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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503270020920701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5-03-27&officeId=00020&pageNo=7&printNo=16457&publishType=00020 司法考試(사법고시) 합격자 60명發表(발표) 最高得㸃(최고득점) 柳聖秀(유성수)씨, 紅一㸃(홍일점)도 끼여] 1975.03.27 동아일보 7면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503270020920701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5-03-27&officeId=00020&pageNo=7&printNo=16457&publishType=00020 司法考試(사법고시) 합격자 60명發表(발표) 最高得㸃(최고득점) 柳聖秀(유성수)씨, 紅一㸃(홍일점)도 끼여] 1975.03.27 동아일보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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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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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A34면 1단 기사입력 2020.07.21. ]<ref>https://youtu.be/q90VeK2fcPw 영국인이 말한다. "백선엽 장군이 부역자가 아닌 3가지 이유"</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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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백 장군이 부역자가 아닌 이유는 크게 3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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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앞서 말했듯 일본 군대에서 복무했다는 게 부역의 증거는 아니다. [[만주 제국군]]은 [[대한민국]]을 침공하지 않았고 백 장군도 자국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누지 않았다. [[간도특설대]]는 주로 [[중국 공산당 게릴라]]들을 뒤쫓았고, 백 장군은 적을 거의 보지도 못했으며 실제 전투를 겪지도 않았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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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지금 반대파들이 악용하는 부역 기준은 정부 스스로 세운 원칙에도 어긋난다. [[노무현]] 정부에서 만든 [[일제강점]]하 강제 동원 피해진상규명위원회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 포로수용소에서 일본군 교도관으로 일하면서 가혹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전범]](戰犯)으로 분류된 조선인 83명을 사면했다. 그들이 신분이 그랬을 뿐이지 실제 전범으로 볼 수 있는 행위를 안 했다는 이유였다. 그렇다면 백 장군도 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간도특설대]]에 소속되어 있었을 뿐이지 [[친일 부역]] 행위를 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짓을 했느냐가 아니라 원래 신분이 어떠냐를 들어 처벌하는 건 북한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다. 민주국가인 대한민국에선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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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백 장군 반대 세력은 국가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들은 운동장을 옮겨 놓고 논쟁을 벌인다. 가만 생각해보자. 나라란 우리가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우리 [[정체성]]을 확립하고 가치를 세우고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경험의 총체다. 백 장군이 어렸을 때 대한민국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25세 때 해방됐지만 바로 두 쪽으로 갈라졌다. 그는 이후 목숨을 걸고 다른 반쪽을 지켰고, 그때 대한민국은 겨우 건국 18개월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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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참고 자료==

2020년 7월 22일 (수) 12:33 판

백선엽(白善燁, 1920.11.23 ~ 2020.07.10)은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최초의 4성 장군이다. 6.25 전쟁 때 낙동강 전선을 방어했다.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평양으로 이사했다[1]. 고향 마을과 김일성이 태어난 대동군 고평면 남리 만경대 마을과는 거리가 40리 (16km) 정도라고 한다. 평양사범학교와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군 중위로 있다가 해방 직후 평양에서 조만식 선생의 비서를 지냈다. 평양에 온 소련군 진지첸 대위가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대중 앞에 처음 나서던 날의 집회에도 참석했다고 하며, 조만식 선생을 찾아온 김일성을 몇번 보았다고 한다. 1945년 12월말 월남했다.

약력[2][3]

  • 1920년 11월 23일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江西郡 江西面 德興里)에서 출생[1][2]
  • 1926년 평양으로 이사
  • 1939년 평양사범학교 졸업
  • 1940년 봉천군관학교 입교 (제9기생)
  • 1941년 12월 견습사관 (보병 제28단)
  • 1942년 6월 만주군 소위 임관 (보병 제26단 신병훈련소 소대장)
  • 1943년 2월 간도특설대로 전속
  • 1944년 11월 제1호 작전 (대륙타통[大陸打通] 작전), 북지(北支) 치안전 참가
  • 1945년 봄 전속, 연길 국경경비대 근무
  • 1945년 8월 만주국 패망으로 만주군 해산. (당시 계급 중위)
  • 1945년 8.15 해방 후 귀국. 평양에서 조만식 선생의 비서관
  • 1945년 12월말 월남. (조만식 선생은 소련군의 탄압으로 활동에 제약을 받다 1946년 1월 5일 고려호텔에 연금됨.)

