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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ames F. Person, [https://www.wilsoncenter.org/publication/the-1967-purge-the-gapsan-faction-and-establishment-the-monolithic-ideological-system The 1967 Purge of the Gapsan Faction and Establishment of the Monolithic Ideological System] Wilson Center Dec 14, 2013
* James F. Person, [https://www.wilsoncenter.org/publication/the-1967-purge-the-gapsan-faction-and-establishment-the-monolithic-ideological-system The 1967 Purge of the Gapsan Faction and Establishment of the Monolithic Ideological System] Wilson Center Dec 14, 2013


==폭압 통치와 연쇄적 대남 도발==
=='''폭압 통치와 연쇄적 대남 도발'''==
갑산파 숙청으로 김일성 유일체제를 확립하고, 장남 김정일 후계 구도를 굳히는데 성공한 김일성은 군사력 강화를 위한 중공업에 치중하여, 민생 경제를 붕괴시키고, 잇다른 대남 무력도발로 남북간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월남전이 격화되고 한국이 월남 파병을 하자 북한군도 비밀리에 월맹에 파견하였다.
갑산파 숙청으로 김일성 유일체제를 확립하고, 장남 김정일 후계 구도를 굳히는데 성공한 김일성은 군사력 강화를 위한 중공업에 치중하여, 민생 경제를 붕괴시키고, 잇다른 대남 무력도발로 남북간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월남전이 격화되고 한국이 월남 파병을 하자 북한군도 비밀리에 월맹에 파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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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올림픽에 대응하여 1989년 세계청년학생축전(世界靑年學生祝典, World Festival of Youth and Students)을 평양으로 유치하였으나, 별 중요성도 없는 행사에 과도하게 외화를 낭비하여 북한 경제는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기울어져 간다.
서울 올림픽에 대응하여 1989년 세계청년학생축전(世界靑年學生祝典, World Festival of Youth and Students)을 평양으로 유치하였으나, 별 중요성도 없는 행사에 과도하게 외화를 낭비하여 북한 경제는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기울어져 간다.


==1994년 사망==
==1994년 사망==

2018년 12월 16일 (일) 22:5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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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김일성(金日成, 1912년 4월 15일 ~ 1994년 7월 8일, 영어: Kim Il-sung)은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하 북한) 출범 당시부터 1994년 사망할 때까지 북한의 최고 지도자였다. 어릴 때 만주로 가서 성장하여 오랜 외국 생활로 국내 기반이 전혀없었던 그는 운좋게 스탈린의 간택을 받아 소련군 무력의 도움으로 북한의 최고 권력을 장악했으나, 초기에는 연안파, 남로당파 등 여러 세력과 연합할 수 밖에 없었다. 6.25 남침 전쟁 실패후 책임을 박헌영 등에게 덮어씌워 남로당파를 숙청하고, 1956년 8월 종파 사건을 일으켜 연안파, 소련파등을 숙청하여 김일성 유일체제를 구축하는데 성공한다. 1967년 마지막 남은 갑산파를 숙청한 후부터 장남 김정일에로 권력 승계 작업을 시작하였으며, 1980년대에는 김정일의 권력이 김일성을 능가하게되어 김일성은 명목상의 최고 지도자로 전락하였다. 그는 6.25 남침 전쟁을 일으켜 수백만 동족을 살상케한 전범이고, 정치적 반대 계층을 탄압하고 수십만을 수용소에 가두어 반인도적 범죄를 자행한 최악의 반인권 사범이며, 국가를 김일성 일족의 사유물로 만들고, 인민들의 대부분 자유를 박탈하여 노예화한 총책임자이다.

출생과 가계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1] 평안남도 대동군(大同郡) 용산면(龍山面) 하리(下里) 칠골의 외가에서 김형직(金亨稷, 1894~1926)강반석(康盤石, 1892~1932) 부부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생가로 알려진 만경대(萬景臺) 고향집은 조부모 김보현(金輔鉉, 1871~1955)과 이보익(李寶益, 1876~1959)이 살던 집이며, 당시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古平面) 남리(南里)에 속했다. 오늘날 칠골과 만경대는 평양직할시(平壤直轄市)에 편입되어 있다.

흔히 그의 본명은 김성주(金成柱)라고 하나, 그의 어린 시절 학교 동창들의 증언에 의하면 김성주(金聖柱)가 맞을 가능성이 크고[2], 김성주(金誠柱)로 기록한 문헌도 있다.[3][4] 김일성은 3가지 모두 자신의 이름이 맞다고 했다 한다.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金膺禹, 1845~1878)는 남의 집 소작농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다 1860년부터 평양에 살고 있던 지주 리평택(李平澤)의 조상 묘를 봐주는 산당지기로 만경대에 이사하게 되었다고 한다.[5] 북한은 김응우가 제네랄 셔먼호 격침을 주도했다고 주장하나, 이런 말은 1967년 갑산파 숙청후 김정일을 후계자로 만드는 과정에서 김일성 가계를 우상화할 필요성 때문에 지어낸 것이다.

