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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김일성 또는 관련있는 이름이 나오는 기록은 너무 많아서 일일이 들기 어려우므로 특색있는 것만 다룬다. [[보천보 사건]]의 주역 [[동북항일연군]] 1로군 [[김일성 (6사장)|6사장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이 아닌 다른 사람이고, 1로군 제2방면군장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이 맞다.
이 시기에 김일성 또는 관련있는 이름이 나오는 기록은 너무 많아서 일일이 들기 어려우므로 특색있는 것만 다룬다. [[보천보 사건]]의 주역 [[동북항일연군]] 1로군 [[김일성 (6사장)|6사장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이 아닌 다른 사람이고, 1로군 제2방면군장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이 맞다.


===초기 빨치산 시절===
===초기 빨치산 시절 1932~1935===
김일성 또는 유사한 이름이 나오는 기록은 많으나 누구인지 신원 확인이 어렵다.
김일성 또는 유사한 이름이 나오는 기록은 많으나 누구인지 신원 확인이 어렵다.



2020년 8월 8일 (토) 14:58 판

북한 김일성과 관련된 해방전 또는 해방 직후의 1차 자료들로는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다. 논란 많은 인물 김일성의 행적에 대한 실체 파악을 위해서는 한국, 일본, 중국, 소련 등에 산재해 있는 조작, 가공되기 이전의 각종 1차 자료들을 가능한 한 많이 발굴하여 종합하는 것이 필요하다.

만주 시절 청소년기

당시 기록

대외 열람이 불가능한 자료이기는 하지만 金日成이 어린 시절 장백에서 학교를 다닐 때 학사기록부가 남아 있다.
현존하는 김일성 관련 최초 기록이나, 열람이 금지되어 내용을 알 수 없다.
"육문학교(毓文學校) 생도(生徒) 김성계(金聖桂)"가 바로 북한 김일성이며, 김성주(金聖柱)를 잘못 적은 것임.
1930년 3월 14일 국민부(國民府)는 산하의 남만한인청년총동맹(南滿韓人靑年總同盟), 남만농민동맹(南滿農民同盟), 남만여자교육회(南滿女子敎育會) 등 3개 단체를 통합시켜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東省朝鮮人農民總同盟)을 조직한다. 이 동맹의 무송(撫松)·안도(安圖) 지방을 담당할 지부동맹조직위원(支部同盟組織委員)으로 김성주(金成柱)가 선출됨.
1930년 6월 27일에 창립된 국민부 소년단(國民府 少年團) 제3분대장 김성주(金成周)는 북한 김일성으로 보임.
이종락(李鍾洛) 등이 1931년 1월 28일 구속되자 조선혁명군 사령부(朝鮮革命軍 司令部)는 와해된다. 3월말경 고할신도 체포되고, 잔존 세력이 세화군(世火軍)을 조직했다는 외사경찰보(外事警察報) 제124호(1932년 11월)의 기사. 1931년 3월 세화군(世火軍)의 군정위원회(軍政委員會) 위원으로 김성주(金成柱)가 나온다.

오가자(五家子)에서의 살인 - 길흑농민동맹사건

정모(鄭某)씨를 살해한 이 사건은 김일성이 1930년말 회덕현 오가자(懷德縣 五家子)에 가서 머물던 시기에 일어났다. 당시 김일성은 최형우가 근무하던 삼성학교(三成學校)를 세운 이만진(李萬鎭)의 집에서 아들 이선일(李善一, 1912~?)과 한 방에 기거했다고 한다. 이선일이 1970년대 초 이명영(李命英, 1928~2000)에게 증언한 바에 의하면 사건의 주범은 김일성이다.[1][2][3]

