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金九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9 · 10대 국무령
1926년 12월 14일 ~ 1927년 8월

홍진 (제8대)

이동녕 (제11대)
부통령
이인성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18 · 19 · 20대 주석
1940년 3월 13일 ~ 1947년 3월 3일

이동녕 (제17대)

이승만 (제21대)
부주석
김규식
개인 정보
본명
자(字) 연하(蓮下), 창암(昌巖)
호(號) 백범(白凡)
가명 장진(張震), 장진구(張震球)
초명 창암·창수·구(龜)
출생
1876년 8월 29일
사망
1949년 6월 26일 (72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평동 경교장
주소지
황해도 해주목 백운방 텃골
(현 황해남도 태탄군 지촌리)
성별
국적
조선 조선 (1876년 - 1897년)

대한제국 대한제국 (1897년 - 1910년)
일제 강점기 일제강점기 조선 (1910년 - 191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한민국 임시 정부 (1919년 - 1948년)

대한민국 대한민국 (1948년 - 1949년)
정당
한국독립당 (1930년, 상하이)
한국국민당 (1935년, 항저우)
통합 한국독립당 (1940년, 충칭)
종교
개신교(감리회)
상훈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김구(金九, 1876년 8월 29일 (음력 7월 11일) ~ 1949년 6월 26일)는 일제하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당시 임시정부 주석이었다. 해방 후 미군정기에 한독당(한국독립당) 당수로, 신탁통치 반대 운동, 남북협상 등 정치활동을 했으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여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지 않았다. 1949년 6월 26일 암살 당했다. 초명은 김창수(金昌洙)이다.

생애

1896년 치하포(䲭河浦) 사건

1896년 3월 9일 백범 김구(金昌洙)가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䲭河浦)에서 일본인 스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타살한 사건이다. 김구는 무역상인 또는 약장사[賣藥商人]로도 언급되는 스치다를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 육군중위로 판단했다고 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자료 《고종시대사 4집 > 建陽 元年 3月 31日 (1896년 3월 31일)》에도 스치다가 일본인 육군중위로 나오는데 김구(김창수)의 주장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앞서 지난 3月 9日에 김창수(金昌洙, 金九)가 대동강(大洞江) 하류(下流) 치하포(治下浦, 䲭河浦)에서 일본인(日本人) 육군중위(陸軍中尉) 스치다 조스케(土田讓亮)을 살해(殺害)하였었던 바 이 날 일본판리공사(日本辨理公使)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 1855~1911)가 외부대신(外部大臣) 이완용(李完用)에게 조회(照會)하여 즉시 가해자(加害者)를 나포(拿捕)하여 처벌(處罰)할 것을 요구(要求)하다. 이완용(李完用)이 조복(照覆)하여 해범(該犯)을 각기형포(刻期 詗捕)하여 안율 징판(按律 懲辦)할 것임을 회답(回答)하다.
출전 外記 建陽 元年 4月 1日·4日
舊韓國外交文書 第3卷 日案 3988號 建陽 元年 3月 31日
舊韓國外交文書 第3卷 日案 3996號 建陽 元年 4月 4日
白凡逸志 78面∼87面

그러나 1896년 05월 30일일자 주한일본공사관 기록에 의하면 피살된 스치다는 일개 매약상(賣藥商)에 불과하다.

당시 주한 일본 외교공관이 작성한 다른 기록을 보아도 스치다는 상인으로 나오며, 일본군 중위가 아니므로, 김구는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한 것이다.

도진순 교수는 피살된 스치다가 계림장업단(鷄林奬業團)[1] 소속 상인이라고 주장했으나[2], 계림장업단은 사건이 일어난 몇달 뒤에 결성되었으므로[3][4][5]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6]

치하포 사건 관련 원자료

各司謄錄 6 > 京畿道篇 6 : 忠淸道篇 1 > 仁川指訓 > 建陽元年七月九日 (1896년 07월 09일)
各司謄錄 근대편 > 內部來去文 09 > 안악군 치하포에서 김창수(김구) 외 2인의 일본인 살해에 관한 조회 : 建陽元年七月十二日 ( 1896년 07월12일(음) )
各司謄錄 6 > 京畿道篇 6 : 忠淸道篇 1 > 仁川報牒·謄本·來報 1 > 建陽元年九月十二日(1896년 09월 12일)

조선 주재 일본 공관의 보고서

7. 雞林獎業團의 성황 및 행상 단속상의 편의

雞林獎業團은 창립 이래 점차 단원을 증가시켜 현재원 303명에 달하고 그 밖에 京城에서 입단 신청을 했으나 아직 입단 수속을 마치지 않은 자가 수십 명 있다. 이 총인원의 내역은 平壤 행상 중인 자 63명, 開城 동 15명, 釜山에 현재 거주하는 자 5명, 當港 동 220명이다. 또 同團은 지난날 이래 그 主意와 목적을 발표하고 團 자금을 갹출하여 집중시켰는 바, 當港에서만 모집한 금액이 1,000圓이 되어 드디어 규약 수행의 단계에 이른 것 같다. 또 지난날 군함 愛宕에 편승하여 평양 지방으로 출장시킨 當館 소속 순사의 보고에 의하면, 행상인의 단속이 매우 빈틈이 없고 공무상 편의가 적지 않다고 한다. 기타 행상 지방의 정황과 商況 등에 대하여 同 단원이 본부에 전한 통신은 직접적으로 당관에 참고가 되는 것이 적지 않아 당관은 크게 편의를 얻을 수 있는 형편이다.
8. 평양 출장한 순사의 서신 요지

평양 출장을 위하여 군함 愛宕에 편승한 당관 순사 3명은 지난 7일 黃海道 安浦에 상륙하였고 그곳에서 水路로 평양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 8일이었다. 愛宕艦은 그곳에 도착한 전후 乘組 軍醫長이 자살을 기도하여 앞서 희망했던 평양 시찰을 할 수가 없었으므로 바로 닻을 올려 佐世保로 향하여 回航하였다(이달 21일 동 함장으로부터 무사히 吳軍港으로 들어가 4, 5일간 선체 수리를 마치겠다는 뜻으로 본관에게 報知가 있었음). 이 일행은 평양에 들어온 다음날 府廳에 가서 土田讓亮의 가해자 수색 유무를 물었더니, 10일 전 이 건에 관하여 외부로부터 통첩이 있어 바로 관할 관청인 海州府에 이첩했다고 답하였다 한다. 그렇다면 이 건은 지난 4월 4일 외부대신이 당국 정부가 수사를 담당하여 상당한 명령을 이곳 지방관에게 통첩할 것을 승인한 이래 만 2개월이 헛되이 지났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정부가 중요사건의 처분을 지체시킨 것을 놀랍게 참고 견딘 것이다. 또한 이 일행은 재류 행상자 시찰을 마치고 14일에 이르러 평양부 순검 5명을 이끌고 해주부로 향해 출발했다고 했다. 그 후의 상황은 後報를 기다려 보고하겠다.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8090172500、韓国暴徒ノ為本邦人被害関係雑件(5-3-2-0-14)(外務省外交史料館)」
標題:2.仁川領事館/(4)長崎県民土田譲亮治下浦ニ於テ暴民ノタメ遭難ノ件 (1896년 6월 29일)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8090172600、韓国暴徒ノ為本邦人被害関係雑件(5-3-2-0-14)(外務省外交史料館)」
標題:2.仁川領事館/(5)山口県民蛭子音三郎踪跡不明ノ件 (1896년 7월)
p.2 인천항 정황보고에 土田讓亮 건이 나옴.
7. (5行 불명) 청구해두었던 건은 이미 보고한 바 있었는데, 위 金昌洙 및 관계자 李化濟는 이달 13일 仁川에 도착했다. 감리가 왔다 간 후 날짜를 정하여 立會 재판을 개시하도록 기약이 되어 있으므로 재판의 결과는 후일 보고하겠다.

관련 자료

해방전 활동

그의 해방전 독립운동에 관해서는 자서전 《백범일지(白凡逸志)》가 참고가 된다. 이 책은 춘원 이광수가 윤문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모두 진실이라고 믿기에는 의심스러운 점도 있다.