조부 김보현은 평범한 농부였고, 부친 김형직은 숭실학교를 중퇴하고 만경대와 평안남도 강동군 봉화리에서 서당 교사를 하다, 장일환(張日煥, 1886 ~ 1918) 등이 주도한 조선국민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9년 무렵 중강진으로 이주하여, 거기서 3.1운동에 참여했다가 경찰의 추적을 피해 압록강 대안(對岸)인 만주 임강현(臨江縣)으로 피신한다. 만주에서는 가짜 세브란스 의전 졸업장을 내걸고 무면허 한의원을 개업하여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고 한다.

수학기

김일성은 임강현에 살 때인 1920년 봄에 중국인 학교인 임강 소학교(臨江小學校, 즉 모아산현립소학교)에 입학하고,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모아산현립소학교(帽兒山縣立小學校)는 1927년 당시 한인을 박해하는 것으로 유명해진 반동 소학교였다.[6] 이어 1921년 여름 부모가 장백현(長白縣) 팔도구(八道溝)로 이주하자 장백현 소학교에 다니게 된다. 장백현 소학교의 학사기록부가 남아 있으나 중국 당국이 공개를 금하고 있다.[7]

배움의 천리길과 광복의 천리길

김일성은 1923년 1월 만주 8도구에서 걸어서 외가인 칠골로 와 외조부 강돈욱(康敦煜, 1871~1943)이 운영에 간여하던 창덕학교(彰德學校)를 2년간 다니다가 부친이 경찰에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925년 1월 왔던 길을 다시 걸어서 만주로 갔다고 한다. 이때 그가 창덕학교를 다녔다는 것은 월남한 당시 급우들의 증언으로 사실 확인이 된다. 그러나 당시 어린 아이였던 그가 수백 km 의 먼길을 한겨울에 혼자 걸어서 왕복했다는 것은 사실로 보기 어렵다. 눈덮히고 얼어붙은 산골 길을 어린 아이 혼자 걷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고 도중에 숙식 문제를 해결할 능력도 없을 때이다. 올 때는 부친이 동행했고, 돌아갈 때도 누군가가 동행했을 것이다. 한 겨울에 그 먼길을 어린 아이 혼자 걸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식이 그렇게 하도록 방치했다고 자기 부모를 욕보이는 짓이다.

북한에서는 왕복 모두 김일성 혼자 걸은 것으로 주장하며, 칠골로 걸어 왔다는 경로를 배움의 천리길, 1925년 1월 칠골 외가를 떠나 같은 길을 거꾸로 걸어 만주로 돌아간 길을 광복의 천리길이라 명명하고, 매년 학생들이 이 길을 따라 걷도록 하는 행군을 시키고 있다.[8] 당시 김일성이 만주로 가기 위해 압록강을 건느면서 맹세했다고 하는 말이 각종 김일성 전기에 판박이처럼 나온다.[9]

『나는 14살 때에 조선이 독립하지 않으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하고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그 때 나는 그 누군가가 지은 「압록강의 노래」를 부르면서 내가 언제 다시 이 땅을 밟을 수 있을까, 내가 자라나고 선조의 무덤이 있는 이 땅에 다시 돌아올 날은 과연 언제인가, 이렇게 생각하니 어린 가슴에도 슬픔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말은 해방 직후 김일성 수행기자를 하다 1959년 한국으로 귀순한 한재덕(韓載德, 1911~1970)이 지어낸 것으로, 1945년 10월 19일자 평양민보(平壤民報)에 처음 실렸다.[10][11][12]

부친 김형직의 사망

만주로 돌아온 김일성은 부모를 따라 무송현(撫松縣)으로 이주하여 소학교를 졸업했다. 1926년 봄에 정의부(正義府)에서 운영하고, 최동오(崔東旿, 1892∼1963)가 숙장(塾長)으로 있던 길림성 화전현(樺甸縣)의 화성의숙(華成義塾)에 들어갔으나 그해 6월에 부친이 사망하면서 그만두게 된다.[13] 증언에 의하면 김형직은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민족주의 경향의 사람으로 만주에서도 찾아온 환자들이 공산주의자인 경우 치료를 거부하고 돌려보내 이들의 분노를 사서 테러를 당해 죽었다고 한다.[14][15]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pp.96~97] 당시(當時) 무송(撫松)에 살았던 이도일(李道日)씨(79세, 釜山 거주)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나는 형직(亨稷)이랑 같이 독립운동단체(獨立運動團體)인 백산무사단(白山武士團)에 관계(關係)했었다. 단장(團長)은 김호(金虎)란 사람이었다. 우리는 모두 순수한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였다. 그런데 그때 공산당 운동(共產黨運動)이 벌어지면서부터 독립운동 진영(獨立運動陣營)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한의(漢醫)였던 김형직(金亨稷)은 독립군(獨立軍)한테는 약도 주고 치료(治療)도 해주었으나 공산당(共產黨)은 아예 상대를 하지 않아 공산당한데 원한을 사고 있었다. 어느 날 밤 공산당(共產黨)들이 와서 분풀이로 형직(亨稷)이를 살해(殺害)하고 말았다. 김성주(金聖柱)는 자기 아버지를 누가 죽인지도 모르고 지금 공산당(共產黨)을 하고 있는 것이다."

