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
呂運亨
조선인민공화국의 제1대 국가부원수 겸 국가원수 권한대행
1945년 9월 6일 ~ 1946년 2월 2일
기본 정보
본관
함양(咸陽) 여씨
출생일
1886년 5월 25일
출생지
조선 경기도 양근군 서시면 묘곡
사망일
1947년 7월 19일 (61 세)
사망지
미 군정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서 암살됨
본관
함양(咸陽) 여씨
경력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조선건국동맹 위원장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조선인민당 당수
학력
중화민국 난징 금릉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여운형(呂運亨, 1886년 5월 25일 ~ 1947년 7월 19일)은 일제하 공산주의 운동가, 언론인이었고, 해방 후 좌파 노선을 걸은 정치인이다.

생애


자유시 참변 당시 여운형의 역할

자유시 참변 당시 여운형은 이르쿠츠크파 공산당 당 대표였고[1], 참변에 대한 상당한 책임이 있다. 그는 1921년 6월의 참변 발발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이나, 11월 이르쿠츠크에서 열린 참변 당시 러시아군에 체포된 독립군들의 재판에 김규식 등과 함께 배심원으로 참석하여 재판에 정당성을 인정해 준 것으로 비판 받는다.[2]

이 일에 대한 원전은 확인하지 못했으나, 위키백과 김규식(金奎植, 1881 ~ 1950) 항목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3]

1921년 11월부터 여운형, 나용균, 박헌영, 원세훈 등과 함께 장가구에서 자동차편으로 출발, 러시아 이르쿠츠크에 도착하였다. 한파가 닥치지 않아 8일만에 차량으로 몽골 고륜(울란바토르)에 도착, 양털가죽과 낙타 가죽 장화, 모피 등을 구비, 6일만에 마차로 극동공화국(極東共和國)의 수도 우딘스크에 도착했다가 다시 3일만에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12월 이르쿠츠크에 체류 중,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된 독립군들의 재판정에 배심원으로 참석했다. 이들 독립군은 그해 6월에 자유시 참변 당시 생포된 독립군들과 백러시아군에 가담해서 활동하던 조선인 등으로, 이들에게는 유형과 징역 등의 처분이 내려지는 것을 목격했다.

김규식(金奎植)은 반공주의자로 알려져 있으나, 저 무렵에는 공산주의자들과 같이 행동하기도 했다. 해방 후 미군정은 이승만, 김구 등 반공적인 우파들은 배제하고, 온건한 우파 김규식과 좌파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좌우 합작 정부를 추진했는데, 두 사람 모두 자유시 참변 당시 행적이 논란된다.

친일 논란

친일사전에 없는 여운형, 친일행적 또 드러나 : 친일 잣대에 형평성 논란 정진석 교수 자료 3건 공개 동아일보 2009-12-16
〈대동신문〉의 여운형 진술서는 1943년 2월 6일 일본인 검사 스기모토(杉本寬一)에게 제출된 것으로 "나는 조선민족의 관념을 완전히 청산하고 적신(赤身)으로 되여서 총독의 명령에 복종하야 당국에 협력하야서 국가를 위하야 활동하랴고 생각함으로서 좌(左)에 맹세합니다"라고 썼다. 진술서 끝에는 "포연탄우 속에 문필도 보답하고(砲煙彈雨又經筆)/나라 위해 젊은 목숨 바치기를 청하네(爲國請纓捨一身)/천억(千億·일본이 중심이 된 동양)이 결성하여 공영을 이루는 날(千億結成共榮日)/태평양 물에 전쟁의 티끌을 씻으리(太平洋水洗戰塵)"라는 자작 한시를 덧붙였다.[4][5]
또 일제 패망 후 서울에 진주한 미군사령부 정보참모부는 1945년 9월 12일자로 작성한 비밀문서 〈G-2 Periodic Report〉에서[6] 여운형은 "한국인들 사이에 친일파로 널리 알려진 정치가"이며 "조선총독으로부터 거금 (아마 2000만엔)을 받았다"고 지적했다. 1950년 11월 유엔군이 노획한 조선공산당 문서도 그를 "변명할 이유가 없는 친일분자" 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아래 정진석 교수의 글에는 여운형의 친일 논란과 관련한 여러 이슈에 대해 종합적인 검토를 하고 있다.