그의 해방전 활동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임시정부를 끝까지 지켜냈다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의 침투하여 임정을 장악하려는 것을 막아낸 것도 그의 공로로 볼 수 있다.

《백범일지(白凡逸志)》에는 임시정부 국무총리까지 지낸 공산주의자 이동휘(李東輝, 1873 ~ 1935)와 주변 인물들의 행태에 대해서도 많은 비판을 하고 있다.[7]

“기미년, 즉 대한민국 원년에는 국내나 국외를 막론하고 정신이 일치하여 민족 독립운동으로만 진전되었으나 당시 세계 사조의 영향을 따라서 우리 중에도 점차로 봉건이니, 무산혁명이니 하는 말을 하는 자가 생겨서 단순하던 우리 운동선에서도 사상의 분열,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임시정부 직원 중에도 민족주의니, 공산주의니 하여 음으로 양으로 투쟁이 개시되었다.


심지어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가 공산혁명을 부르짖고 이에 반하여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은 민주주의(데모크라시)를 주장하여 국무회의 석상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못하고 대립과 충돌을 보는 기괴한 현상이 중생첩출(重生疊出)하였다. 예하면, 국무회의에서는 러시아에 보내는 대표로 여운형(呂運亨), 안공근(安恭根), 한형권(韓亨權) 세 사람을 임명하였건만, 정작 여비가 손에 들어오매 이동휘는 제 심복인 한형권 한 사람만을 몰래 떠나보내고 한이 시베리아를 떠났을 때쯤 하여서 이것을 발표하였다.


이동휘는 본래 강화진위대 참령으로 군대 해산 후에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서 이름을 대자유(大自由)라고 행세한 일도 있다. 하루는 이동휘가 내게 공원 산보 가기를 청하므로 따라갔더니 조용한 말로 자기를 도와 달라 하기로 나는 좀 불쾌하여 내가 경무국장으로 국무총리를 호위하는 데 내 직책에 무슨 불만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 씨는 손을 흔들며, “그런 것이 아니라 대저 혁명이라는 것은 피를 흘리는 사업인데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독립운동은 민주주의 혁명에 불과하니 이대로 독립을 하더라도 다시 공산주의 혁명을 하여야 하겠은 즉 두 번 피를 흘림이 우리 민족의 대불행이 아닌가 그러니 적은이(아우님이라는 뜻이니 이동휘가 수하 동지들에게 즐겨 쓰는 호칭)도 나와 같이 공산 혁명을 하는 것이 어떠냐”고 나의 의향을 묻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나는 이 씨에게 “우리가 공산혁명을 하는 데는 제3국제공산당의 지휘와 명령을 안 받고도 할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하였다. 이 씨는 고개를 흔들며 “안 되지요” 한다. 나는 강경한 어조로 “우리 독립운동은 우리 대한민족의 독자적 운동이요. 어느 제3자의 지도나 명령에 지배되는 것은 남에게 의존하는 것이니 우리 임시정부 헌장에 위배되오. 총리가 이런 말씀을 하니는 것은 대(大)불가이니 나는 선생의 지도를 받을 수가 없고 또 선생께 자중하시기를 권고하오” 하였더니 이동휘는 불만스러운 낯으로 돌아갔다.


이동휘가 보낸 한형권이 러시아 국경 안에 들어서서 우리 정부 대표로 온 사명을 국경 관리에게 말했더니 이것이 모스크바 정부에 보고되어서 그 명령으로 각 철도 정거장에는 체류 한인 동포들이 태극기를 두르고 크게 환영하였다. 모스크바에 도착하여서는 러시아 최고 수령 레닌(Vladimir Lenin)이 친히 한형권을 만났다. 레닌이 독립운동 자금은 얼마가 필요하냐고 묻는 말에 한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200만 루블이라고 대답한 즉 레닌이 웃으면서 “일본을 대항하는 데 200만 루블로 족하겠는가?”라고 반문함으로 한은 너무 적게 부른 것을 후회하면서 본국과 미국에 있는 동포들이 자금을 마련하니 당장 그만큼이면 된다고 변명하였다.


레닌은 “제 민족의 일은 제 민족이 하는 것이 당연하다”면서 곧 외교부에 명하여 200만 루블을 한국 임시정부에 지불하게 하니 한형권은 그 중에서 1차분으로 40만 루블을 가지고 모스크바를 떠났다.


이동휘는 한형권이 돈을 가지고 떠난다는 기별을 받자 국무원에는 알리지도 않고 몰래 비서장이요 자기의 심복인 김립(金立)을 시베리아로 마중 보내서 그 돈을 임시정부에 내놓지 않고 자기 손에 받으려 했으나 김립은 제 속이 따로 있어서 그 돈으로 우선 자기 가족을 위하여 북간도에 토지를 매수하고 상해에 돌아와서도 비밀히 숨어서 광동(廣東) 여자를 첩으로 들이고 호화롭게 향락 생활을 시작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이동휘에게 그 죄를 물으니 그는 국무총리를 사임하고 러시아로 도망하여 버렸다.


한형권은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통일 운동자금이라고 칭하면서 20만 루블을 더 받아가지고 몰래 상해로 돌아와서 공산당 무리에게 돈을 뿌려서 소위 국민대표대회라는 것을 소집하였다. 그러나, 공산당도 하나가 되지 못하고 세 파로 갈렸으니 하나는 이동휘를 수령으로 하는 상해파요, 다음은 안병찬, 여운형을 두목으로 하는 이루쿠츠크파요 그리고 셋째는 일본에 유학한 학생으로 조직되어 일본인 복본화부(福本和夫)의 지도를 받는 김준연 등의 ML당파였다. ML당은 상해에서는 미미했으나 만주에서는 가장 맹렬히 활동하였다.


있을 것은 다 있어서 공산당 외에도 무정부당까지 생겼으니 이을규, 이정규 두 형제와 유자명 등은 상해와 천진 등지에더 활동하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들의 맹장들이었다.


한형권의 붉은 돈 20만 루블로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대회라는 것은 참말로 잡동사니라는 것이 옳을 것이었다. 일본, 중국, 조선, 아령(俄領) 각처에서 무슨 단체 대표, 무슨 단체 대표 하는 형형색색의 명칭으로 200여 대표가 모여들었는데 그 중에서 이루쿠츠크파, 상해파 두 공산당이 민족주의자인 다른 대표들을 경쟁적으로 끌고 쫓고 하여 이루쿠츠크파는 창조론, 상해파는 개조론을 주장하였다. 창조론이라는 것은 지금 있는 정부를 해체하고 새로 정부를 조직하자는 것이요, 개조론이라는 것은 현재 있는 정부는 그대로 두고 개조만 하자는 것이었다.


이 두 파는 아무리 싸워도 귀일(歸一)이 못되어서 소위 국민대회는 필경 분열되고 말았다. 이에 창조파에서는 제 주장대로 ‘한국정부’라는 것을 ‘창조’하여 본래 정부의 외무총장인 김규식이 그 수반이 되어서 이 ‘한국정부’를 끌고 해삼위로 가서 러시에 출품했으나 모스크바에서 돌아보지도 아니 함으로 계불입량(計不入量)하여 흐지부지 쓰러지고 말았다.


이 공산당 두 파의 싸움 통에 순진한 독립운동자들끼리도 창조니, 개조니 하는 공산당 양파의 언어 모략에 현혹하여 시국이 요란함으로 당시 내무총장이던 나는 국민대표대회에 대하여 해산을 명하였다. 이 것으로 붉은 돈이 일으킨 한 막(幕)의 희비극이 끝을 맺고 시국은 안정을 되찾았다.