김형직은 한의원을 하면서 아편 밀거래에도 간여했다는 증언이 많은데, 이 때문인지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그러나 그가 사망한 직후부터 남은 가족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빠지는데, 당시 무송지방에 횡행하던 마적떼에게 재산을 약탈 당했을 가능성이 있다.[16][17]

중학교 과정

부친이 사망한 후 김일성은 한 동안 방황하다 마골단(馬骨團) 이라는 부유한 사람들을 골라 죽이고 재물을 강탈하는 극좌 폭력집단에 들어가 심부름을 하며 지냈다고 한다. 이때 정의부(正義府)에서는 이종락(李鐘洛, 1907~1940)을 파견하여 이들을 제압하는데, 이종락은 김일성을 불쌍히 여겨 데려와 봉천(奉天)의 평단중학교(平旦中學校)에 입학시켜주었다고 한다.[18] (평단중학 재학은 그 학교 출신자의 증언에 의한 것으로 북한의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도 얼마 다니지 못하고 그만두게 되나 몇몇 사람의 후원을 얻어 길림의 육문중학교(毓文中學校)에 들어가게 된다. 김학규(金學奎, 1900~1967)의 증언에 의하면 김형직이 생전에 정의부 사람들과 상당한 친분이 있었으므로 정의부에서 김일성에게 장학금을 대어주었다고 한다.[19] 그러나 1929년 5월 조선공산청년회(朝鮮共産靑年會) 조직 사건으로[2] 경찰의 단속을 받아 육문중학교를 중퇴하게 된다. 이것이 북한에서 인정하는 김일성의 최종학력이다.

반국민부 활동기 (1929~1932)

1921년 6월의 자유시 참변(自由市慘變) 당시 만주와 연해주 등지에서 무장투쟁을 하던 민족 진영 독립운동가들은 공산주의자들의 계략에 빠져 거의 몰살당하다시피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민족진영과 공산주의자들의 대립은 서로 공존하기 힘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자유시 참변을 모면한 민족진영 사람들이 다시 세력을 규합하여 1920년대 중반 정의부(正義府), 신민부(新民府), 참의부(參議府) 등 소위 3부가 정립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만주의 젊은 층들에는 공산주의 열풍이 불어 3부에도 공산주의자들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조직의 존립기반 자체를 잃어버릴 위기에 처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3부 통합운동이 일어난다. 그러나 서로간의 의견차가 커서 완전한 통합은 이루지 못하고, 두 갈래로 부분 통합을 하게된다. 정의부의 주류 세력들과 신민부, 참의부 일부 인사가 참여하여 1929년 4월 국민부(國民府)가 만들어졌고, 산하에 군사조직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을 두게 된다. 그러나 국민부 내에도 이미 다수의 공산주의자들이 들어와 있어 상당한 갈등이 있었다.

원래 정의부 소속이었던 이종락은 그대로 국민부에 소속되는데, 육문중학을 중퇴하고 갈 곳없는 김일성을 데려다 국민부 산하 간부 양성기관인 남만주학원(南滿洲學院 (약칭 南滿學院))에 입학시킨다. 남만학원은 국민부 본부가 있던 요녕성(遼寧省)의 신빈현(新賓縣) 왕청문(旺淸門)에 있었는데, 김일성의 남만학원 재학사실은 당시 왕청문에서 학교를 다녔던 사람의 증언에 의해 알려진 것으로 북한의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다.[20]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東省朝鮮人農民總同盟)

당시 김일성은 국민부 산하 청년조직인 남만한인청년총동맹(南滿韓人靑年總同盟, 남만청총)에 가입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국민부 지도부는 1929년 10월 중순 남만청총에 침투해 들어와 접수하려는 극렬 ML파 공산주의자들 6명을 체포하여 사살하였다.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도 이 사건을 거론하며 국민부 지도부를 비판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당시 이종락과 김일성도 국민부 지도부 편에 서서 이 사건의 사후 수습에 협조하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도 분파간에 알력이 심해 ML파 공산주의자들은 이종락등도 적대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1930년 3월 14일 국민부 산하 남만한인청년총동맹(南滿韓人靑年總同盟), 남만농민동맹(南滿農民同盟), 남만여자교육회(南滿女子敎育會) 등 3개 단체를 통합시켜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東省朝鮮人農民總同盟)을 조직한다. 이 동맹의 무송(撫松)·안도(安圖) 지방을 담당할 지부동맹조직위원(支部同盟組織委員)으로 북한 김일성(金成柱)이 선출되었다.[21]