2009년 11월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장지연의 이름이 올랐다. 이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작성한 친일 반민족 행위 결정 내용을 담은보고서 명단에서는 장지연의 이름이 빠졌다. 장지연의 친일 여부가 아직까지 논란의 대상임을 보여준다. 반면 곳곳에서 친일 행적이 확인되고 있는 여운형은 검토 대상조차 아니었다. 어떤 시각으로 어디까지 보느냐에 따라 판단이 다를 수 있다. 친일과 항일의 무게를 제대로 따지지 않으면 억울한 피해자를 낳을 수 있다.
정진석 교수 '전쟁기의 언론과 문학'에서 지적
우리나라 언론사를 평생 연구해온 정진석 한국외대 명예교수는 신간 '전쟁기의 언론과 문학'에서 "여운형도 친일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정 교수는 조선인 학생의 일본군 입대를 선동한 '반도학도 출진보'에 실린 여운형의 글을 그 근거로 제시했다.[7]

'반도학도 출진보'는 경성일보사가 1944년 2월에 발행한 책으로, 여운형·안재홍·친일문학단체 문인보국회 등이 경성일보에 기고한 글이 실려 있다.


정 교수에 따르면 여운형은 "나는 지금 결연히 일어나 2천500만 동포와 고난을 같이하고 조선을 위해서, 일본을 위해서 대동아를 위해서 미력이지만 여생을 전부 바치겠다고 맹세하는 바이다."라는 내용의 글을 썼다.

정 교수는 "여운형이 진심에서 우러나와 이 글을 썼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면서 "하지만 이 글이 여운형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실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변명의 여지도 없이 친일의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장지연과 여운형의 행적을 비교했다.

그는 장지연에 대해서는 작은 흠이라도 없는지 낱낱이 찾아내 단죄하는 자세를 취하면서도 여운형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 정도가 아니라 대한민국 최고의 훈장을 줘야 한다고 추켜세운다면 형평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일생에 '친일'과 '항일'이라는 상반되는 행위가 있었을 경우 어느 쪽이 더 무거운가를 비교해서 평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여운형의 친일 근거 문헌

아래의 여러 여운형 친일 행적 자료중 1946년 2월 대동신문(大東新聞)의 기사 2건은 발행인 이종형(李鍾滎)이 친일 극우 인사이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을 많이 한다. 그러나 기사에 나오는 검사 스기모토 칸이치(杉本寬一)와 서기 이가주신(李家柱臣)은 실제로 당시에 그러한 직위에 있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특히 이가주신(李家柱臣)의 본명은 이주신(李柱臣)으로 해방 직후 1945년 11월 24일자로 경성지방법원 검사로 발령받아 활동한 것이 확인된다. 대동신문 기사는 검사 이주신(李柱臣)으로부터 얻은 정보에 근거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직 검사가 당시 정치적 거물인 여운형에 대해 거짓 정보를 함부로 흘리고 다녔을 가능성은 없으므로 기사 내용은 사실로 보인다. 사실이 아니라면 신문사가 현직 검사를 실명으로 거명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해방 직전 소련의 대일전 참전 저지를 위해 노력