이선일이 공범이라고 증언한 변달환(邊達煥)·한용서(韓用瑞)·천학진(千學振) 등 3명이 1932년 8월 8일 장춘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 과정이 당시 여러 신문에 보도된 것이 근래 밝혀졌다[4][5][6][7][8][9][10]. 이에 의하면 사건은 음력 1930년 12월 25일 (양력 1931년 2월 12일)에 일어났으며, 피살자는 정원일(鄭元一)이고, 교살 당했다고 하였다. 이 기사들의 내용은 이선일의 증언과 거의 일치하나 다만 신문 기사에는 김일성의 이름은 나오지 않고, 달아난 공범으로 홍종환(洪鍾煥)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선일이 증언할 당시는 이 사건은 현지에서 직접 겪은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일인데다, 증언내용이 당시 신문 기사와 거의 일치하므로 김일성이 주범이라는 그의 증언도 사실일 것이다. 극히 최근에 조선일보 DB가 공개되어 검색해본 결과 이 사건 보도에 김일성 이름이 등장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과살인죄(殺人罪)로구형(求刑) 신의주법원(新義州法院)에서
농민동맹(農民同盟)의 삼명판결(三名判决) 조선일보 1933.02.08 석간2면

조선혁명군 고동뢰(高東雷) 소대 참살 관련 기록

이 사건에 대한 당시 기록은 발견된 것이 아직 없으나, 피살된 고동뢰 소대원 중 한 명이었던 김문빈(金文彬)의 친구이자 당시 김일성과도 알고 지냈던 이시찬(李時燦)의 증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11][12][13][14] 증언에 등장하는 주변 인물들은 1974년 당시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나, 조선혁명군에 고동뢰 소대장이 실제로 있었고, 그가 나오는 마지막 기록은 1932년 2월 상순이라는 것이 확인된다.[15]

김일성은 또한 조선혁명군 심용준(沈龍俊, 1896~1949) 중대의 무기를 훔쳐 달아나기도 했다.[16]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는 김일성이 마치 심용준과 대단한 친분이 있었고, 그가 은퇴한 후에도 자신을 도와주려한 것처럼 장황하게 써 놓았으나 거짓말로 보인다.[17] 심용준은 김일성이 살해한 고동뢰 소대 10명의 직속 상관 중대장이었으므로 김일성을 원수처럼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다.[18]

후일 증언 또는 기록

  • 김일성은 어린 시절 부친 김형직으로부터 김일성 장군과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가짜 김일성 관련 기록과 증언#김형직도 아들들에게 김일성 장군과 같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쳐
p.7 (p.589)에 김일성의 육뮨중학 시기및 1932년 여름까지의 일에 대한 증언이 나옴.

만주 항일 빨치산 시기

이 시기에 김일성 또는 관련있는 이름이 나오는 기록은 너무 많아서 일일이 들기 어려우므로 특색있는 것만 다룬다. 보천보 사건의 주역 동북항일연군 1로군 6사장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이 아닌 다른 사람이고, 1로군 제2방면군장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이 맞다.

초기 빨치산 시절 1932~1935

김일성 또는 유사한 이름이 나오는 기록은 많으나 누구인지 신원 확인이 어렵다.

동북항일연군 1로군 6사장 김일성

1936년 ~ 1937년 기록에 자주나오는 동북항일연군 1로군 6사장 김일성보천보 사건의 주역이나, 북한 김일성이 아닌 다른 사람이다.

동북항일연군 1로군 제2방면군장 김일성

1939년 ~ 1940년 기록에 나오는 동북항일연군 1로군 제2방면군장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이 맞다.

  • 조선총독부 경무국(朝鮮總督府警務局)이 1938년(昭和 13年) 발간한 《최근에 있어서의 조선치안상황(最近に於ける朝鮮治安狀況)》의 1938년 12월말 현재 대안비적현세표(對岸匪賊現勢表)에는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이 임강현(臨江縣, 부하 200 명)과, 무송현(撫松縣, 부하 300 명) 두 곳에 나온다.[21] 2명의 김일성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아마도 1명은 전사한 6사장 김일성이고, 다른 1명은 이후 그와 같은 이름을 쓰던 제2방면군장 김일성으로 보인다. 북한 김일성이 제2방면군장이 된 것은 1938년 11월의 일로 알려져 있다.

김일성 귀순 공작 관련 기록

소련군 시절

북한 김일성이 일본군의 토벌에 쫓겨 1940년 10월 23일 소련으로 도주한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소련과 중국 기록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고, 증언도 있다.