세기와 더불어에는 김일성이 1929년 가을부터 1930년 5월 초까지 길림의 감옥에 투옥되어 있었다고 주장하나, 1930년 3월 14일에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 간부로 선출되고 있으므로 이는 명백한 거짓말이다. 아마도 당시 '반동단체' 국민부 산하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사실을 숨기기 위해 이런 조작을 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와 세화군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제9대장이었던 이종락(李鐘洛, 1907~1940)국민부(國民府) 내의 좌파, 공산주의자들은 1930년 8월 국민부를 탈퇴하고 나와 김광렬(金光烈, 1896 ~ ?)의 동아혁명군(東亞革命軍)과 연합하여 9월 10일에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朝鮮革命軍 吉江指揮部)라는 군사조직을 만든다. 국민부 산하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에서 이탈해 나온 조직인데다, 국민부 타도를 목적으로 하면서도 같은 이름을 달고 있는 것은 혼란을 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가 내세운 강령을 보면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 타도, 국민부 타도, 중국공산당의 지도를 받아 공산혁명 완수 등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하고 있고, 조선독립이나 항일투쟁이라는 말은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22] 순수한 조선인들만의 조직인데도 중국인 공산당원처럼 사고하며 행동하고 있다.

1931년 1월말 이종락 등 지도부가 구속된 후 잔존세력이 세화군(世火軍), 동방혁명군(東方革命軍) 등으로 이름을 바꾸어 가며 조금 더 존속하나 1931년 말에 완전히 소멸한다.

1931년 3월 24일에 김일성(金成柱)이 세화군(世火軍) 군정위원회(軍政委員會) 위원(委員)으로 선임되었다는 일제의 기록이 있다.[23] 그러나 동아일보 1931년 3월 26일자 기사에 "이종락(李鐘洛) 부하 김일성(金一成) 등 3명이 체포"되었다고 하였고[24], 이어 같은 신문 5월 4 일자 기사에는 조사를 받은 이 3명이 길림성 정부로 호송된다고 하였다.[25] 그가 이때 길림의 감옥에 갇혔던 것은 사실로 보이나 얼마나 오래 투옥되어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동아일보 기사로 보아 당시 김성주는 김일성(金一成)이란 이름을 쓰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930년 말 이종락 부대의 세금 징수원이 되어 회덕현(懷德縣) 오가자(五家子)에 가 있던 시기에 삼성학교(三成學校) 교사였던 최형우(崔衡宇, 1905~1950)가 일성(一星)이란 별호를 지어 주었다는 증언이 있고[26][27], 북한은 김혁이라는 시인이 "한별"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동지들이 한자로 一星이라 적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어쨌던 당시 한때 김일성이란 이름을 쓴 것은 사실로 보이나, 본명을 버리지 않고 여전히 그대로 쓰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변성명이 필요할 때 김일성이라고 둘러댄 것이 아닌가 한다.

조선혁명군 고동뢰 소대 참살

믿고 따랐던 상관 이종락이 체포 구금되고, 속했던 군사조직도 흐지부지 와해되자 의지할 데를 잃은 김일성은 무송(撫松)으로 돌아가 장아청(張亞靑, 1913~1937) 등 또래들을 모아 불량배 짓을 하고 다녔다. 이런 일로 중국인들 사이에 조선인들에 대한 평판이 나빠질 것을 우려한 주민들이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측에 제압을 요청하자 총사령 양세봉(梁世奉, 1896~1934)은 이 패거리들을 제압하러 1932년 2월 중순 고동뢰(高東雷) 소대장이하 10명을 무송(撫松)으로 파견한다. 무송에 당도한 일행이 장거리 행군에 지쳐 피곤해서 잠든 사이에 사전 정보를 입수한 김일성 일당은 이들 10명을 무참히 살해하고, 무기를 훔쳐 도망친다.[28] 이것이 김일성의 최초의 무장투쟁이다.

김일성은 또한 조선혁명군 심용준(沈龍俊, 1896~1949) 중대의 무기를 훔쳐 달아나기도 했다.[29]

모친 강반석의 사망

고동뢰 소대장 일행을 참살하고 도망갔던 김일성은 1932년 초여름 조선혁명군 양세봉 총사령을 다시 찾아와서 지난 잘못에 대한 용서를 빌고 조선혁명군에 자신을 받아 줄 것을 간청했다고 한다. 주위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양세봉은 그를 용서하고 받아주기는 했지만, 못 미더워하여 그가 원하는 직책은 맡겨주지 않았다. 이에 김일성은 다시 어디론가 떠나고 만다.[30] 김학규에 의하면 1932년 여름 김일성(金聖柱)이 양세봉을 찾은 것은 사실이다.[19]

이해 7월 31일에 안도현(安圖縣)에서 살던 모친 강반석이 병으로 사망한다.