여운형은 조선 총독부나 일본의 고관들을 많이 알고 지냈다고 한다. 독립운동 한다는 사람이 일본 고관들과 친했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때로는 특정한 일을 해 달라는 그들의 부탁을 받기도 했는데, 당연히 일본을 위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해방직전인 1945년 7월 일본 수상의 부탁으로 모택동을 찾아가서 만나 스탈린이 일본전에 뛰어들지 말고 중립을 지키도록 설득해달라고 요청하러 간다고 했다. 그가 실제로 모택동을 만나러 갔는지는 좀더 확인이 필요한 것같지만, 여운형은 당시 일본을 위해서도 활동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呂運亨(여운형)과 가까이 지내던 崔容達(최용달)이 政界一線(정계일선)에
그보다 두달전 六월 어느날 내집에 들른 최용달(崔容達)군은 七월 초순 여운형(呂運亨)씨와 함께 모택동(毛澤東)을 만나러 연안(延安)으로 갈 계획임을 나한테 이야기한 일이 있었다. 불리한 전세(戰勢)에 몰린 일본수상(日本首相) 「스즈끼」(鈴木貫太郎)가 여운형 씨에게 「친서(親書)」를 보내어 모택동(毛澤東)을 만나달라는 부탁을 해왔는데 그길에 최(崔)군이 동행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모(毛)를 만나는 목적은 일본(日本)의 대미영전쟁(對美英戰爭)에 소련(蘇聯)이 끝까지 중립(中立)을 지키도록 (참전(參戰)하지 않도록) 「스탈린」을 움직여달라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성공할 가능성이 없는 일이 아니겠느냐고 그때 나는 즉각 나의 의견을 말했던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는 것보다는 차라리 미영(美英)을 설득(說得)하여 소련과의 동맹(同盟) 관계를 파기(破棄)케하고 일본(日本)과 합작(合作)하여 소련를 치도록 하는 편이 도리어 가망이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 그때 나의 관측이었다.
그러나 최(崔)군은 미영(美英)의 민주주의(民主主義) 옹호의 결심(決心)은 굳은 것이어서 일본(日本)과의 합작(合作)은 불가능한 것이라 말하고 그 본보기로 그해 四월 「히틀러」가 패망할 때 자기의 진짜 적(敵)은 미영(美英)이 아니라 소련이라고 최후순간까지 외쳤는데도 불구하고 미영(美英) 측은 끝내 그것을 묵살하고 「히틀러」 공격의 손을 멈추지 않았던 일을 들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눈후 최(崔) 군은 고향(양양)을 잠깐 다녀와서 연안(延安)으로 떠날 것이다 하였는데 그후 다시는 그를 만나지 못한채 八ㆍ一五 해방(解放)을 맞이한 것이었다.

해방 직후의 정치 행보

미군정의 1946년 8월 16일자 기록[10]에 의하면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呂運弘, 1891~1973)이 어느 파티에서 약간 술이 올라 한 발언이 나온다. 해방 전일인 8월 14일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가 여운형을 불러 일본이 항복하니 정권인수를 하겠느냐는 말에 응하였다. 아베는 처음에는 송진우에게, 두번째는 안재홍에게 제의했다 거절 당하고, 세번째로 여운형에게 의향을 물었는데, 그는 즉시 승락하고 동생 여운홍과 함께 송진우 등 극좌파와 거리가 먼 다수의 사람들을 포함한 조직을 꾸렸다. 하지만 이튿날인 8월 15일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 (遠藤柳作)가 미군은 부산과 목포지역만 점령할 것이라고 말하자, 여운형은 즉시 소련이 받아들일만한 공산주의자와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로만 조직을 다시 꾸렸다고 하였다. 공산주의자이면서 기회주의적인 여운형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진술이다.

건국준비위원회조선인민공화국

신탁통치 반대에서 찬성으로 선회

여운형은 신탁통치안이 처음 알려진 1945년 말에는 반탁을 주장하였으나[11] 소련의 지시를 받았는지 1946년 1월 2일 새해 벽두부터 찬탁으로 돌아섰다.[12]

1월 14일에는 탁치문제로 대중이 분열한 죄과는 자신에게 많다며 지도자 자리를 물러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13]

친소 친북 좌파 노선의 정치 활동

해방 후 그의 정치적 행보를 보면 남한에서 활동하면서도 미국보다는 소련에 더 가까운 행동을 보였고, 이승만, 김구보다는 김일성을 더 신뢰했다.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과 앙숙의 관계였던 것만 제외하면 해방 후에도 거의 공산주의자에 가까운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은 박헌영은 포기하고, 여운형을 소련 및 김일성과 분리시켜 김규식과의 좌우 합작을 추진했으나 여운형의 피살로 수포로 돌아갔다.[14][15] 여운형과 김규식의 좌우합작에는 버취(Leonard M. Bertsch) 중위가 깊이 관여하였다.[16] 그는 하버드 대학 출신으로 변호사 자격을 가지고 있어 계급에 비해 중요한 일을 맡았다. 미국에 돌아가서도 자신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중위였다고 말하고 다녔다 한다.[17][18]

여운형은 소련과 북측에 온갖 제안을 하며 반탁을 빌미로 이승만김구의 제거까지 논의하고 있다. 여운형 본인도 처음에는 반탁을 주장해 놓고서는 소련의 지시를 받았는지 1946년 벽두부터 찬탁으로 돌아섰다.