태평양 전쟁 개전 후

일본이 1941년 12월 진주만을 공습하면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김구 등 임시정부 지도자들은 이 전쟁이 일본의 패배로 끝나고 조선이 해방될 것이라고 예감하게 된다. 그 전에 미국과 여러 나라들로부터 임시정부의 승인을 얻어내려 노력하지만 실패한다. 그러나 1943년 카이로 선언에 조선 해방 문제가 포함되면서 해방은 가시권에 들어오게 된다. 카이로 선언이 나오는데는 김구의 대중국 외교와 이승만의 대미외교가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 김구(Kim Koo)가 서명한 임시정부의 대독선전포고문 : 1945.02.28
The Declaration of War on Germany by Korean provisional Govt : 1945.02.28 인도 국립공문서관 소장 한국독립 및 정부수립 관련 자료

일본 아닌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것은 좀 이상해 보인다.

1945년 11월 23일 귀국

신탁통치 반대운동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를 결의한 것이 발표되고, 한국에 이 소식이 전해지자 처음에는 좌우 공히 신탁통치 반대를 표명하고 반탁운동에 돌입하였다. 해가 바뀐 1946년 1월 초부터 좌익은 돌연 찬탁으로 선회하고, 이후 정국은 반탁과 찬탁 세력간의 갈등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반탁운동의 중심은 김구와 임시정부 세력이었다.

남북협상

김구는 1947년 12월 1일에 소련이 UN의 남북동시총선 결의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남한만이라도 선거를 해야하고, 이를 두고 남한 단독의 정부수립이라고 부르면 안 되며, 북한 지역은 추후에 조건이 되면 선거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1948년 1월 25일까지도 한독당은 같은 입장을 견지하였다.

南北을 通한 選擧아니라도, 政府는 統一政府, 金九氏·聲明發表 婦女日報 1947.12.02
韓獨黨(한독당) : 蘇側(소측)이 北朝鮮入境(북조선입경)을 拒否(거부)한다면 우리는 不得已(부득이) UN 監視下(감시하)에 樹立(수립)되는 政府(정부)가 中央政府 局限(중앙정부 국한)된 選擧(선거)이라도 中央政府(중앙정부)로 세계가 인정하는 한 이에 협력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1월 26일 김구와 김규식이 회동하여 남한만의 단독총선에 반대하기로 합의하였다.[8][9][10]

하지만 한독당 시당부는 1월말까지도 총선거에 대비하는 등 혼선을 빚고 있다.

김구가 남한만의 총선을 반대하고 남북협상으로 방향을 선회한데는 중국시절 그와 친분이 있던 거물 남파 간첩 성시백(成始伯, 1905 ~ 1950)과 몰래 북한을 들락거리던 홍명희(洪命憙, 1888 ~ 1968)의 설득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11] 장덕수(張德秀, 1894 ~ 1947.12.02) 암살의 배후로 의심받아[12] 법정에 나가 증언도 해야하는 등의 일로 인해[13] 미군정과 이승만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되고 이것이 남한 단독총선 반대로 이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1948년 4월 김구, 김규식남북협상을 위해 북으로 출발하기도 전에 북한은 두 사람이 이미 항복했다고 선전하고 있었다. 1948년 04월 15일자 현대일보 기사

당시 서울에 있었던 박갑동(朴甲東, 1919~ )의 주장에 의하면 김구는 남북협상이 성공하여 단일정부를 세우게 되면 자신이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북행을 택했다고 한다[14]. 성시백이나 홍명희가 김일성의 뜻이라며 그런 식으로 김구를 회유했을 가능성이 있다. 김구의 방북을 설득했던 홍명희는 같이 평양에 갔다가 서울로 귀환하지 않고 북한에 남아 부수상이 되었다. 그가 평양에 가서 갑자기 북한 잔류를 결정했을 리는 없고, 서울에서 이미 북한에 포섭되어 요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북협상은 1948년 5.10 총선거 직전인 4월 하순 ~ 5월 초순 남한 인사 200~300명이 방북하여 평양에서 열렸다.


양김씨(김구, 김규식)가 평양으로 출발도 하기 전에 북한 방송은 그들이 이미 항복했다고 선전하고 있었다.


김구는 4월 19일 청년학생들이 경교장 앞에서 그의 방북을 가로막자[15] 담을 넘어 북행을 결행하였고[16], 5월 5일에 돌아왔다.[17]


48년 남북정치협상은 蘇각본-蘇민정사령관 레베데프 비망록 [중앙일보] 1994년 11월 15일 종합 1면
특히 비망록에는 남한(南韓)으로부터 받은 정세보고에서 김구가 기자들에게『나를 5월10일까지 암살하려는 것을 알고 있다』고 기록, 김구는 평양으로 출발하기 전 자신의 암살을 예견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이후 평양에 간 김구는 48년5월3일 1시간 30분동안 김일성과의 단독회담에서『만일 미군정(美軍政)이 나를 강하게 압박하면 북한에서 나에게 피난처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도 좋은가』라고 묻자『김일성이 긍정적으로 대답했다』고 기록돼 있다.

레베데프 비망록의 내용으로 보아 김구가 김일성에게 북한에서 노후를 보낼 과수원을 달라고 했다는 북한의 주장은 사실일 수도 있는 것 같다.[20]

남북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의 공동성명서

방북한 인사들은 북측 인사들과 회합한 후 4월 30일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 대체로 소련과 북한 측 주장을 수용한 내용이며, 미군정도 이를 수용해야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2항에는

북 정당 사회단체 지도자들은 우리 강토에서 외국 군대가 철퇴한 후에 내전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며, 또 그들은 통일에 대한 조선 인민의 지망에 배치하는 여하한 무질서의 발생도 용허하지 않을 것이다. 남북 정당사회단체들 간에 전취 약속은 우리 조국의 완전한 질서를 확보하는 튼튼한 담보이다.

라고 하였지만, 이 말이 무색하게 1949년 미군이 철수하자마자[21][22] 북한은 곧바로 남침 전쟁을 개시하였다.

레베데프 비망록에 의하면 당시 남한에서 방북했던 인사는 226명이라고 했는데, 이중 1/3 가량인 홍명희(洪命憙, 1888 ~ 1968), 김원봉 등 70여명이 돌아오지 않고 북한에 남았다.[23] 김구, 김규식 등은 월북자들이 당당하게 북한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둘러리나 서 준 꼴이다.

방북한 인사들은 자신들의 헛된 망상으로 한국민들을 속인 것이다.

서울 귀환 후

방북했던 김구, 김규식은 5월 5일 저녁 서울에 귀환하여 다음날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남조선(南朝鮮) 선거반대(選擧反對)에 합법적 투쟁 전개(合法的鬪爭展開) : 양김씨 기자단 회견(兩金氏 記者團 會見) 1948.05.08 조선일보 1면


통일책 숙의(統一策 熟議)? 양김씨(兩金氏) 동도 이경(同道 離京) 조선일보 1948년 06월 25일 1면
모종(某種)의 숙의차(熟議次) 양김씨(兩金氏) 모사찰행(某寺刹行)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 1948년 6월 25일 1면 9단
1948년 7월 11일 오전 11시 경교장을 방문한 주한 중국 공사 유어만(劉馭萬, Liu Yuwan)과 김구의 대화록 - 이화장 문서.

남북협상 당시 평양의 공동성명에는 전쟁은 없을 것이라며, 미소 양국 군대의 철군을 주장했다. 서울로 와서도 김구는 미군 철수를 주장했고, 대한민국의 건국을 반대하며 끝까지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울 귀환 2개월여 뒤 주한 중국공사 유어만(劉馭萬, Liu Yuwan, 1897~1966)[24][25]과 만나 나눈 대화에서는 북한군은 이미 강력하여 남한이 따로 정부를 세워도 그들이 남침하여 적화될 것이기 때문에 단정을 반대하는 것처럼 말했다. 공동성명서의 주장과 달리 김구는 북한의 남침을 예견하고 있었으면서도 미군철수를 주장했던 것이다. 그가 대한민국 건국에 반대하며 끝까지 협조하지 않은 배경에는 남한이 정부수립을 해봐야 북한의 남침으로 곧 적화될 것이 뻔하므로 괜히 참여했다 나중에 화를 당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작용했을 가능성도 상당하다.