부음

  • 백선엽 장군 ‘영면’…“미한 동맹 창시자”
  • 모건 오테이거스 국무부 대변인은 14일 성명에서 “미국은 백선엽 장군의 죽음에 대해 한국 국민들에게 진심으로 조의를 표한다”고 밝혔습니다.그러면서 “한국 최초의 4성 장군으로서 한국 전쟁 중 조국에 대한 그의 봉사는 오늘날까지 미국과 한국 모두 계속 지키고 있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위한 싸움의 상징이었다”고 강조했습니다. 아울러 “백 장군은 외교관과 정치인으로 일하면서 그의 나라를 위해 매우 탁월하게 봉사했고, 미국과 한국의 동맹을 구축하는데 일조했다”고 덧붙였습니다.[4]
  • 1990년대 중반부터 최근까지 주한미군사령관과 유엔군사령관, 한미연합사령관을 겸했던 퇴역 4성 장군 4명이 VOA를 통해, 100세를 일기로 별세한 백선엽 장군을 추모하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백선엽 장군과 수십 년 동안 인연을 맺어온 전 사령관들은 하나같이 백 장군을 “정신적 지주”로 부르며 그가 한국의 생존과 평화적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습니다. [5]
백 장군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 존재 안 할 수도
전대협-육사구국동지회 등,"비서 성희롱한 파렴치범을 서울시장(葬)으로 모시면서 구국의 영웅의 빈소를 막는다는게 말이 되느냐"
6.25 전투서 백척간두의 조국 구한 영웅
32세에 대한민국 최초의 4성 장군에 올라
역대 주한미군사령관들이 가장 존경한 한국 군인
6·25전쟁의 영웅인 백선엽(100) 예비역 대장이 10일 오후 11시 별세했다.

1920년 평안남도 강서군 덕흥리에서 태어난 백 장군은 6·25 전쟁 초반인 1950년 8월 대구에 진출하려던 북한군을 다부동 전투에서 물리쳤다. 이 승리로 한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에 교두보를 마련했고,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반격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다부동 전투에서 그는 패퇴 직전인 아군에게 "내가 앞장설 테니, 내가 물러나면 나를 쏴라"고 말하며 인민군이 점령한 고지로 뛰어올라갔고 전세를 뒤집었다.

1952년 7월 백 장군은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됐고, 1953년 1월 한국군 최초의 4성 장군이 됐다. 정전 회담 때는 한국군 대표로도 참가했다. 백 장군은 1959년 합참의장을 지낸 뒤 1960년 5월31일 예편했다

간도특설대에서 독립군을 토벌했나?

백선엽이 간도특설대에 전속된 1943년 2월에는 만주에는 항일무장투쟁을 하는 독립군은 전무했다.

김일성이 속했던 동북항일연군은 중국공산당 산하 조직으로 코민테른의 지휘감독을 받았다. 투쟁 내용도 양민에 대한 약탈, 방화, 납치, 살인을 일삼아 마적단과 큰 차이가 없었는데, 1939년 10월 ~ 1941년 3월 치안숙정 작전기간의 집중토벌로 항일연군은 완전히 궤멸되고 소수의 잔존세력은 소련으로 도주하여 소련군 88여단에 배속된다. 김일성은 1940년 10월 23일 소만국경을 불법월경하여 소련으로 도주했고, 이후 해방될 때까지 아무런 항일투쟁도 하지 않고 소련군에서 편하게 지냈다.

정안기 박사의 해설중 김일성보천보 사건에 대한 부분은 오류가 많다. 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고, 북한 김일성이 아니다. 또한 그는 1920년 무렵부터 유명했던 전설적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을 사칭한 가짜가 맞다.

일본육사나 만주군관학교 조선인 생도들의 고뇌

박정희, 백선엽 등 일본육사나 만주군관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날 때 대개 일본의 패배를 예측하고 있었고, 일본이 패망하면 조선이 독립될 것이라는 것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들이 적극적으로 일본군 또는 만주군에서 출세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질 이유도 없었다. 당시 사관학교를 다니던 생도들의 고뇌가 어떠했는지는 아래 글에서 알 수 있다. 그들을 친일파로 모는 것은 정치적 목적의 마녀사냥에 지나지 않는다.

장지량(張志良, 1924~2015)이 일본 육사 생도 시절 ‘조선인(朝鮮人)’ 생도로서 겪었던 고뇌와 애환(哀歡)을 기록했던 ≪내정일지(內情日誌)≫라는 제목의 수기(手記) 내용을 발췌

백세 기념 대담

조선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아 창간되던 해에 태어난 100세의 백선엽(白善燁, 1920.11.23 ~ ) 장군과 김형석(金亨錫, 1920.04.23 ~ ) 연세대 명예교수의 대담을 주선했다.