여운형과 김일성의 비밀 회동

전 노동당 간부 박병엽(朴炳燁, 1922 ~ 1998)은 여운형이 비밀리에 여러 차례 방북하여 김일성과 회동한 사실에 대해 증언하였다.[19]

박병엽 구술; 유영구, 정창현 엮음,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 전 노동당 고위간부가 본 비밀회동》(선인출판사, 2010.11.10.)

제2장 김일성과 여운형의 비밀회동
제1차 회동 (1946년 2월 10일~11일)
제2차 회동 (1946년 4월 17일~ 25일)[20]
제3차 회동 (1946년 7월 31일)
제4차 회동 (1946년 9월 23일~ 30일)
제5차 회동 (1946년 12월 28일 ~ 1947년 1월 10일)

1947년 여운형의 피살 이전 활동

위의 날짜들이 정확한지는 검증이 필요할 수도 있으나, 여운형이 자주 비밀 방북을 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인민당의 설국환[21]은 1946년 5월의 인터뷰에서 여운형이 3월이나 4월에 두번째로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 김두봉 등을 만났으며, 첫번째 방문은 작년 가을이라 하였다.[22] 소련측 문건에 여운형이 1946년 9월말 평양을 방문했다고 나오므로 제4차 회동은 시기가 맞는 것으로 보인다.[23][24] 그의 1946년 9월말 방북에 대해 미군정은 여운형이 박헌영과의 경쟁에서 김일성의 지지를 얻기 위해 평양으로 갔다고 적었다.[25]

스티코프 일기 번역본[26] 말미에는 1946년 9월말 여운형의 방북과 관련하여 다음 두 건의 기록이 나온다.

여운형은 조성된 정세와 관련하여 남조선 좌익이 어떠한 정치노선을 취해야 하는지 조언을 얻기 위해 북에 온 것이라고 김일성에게 말했다고 한다. 이를 보면 여운형의 행동은 소련군정과 내통하여 미군정과 남한 우익에 대적하는 수준이다.


뿐만 아니라 여운형은 김일성 및 소련 군정 측 인사들과 밀서도 자주 주고 받았다.[27] 그의 비서였던 이기건(李奇建, 1919년 ~ ?)은 김일성이 평양에 와서 대중앞에 갓 출현한 1945년 10월에 여운형이 김일성에게 보내는 밀서를 평양으로 가서 전달했다고 증언했다.[28] 다른 사람들은 김일성이 왔는지도 잘 모를 때이고, 곧 이어 그가 가짜라는 말이 퍼지기 시작하는데, 여운형은 당시에 벌써 김일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편지를 배달한 이기건은 보천보 사건 당시 김일성을 도운 일 때문에 서대문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해방 후 풀려나 북한에 나타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의 김일성인 줄로 알고 그를 만나러 평양으로 가는 박금철(朴金喆, 1912~1967?)과 동행하여 같이 김일성을 만났는데, 두 사람이 만나서 하는 대화가 서로 전혀 모르는 사람 같아서 둘 중 한 명은 가짜라 느꼈다고 했다. 이 증언은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가장 강력한 증거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당시 여운형은 무슨 수로 김일성을 알고 재빠르게 밀서까지 보냈는지 의문이다.