  • 김구(金九) - 유어만(劉馭萬, Liu Yuwan) 대화록 전문(全文) : 1948년 7월 11일. 원문은 영문임.
유어만(劉馭萬, Liu Yuwan)은 서울주재 중국(장개석 정부) 총영사
Record of Conversation between Kim Gu and Liu Yuwan : July 11, 1948 Wilson Center : 영문 원문
조갑제(趙甲濟), 金九가 유어만 중국 공사와 나눈 대화록: 金九는 북한이 남침할 것을 알면서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였나? 조선 pub 2014-10-27
류근일, 김구 선생이 단독정권(대한민국)수립 반대한 것은 사실 - 이인호 이사장은 역사적 사실을 말했을 뿐 조선 pub 2014-10-24

장덕수 피살 이후부터 김구는 공산화된 북한을 끝까지 편들며 남한과 미군정에 강력히 반대하는 이해하기 힘든 행보를 보였는데, 이것이 그가 1949년 6월 26일 암살 당하는 빌미를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피살 후 장례가 끝나기도 전에 그가 생전에 원하던 미군철수가 완료되었고[21][22], 정확히 1년 뒤에 유어만 공사와의 대화에서 그가 예견했던대로 북한의 남침 전쟁이 개시되었다.

남북정치협상은 소련의 각본에 놀아난 것

북한을 점령한 소련 제25군 군사위원으로 평양 소련군정의 민정사령관을 맡기도 했던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이 남긴 레베데프 비망록에는 남북협상은 소련과 김일성이 세운 치밀한 공작에 방북한 남한 인사들이 놀아난 것으로 나온다. 당시 김구가 김일성에게 여생을 보낼 과수원이나 하나 달라고 했다는 북한측 주장의 사실 여부에 대해 논란이 있어왔는데[26][27][28][29], 여기에 나오는 김구와 김일성의 문답 내용으로 보아 어느 정도 사실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남북지도자 연석회의에 대한 소련측의 의도와 역할, 소(蘇)군정의 북한정권 수립과정 등이 문건으로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비망록에는 북조선 인민위원장 김일성과 북조선 노동당 위원장 김두봉이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와 민족자주연맹 대표 김규식등 이른바「4金회담」에서 김구와 김규식에게 『헌법은 채택하지만 당분간 내각은 구성하지 않고 김구. 김규식 두 선생에게 직위를 부여하고 헌법을 통과한 후 통일정부를 세울 계획』이라고 제의, 두 정치 지도자를 회유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와 함께 소(蘇)군정은 김구와 김규식 일행이 남북(南北)지도자 연석회의를 결렬시키거나 회의에서 퇴장하면 이들을 「미제(美帝)간첩」으로 폭로하는 대책을 수립해 놓았다.
특히 비망록에는 남한(南韓)으로부터 받은 정세보고에서 김구가 기자들에게 『나를 5월10일까지 암살하려는 것을 알고 있다』고 기록, 김구는 평양으로 출발하기 전 자신의 암살을 예견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이후 평양에 간 김구는 48년 5월 3일 1시간 30분동안 김일성과의 단독회담에서 『만일 미군정(美軍政)이 나를 강하게 압박하면 북한에서 나에게 피난처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도 좋은가』라고 묻자 『김일성이 긍정적으로 대답했다』고 기록돼 있다.[30]

또 김두봉은 4월25일 밤 레베데프 소장에게 『김규식을 5월10일까지 평양에 체류하도록 하자』고 건의, 김규식이 미군정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있음을 감안, 그를 북한에 묶어 두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레베데프 비망록 전문은 아래에서 볼 수 있는데, 김구는 평양에서 미군정에 대한 비판만 열심히 할 뿐, 북한의 요인들이 모두 소련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전혀 몰랐거나, 외면하고 있다. 북한 우파 세력이 철저한 탄압을 받으며 정치활동이 금지되어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아무 문제도 제기하지 않고 남한의 미군정만 비판한다.

  • 전현수 역, 『레베제프일기(1947~1948년)』, 한국연구재단 기초학문자료센터, 2006.
북한현대사 관련 러시아 기록사료(Russian Archives) 조사연구 - 구소련 군정문서.외교문서(1945-1960)를 중심으로 기초학문자료센터 (KRM)
첨부된 pdf 파일 중 "2. 레베제프 일기 러시아어 원문" / "18. 레베제프 일기 번역문" (온라인 열람 가능)
레베데프 비망록.pdf

김구의 북행 배경에 대한 조경한(趙擎韓)의 증언

김구가 남북협상을 결행한 배경에 대해 당시 한독당 상무위원이었던 조경한(趙擎韓, 1900~1993)[31]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조규하, 이경문, 강성재 공저, 『남북(南北)의 대화(對話)』 2판 (서울, 고려원, 1987) pp.357-358. (국회도서관 온라인 열람 가능)
韓民黨(한민당)등 170여團體(단체) 反對(반대)
韓協聲明(한협성명) "協商(협상)은 蘇(소)에 韓半島(한반도) 넘기는 것"
李承晩(이승만)도 눈물 글썽 反意表明(반의 표명)
다음은 韓獨黨(한독당) 내의 反對見解(반대견해).

▲趙擎韓(조경한)씨(七二) 전 臨政 國務院 秘書長 (임정 국무원 비서장) 당시 韓獨黨常務委員(한독당상무위원)ㆍ서울 행당洞(동) 二九○)

남북협상이 개최 되기 전에 명동 韓美(한미) 호텔에 머물고 있었는데 病中(병중)이었지요. 하루는 一波(일파) (嚴恒燮(엄항섭)씨)[32]가 찾아와 하는 말이 南北協商(남북협상)을 해야겠다고 해요. 이유를 물었더니 총선거 후 南韓(남한)에 美國人(미국인) 판무관이 들어앉는다는 說(설)이 있거니와 그보다도 첫째 南韓(남한)에서 總選擧(총선거)가 실시되면 張德秀被殺事件(장덕수피살사건) 여파로 韓獨黨(한독당)이 불리한 입장에 서기 때문에 도저히 선거에 이길 자신이 없으니 그 政治的 出路(정치적 출로)로 南北會談(남북회담)이 요청되고 둘째 兩金(양김) 명의로 「유엔」에 節略書(절약서)를 보내고 동시에 金日成(김일성)에게 南北總選擧 (남북총선거)를 제의하면 南北韓(남북한)을 통한 總選擧(총선거)가 가능하며 그렇게 되면 金九(김구)선생이 大統領(대통령)으로 선출될 수 있으니 남북협상을 열어야 한다고 말해요. 그래서 누가 그러더냐고 물었더니 臨政駐佛連絡員(임정주불연락원)으로 있었던 徐嶺海(서영해) (越北(월북) 行方不明(행방불명))[33]라는 사람이 金九(김구) 선생을 찾아와서 金日成(김일성)도 協商(협상)에 찬성하며 獨立運動經歷(독립운동경력)이 짧아서 金九(김구) 선생을 大統領(대통령)으로 모시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고 자꾸 종용하고 있다는 말까지 털어놓아요. 그래서 남한의 선거에 韓獨黨(한독당)이 참가만하면 압도할 수 있고 徐嶺海(서영해)의 말은 믿을 수 없다고 반박하면서 南北協商(남북협상)을 하지 말도록 강경하게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民族(민족)의 대외적인 명분도 있고하니 정 하려거든 일단 예비회담 개최를 제의해서 거기서 대표를 쌍방이 정하되 본회담에서는 저쪽이 감당키 어려운 案件(안건)를 내놓고는 결렬되는대로 기자회견을 열고 저쪽에 책임을 전가하자고 했어요. 공산당하고 협상할 때는 실력이 二(이)배 이상 돼야하는데 당시 남한의 정세는 그렇지 못했지요. 그후 내가 다시 병석에 눕게되자 그 의견이 채택되지 못했는데 北行(북행) 며칠 전에 白凡(백범)이 문병차 와서 같이 갔으면 하는 의사를 표시한 일이 있었으며 趙素昻(조소앙)씨도 "공산당을 잘 아는 당신이 병만 안났더라도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 일이 있습니다.

