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6.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에 선전포고 없는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일어난 전쟁이다.
원인
김일성의 적화통일 야욕
김일성은 1946년 8월 15일 해방 1주년 기념사에서 이미 남한에 대한 적화통일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었다.[2] 이는 그가 인민의 선택과 무관하게 소련의 앞잡이가 되어 북조선임시인민위원장으로 발탁된 시기부터 전쟁으로 남한을 적화통일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이후 1948년의 김구와 김규식 등이 참석한 남북협상 따위는 진심이 결여된 남한 정국을 혼란시키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소련, 중국과의 결탁
6.25 전쟁(외국에서는 한국 전쟁으로 불리고 있다)은 북조선의 야욕으로 발발하였으며, 구 소련 스탈린과 중화인민공화국 모택동의 지원을 약속(김일성은 소련의 지원이 충분하므로, 중국 공산당의 지원은 받지 않겠다고 말했음) 받고 일으킨 남침이며, 이 설명은 대한민국과 미국의 기록, 공개된 구 소련의 비밀문서를 통해 증명되었다. 소련공산당의 니키타 흐루쇼프 전(前)서기장은 그의 회고록에서 한국 전쟁은 김일성의 계획과 스탈린의 승인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을 밝혔다.
결국 구 소련 비밀문서의 공개에 따라 조선인민군의 남침은 김일성이 주도한 것으로 밝혀졌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원을 약속받은 것도 김일성이라는 것이 밝혀져 내란확전설, 이승만 주도설 등은 거짓말로 밝혀졌다.
폐쇄적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산주의 체제의 특성, 참전자 증언, 구 소련의 공개된 문서를 고려할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주장하는 이승만 북침설은 설득력이 없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 대한민국과의 수교 이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장인 북침설을 공식적으로 동의하였으나, 최근의 경제개방과 대한민국과의 수교 이후에는 남침설을 정설로 인정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1996년 7월에 한국 전쟁의 기록을 대한민국의 북침에서 북한의 남침으로 수정하는 역사 교과서 개정을 하였다.
소련의 붕괴 이후 베일에 싸여 있던 한국 전쟁 관련 비밀 문서가 공개된 이후, 한국 전쟁의 원인은 남조선로동당 박헌영의 설득을 받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이 대규모의 대한민국 침입을 계획하고 스탈린의 재가를 얻어 개시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과정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 승인 요청을 무려 48번이나 거절하고[4][5][6] 전방 위주의 게릴라전만 허용했지만 김일성의 강력한 의지를 꺾을 수 없어서 결국 스탈린은 남침을 승인하고 말았다. 미국의 사회학자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스탈린이 훨씬 더 깊이 개입해 있었다고 한다. 영국 정보기관에서 나온 문건에 따르면,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미국은 대한민국을 지켜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거짓으로 밝혀진 음모론들(남침유도설)
남침 유도설에는 여러 형태가 있으나 대표적으로 아래의 두 가지를 소개한다. 남침 유도설은 미국 시카고 대학의 브루스 커밍스 교수와 그 외에 다른 학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으나 이는 명백한 거짓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불순한 의도에서 국내외에서 끊임없이 남침유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미 공모설
이승만의 제1공화국의 북진 통일론이 대남 도발을 촉진시켰다는 설이다. 이승만은 여러 차례 무력 북진 통일을 부르짖었으며, 미국의 군사 원조를 공공연히 요청한 바 있다. 실제로 1950년대 초부터 남북은 경쟁적으로 군비를 증강시키기 시작했고, 미국이 국군을 강화시키면 이승만이 무력통일을 추구할 것이라고 판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예방적 조치를 취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한미공모설은 위 항목에 관련된 구 소련의 문서공개로, 제시된 적 있는 가설로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2010년 6월, 56년만에 공개된 CIA 극비 문서에서 한국 전쟁 발발 불과 엿새전인 6월 19일, 북한의 남침가능성이 낮게 평가한 보고서를 작성하였고 북한이 소련의 철저한 위성국가로 독자적인 전쟁 수행능력이 전혀 없다고 보고 있었다.
애치슨 라인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딘 애치슨이 발표한 미국의 극동방어선이었던 애치슨 라인이 6.25 전쟁의 원인으로 이야기되는 경향이 최근까지도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김일성은 분단 직후부터 꾸준히 남침을 원했으며 스탈린과 김일성이 공모하여 남침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애치슨 라인은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전개
북한의 기습남침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경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대한민국을 기습남침하여 전쟁이 발발했다.
