의 모든 행동의 자유를 박탈 당한 상태에서 감시를 받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집단들과 통일정부를 세울 수 있었겠는가?

김구, 김규식의 귀환 공동 성명

방북했던 김구, 김규식은 5월 5일 저녁 서울에 귀환하여 성명을 발표했다.

파일:1948-05-07-동아일보-양김씨공동성명.jpg
방북 후 귀환한 김구, 김규식의 1948년 5월 6일자 공동성명 : 1948년 5월 7일자 동아일보 기사.[10]
兩金氏(양김씨) 共同聲明發表(공동성명발표) 1948.05.07 동아일보 1면

南北協商(남북협상)에 參席(참석)하였던 金九(김구), 金奎植(김규식) 兩氏(양씨) 는 지난 五月五日 下午 八時四十分(오월 오일 하오 팔시 사십분) 歸京(귀경)하였다. 兩金氏(양김씨)와의 一行(일행)은 六十餘名(육십여명)인데 崔東旿(최동오), 李克魯(이극로) 洪命憙(홍명희), 張健相(장건상) 四氏(사씨)는 自己(자기) 故鄕(고향)을 찾아갔으므로 今番(금번) 同行(동행)치 못하고 北朝鮮(북조선)에 殘留(잔류)하고 있다 한다. 兩金氏(양김씨)는 到着 第一聲(도착 제일성)으로 다음과같은 共同聲明書(공동성명서)를 發表(발표)하였다.

今般( 금반) 우리의 北行(북행 )은 우리 民族(민족)의 團結(단결)을 疑心(의심)하는 世界人士(세계인사)에게는 勿論(물론)이오 祖國(조국)의 統一(통일)을 渴望(갈망)하는 多數同胞(다수동포)들에게까지 今般行動(금반행동)으로써 만흔 期待(기대)를 일우어 준것이다. 그리고 南北諸政黨(남북제정당) 社會團體連席會義(사회단체연석회의)는 祖國(조국)의 危機(위기)를 克服(극복)하며 民族(민족)의 生存(생존)를 위하여는 우리 民族(민족)도 世界(세계)의 어느 優秀(우수)한 民族(민족)과 같이 主義(주의)와 黨派(당파)를 超越(초월)하여서 團結(단결)할 수 있다는 것을 또한번 行動(행동)으로써 證明(증명)한 것이다. 이 會議(회의)는 自主的(자주적), 民主的(민주적), 統一祖國(통일조국)을 再建(재건)하기 위하여서 南朝鮮(남조선) 單選(단선), 單政(단정)을 反對(반대)하며 美蘇 兩軍撤退(미소양군철퇴)를 要求(요구)하는데 意見(의견)이 一致(일치)하였다. 北朝鮮當局者( 북조선당국자)도 單政(단정)은 絶大 樹立(절대 수립)하지 아니하겠다고 確言(확언)하였다.

連席會議(연석회의)에서 國際協調(국제협조)와믿 其他數個問題(기타수개문제)에 對(대)하여 우리의 從來 主張(종래 주장)이 다 貫徹(관철)되지 못한 것은 우리 로써는 遺憾(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나 國際協調問題(국제협조문제)에 對(대)하여서는 앞으로 어느 나라가 우리의 獨立(독립)을 더 잘 도아주느냐는 實地行動(실지행동)에서 容易(용이)하게 解決(해결)될 수 있는 것이며 또 其他問題(기타문제)에 있어서도 앞으로 各自(각자)가 勞力(노력)하며 南北指尊者(남북지도자)들이 자조 接觸(접촉) 하는데서 圓滿(원만)히 解決(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우리는 行動(행동)으로써만 우리 民族(민족)은 團結(단결)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 아니라 事實(사실)로도 우리 民族(민족)끼리는 무슨 문제던지 協調(협조)할 수 있다는 것을 體驗(체험)으로 證明(증명)하였다.