김구의 북행 배경에 대한 유어만(劉馭萬) 중국 총영사의 대전(代電)

서울 주재 중국 총영사 유어만(劉馭萬)이 본국의 외교부장에게 보낸 전문에 당시 김구, 김규식의 북행 주변 상황이 나와 있다. 김구는 장덕수 암살 배후로 의심 받아 미군정과는 완전히 단절된 상태였고, 이것이 북행을 고집한 하나의 배경이 된 것으로 보인다.

劉馭萬 총영사의 代電

[발 신] 劉馭萬
[수 신] 外交部
[연월일] 1948년 4월 20일
[번 호] 제119호
[내 용]
特急:남경 왕부장님 보십시오.
2김(김구·김규식)이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반대한 이후 저는 곧 이승만과 김구의 합작을 성사시키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김구의 세력이 雄厚하여 경시할 수 없음을 거듭 말했더니 이승만도 김구의 의견을 상당히 중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김구는 한민당 당수 장덕수 암살사건에 연루된 혐의가 적지 않습니다. 김구 본인은 비록 어떠한 처분도 받지 않았지만 암살범을 비롯하여 8인이 미군사법정에 의해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이는 김구로서도 어쩔 수 없었고 이후 김 씨와 미군정당국의 관계는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162·163호 전보를 받은 뒤 최후의 노력으로 王·司徒 두 부대표를 보내 알선하였지만 아무런 성과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상황이 여의치 못해 더 이상 활동을 펼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蔣 주석께서 한국 각 당파의 통일을 위해 각 당파 영수에게 단결을 호소하는 전문을 보내시는 것은 주석님의 위신을 손상시키는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주석님과 부장님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지난달 받은 147호 전보를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전보를 받은 즉시 김구에게 주석님과 부장님의 뜻을 전하였으나 김 씨는 고집이 세 충고를 듣지 않으니 참으로 애석할 노릇입니다.
남북영수회의는 오늘까지의 상황으로 보아 성사될 것 같습니다. 김구·조소앙·엄항섭·여운홍·홍명희 등이 어제 저녁 북상하였는데, 듣자하니 오늘 새벽 이미 평양에 도착하였다 합니다. 김규식 일행 수십 명은 내일 새벽 6시 평양을 향해 출발할 것이라 합니다. 김구는 출발 전 사저에서 기자들에게 남북회의가 성공을 거두지 못하면 殉國할 것이라 성명하였습니다. 김 씨의 고집을 엿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2김과 가까운 사람의 말에 의하면, 이번 북상한 1-2백 명 가운데 대부분이 남으로 내려오지 않을 것이라 합니다. 나머지는 2주일 정도 뒤 漢城으로 되돌아 올 것입니다.
김규식은 회의 성공에 회의적인데 남으로 돌아온 뒤에는 정계에서 은퇴할 것이라 합니다. 김구의 행동은 예측불허인데 전체적인 상황으로 보아 소련은 남한의 선거를 방해하려는 음모를 갖고 있는 듯합니다. 2김이 북상을 결정하기 전 연락원을 통해 회의 선결조건 5가지를 제안하였고, 북한은 이를 완전히 수용하기로 하여 2김의 북상이 성사되었습니다. 2김이 제안한 5가지를 아래에 보고 드립니다.
한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국제원조의 조건 하에 2김은 아래 5가지를 주장하였습니다.

첫째, 진정한 민주정부를 건립하며 어떠한 독재체제도 거부한다.
둘째, 사유재산제를 승인하며 독점적 자본주의를 거부한다.
셋째, 전국적인 보선을 실시하며 통일된 중앙정부를 건립한다.
넷째, 어떤 우방도 한국 영토 내에 군사근거지를 설치해서는 안 된다.
다섯째, 미소 양국은 즉각 담판을 개시하여 점령군의 철퇴 시간과 조건을 토의해야 한다(이는 철병의 선결문제와 선후방법을 칭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철병방법을 전 세계에 공포해야 한다. 【劉馭萬】

김구의 북행 배경에 대한 박갑동의 증언

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은 당시 서울에 있었고, 경교장에도 자주 출입하며 김구와 면담도 했는데, 김구의 북행 강행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대립 / 백범 종종 조만식 밀서 받아 / 남로당선 홍명희 통해 접근 시도하기도
특히 백범은 평양의 조만식으로부터 밀서를 종종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북동포가 전부 자기를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에 백범이 측근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평양에 간 것도 이같은 믿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중요한 배경은 평양의 김일성이 5·10선거를 파탄시켜 이승만 정권을 수립 못 하게 하기 위해 백범이 평양의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해주면 남조선에서 비록 단독정부를 수립해도 이북에서는 이에 대항하는 정부를 수립하지 않겠다는 밀서를 보내온 것이었다.

남로당에서도 홍남표가 홍명희를 시켜 백범에게 공작도 했었다. 백범은 황해도 출신이기 때문에 북한에 대한 관심과 애착이 굉장했었다.
◎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 대립/김일성 당ㆍ군ㆍ정 3권 장악/분단책임 미­이승만에 전가… 공산정권 수립
백범은 남북통일선거를 하면 자기가 정권을 쥔다고 믿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도 그럴만한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조만식계의 북조선 민주당계나 기타 북조선 인사들이 서울에 오면 돈암장보다 경교장을 먼저 찾아가기 때문이었다.

백범은 이북동포들에게 자기의 얼굴을 꼭한번 보일 필요를 느꼈기 때문에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평양에 갔는데 김일성은 백범이 회의대표들과 충분히 인사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백범의 방북보고서를 보면 (이것은 당외비였는데 남로당 수중에 한 부 들어왔다) 아주 불만에 차 있었다.

북한에서의 김일성 시책을 다 부정적으로 보았고 긍정적으로 본 것은 「혁명가 유가족 학원을 지어 혁명가 유가족을 우대하고 있다」는 단 한가지뿐이었다.

백범은 평양행은 결과적으로 미국과 이승만에게만 타격을 주었을뿐 김일성은 오히려 덕을 보았으며 백범 자신은 잃은 것만 있지 얻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백범과 심산(김창숙)이 믿고 있던 벽초(홍명희)는 평양연석회의에 가서는 김일성에 밀착하여 서울을 버리고 평양에 영주하기 위해 가족을 다 불러갔다.

9월에 김일성정권이 수립되자 벽초는 부수상에 등용되었다. 그는 감격해 쌍둥이딸 둘을 김일성집 가정부로 보냈다. 큰아들 기문은 과학원원사로 한글을 연구하고 둘째아들 기무는 38선을 왔다갔다 하다가 행방불명되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평양에서 벽초를 만난 사람들의 얘기로는 역시 속으로는 불평불만이 가득차 서울을 그리워하고 있더란 것이었다.
단독정부 반대 위해 남·북 정당·단체 연석회의 / 김구·김규식, 남한대표로 평양회합에 양 김씨는 주석단에 안 껴주고 푸대접 / 조만식 석방요구에 김은 밀서 내밀며 "장난 그만 하시오"
남·북 연석회의, 김일성의 모략에만 이용당해 / 김구·김규식은 귀경 즉시 성명을 발표 실패나 성공 말 않고 요령부득한 내용 / 북쪽선 이미 인민공화국헌법의 초안을 채택
김일성(金日成)은 사람을 부를때 밀서(密書)만 보내지 않고 반드시 밀사(密使)를 보냅니다. 48년 김구(金九)선생이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가시기 전에도 평양에서 밀사가 왔었습니다. 당시 내가 속해 있던 남로당에서도 같은 공작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그걸 알고 있었습니다. 밀사가 가져온 밀서의 내용은 「미제와 이승만 도당이 남쪽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단독정부를 수립하려하니 이것은 민족분열의 일대위기입니다. 이것을 막기 위하여 선생님을 정중히 평양에 초청합니다. 만일 선생님이 평양에 와주시면 남쪽에서 단독정부가 수립되더라도 이에 대응하는 북만의 단독정부는 수립하지 않겠습니다.」 하는 내용이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김구(金九)선생이 전 국민과 측근의 결사적인 반대를 무릅쓰고 평양에 갔던 것입니다. 김구(金九) 선생이 북에 가기 직전에 평양거리엔 「민족반역자 김구(金九) 이승만(李承晩) 를 타도하자」는 삐라가 곳곳에 붙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그걸 하루 아침에 떼어버리고 「김구(金九)가 김일성(金日成) 장군에게 항복하러 온다」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이런 사실을 어떻게 확인하지요?