중공당 산하 유격대 활동기 (1932~1940)

소련이 공산혁명에 성공하면서, 만주에는 1920년대부터 공산주의 사조가 몰려온다. 1930년 5월 30일에 간도폭동이 있었고,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킨 이후 1932년 3월 만주국이 수립되자 만주 도처에서 소규모의 항일 유격대(抗日遊擊隊)가 조직되기 시작한다. 북한은 김일성이 1932년 4월 25일 안도현(安圖縣) 유격대를 창건했다고 주장하며 이날을 인민군 창건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중국 기록에는 당시 안도현 유격대 대장은 이영배(李英培)로 나오며, 김일성의 이름은 없다. 다른 정황을 보아도 이때 김일성이 유격대를 창건했다고 보기 힘든 점이 많다. 1932년 여름 조선혁명군 양세봉 총사령을 찾아 자신을 받아줄 것을 요청했고, 7월 31일에 모친이 사망하므로, 그가 유격대에 투신한 것은 적어도 모친 사망 후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만주 빨치산 출신으로 북한의 최고재판소장을 지낸 이국진(李國鎭, 1905~1980)은 김일성이 1932년 초겨울(연말) 안도 유격대를 찾아와 가담했다고 증언한다.[31]

李國鎭(이국진)(前 국가최고검찰장)의 증언.
"1932년에 들어와서야 中國(중국) 공산당이 직접 이끄는 反日(반일)유격대가 조직되기 시작했소. 항일홍군유격대라고 불린 이 유격대는 처음에는 인원이 많아야 10명 내외였으며 총도 몇 자루 없었소. 1932년 초겨울 安圖(안도) 유격대에 金成柱(김성주)라는 학생 옷차림의 청년이 참가했는데 그는 원래 3년제 소학교에서 글을 가르치는 선생이었소. 이 사람이 바로 金日成(김일성) 동지요. 그 당시 유격대를 지휘한 이들은 중국인 周保中(주보중) 楊靖宇(양정우) 李廷祿(이정록) 董章榮(동장영) 등과 조선인인 李紅光(이홍광) 李東光(이동광) 崔庸健(최용건) 金策(김책) 李光(이광) 등이었소. 부대 명칭은 처음에 반일홍군유격대였고 33년1월 중국 공산당이「만주의 각급 당조직과 전체 당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따라 동북인민혁명군으로, 다시 36년 2월 중국공산당 공산국제주재대표단의「동북항일연군통일군대건제선언」이 발표된 뒤 해방될 때까지「동북항일연군」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었소"

김일성이 1932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는 기록이 다수 있으나, 가입 시기가 확실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정확한 시점은 중공당 당원 명부에 적혀 있을 것이나 이를 확인했다는 사람은 아직 없는 것 같다.

동북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연군

1930년대 초 만주에는 잡다한 성격의 무장단체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만주를 지배하던 마적 출신 군벌 장작림이 1928년 폭사한 후 그의 잔존 세력이었던 군대, 각종 마적 집단, 공산주의자들이 조직한 홍군 유격대 등이다. 항일 투쟁을 위해 이런 집단들이 통합하거나 연대를 모색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이 성립하지만, 통일된 지휘체계를 가진 조직이 아니라 1군부터 11군까지 나뉘어져 각 군의 군장이 지휘하는 체제였다. 좀더 많은 무장단체를 규합하고, 지휘체계를 단순화하기 위해 명칭에서 공산주의 색채를 드러내는 "인민혁명"을 떼어내고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으로 바꾸어 무색무취한 항일군인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공산주의자들의 지배력이 더 강화되었고, 이들은 중공당 만주성위와 코민테른의 지휘 감독하에 있었다. 중공당원들이 주축이었지만, 연안의 중공당 중앙과는 거리가 멀어 연락이 두절되어 있었다.

11개 군을 활동 지역에 따라 3그룹으로 묶어 1, 2, 3로군(路軍)으로 편성한다. 이 중에서 남만주에서 활동하던 1군과 2군을 묶은 것이 1로군이며, 총사령은 양정우(楊靖宇, 1905~1940)였다. 동만주의 2로군 총사령은 주보중(周保中, 1902-1964), 북만주의 3로군 총사령은 조상지(趙尙志)[나중에 이조린(李兆麟)으로 교체]였으며, 3개 로군을 총괄하는 지휘체계를 만드는데는 실패했다. 부대가 각지에 분산되어 유격전을 벌이며 수시로 이동해 다녀야하는 상황이었으므로 단일 지휘체계를 갖춘다 해도 실효성을 발휘할 수 없었다.

김일성이 유격대에 투신한 초기에 어디서 무슨 활동을 했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북한에서 주장하는 엄청난 전과들은 믿을만한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김일성의 유격대 투신 초기인 1932년에서 1936년까지 관련 기록을 가장 많이 찾아내어 검토한 사람은 허동찬(許東粲, 1932 ~ )이다.[32] 그가 찾아낸 기록들을 보면 유격대 내에 약간의 지위를 가진 인물로 김일성(金日成), 김일성(金一成), 김일성(金一星), 김일선(金一善), 김일선(金日善) 등의 이름이 어지럽게 나오는데 누가 누구인지 정확히 판별하기 어려우나 적어도 이런 이름의 사람이 둘 이상이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김일선은 김일성과 관계없는 이름처럼 보이지만, 김일성의 이칭으로 명기된 기록들이 있기 때문에 같이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북한 김일성이 유격대 시절 초기에 어떤 이름을 썼는지도 명확하지 않으므로 이런 기록들 중에 실제 북한 김일성이 들어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나중에 동북항일연군에서 두드러진 직책에 있었던 김일성(金日成)은 처음의 1로군 2군 6사장, 나중의 제2방면군장 두 경우가 있다. 6사장 김일성이 1937년 6월 보천보 사건의 주역인데, 그는 그해 11월 13일 전사한 것이 확실하다. 나중의 제2방면 군장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이 맞는 것으로 판단된다. 다수의 사람들이 보천보 주역 김일성은 전사했고, 그 이후부터 북한 김일성이 김일성(金日成)이란 이름을 썼다고 증언했다. 물론 김일성 진짜론자들은 6사장 김일성도 북한 김일성이 맞다고 하며, 그가 전사했다는 기록들은 모두 잘못된 것이며 전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북한도 보천보 사건 주역이 북한 김일성이 맞다고 주장하고, 김일성 회고록에도 그렇게 써 놓았다.