낙동강 방어선
인천상륙작전
- [단독] '인천상륙작전' 1945년 미군 보고서가 결정적 MBN 2020.06.25
중공군 참전
1.4 후퇴
교착상태
명칭
해외에서는 한국 전쟁으로 부르고 북한에서는 조국해방전쟁으로 부른다. 우리는 그렇다면 독립 전쟁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1차 중동전쟁을 독립전쟁으로 부르듯이
전쟁의 피해
- 배진영, [특별기획]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代 紙上 戰犯재판 : 金씨 3代는 국제형사재판소에 보내야 할 범죄자들 월간조선 2019년 6월호
- 한국전쟁 피해 통계집(韓國戰爭被害統計集) (國防軍史硏究所 1996) : pdf 파일
- 한국전쟁 피해 통계집(韓國戰爭被害統計集) (國防軍史硏究所, 1996) 국립중앙도서관
좌익세력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 수는 12만 9천명
- [특별기획]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代 紙上 戰犯재판 : 金씨 3代는 국제형사재판소에 보내야 할 범죄자들 월간조선 2019년 6월호
- (6·25전쟁 전후) 북한군 등 적대세력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 조사연구보고서 : 민간인 학살을 중심으로 / 집필: 신승원, 손석현, 최윤철 (서울 :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13)
잊혀진 국군포로 6만명
- 북한에서 태어나 한국으로 온 국군포로 자녀들은 정부와 사회의 무관심에 특히 분개한다. "국군 포로 자식으로 딸로 살아내느라고 수고했다고 와서 잔등이라도 한번 쓸어주면 덧나나요." 최 씨는 말했다. "김일성대를 졸업한 탈북민만 보면… 온 대한민국이 어쩔 줄 모르는데, 북한에서 자기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운 그 불쌍한 병사의 딸은 들여다도 안본다는…." 이때부터 최 씨의 언성이 높아졌다. "저 여기 군인들 보면 말해요. 너희 군대 절대 가지마라고… 전쟁 일어나면, 포로되면, 우리 아버지처럼 또 아오지 탄광 간다고. 너희 젊은 사람들은 도망치라고, 전쟁나면." 최 씨는 최근 다시 논란이 된 위안부 문제에 빗대 이렇게 덧붙였다. "종군위안부 문제요, 나라가 없을 때 가장 연약한 여인들이 겪은 문제에요… 그 상처에는 지금 다치면 피고름이 나오고, 나라가 있으면서 북한 땅에 가서 이 나라 젊은이들(국군포로)이 당한 그 상처에는 지금도 다치면 선지피가 콸콸 쏟아진다고."[7][8][9]
외부 링크
- Kathryn Weathersby, The Korean War Revisited Wilson Quarterly Summer 1999
- 강규형, [2010, 인물로 다시 보는 6·25] [1] 전쟁 배후조종한 스탈린 조선일보 2010. 6. 21
- 김영호, [2010, 인물로 다시 보는 6·25] [2] 자유세계 지켜낸 트루먼과 맥아더 조선일보 2010. 6. 22
- 오규열, [2010, 인물로 다시 보는 6·25] [3] 전쟁을 부추기고 이용한 모택동 조선일보 2010. 6. 23
- 김기철 기자, [2010, 인물로 다시 보는 6·25] 중공軍, 휴전후에도 北 잔류… "점령군처럼 행동" 비판받아 조선일보 2010. 6. 23
- 이지수, [2010, 인물로 다시 보는 6·25] [4] "이 자식아, 전쟁지면 너도 책임있어" 김일성, 박헌영에 잉크병 집어 던져 조선일보 2010. 6. 24 종합 A08면
- 차상철, [2010, 인물로 다시 보는 6·25] [5] "유엔군 철수하면 北進" 압박하자 美, '비상시 이승만 감금' 검토 조선일보 2010. 6. 25
6.25 관련 참고 서적
- 6.25 전쟁사 제1집 - 전쟁의 배경과 원인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2004) : 북한의 군대 창설 과정이 자세히 나옴.
- 천젠(Chen Jian), 캐스린 웨더스비(Kathryn Weathersby), 션즈화(Shen Zhihua), 밀턴 라이텐버그(Milton Leitenberg) 지음 | 오일환, 이연식, 방일권 (편역) 옮김, 《한국전쟁의 거짓말 :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의 불편한 동맹》 전쟁과 평화 학술총서 Ⅲ-Ⅰ (채륜, 2018년 11월 20일)
- John Toland (1912~2004), In Mortal Combat : Korea, 1950~1953 (New York , William Morrow & Co, 1991)
- 존 톨랜드의 6·25전쟁 (전 2권) 존 톨랜드 지음 | 김익희 옮김 | (바움, 2010.06.10) | 1권 436쪽, 2권 468쪽
- Torkunov, Anatoly Vasilievich, The War in Korea 1950 - 1953: Its Origin, Bloodshed and Conclusion (Tokyo : ICF Publishers, 2000) 192 p.