앞으로 北朝鮮當局者(북조선당국자)는 斷電(단전)도 하지 아니하며 貯水池(저수지)도 圓滑(원활)히 開放(개방) 할 것을 快諾(쾌락)하였다. 그리고 曺晩植先生(조만식 선생)과 同伴(동반)하여 南行(남행)하겠다는 우리의 要求(요구)에 對(대)하여 北朝鮮當局者(북조선당국자)는 今次(금차)에 實行(실행)식힐 수는 없으나 未久( 미구)에 그리되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하였다.

발표한 성명서의 내용대로라면 두 사람은 북한측의 속셈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그들이 꾸며놓은 각본에 놀아나다 온 것이다. 국민을 우롱하는 무책임한 발언들로 보인다. 이들의 북한 집단에 대한 오판이 자신들의 불행한 운명을 초래한 원인이 되지 않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아래 조선민주당의 비판 성명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아래 미군정의 보고서에는 동아일보 기사에 난 양김씨의 공동성명에는 없는 내용이 많이 있다. 성명 발표 후 오간 대화의 내용까지 포함된 듯하다.

두 사람은 남한군이 북한을 공격하지 않는 한 북한군의 남침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2개월여 뒤 김구는 중국공사 유어만(劉馭萬, Liu Yuwan)과의 대화에서 북한군은 이미 강력하여 남한이 따로 정부를 세워도 그들이 남침하여 적화될 것이기 때문에 단정을 반대하는 것처럼 말했다.[11]


귀환 후에도 김구는 남한 단독의 총선을 반대하고 참여도 하지 않았다. 이후 수립된 대한민국을 인정하지도 않았고, 어떤 협력도 거부했다. 김규식은 단독 총선에 반대하지는 않으나 자신은 참여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6.25 남침과 남북 협상 참여 요인들의 납북

김구가 예상했던대로 북한은 불과 2년뒤 6.25 남침 전쟁을 개시하였다. 이는 남북협상에 임한 북한의 의도가 남한의 총선을 방해하는 것이 목적이고, 그들이 원하는 남북한 단일정부는 애초부터 남침 전쟁을 통해 남한을 적화하여 달성한다는 계획이었음을 입증한다. 전쟁 준비는 하루 이틀 사이에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므로 북한이 해방 직후부터 군사력 강화에 열성적이었다는 것도 이런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소련의 대리인으로 소련군의 전폭적 지원을 받아 북한의 실질적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김일성이 자신의 권력을 잃을 수도 있는 남북합의에 의한 통일 정부 수립을 진지하게 고려했을 리는 만무하고, 자신이 통일 정부의 최고 권력자가 되는 적화 통일만이 그가 원한 유일한 통일정부 수립 방식이었을 것은 자명하다.

연석회의가 열린지 불과 10개월 후인 1949년 3월에 김일성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을 만나[12] 통일을 위한 남침 전쟁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 당하고,[13] 이후 48차례나 스탈린에게 전문을 보내 간청한 끝에[14][15] 간신히 승락을 얻어 6.25 남침 전쟁을 일으킨다. 이로보아 북한이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에 나선 것은 남한에 분열과 혼란을 조성하고 총선을 방해할 목적이 있었을 뿐이고, 애초부터 전쟁을 통한 적화통일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귀환 인사들 중 다수는 6.25 때 납북

뿐만 아니라 당시 방북했다 귀환한 요인들은 피살된 김구 외에는 김규식(金奎植), 조소앙(趙素昻), 조완구(趙琬九), 엄항섭(嚴恒燮) 등 대부분이 6.25 때 납북되었다. 북한 측은 이들의 이용 가치가 높다고 보아 우선 납북 대상으로 지목하고 있었다고 한다.[16]