동북항일연군 1로군 전기 편제의 지휘관들 (1936년 7월 ~ 1938년 6월)
총사령부(總司令部)군장(軍長)사장(師長)
총사령 양정우(楊靖宇, 1905~1940)
부사령 왕덕태(王德泰, 1907~1936)
1군 군장 양정우1사장 정빈(程斌, 1911~1951)
1938년 6월말 투항
2사장 조국안(曹國安, 1900~1937)
1937년 가을 전사
3사장 왕인재(王仁齋, 1906~1937)
1937년 가을 전사
2군 군장 왕덕태
1936년 10월 말 전사
4사장 안봉학(安鳳學, 1909~1937)
1936.09.30 투항
5사장 사충항(史忠恒, 1906~1936)
1936년 10월 전사
6사장 김일성(金日成, 1901~1937)
1937.11.13 전사


동북항일연군 1로군 후기 편제의 지휘관들 (1938년 7월 ~ 1941년 3월)
총사령부(總司令部)방면군장(方面軍長)

총사령 양정우(楊靖宇, 1905~1940)
1940.02.23 전사

부사령 위증민(魏拯民, 1909~1941)
1941.03.08 전사

제1방면군장 조아범(曹亞範, 1911~1940)
1940.04.08 내분으로 피살
제2방면군장 김일성(金日成, 1912~1994.07.08)

1940.10.23 소련으로 월경 도주[33][34]

제3방면군장 진한장(陳翰章, 1913~1940)
1940.12.08 전사
경위려(警衛旅) 여장(旅長) 박득범(朴得範, 1908~?)
1940.09.30 투항[35]


1939년~1941년 3월간 일본 관동군 노조에(野副) 토벌대의 항일연군 1로군에 대한 집중토벌로 1940년 2월말 총사령 양정우가 전사하고, 불리한 전세에서 살아날 길이 없다고 판단한 김일성은 1940년 10월 23일 상관인 총사령 대행 위증민의 허락도 없이 부하 몇명을 데리고 소련으로 도주한다.[33][34] 이듬해 3월 위증민이 전사하면서 항일연군 1로군은 완전히 궤멸된다.

전투중의 지휘관이 도주한 김일성과 같은 행위는 정상적인 군율에 따르면 사형을 면할 길이 없으나, 처벌 권한을 가진 직속 상관들이 모두 전사하여 운좋게 처벌을 면한다. 소련군 88여단에서는 1로군 상관들이 모두 전사한 덕에 1로군을 대표하는 인사가 되어 비겁한 도망자가 오히려 더 대접을 받는 희극적인 일이 벌어진다.

김일성 귀순 공작

노조에 쇼도쿠(野副昌德) 소장이 이끈 노조에(野副) 토벌대가 항일연군 1로군을 상대로 집중적인 토벌을 벌이던 때와 같은 시기에 경찰 쪽은 항일연군 요인들 귀순 공작을 펼치고 있었다. 당시 귀순공작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김창영(金昌永, 1890-1967)의 1949년 반민특위 증언과[36] 1940년 4월 만선일보(滿鮮日報) 에 5회에 걸쳐 연재된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생장기(生長記)」에[37] 의하면 귀순공작의 마지막 대상은 김일성이었다. 김일성의 왕년의 상관으로 체포되어 6년여 옥고를 치른 이종락(李鐘洛, 1907~1940)과, 김일성의 삼촌 김형권(金亨權, 1905~1936)과 함께 군자금 모집에 나섰다 체포되어 역시 옥고를 치른 박차석(朴且石)은 석방되자 변절하여 일본 측에 협력하게 되는데, 김창영은 이들을 김일성 귀순 공작에 투입한다. 김일성으로서는 자신이 믿을만한 사람들로 생각하던 터라 부대로 찾아온 이들의 설득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종내에는 귀순을 결심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귀순 후의 안전보장을 위해 까다로운 조건을 내거는 바람에 협상이 지연되면서 이러한 상황이 1로군 총사령 양정우에게 보고가 들어간다. 1940년 1월말 부하를 이끌고 김일성 부대에 들이닥친 양정우는 협상차 들어와 있던 이종락을 체포하여 끌고 가서 사살한다. 이때문에 김일성 귀순공작은 막을 내리지만, 양정우 본인도 한달여 뒤 전사하고 만다.