1946년 8월 7일, 동대문 경찰서에서 인민당 정치부장 김세용(金世鎔)의 집을 수색하여 얻은 물품 목록에는 김일성이 여운형에게 보내는 7월 18일자 편지도 들어 있었다.[29]


딸들을 북한에 보내

그는 미군정이나 남한 우파들보다는 김일성과 소련군정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고, 테러 위협이 있다는 핑계로 딸 여연구(呂鷰九, 1927~1996), 여원구(呂鴛九, 1928~2009) 등을 북한으로 보내기도 했으나, 왜 자신은 월북하지 않고 남한에 계속 남아있었는지 의문이다. 북한에는 김일성의 위치가 거의 확고해져 자신이 활동할 공간이 별로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북한의 딸 여연구가 1994년 7월 28일 재미 언론인이었던 문명자(1930 ~ 2008)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에 의하면 그녀는 1946년 이화여대 2학년 때 학생운동을 하다 부친의 권고로 동생 원구와 함께 북한으로 갔으며, 7월 3일 김일성의 집에 도착하여 한동안 김일성 부부의 집에서 기숙하다 소련 유학을 갔다고 했다.[30] 이후 여운형의 딸들은 북한에서 고위직들에 오르며 최고의 대접을 받았다.


암살

여운형은 1947년 7월 19일 암살 당했는데, 범인은 잡혔으나 배후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31] 좌우파 모두 배후로 거론된다. 장례식은 8월 3일 거행되었다.[32]

피살 당시 그가 들고 있었던 가방 속에서 김일성김두봉(金枓奉)에게 보내는 1946년 11월 16일과 11월 30일자 편지(사본)가 발견되었다.[27]


p.3 : G-2 Weekly Summary #98 (pp.21~23) : Comments on the political situation - Lyuh Woon Hyung's Murderer links Assassination with that of Song Chin Woo 1947.07.31
여운형 암살, 송진우 암살과 연결되어 있다. 한지근이 자기는 송진우 암살에 연루된 한현우가 이끄는 그룹에 속해 있었다고 실토.
번스(Arthur C. Bunce) - 김일성 대담 (1946년 10월, 평양)

김일성 : 좌우통합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우선 민주·진보주의자들을 테러하는 친일 분자들을 당에서 축출해야 한다. 강량욱 목사(김일성의 외조부 뻘로 당시 북조선 임시인민위 서기장)의 아들·딸을 테러분자들이 죽였다(46년 3월). 이 테러분자들로부터 김구의 사인이 있는 문건이 나왔다. 또 남조선에서 좌우익 통합문제를 협의한 후 테러단들이 여운형을 나무에 걸어 교수시키려다 실패하기도 했다.
(당시 좌우합작위 우측 비서였으며 현재 민족통일촉진회 최고위원인 송남헌(宋南憲, 1914~2001)씨는 박헌영 진영 청년들이 서울 신당동 친지 집에 있던 여운형을 높이 10m의 나무에 매달아 죽이려다 실패했었다고 증언했다.)

번스 : 그 테러 미수사건의 배후는 좌익 진영이다. 특히 박헌영이 좌우 통합을 방해하고 있다.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하』(중앙일보사, 1993), PP. 244-248.

피살 직전 미군정에 제출한 청원서

여운형이 피살 직전인 1947년 6월 미군정에 제출한 청원서에는 한반도 임시정부 설립을 위한 미소공동위원회에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에 반대하거나 부분적으로만 동의하는 정치세력의 참여는 불허할 것을 건의하고 있다. 반탁을 주장하는 김구, 이승만, 한민당 등 우파 세력은 모두 배제하고 좌파들로만 임시정부를 구성해야한다는 청원이다. 소련과 북한의 주장과 동일하다.

49. Proposals concerning selection of political parties and social organizations to be consulted by the Joint Commission : 비망록 / Lyuh Woon Hyung Chairman Laboring People's Party Seoul Korea 발신 ; Brwon General 수신, 1947.06.17

미군정기 여론조사 지지율

해방 직후 미군정기에 대통령 예비 후보자들에 대한 아래와 같은 3건의 여론조사가 있었는데, 이승만에 대한 지지가 압도적이었다.