제가 51년 평양에 있을때 직접들은 얘긴데, 김구(金九) 선생이 보낸 편지를 김일성(金日成)이 양복 안주머니에 넣고 있다가 깜빡 잊고 세탁을 맡겼다는 겁니다. 세탁하는 사람이 이걸 발견하고 꺼내보지 않고 그냥 김일성(金日成)에게 바쳤는데, 김(金)은 그가 본 줄 알고 후에 그를 죽여버렸다고 해요. 그런데 최근에 나온 「김일성의 비서실장 고봉기(高鳳起)의 유서」라는 책에 이 내용이 그대로 나와 있더군요.

이뿐만이 아니라 김일성(金日成)은 여운형(呂運亨) 씨에게도 밀사를 보내 북으로 초청해갔습니다. 그런데 초청을 받아 갔던 두분이 비명에 갔다는 점을 우연의 일치로만은 볼 수 없기도 합니다.

대한민국 건국 후의 행보

1948년 말 프랑스 파리에 개최된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1949년 1월 16일 한독당 중앙집행위원장 김구는 한독당 중앙위원회 석상에서 '5.10 총선으로 남한의 정부를 수립한 것이 북한도 따로 정부를 수립하는 핑계거리가 되었다, 미소 양군의 철수를 위해 국방군과 인민군은 뭉치라, 나는 불원간(不遠間) 서울에서 조국의 통일을 위한 남북협상이 있을 것을 희망하고 또 믿고 있다'는 등의 발언을 했다.[34][35][36] 중대한 발언이었고,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1949년 1월 18일 정부 대변인은 남북협상과 영수회담을 운운하는 김구의 발언에 대해 “항일투쟁으로 전 민족을 영도하고 나갈 때는 영수라는 말이 성립되어도 자주독립 국가가 된 이 마당에는 영수 운운은 큰 불찰이다. 따라서 3영수 합작 운운도 부당하며 존재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성명서는 이대통령과 김구, 김규식 양씨와의 합작을 부정하는 내용이었다. 이어서 대변인은 “아직도 남북협상을 주장하고 이북(以北) 정권을 말하는 관념유희(觀念遊戱)에 가까운 진부한 언사를 쓰고 있음은 모순당착(矛盾撞着)"이라며 남북협상 불가를 선언했다.[37][38]

1949년 1월 16일 김구의 발언은 “대한민국만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 "이며, “이승만 대통령만이 유일한 최고 원수”라는 사실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다. 이는 대한민국에 대한 명백한 반역이자, 국가 원수에 대한 심각한 모독이다. 이러한 발언을 한 배경에 대해 정안기는 "당시 김구는 소련 군정이 촘촘하게 설치한 정치적 그물망에 걸려든 대어(大魚)였고, 새파란 김일성의 장단에 놀아나는 정치적 노리개에 불과했다. 이후 김일성의 충실한 하수인을 자처하는 늙은 친공주의자 김구에게 대한민국은 '어차피 적화될 너절한 나라'에 불과했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피살과 살해범 안두희의 변

김구는 대한민국 건국과 이후의 정부에 사사건건 반대하다 1949년 6월 26일 포병 소위이자 한독당 제9호 비밀당원 안두희와 언쟁 중에 12시 46분경 권총 저격을 받고 피살되었다. 사흘 뒤인 6월 29일 그가 생전에 강력히 요구했던대로 미군의 철수가 완료되었다.[21][22] 그로부터 정확히 1년 뒤인 1950년 6월 25일 김구가 예견했던대로 북한의 남침이 개시되었다.

안두희는 1955년 간행한 아래 수기에서 살해의 동기를 밝힌 바 있다. 안두희는 김구가 송진우, 장덕수 암살의 배후라고 확신한 듯 하고, 1949년 5월 4일 국군 대대장이었던 표무원(表武源, 1925~2006)강태무(姜太武, 1925~2007)가 휘하의 대대병력을 이끌고 월북한 사건과, 국회 프락치 사건 등에도 김구가 관련되어 있다고 파악한 듯하다. 안두희가 한독당 비밀 당원이었다는 것은 김구가 그에게 모종의 비밀 임무를 맡길 계획이었음을 시사한다. 안두희는 몇 차례 김구와 만나서 대화해본 결과 김구가 계획하고 있던 일들에 동의할 수가 없었고, 탈당시 살해 위협도 받았다고 한다.

재출간 : 나는 왜 김구선생을 사살했나 : 안두희의 시역(弑逆)의 고민 타임라인 2020년 12월 15일
1948년 8월 15일의 건국과 정부수립을 앞두고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과 초대 내각은 만장일치로 백범 김구를 부통령으로 추대했다. 임시정부 주석으로서의 위상과 독립운동에 기여한 그 나름의 역할 그리고 김구에 대한 민중의 신망을 대한민국 정부는 온전히 수용했다. 그러나 이승만과 초대 내각의 결단과 신생 독립국 민중의 여망은 김구의 거절로 보기 좋게 무산되고 말았다.

부통령 제안을 단칼에 거절한 김구는 외세 배격과 자주통일국가 건설이라는 반탁운동 당시의 명분을 그대로 유지하며 대한민국의 건국과 정부수립을 반대했다. 그뿐 아니라 신생 독립국의 후견 역할을 하던 미국을 외세로 몰아 미군 철수와 내정 불간섭을, 대한민국 단독정부를 추인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철수를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김구의 요구는 외세, 즉 미군 철수로만 그치지 않았다. 김구는 보다 본질적인 차원을 노렸다. 즉 미군 철수로 인한 군사적 공백을 1억5000만 달러 상당의 군사 원조로 상쇄하기로 합의한 이승만 정부와 미국 간의 합의를 전면 백지화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김구의 바람대로 결국 1949년 5월말 대부분의 미군이 인천항을 통해 철수하고 6월 30일 철수를 완료한다는 계획을 발표한다. 또한 미군 철수에 따른 군사적 공백을 메우기 위한 1억5000만 달러 상당의 군사원조 백지화마저 수용해 버린다. 6월 29일 군사고문단 500명만 남긴 채 미군이 모두 한국을 떠났다. 신생 독립국 대한민국은 스스로의 자위력으로 김일성의 북한 공산집단과 그 배후인 소련과 중공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김구는 자신의 요구대로 미군이 실제로 철수를 시작하고 1억5000만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군사원조마저 백지화된 상태에서 국회와 군대를 장악하기 위한 시도를 본격화한다. 소장파 13명을 제헌국회에 입성시켜 국회 장악을 시도한 ‘국회프락치사건’과 청년장교들을 대거 포섭함으로써 군대 장악을 시도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국회프락치사건은 1949년 6월 10일 38선을 넘으려다 붙잡힌 정재한(鄭載漢)이라는 여간첩이 음부에 숨기고 있던 박헌영에게 보내는 암호문서가 발각되면서 그 실체가 백일하에 드러난다. 이 사건은 헌병대와 검경이 합동으로 내사를 해오면서 1949년 4월 말부터 8월 중순까지 3차에 걸쳐 관련 의원들이 속속 검거되고 있었다. 모두 13명의 의원들이 검거되었다. 이들은 1심에서 모두 유죄판결을 받은 후 이에 불복 항고, 2심에 계류중 6·25전쟁이 발발하며 서울이 북한괴뢰군에 점령되자 한 명 만 제외하고 모두 월북했다.
[정안기 박사 특별 대담] 안두희, 백범 암살의 진실 (2) - 《弑逆의 苦悶》은 과연 僞書인가? 미디어워치TV 2021. 1. 28.
[정안기 박사 특별대담] 안두희, 백범 암살의 진실 (3) 미디어워치TV 2021. 2. 25.
[정안기 박사 특별대담] 안두희, 백범 암살의 진실 (4) - 안두희의 충성과 반역 미디어워치TV 2021. 3. 11.
미군정 사령관 하지 장군(CG, Commanding General)이 1947년 12월 13일 워싱턴의 합동참모본부(JCS, Joint Chief of Staff)에 보낸 전문. "경찰청장 장택상(Police Chief Chang)의 정보에 의하면 장덕수 암살범의 자백이 김구를 암살을 사주한 사람으로 지목하고 있다. 만일 이 사실이 증거로 뒷받침된다면 김구를 살인죄로 미국 법정에 기소하는 것이 사령관(CG, 하지 장군)의 뜻이다"라고 하였다.