김일성 항일 무장투쟁의 성격

김일성이 말년에 작가들을 동원하여 꾸며낸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는 조선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빛나는 항일 무용담들로 가득차 있으나, 주요 줄거리들이 모두 조작된 것이다.

김일성이 소련군에 있을 당시인 1942년 주보중의 지시를 받고 자필로 쓴 《항련 제1로군 약사 (抗聯第一路軍略史)》에는[38][39][40][41][42] 자기들이 한 일에 대해 비교적 솔직하게 쓰고 있는데, 조선독립이란 말은 한 마디도 나오지 않으며, 자신들의 투쟁이 최종적으로 실패했다고 자인하고 있다. 김일성 자신도 그냥 중국인의 한 사람으로 그들 틈에 섞여 만주적화를 위해 투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엄청난 항일전공으로 내세우는 보천보 사건에 대해서조차 단 한 마디 언급도 없다. 항일연군 시절 김일성의 수하였던 여영준(呂英俊)은 당시 김일성이 해방이 되면 중국 공산당이 안도현장(安圖縣長) 정도를 시켜주길 원했다고 증언하였는데,[43] 이런 것을 보면 당시 그는 조선인 아닌 중국인이나 다름없었다. 여영준 본인은 중국의 조선족이 되었다.

또한 김일성 부대 뿐만 아니라 많은 항일연군 부대들이 양민에 대한 약탈, 납치, 살인, 방화를 일삼았다는 기록도 엄청나게 많다.[44][45][46] 그들이 생업에 종사한 것도 아니고, 몰래 후원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봐야 턱없이 부족한데다 보급품을 조달할 마땅한 다른 방법이 없으니 그렇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일본 군부대나 관공서를 쳐서 물자를 빼앗기에는 치러야할 희생이 너무 크고, 만만한 대상이 양민일 수 밖에 없다. 그 중에서도 나올 것이 많은 돈많은 부잣집을 털고는 적당히 친일파를 응징했다고 구실을 붙여주면 되는 것이다. 납치해온 사람들 중 나이든 사람은 인질대금을 받고 풀어주고, 젊은 사람은 손실된 병력과 인력을 충당하게 했다. 항일연군의 여자 대원들도 납치되어 온 경우가 많다. 공산주의의 신성한 목적을 위해서는 무슨 일을 해도 정당하다는 그들만의 논리야 있겠지만 사실상 마적단이나 다를바가 별로 없었다.

러시아의 정치 주간지 '노보에.브레미야'(新時代)는 구 소련 군인 시절때 金日成을 잘 알고 있던 게오르규 트마노프의 증언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은 보도를 했다.[47]

「제 2차 대전중 소련군 대위로서 극동 군관구 저격여단 소속 조선인 대대 대대장을 역임하며 하바로프스크 교외에 주둔하고 있던 김일성은 1944년 7월에 열린 同여단 공산당 회의에서 중국인 대대(大隊) 정치위원으로부터 " 조선인 대대는 중국 길림성에서 현지 도둑과 짜고 민중에 대한 약탈행위를 반복했으며 중국 공산당원도 살해했다"고 고발당했다. 중국 정치위원은 "이 부대는 일본군과 싸우는 것보다 공산당을 죽이는 것을 명예로 생각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회의에서" 우리가 죽인 것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트로츠키스트"라고 변명했다.

탈북한 장해성 국제펜 망명북한펜센터 이사장이 북한에 있을 때 김정숙 이전 빨치산 시절 김일성의 처였던 김혜순(金惠順)을 1980년대 중반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그녀도 당시 마적질을 한 것을 솔직히 털어놓았다고 한다.[48]

노인은 입을 다물었다. 많은 시일이 지나서야 나는 끝내 여 투사의 입을 열수 있었다.

“임자들은 항일 무장투쟁이다 하면 그저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 속에서 늘 왜놈토벌대들에게 쫓겨 다니고 굶고 떨고 그런 줄만 알겠지?”
“당연한 거 아닙니까? 배운 것도 들은 것도 영화에서 본 것도 다 그런 것들뿐인데요”

“물론 그렇긴 했지, 하지만 사실대로 말해서 늘 그렇게 굶고 배고프고 언제 죽을지도 모를 위협에 시달린다면 누가 그 짓을 하겠나. 아무리 명분이 조국 광복을 위해 싸운다고 해도 말일세. 사실대로 말하면 집단부락이나 왜놈 목재소 같은 걸 하나 제대로 치면 며칠은 정말이지 배를 두드리며 잘 먹는 때도 있었어. 그 멋이 없다면 십여 년씩 산에서 싸우기가 힘들었을 거야.”