인민군은 단기간에 서울을 점령한 후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갔다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국군과 UN군의 반격으로 남한 적화가 실패할 가능성이 커지자, 남한의 주요인사들을 납북하기 시작했다. 전 북한정무원 부부장 박병엽 (필명 신경완)의 증언에 의하면 남북협상에 참여했던 인사들은 우선 납북 대상이었고,[16] 협상을 위해 방북했던 김규식(金奎植, 1881 ~ 1950), 조소앙(趙素昻, 1887 ~ 1958), 조완구(趙琬九, 1881 ~ 1954), 엄항섭(嚴恒燮, 1898 ~ 1962), 김붕준(金朋濬, 1888 ~ 1950), 최동오(崔東旿, 1892~1963)[17], 원세훈(元世勳, 1887 ~ 1959)[18], 오하영(吳夏英, 1879 ~ 1960), 박건웅(朴健雄, 1906 ~ ? )[19] 등이 납북되었다. 평양까지 가서 공산주의자들의 실상을 겪어보고도 그들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끝내 그들에 의해 비극적인 일을 당한 것이다. 김구도 암살 당하지 않고 생존해 있었더라면 최우선 납북 대상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남북협상 관련 소련측 기록

소련 붕괴 후 공개된 소련측 자료들에 의하면 남북협상을 막후에서 주도한 세력은 소련군정 실세 스티코프레베데프이며, 김일성, 김두봉은 그들이 내세운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 김구김규식 등 남측 인사들은 소련의 각본에 놀아난 것이다.

<평양의4김회담>1.레베데프 비망록-자료적 가치 중앙일보 1994년 11월 15일 종합 8면
<평양의4김회담>1. 46년만에 밝혀진 南北정치협상 진상 중앙일보 1994년 11월 15일 종합 8면
<평양의4김회담>2. 金九 올때까지 대표자회의 연기 중앙일보 1994.11.16 종합 8면
<평양의4김회담>2. <해설>蘇군정 남한정세 손금보듯 중앙일보 1994. 11.16 종합 8면
<평양의4김회담>3. 蘇,김일성에 신문보도 일일이 지시 중앙일보 1994.11.17 종합 8면
<평양의4김회담>4. 白凡 "나는 김일성 만나러 왔을뿐" 중앙일보 1994.11.21 종합 8면
<평양의4김회담>5. 蘇 朴憲永도 빠뜨려선 안된다 중앙일보 1994.11.22 종합 8면
<평양의4김회담>6. 蘇 南대표에 총선후 정부수립 약속받아라 중앙일보 1994.11.23 종합 8면
<평양의4김회담>7. 끝 조만식 南行 白凡요구에 金日成침묵 중앙일보 1994.11.24 종합 8면
  • 전현수 역, 『레베제프일기(1947~1948년)』, 한국연구재단 기초학문자료센터, 2006.
김영중(金英仲) 편, ≪레베데프 비망록 : 대구, 매일신문 1995.1.1.~2.28. 24회 연재기사 全文: 1947.5.14~1948.12.26 기록≫ (제주, 해동인쇄사, 2016) / (Naver 책 : ISBN 480B170805082)
전현수, ≪쉬띄꼬프일기≫ 해제 국사편찬위원회 : 스티코프의 생애가 자세히 나옴.
레베데프 비망록.pdf
쉬띄꼬프 일기.pdf

남북협상 관련 북한 문헌

1948년 5월 15일 서울 을지로의 신흥출판사 발행으로 되어 있으나 북한자료임 (미군노획문서)
200663 조선중앙년감(朝鮮中央年鑑) 1950년판 (2 of 3) 조선중앙통신사(朝鮮中央通信社), 1950년 2월 15일
200663 조선중앙년감(朝鮮中央年鑑) 1950년판 (3 of 3) 조선중앙통신사(朝鮮中央通信社), 1950년 2월 15일

참고 문헌

  • 유영구, “거물간첩 성시백 프로젝트”상, 『월간중앙』 1992년 6월호, pp.634-667.
유영구, “거물간첩 성시백 프로젝트”하, 『월간중앙』 1992년 7월호, pp.?~?.