암살 사건 연루 혐의

해방 직후 송진우(宋鎭禹, 1890~1945.12.30), 여운형(呂運亨, 1886~1947.07.19), 장덕수(張德秀, 1894~1947.12.02) 등 주요 정치인에 대한 3건의 암살 사건에 김구가 연루되었다는 주장과 혐의가 있으나 사실로 분명히 확인되지는 않았다.

미군정 기록에 의하면 경기도 경찰부장 장택상(張澤相, 1893~1969)이 1945년 12월 중순 임정 요인들이 참석한 저녁 모임에서 들었다는 말이 나온다. 대화의 내용은 좌파들은 미군정 당국이 축출할 것이고, 김구에 대적할만한 사람은 송진우 뿐이므로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나왔다고 한다. 이런 말을 듣고 송진우에게 조심하라는 말을 여러 차례 했으나 송진우는 그럴 리가 없다며 별로 조심을 하지 않아 당했다고 하였다.[39]


역시 미군정 기록에 의하면 여운형 암살범 한지근이 자기는 송진우 암살에 연루된 한현우가 이끄는 그룹에 속해 있었다고 실토했고 한다.[40] 송진우 암살범 한현우의 배후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장덕수 암살범은 한독당원이었기 때문에 미군정은 김구가 배후라는 혐의를 두고 있었고[12], 이 때문에 김구는 법정에 나가 증언도 해야 했다.[13][41] 김구는 이승만에게 하지 장군에게 이야기하여 법정에 나가지 않도록 해달라고 부탁했으나 이승만이 들어주지 않아 이 때문에 이승만과 사이가 결정적으로 틀어지게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승만은 하지 사령관과 사이가 극도로 좋지 않았고, 장덕수나 유가족과도 상당한 친분이 있어 김구의 청을 선뜻 들어줄 상황도 아니었던 것 같다. 장덕수 암살을 김구가 직접 지시했는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한독당 인물들이 계획하고 실행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42]

김구 어록

김구나 신익희 같은 분들은 "일제시대에 국내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친일파"라는 발언을 하였다.[43][44]

Mark Gayn (1909~1981), 《Japan Diary》 (William Sloane Associates, 1948) p.433 :

[November 7, 1946 SEOUL] With characteristic bluntness, Kim Koo said: "Practically everyone in Korea is a collaborator. They all ought to be in jail."

[1946년 11월 7일, 서울] 김구는 특유의 퉁명스러운 어조로 "한국 내에 있은 사람은 사실상 모두 일제 협력자다. 그들은 모조리 감옥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경남(李敬南), 《설산 장덕수(雪山 張德秀)》 (서울, 東亞日報社, 1981) p.329

이 해(1945년) 12월 중순의 일이다.... 술기운 탓도 있겠지만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가 『국내에 있던 사람은 크거나 작거나 간에 모두 친일파...』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친일을 하지 않고서는 어떻게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겠느냐고 말했다.[45]
  • Mark Gayn은 Chicago Sun 지의 일본 동경 지국장으로 1946년 가을 취재차 한국에 와서 김구, 이승만 등도 만났었다. 당시 일들이 나오는 《Japan Diary》는 김구 생전에 출판되었다.


해방 후 김구의 거처 경교장(京橋莊)은 금광업자 친일파 최창학(崔昌學, 1891~1959)이 자신의 별장을 제공해 준 것이다. 친일파를 감옥에 보내는 대신 별장을 제공받은 것인가?

해방 후 귀국한 임시정부 인사들의 안하무인식 언행에 불만을 토로한 사람들이 많았다.

미군정기 여론조사 지지율

해방 직후 미군정기에 대통령 예비 후보자들에 대한 아래와 같은 3건의 여론조사가 있었는데, 이승만에 대한 지지가 압도적이었다.

  • 잡지 선구(先驅) 1945년 12월호 pp.45~51 에 실린 1945.10.10 ~ 11.09 기간에 시행된 대통령 후보에 대한 여론조사[46].
    설문지에 직접 기명하는 방식이었으며, 배포한 1957매 중 투표한 매수 978매이며, 응답률은 50.0% 였다.
    이승만 431표 (44.1%), 김구 293표 (30.0%), 여운형 78표 (8.0%), 무기록 176표 (18.0%)

  • 한국여론협회(韓國輿論協會)가 1946년 7월 시행한 초대 대통령 후보에 대한 여론조사[47]
    종로4가 등 3개소 행인 6,671인을 대상으로 조사
    이승만 1916인 (28.7%), 김구 702인 (10.5%), 김규식 694인 (10.4%), 여운형 689인 (10.3%), 박헌영 84인 (1.3%), 기타 110인 (1.6%), 모르겠다 2476인 (37.1%)

  • 미군정청 홍보처가 1947년 5월 서울에 거주하는 1,000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대통령 후보자에 대한 여론조사[48]
    이승만 43.9%, 김규식 18.5%, 여운형 17.5%, 김구 15.2%, 허헌 1.3%, 조소앙 1.3%, 김원봉 0.9%, 김성수 0.7%, 박헌영 0.4%

김구 신화의 진실

아래는 유튜브 펜앤드마이크TV에서 방영된 내용이다.

참고 자료

[정밀복기] 김구와 건국 반대 운동 내막
성시백 동지는 남북련석회의를 성과적으로 보장하기 위하여 위대한 수령님의 높으신 권위를 가지고 극단한 반동분자로 있던 김구 선생을 돌려세우는 사업체에도 큰 힘을 넣었다”(북한 노동신문)
김구가 건국을 앞둔 상황에서 종잡을 수 없는 행보를 한 이유는 임정의 주불(駐佛) 외교위원이었던 서영해(徐嶺海)[49]와 북한에서 남파된 간첩 성시백(成始伯, 1905 ~ 1950)[50]에게 포섭 당했기 때문이란 주장이다. 김구의 추종자였던 조경한(趙擎韓)[51]은 “서영해가 나타나 ‘남북한을 통틀어 총선거를 하면 선생님이 대통령이 되실 텐데 무엇 하러 이승만이 주도하는 남한만의 선거에 참여하려 하십니까. 김일성도 김구 선생을 대통령으로 모시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라고 집요하게 설득하는 바람에 변심하게 되었다”고 증언했다(이호, <하나님의 기적 대한민국 건국>(하), 도서출판 복의 근원, 2013, 210쪽).
김구의 방북을 설득한 거물 남파간첩 성시백(成始伯, 1905 ~ 1950) 관련 특집기사임.
대의(大義)에 충실했던 독립운동의 대부
임정의 중심인물로 활약… 동학농민ㆍ의병운동 거쳐 신민회에서 활동
백범일지에 "소련 공산주의 독재 반대" 써놓고, 자유대한민국 건국을 반대
김일성 만나 '합작'추진했는데 국부라니… 통합당은 국가 위기를 구경만 할 것인가
그[김구]는 1947년11월에 출판된 자서전 《백범일지(白凡逸志)》의 제3장에 “나의 소원”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여기서 자신의 정치이념이 “자유”라면서 “독재”에 대한 반대를 명백하게 선언하고 “독재 가운데서도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 독재가 가장 무서운 독재”라는 말로 공산주의에 대한 거부를 분명히 했었다.