  • 잡지 선구(先驅) 1945년 12월호 pp.45~51 에 실린 1945.10.10 ~ 11.09 기간에 시행된 대통령 후보에 대한 여론조사[33].
    설문지에 직접 기명하는 방식이었으며, 배포한 1957매 중 투표한 매수 978매이며, 응답률은 50.0% 였다.
    이승만 431표 (44.1%), 김구 293표 (30.0%), 여운형 78표 (8.0%), 무기록 176표 (18.0%)

  • 한국여론협회(韓國輿論協會)가 1946년 7월 시행한 초대 대통령 후보에 대한 여론조사[34]
    종로4가 등 3개소 행인 6,671인을 대상으로 조사
    이승만 1916인 (28.7%), 김구 702인 (10.5%), 김규식 694인 (10.4%), 여운형 689인 (10.3%), 박헌영 84인 (1.3%), 기타 110인 (1.6%), 모르겠다 2476인 (37.1%)

  • 미군정청 홍보처가 1947년 5월 서울에 거주하는 1,000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대통령 후보자에 대한 여론조사[35]
    이승만 43.9%, 김규식 18.5%, 여운형 17.5%, 김구 15.2%, 허헌 1.3%, 조소앙 1.3%, 김원봉 0.9%, 김성수 0.7%, 박헌영 0.4%

참고 자료

  • The Passing of Lyuh Woon Hyung : 여운형 피살 당시 미군정청이 작성한 여운형의 일대기
Information on Korean Leftist, US-USSR p.7 Lyuh, Woon Hyung:비망록 / p.8 The passing of Lyuh Woon Hyung:기록자료 / p.18 A few thumbnail sketches:기록자료 : 여운형
RG 332, 332.3 Records of U.S. Army Organizations in Pacific Theaters, 1941-48, Records of the Historical Section of the Intelligence Division (G-2) of HQ, USAFIK, XXIV Army Corps, 1945-48,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XXIV Corps, G-2 Historical Section, 1945-46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pp.2~11
  • Lyuh Woon Hyung : 미군정청이 기록한 1945년 9월 ~ 1947년 5월 24일 기간 여운형의 행적
“지상에선 신사(紳士), 지하에선 투사(鬪士)”
일제의 탄압과 회유 속에서도 절조 유지하면 독립운동…극좌 노선에 반대