- 토르쿠노프 저, 구종서 역, 한국전쟁의 진실과 수수께끼 (서울 : 에디터, 2003) 중앙일보 2003.06.27 5면
- 트루먼과 스탈린의 한반도 게임 비사
6.25 관련 원천 사료
- 6.25 전쟁 관련 기록물 국가기록원
- 전쟁기념관
- 인천상륙작전 기념관
- <러시아 외무부 한국전관련문서 요약> 1. 전쟁발발과 휴전 중앙일보 1994.07.21 종합 4면
- <러시아 외무부 한국전관련문서 요약> 2. 김일성 전쟁준비 보고 중앙일보 1994.07.22 종합 35면
- <러시아 외무부 한국전관련문서 요약> 3. 蘇.中비밀방문,병력배치 중앙일보 1994.07.23 종합 30면
- <러시아 외무부 한국전관련문서 요약> 4. 끝 중앙일보 1994.07.24 종합 30면
- [단독] 김일성이 마오쩌둥에 보낸 ‘6·25전쟁 파병요청’ 친필편지보니… 동아일보 2019-09-25
- 마오쩌둥에게 “우리 자체 힘으로 (패전) 위기 극복 가능성 없다”고 매달려
- 마오쩌둥의 파병 초안, 형식은 지원군이지만 정규군 파견 드러나
- 정전협정에 “중국 인민 항미원조 전쟁에서 위대한 승리” 주장
- 6·25전쟁 ‘항미원조’ 전쟁이라는 중국, 미국에 함께 맞선 북-중 혈맹 강조
- MODERN KOREAN HISTORY PORTAL Wilson Center 한국사 현대사 관련 자료
- KOREAN WAR ORIGINS, 1945-1950 This collection of primary source documents sheds light on the question of "who started the Korean War?"
- KOREAN WAR, 1950-1953 A collection of primary source documents related to the Korean War : Wilson Center
- KOREAN WAR ARMISTICE On July 27, 1953, the Korean Armistice Agreement was signed, ceasing hostilities and bringing an end to the Korean War.
- KOREAN WAR BIOLOGICAL WARFARE ALLEGATIONS In 1951 and again in 1952, China, North Korea, and the Soviet Union alleged that the United States conducted biological warfare (BW) in areas of the PRC and in the DPRK.
- CHINA AND THE KOREAN WAR A collection of materials documenting China's involvement in all stages of the Korean War : Wilson Center
사진 자료
- 6.25 당시 피난민 사진들 Wikimedia Commons
- Korean War Historical Images Morning Calm Weekly Newspaper Installation Management Command, U.S. Army
- Signal Corps Photographs of American Military Activity Part 2 (2차 세계대전 전후)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각주
- ↑ 송종환, 6·25 전쟁 50년의 再照明 ⑧ - 舊소련 비밀문서에 나타난 전쟁의 起源 : 스탈린은 6·25 전쟁을 기획하고 연출한 총감독이었다 월간조선 1999년 11월호
- ↑ 민주조선 자주독립의 길, 김일성 장군 중요 논문집, (북조선로동당중앙본부 선전선동부, 1947) :八.一五 一週年을 記念하면서 朝鮮同胞에게 告함 : p.28
- ↑ Regarding the organization of the military committee .군사위원회 조직에 관하여(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북한자료센터) 6.25 전쟁 납북인사 가족협의회
- ↑ Kathryn Weathersby, “New Findings on the Korean War”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Bulletin, 3 (Fall 1993), p.14: This was Kim Il Sung’s war; he gained Stalin’s reluctant approval only after persistent appeals (48 telegrams!).
- ↑ Kathryn Weathersby, The Korean War Revisited Wilson Quarterly Summer 1999
- ↑ 소련, “남침 준비 부족, 게릴라전 주력하라”, KBS 2010.06.24 (22:03)
- ↑ https://www.bbc.com/korean/features-53174047 6.25: 잊혀진 국군포로의 잊혀진 딸들… 그들은 최하층민의 삶을 살았다
-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31&aid=0000544599 6·25 참전용사 기리는 묵념하는 통합당
- ↑ 2020년 총선후, 여당 민주당의 518 기념식과 노무현 기념식에는 상갓집 개처럼 참석을 하였다. 6.25 기념일에는 국회 회의에 앞서 묵념으로 갈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