그는 특히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라는 것은 이러한 독재 가운데서도 가장 철저한 것이어서 독재 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으로 발휘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한 그가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거부로 인하여 38선 이남에서 실시된 자유민주선거의 수용을 거부하고 이를 보이콧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김구는 5.10 제헌국회 선거를 앞둔 1948년4월 주변의 열화(熱火) 같은 반대를 뿌리치고 평양 방문을 결행하여 4월19일부터 이달 말까지 소련 군정 당국의 배후 조종 하에 김일성(金日成) 중심의 공산주의자들이 차려 놓은 ‘북한 공산정권’ 수립 예행 행사였던 ‘남북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둘러리로 참가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기행(奇行)의 주인공이 되었다.

김일성의 북한은 그 뒤 이때 평양을 방문한 김구가 김일성을 만나서 “충성을 서약”하고 “임시정부의 관인(官印)을 김일성에게 바쳤다”는 선전을 해 오고 있다.

함께 보기

각주

  1. 계림장업단(鷄林奬業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주해본 펴낸 도진순 교수 "국민 애독서'백범일지'참모습 찾았죠" 경향신문 1997년 8월 13일자, 19면
  3. 1896-04 : 의병운동으로 인천에 철수한 일본인 상인, 무장행상단체인 鷄林奬業團 조직 (회원 219명). 시대별연표 > 근대사연표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4. 1896-05-22 : 일본상인 무장행상단체 鷄林奬業團, 평양에 第1大區 설치. 시대별연표 > 근대사연표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5. 한철호(韓哲昊), 鷄林奬業團(1896-1898)의 조직과 활동 사학연구 제55.56호 1998.09 pp.629-650
  6. 김구考...치하포사건과 계림장업단 - 眞明行 - 티스토리
  7. [이동복칼럼] 백범일지를 읽고 백일몽에서 깨어 날 것을 문재인 씨에게 권한다 whytimes 2019-08-16
  8. 離合無常(이합무상)! 昨今(작금)의 政情(정정) 경향신문 1948-01-28 1면
  9. 南北要人會談(남북요인회담) 選擧對策講究必要(선거대책강구필요) 金九氏主張(김구씨주장) 조선일보 1948-01-28 1면
  10. 南北統一總選擧(남북통일총선거)못되면 小總會(소총회)서 재검토하라 경향신문 1948-01-28 1면
  11. [김효선 칼럼] 거물 간첩 성시백의 포섭작전 내막 : 해방공간의 김구, 선거도 정부수립도 반대 뉴데일리 2010-08-12 : 간첩 성시백이 김구에게.."장군님도 선생을 대통령으로 모시고자..."
  12. 12.0 12.1 유어만(류위완, 劉馭萬) 중국 총영사의 代電 제119호 : 1948년 4월 20일 - 김구가 장덕수 암살에 연루된 혐의가 적지 않다고 했다.
  13. 13.0 13.1 Kimm Koo refuses to identify Kim Suk Whang, reputed leader of the ten who conspired to assassinate Chang Dok Soo [장덕수 암살사건에 연루된 10명의 용의자에 대한 군사 재판에 출석하여, 김석황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진술하는 김구] 1948.03.15 법정 사진
  14. 《건국 50년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 이철승 박갑동 좌우 거목의 세기적 대담》 (이철승, 박갑동 공저, 계명사, 1998) pp.368~369
  15. 자료대한민국사 제6권 > 1948년 4월 19일 > 김구, 청년 학생들의 북행만류에 비장한 결의 표명 동아일보, 서울신문, 조선일보 1948년 04월 20일
  16. 자료대한민국사 제6권 > 1948년 4월 19일 > 김구 38선을 넘어 북행 서울신문, 조선일보 1948년 04월 21일
  17. 자료대한민국사 제7권 > 1948년 5월 5일 > 남북협상 참석차 북행했던 김구, 김규식 입경 서울신문, 조선일보 1948년 05월 06일, 07일
  18. 전현수 역, 『레베제프일기(1947~1948년)』, 한국연구재단 기초학문자료센터, 2006.
  19. 김영중(金英仲) 편, ≪레베데프 비망록 : 대구, 매일신문 1995.1.1.~2.28. 24회 연재기사 全文: 1947.5.14~1948.12.26 기록≫ (제주, 해동인쇄사, 2016) / (Naver 책 : ISBN 480B170805082)
  20. 신복룡, [광복 70주년 특집 |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 김구와 김일성의 다른 계산 [주간조선 2371호] 2015.08.24
  21. 21.0 21.1 21.2 미군철퇴완료(美軍撤退完了) 어제 최후(最後)로 1600名(명) 이한(離韓) : 자주독립(自主獨立)에 거보(巨步) 한위감시하(韓委監視下)에 인천출항(仁川出港) 1949.06.30 경향신문 1면
  22. 22.0 22.1 22.2 주한미군철퇴완료(駐韓美軍撤退完了)! 미육군성성명서발표(美陸軍省聲明書發表) 1949.07.02 조선일보 1면
  23. 양동안, 1948년의 남북협상에 관한 연구 정신문화연구 2010.06 통권119호 p.39
  24. 刘驭万 维基百科
  25. 刘驭万 百度百科
  26. 백범 모욕한 김일성 주장은 날조 중앙일보 1986.01.10 종합 4면
  27. 김일성에게 속아 대한민국 배반한 김구 [올인코리아] 2008. 2. 20
  28. 김구-김일성의 만남, 몰랐던 이야기들 New Daily 2010-08-17
  29. 김구와 김일성의 다른 계산 남북협상 [주간조선 2371호] 2015.08.24
  30. 레베데프 비망록 p.133
  31. 조경한(趙擎韓)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2. 엄항섭(嚴恒燮, 1898~196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3. 서영해(徐嶺海)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4. 韓獨中執(한독중집)서 金九氏演說(김구씨연설) 平和的 協商希望(평화적 협상희망) 1949.01.18 동아일보 1면
  35. 自主的(자주적)으로 統一成就(통일성취) 1949.01.18 조선일보 1면 : 서울에서 南北協商(남북협상) 開催(개최)하자 韓獨中執(한독중집)서 金九氏 演說(김구씨 연설)
  36. 韓獨中執委會(한독중집위회) 提案宣言等(제안선언등)을 决議(결의) 1949.01.19 조선일보 1면
  37. 政府代辯人談(정부대변인담) 三領首 云々(삼령수 운운) 不當(부당), 協商(협상) 주장은 政治遊戱(정치유희) 1949.01.19 동아일보 1면
  38. 領袖云(영수운)은 不察(불찰) 南北協商(남북협상)이란 말 삼가라 1949.01.19 경향신문 1면
  39. Interview with 2nd Lt. Leonard Bertsch, political advisor for General Hodge. : ◦ Robinson, Aug. 16, 1946 NARA 문서
  40. US-USSR Joint Commission 2nd Year, 1 of 2:p.3 G-2 Weekly Summary 98 (pp.21~23) 여운형 암살, 송진우 암살과 연결되어 있다.
  41. 장덕수 살해사건 제5회 공판 개정 : 1948년 03월 08일 조선일보, 동아일보 1948년 03월 09일
  42. 조소앙#장덕수 암살과 정계 은퇴 위키백과
  43. Mark Gayn, 《Japan Diary》 (William Sloane Associates, 1948) p.433
  44. 이경남(李敬南), 《설산 장덕수(雪山 張德秀)》 (서울, 東亞日報社, 1981) p.329
  45. 《독립을 향한 집념(執念) : 고하 송진우 전기(古下宋鎭禹 傳記)》 (東亞日報 社, 1990년 5월) p.238 에는 당시 이런 발언이 오간 상황에 대한 좀더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
  46. 잡지 선구(先驅) 1945년 12월호 pp.45~51 에 실린 1945.10.10 ~ 11.09 기간에 시행된 정치 지도자에 대한 여론조사
  47. 한국여론협회 조사 발표 (韓國輿論協會調査發表) 초대 대통령(初代大統領) 예상 후보 지지율 동아일보 1946년 7월 23일자 3면
  48. 공동위원회 사업 재개 이후 남․북조선 상황에 대한 정보 1947.06.05 : 스티코프가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수슬로프와, 연해주군관구 사령관 메레쯔코프에게 올린 보고서.
  49. 서영해(徐嶺海)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50. 성시백(成始伯)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51. 조경한(趙擎韓)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