함께 보기

각주

  1. 이주천, 제6주제: 해방전 한인 공산주의 운동의 시작 ―러시아와 중국을 중심으로― 1997/9/27 선택지 11월호 원고
  2. 뱅모, [세뇌탈출] 393탄 - 정신차려! 황교안! - 1부 (2019.04.02) : 18분경부터 자유시 참변과 관련한 여운형의 행적에 대해 나옴.
  3. 김규식(金奎植, 1881 ~ 1950) : 위키백과
  4. 4.0 4.1 反省한 呂運亨의 告白 대동신문(大東新聞) 1946년 2월 17일
  5. 5.0 5.1 反省한 呂運亨의 告白 (속) 대동신문(大東新聞) 1946년 2월 18일
  6. 6.0 6.1 G-2 Periodic Report, 9/8 - 10/31/45 p.9 : 1945년 9월 12일자
  7. 7.0 7.1 『반도학도출진보(半島學徒出陳譜)』 : 경성일보사(京城日報社) 1944년 3월 국립중앙도서관
  8. 《文壇三十年의 자최 (十一)》 / 金東仁 『신천지(新天地)』 제4권 제6호 (1949년 7월, 서울 : 서울신문사) pp.148-152 : 국립중앙도서관
  9. 《文壇三十年의 자최 (十一)》 / 金東仁 『신천지(新天地)』 제4권 제6호 (1949년 7월) pp.148-152 : 국회도서관
  10. Interview with 2nd Lt. Leonard Bertsch, political advisor for General Hodge. : ◦ Robinson, Aug. 16, 1946 NARA 문서
  11.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9일 > 인공 중앙인민위원회, 탁치배격담화 발표 서울신문 1945년 12월 29일
  12.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6년 01월 02일 > 인공 중앙인민위원회, 3상회의 결정 지지 전문 보냄 조선일보 1946년 01월 04일
  13. 託治問題로 大衆分裂 罪過는 나 自身에 만타 指導者의 자리를 물러나겟다 呂運亨氏談 동아일보 1946년 01월 16일 석간 1면 5단
  14. Summary of Political Events in Korea p.26의 Hodge가 김규식에게 보낸 1946년 9월 18일자 편지부터 나오는 문건들
  15. 金·呂 양씨에 서한, 하지중장 좌우합작에 기대 <자유신문> 8월 28일자
    合作努力(합작노력)에큰關心(관심) 하將軍(장군)·金呂両氏(김려양씨)에親書(친서)[肖] " <동아일보> 1946년 08월 28일 석간 01면
  16. American Members of the Political Advisory Group of the US-USSR Joint Commission Attending the Commission Meeting at the Duk Soo Palace[덕수궁 석조전에서 개최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정치고문단의 미국측 인사들 : 1947.06.15] 사진의 오른 쪽에서 두번째가 Bertsch 중위
  17. 신복룡, [광복 70주년 특집 |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 여운형의 공명심 비극적 죽음 자초 허약한 김규식은 스스로 무너져 [주간조선 2359호] 2015.06.01
  18. Bertsch Papers, Harvard-Yenching Library at Harvard University / 하버드 대학교 하버드-옌칭 도서관 버치 콜렉션에 대하여 Harvard-Yenching Library at Harvard University
  19. 박병엽 구술; 유영구, 정창현 엮음,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 전 노동당 고위간부가 본 비밀회동》 : (선인출판사, 2010.11.10.)
  20. 미군정 문서에는 여운형의 방북 기간이 4월 19일~4월 25일로 나옴. The Political Adviser in Korea (Langdon) to the Secretary of State Seoul, May 14, 1946.
  21. [부고] 원로 언론인 설국환씨 중앙일보 2007.06.23 종합 29면
  22. US-USSR: Communism in South Korea (General Headquarters, Far East Command, Supreme Commander Allied Powers, and United Nations Command) p.201
  23. 해외사료총서 10권 쉬띄꼬프일기 > 쉬띄꼬프 일기(번역) > 쉬띄꼬프 일기 Ⅰ부 > 1946년 9월 24일
  24. 노동당 대회 결과 보고 - 남조선노동당 결성 과정 및 11월 22~24일 개최된 노동당 창당대회에 관한 보고; 지도부 성원 명단 및 지방조직.
  25. Summary of Political Events in Korea p.30
  26. 해외사료총서 10권 쉬띄꼬프일기 국사편찬위원회 2004년 12월 30일
  27. 27.0 27.1 방선주(方善柱, 1933~ ), 「美國 第24軍 G-2 軍史室 資料 解題」 『아시아文化』 3호 (翰林大學校 아시아文化硏究所, 1987) 중 p. 192 및 자료 C (pp.214~234) : G-2 는 한국에 진주한 미 24군의 정보참모부를 말함.
  28. 南北(남북)의 對話(대화) <47> 괴뢰金日成(김일성)의 登場(등장) (6) 1972.01.27 동아일보 4면
  29. 문명자(1930 ~ 2008), US-USSR: Communism in South Korea (미군정문서) p.177
  30. 문명자(1930 ~ 2008),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여연구 인터뷰 : 김일성 김정숙 부부와의 추억 월간 말 1994년 9월호 pp.44~46
  31. RG 9, Radiograms, Microfilm No. 246-253, 주한미군의 남한 사정에 대한 보고서 (35) p.131 Lyuh Woon Hyung's Death 1947.07.19 / p.154 Lyuh Woon Hyung's Death 1947.07.20 / p.161 Assassination of Lyuh Woon Hyung 1947.07.21 / p.200 Korean Police Arrested Assassin of Lyuh Woon Hyung 1947.07.26
  32. RG 9, Radiograms, Microfilm No. 246-253, 주한미군의 남한 사정에 대한 보고서 (39) p.22 Funeral of Lyuh Woon Hyung 1947.08.04
  33. 잡지 선구(先驅) 1945년 12월호 pp.45~51 에 실린 1945.10.10 ~ 11.09 기간에 시행된 정치 지도자에 대한 여론조사
  34. 한국여론협회 조사 발표 (韓國輿論協會調査發表) 초대 대통령(初代大統領) 예상 후보 지지율 동아일보 1946년 7월 23일자 3면
  35. 공동위원회 사업 재개 이후 남․북조선 상황에 대한 정보 1947.06.05 : 스티코프가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수슬로프와, 연해주군관구 사령관 메레쯔코프에게 올린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