함께 보기

각주

  1. Andreĭ Nikolaevich Lanʹkov, 《From Stalin to Kim Il Song: The Formation of North Korea, 1945-1960》 (C. Hurst & Co., 2002) pp.42~44.
  2. 양동안, 1948년의 남북협상에 관한 연구 정신문화연구 2010.06 통권119호 p.39
  3. 유어만(劉馭萬) 총영사의 代電 1948년 4월 20일 제119호
  4.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서울: 중앙일보사, 1993), 하권 pp.212~223. 해방 후 홍명희의 정치활동과 북한과의 연결에 대한 서용규(북한 노동당 고위간부 출신 박병엽의 가명)의 증언이 자세히 나온다.
    박병엽(朴炳燁, 1922 ~ 1998) 구술, 유영구, 정창현 엮음,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 전 노동당 고위간부가 본 비밀회동 (선인, 2010) "제4장 홍명희의 월북"
  5. 삼균학회(三均學會), 『소앙선생문집(素昻先生文集) (上, 下)』 (서울: 횃불사, 1979)
  6. 6.0 6.1 6.2 6.3 6.4 《건국 50년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 이철승 박갑동 좌우 거목의 세기적 대담》 (이철승, 박갑동 공저, 계명사, 1998) pp.366~367
  7. <백년편지 168> 나의 동생 조소앙을 그리며, 제65주년 제헌절에 쓴다 -서희경- 우리문화신문 2013.08.20
    “북방은 소련 코민포름 지령하에 강대한 권력과 무력을 배경으로 한 데 대하여 우리들은 (…) 상대가 되지 않았으므로 결국 실패에 돌아간 것이다”... “민족진영의 재편성 내지는 대동단결이 필요하며 가능한 지역에서의 선거로 우리의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
    (『삼천리』 1950.4.1)
  8. 社會黨發足, 委員長, 趙素昻氏 국제신문[國際新聞] 1948년 12월 12일
  9. RG 9, Radiograms, Microfilm No. 246-253, 주한미군의 남한 사정에 대한 보고서 (24) : p.295 Lyuh Woon Hong's comment (situation in North korea) 1948.04.30 / : p.273 Regarding LYUH WOON HONG 1948.04.29 (평양방송이 여운홍이 소련군정의 편지를 가져와서 미군정에 전달할 것이라 함.
  10. 兩金氏(양김씨) 共同聲明發表(공동성명발표) 1948.05.07 동아일보 1면
  11. 김구#서울 귀환 후
  12. March 05, 1949 Meeting Between Stalin and Kim Il Ssung Wilson Center Digital Archive
  13.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2>”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2일. 5면.
  14. Kathryn Weathersby, “New Findings on the Korean War”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Bulletin, 3 (Fall 1993), p.14: This was Kim Il Sung’s war; he gained Stalin’s reluctant approval only after persistent appeals (48 telegrams!).
  15. 소련, “남침 준비 부족, 게릴라전 주력하라” Archived - 웨이백 머신[위키백과][*] Kbs News 2010.06.24 (22:03)
  16. 16.0 16.1 《(현대사실록) 압록강변의 겨울 : 납북 요인들의 삶과 통일의 한》 : 이태호 著; 신경완(申敬完) 증언 (다섯수레, 1991) pp.22~24
    박영실, 한국전쟁기 북한의 남한 주요인사 납북 원인 분석 6‧25 전쟁 61주년 기념 학술세미나 (통일부 주최 2011년 6월 21일) 발표 논문 pp.78~79
  17. 김일성(金日成)은 나의 제자(弟子)다? 삼팔선(三八線) 넘는 최동오씨담(崔東旿氏談) 민중일보(民衆日報) 1948/04/22
  18. 원세훈(元世勳, 1887 ~ 1959)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한국학중앙연구원
  19. 金박사도 昨朝에 北行, 방해를 일축 후 病軀 이끌고 發程 자유신문 1948년 04월 22일 01면 - 김규식 방북 동행자 명단 나옴.
  20.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진흥사업 성과포털"의 "[연구과제명] 러시아문서보관소 소장 해방후 한국사회 관련 자료의 수집 번역 및 주해 (1945~1950)"
  21. [김효선 칼럼] 거물 간첩 성시백의 포섭작전 내막 : 간첩 성시백이 김구에게.."장군님도 선생을 대통령으로 모시고자..." 뉴데일리 2010-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