  • 김일성, 안길, 서철이 왕신림에게 올린 보고서 : 1941년 1월 1일
  • 소련서 작성한 이력서
  • 항련 제1로군 약사
  • 적기훈장 수여 관련 문서
  • 주보중의 동북항일유격일기
  • 88여단

동료를 감시, 밀고하는 NKVD 비밀 요원

해방 직후

친인척 관련 기록

부친 김형직

숙부 김형권

외조부 강돈욱

외숙 강진석

김일성 관련 우남위키 표제어

처와 자손 및 가족

관련 인물

각주

  1. 이명영, 진위 김일성 열전 : 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 (10) | 김성주의 살인벽 | 총을 쓰지 않고 타살·교살을 밥먹듯 중앙일보 1974.04.17
  2.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신문화사, 1974) p.135
  3.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권력(權力)의 역사(歷史)》 제2판 (종로서적 1989) pp.303~305
  4. 長春領事館에 逮捕된 ○○단重要人物 신의주검사국에 인도 매일신보(每日申報) 1932년 08월 11일 7면 4단
  5. 朝農同盟事件 卄一日에 公判 新義州地方法院에서 매일신보(每日申報) 1932년 12월 14일 7면 3단
  6. 治維違反及殺人事件最高七年을 求刑 공범二명은 五년과 三년을 구형 判決言渡는 來六日 매일신보(每日申報) 1933.02.02
  7. ○○團員 三名(단원 삼명) 長春領警(장춘령경)에 被逮(피체) 1932.08.15. 동아일보 2면
  8. 農民同盟事件(농민동맹사건) 廿一日 公判(입일일 공판) 1932.12.14. 동아일보 2면
  9. 9.0 9.1 邊達煥等 最高 七年 求刑(변달환등 최고 칠년 구형) 1933.02.01. 동아일보 3면
  10. 密偵殺害(밀정살해)한 農盟員 判决(농맹원 판결) 1933.02.08. 동아일보 3면
  11. 이명영(李命英, 1928 ~ 2000), 《진위 김일성 열전 - 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 <12> 비적두목에 권총사들여 약탈 일삼던 김성주》 중앙일보 1974.04.23 종합 3면
  12. 《진위 김일성 열전 - 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 <13> 양세봉의 관용을 저버린 김성주》 중앙일보 1974.04.24 종합 3면
  13.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列傳)》 (新文化社, 1974) pp.143~145
  14. 國史館論叢 第4輯 > 《조선전사》 現代篇의 分析·批判(許東粲) > Ⅱ. 抗日武裝闘爭史(16〜22권)批判 > 4. 抗日遊擊隊 한국사데이타베이스
  15.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3권 한국독립당 Ⅰ > 기관지 > 『震光』 > 『震光』 제6호(1934년 9월호) : 그리고 同年(1932년) 2月 上旬에 ... 그리고 上 走狗 黃奎淸은 興京縣에서 第3中隊 小隊長 高東雷 一行의 義彈에 銃殺되엿다.
  16. 匪首, 金日成의 生長記 (二) 匪名『金日成』을 襲名 滿鮮日報 1940/04/18, 6면
  17.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7권 19장 2절 : 족제비 사냥군
  18. 조선혁명군 제3중대장 심용준(沈龍俊, 1896~1949) 아래 제1소대장 고동뢰(高東雷) : 1932년 초의 조선혁명군 편성표
  19. 1934년 6월 15일자 간도총영사(間島総領事) 보고서 《 관할구역내 한인의 인민혁명군 `피해` 및 보호에 관한 상황 기타 송부의 건(管內鮮人ノ匪害及保護ニ關スル狀況其他送付ノ件)》 p.7 (0569) : 二. 共匪檢擧狀況 (一○) 明月溝 分署.....共黨遊擊隊員 朱南洙 金日成 兩名...
  20. 東省朝鮮人農民總同盟組織에 관한 件 1930-06-25 일자로 길림(吉林) 주재 일본 총영사(總領事)가 외무대신에게 올린 보고서
  21. 1938년 12월말 현재 대안비적현세표(對岸匪賊現勢表) : 《最近に於ける朝鮮治安狀況 : 昭和8年·13年》 / 朝鮮總督府警務局 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