"내 친척 할머니가 김일성 젖물려 키워… 두 아들이 공산당에 죽자 통탄"
金 "어릴 때 옆 동네 살던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이라고 해 놀라"

白 "김일성 평양 환영회 갔는데 군중들이 말도 안된다며 비웃어"

金 "친일파라는 춘원 없인 독립 못했을 것… 그 덕에 민족의식 키워" 白 "당시 최선 다해 실력 키우려 노력, 일본서 배울 건 배워야 했다"

金 "한국만큼 교육에 열정 쏟은 나라 없어… 그게 발전 거름 됐다

이병철, 사람 키우면 삼성 떠나도 한국에 남을 거니 괜찮다고 해"
총살 열흘 앞둔 박정희 "살려달라" 한마디… 백선엽 "그렇게 해봅시다"
白 "이승만, 美사령관들 불평하면 美 헌법정신 거론하며 꾸짖어"

金 "6·25는 시련이었지만 대한민국이 국제화되는 계기로 작용"

白 "사회주의적 개혁? 자유민주주의를 이길수 있는 것은 없어"

金 "이탈리아 前공산당원이 충고하더라, 절대 북한 믿지말라고"
종교 탄압하던 김일성, 뒤에선 "목사님, 기도해 주십시오… 아멘"
白 "김일성, 만주군관학교 출신 포섭하려 정일권 등에 접근"

金 "함석헌 선생이 하던 학교 맡아 운영하던 중 北압박에 월남"

白 "1953년 아이젠하워 대통령 만나 한미방위조약 필요성 설득"

金 "미국보다 중국에 기우는 文정부, 어리석었다는 평가받을 것"

친일 논란

유신헌법 공부해서 사시합격한 노무현, 문재인은 유신 앞잡이

노무현은 1975년, 문재인은 1980년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유신헌법은 1980년 말에 5공 헌법으로 개정되었으므로 두 사람 다 출세를 위해 유신헌법을 열심히 공부하여 사법시험에 합격한 유신 앞잡이가 맞다. 노무현은 유신 판사였기도 하다. 누구를 친일파라 탓하는가?

司法試驗(사법시험) 百(백)41명 합격 최고득점 趙載淵(조재연)씨┄女子(여자)도 3명 1980.06.05 경향신문 7면
司法試験(사법시험) 2次(차) 합격 최고得点 柳聖秀(득점 유성수)군 1975.03.27 매일경제 7면


마이클 브린

신문A34면 1단 기사입력 2020.07.21. ][6] [7]

참고 자료

각주

  1. 1.0 1.1 [2020 신년특집] [백선엽과 김형석, 文武 100년의 대화] [1] 이광수, 김일성 그리고 이병철 조선일보 2020.01.02
  2. 2.0 2.1 白善燁(백선엽) 回顧錄(회고록) 軍(군)과나 (11) 5년만의 平壤(평양) 1988.09.01 경향신문 5면
  3. 백선엽, 간도특설대 논란 종결자 정안기 박사 류석춘의틀딱TV 2020. 7. 14.
  4. https://www.voakorea.com/korea/korea-politics/state-general-paik 국무부, 백선엽 장군 타계 애도 성명…“자유와 민주주의 위한 싸움의 상징”
  5. https://www.voakorea.com/korea/korea-politics/general-paik 전 미 사령관들 “백선엽 장군은 나의 스승...한국 생존과 번영에 막대한 기여”
  6. https://youtu.be/q90VeK2fcPw 영국인이 말한다. "백선엽 장군이 부역자가 아닌 3가지 이유"
  7. 백 장군이 부역자가 아닌 이유는 크게 3가지다. 첫째, 앞서 말했듯 일본 군대에서 복무했다는 게 부역의 증거는 아니다. 만주 제국군대한민국을 침공하지 않았고 백 장군도 자국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누지 않았다. 간도특설대는 주로 중국 공산당 게릴라들을 뒤쫓았고, 백 장군은 적을 거의 보지도 못했으며 실제 전투를 겪지도 않았다고 회고했다. 둘째, 지금 반대파들이 악용하는 부역 기준은 정부 스스로 세운 원칙에도 어긋난다. 노무현 정부에서 만든 일제강점하 강제 동원 피해진상규명위원회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 포로수용소에서 일본군 교도관으로 일하면서 가혹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전범(戰犯)으로 분류된 조선인 83명을 사면했다. 그들이 신분이 그랬을 뿐이지 실제 전범으로 볼 수 있는 행위를 안 했다는 이유였다. 그렇다면 백 장군도 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간도특설대에 소속되어 있었을 뿐이지 친일 부역 행위를 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짓을 했느냐가 아니라 원래 신분이 어떠냐를 들어 처벌하는 건 북한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다. 민주국가인 대한민국에선 있을 수 없다. 셋째, 백 장군 반대 세력은 국가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들은 운동장을 옮겨 놓고 논쟁을 벌인다. 가만 생각해보자. 나라란 우리가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우리 정체성을 확립하고 가치를 세우고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경험의 총체다. 백 장군이 어렸을 때 대한민국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25세 때 해방됐지만 바로 두 쪽으로 갈라졌다. 그는 이후 목숨을 걸고 다른 반쪽을 지켰고, 그때 대한민국은 겨우 건국 18개월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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