소련 도피 시기 (1940~1945)

만주서 항일 빨치산(게릴라) 활동을 하던 김일성은 일본군에 쫓겨 상관인 동북항일연군 1로군 총사령 대행 위증민(魏拯民, 1909~1941.03.08)의 허락도 없이, 전투 중인 상관과 동료, 부하들을 버리고 1940년 10월 23일 불법 월경하여 소련으로 도주하였다.[33][34] 월경 직후 국경수비대에 체포되어 포시예트(Posyet) 항으로 끌려갔다가[49] 얼마간 감옥에 갇혔는데, 2로군 총사령 주보중(周保中, 1902-1964)의 신원보증으로 풀려났다.

오늘날 한국인 연해주 관광객들이 더러 찾는 포시에트항의 '김일성 감옥'이란 것이 있는데, 아마도 당시 김일성이 수감되었던 곳으로 보인다.[50]


남야영(南野營)

소련으로 도피한 동북항일연군 대원들은 하바로프스크에서 동북쪽으로 70 km 가량 떨어진 아무르 강변 뱌츠코예( Вя́тское, Vyatskoye) 마을의 북야영(北野營, A 캠프)과 보로실로프(지금의 우수리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톡 쪽으로 약간 떨어진 하마탄(Хаматан, Hamatan, 虾蟆塘), 즉 지금의 라즈돌노예(Раздольное, Razdolnoye) 마을의 남야영(南野營, B 캠프)에 분산 수용되는데, 김일성은 남야영에 수용된다.

소련은 1937년 가을에 연해주에 거주하던 한인 지도급 인사 2천여명을 처형하고, 17만 여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킨다. 기차에 짐짝처럼 실려가서 한겨울에 허허벌판에 내팽개쳐진 한인들은 첫 해 겨울에 추위와 굶주림으로 1/3 정도가 사망했다.[51] 이런 만행으로 연해주에서의 한인독립운동은 완전히 맥이 끊기지만, 소련이 만주서 넘어온 조선인 빨치산들을 수용하여 교육과 훈련을 시킨 것은 나름대로 이용할 가치가 높았기 때문이다.

라즈돌노예의 기차역이 바로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실어나르던 출발지인데, 불과 3년 뒤 남야영이 들어서고, 김일성 등이 거기에 수용된 것이다. 남야영에서 1941년 2월 16일 김일성의 장남 김정일이 태어났다.

제88독립저격여단

1942년 7월 만주 빨치산들을 수용한 극동전선군 산하 제88독립저격여단(第88獨立狙撃旅團, 88-я отдельная стрелковая бригада, 88th Separate Rifle Brigade), 통칭 88여단이 북야영이 있는 뱌츠코예 마을에 창설되면서 김일성 일가는 이때 하마탄(라즈돌노예)에서 뱌츠코예로 이주한다. 88여단의 여단장은 주보중(周保中)이었으며, 김일성은 부하 100 여명을 통솔하는 제1대대 영장(대대장)이 되었고, 대위(Капитан, Captain)의 계급을 받았다. 소련군에서 그의 이름은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Jing Zhichen)"이었는데, 이는 한자 이름 金日成을 중국식 발음으로 적은 것이다.[52][53][54] (표준 중국어 보통화 발음은 아닌 듯함.)

소련군 장교로 출세하는 것이 꿈

만주서 일본군에 쫓겨 소련으로 도망간 김일성은 중국보다 앞선 소련의 군인으로 출세하기를 원했다. 빨치산 시절 김일성의 전령병이었던 이을설(李乙雪, 1921-2015)은 김일성이 죽고 난 다음부터 강연 다닐 때 소련 시절의 김일성은 소련서 살고 싶어 했고, 국내로 돌아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하였다.[55] 당시 그는 조선 독립에는 아무 관심도 없고, 소련군 내에서 출세하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한다.[56] 이러한 증언들은 김일성에 의해 북한이 해방되었다고 하는 북한측의 날조된 주장과 정반대로 김일성이 소련군 시절은 물론이고 만주 빨치산 시절에도 조선독립을 위해 투쟁한다는 의식이 전혀 없었음을 뜻한다.

일본의 패배 직후에도 김일성은 한반도로 돌아가기 보다 소련군대에서 복무하며 장군이 되는 것을 확고한 미래상으로 그리고 있었다고 당시 그와 친교가 있었던 소련군 장교 코비첸코 등이 증언했다.[57][58][59]

“만주 게릴라였던 김일성 등이 소련군의 88여단에 편입된 뒤, 만주나 한국에서 전투를 벌였다는 기록은 없다. 일본의 패배 직후에도 하바로프스크 교회 ‘뱌츠코에’에 있었던 김일성은 한반도로 돌아가기 보다 소련군대에서 복무하며 장군이 되는 것을 확고한 미래상으로 그리고 있었다고 당시 그와 친교가 있었던 소련군 장교 코비젠코 등이 회고하고 있다.”

하지만 88여단 자체도 해체될 운명이고, 소련군에서 출세를 바라볼 자격 요건도 갖추지 못해 어려움에 처한 그에게 북조선 지도자로 발탁되는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빨치산 동료들을 감시 보고하는 프락치 역할로 북한 지도자로 발탁되다.

당시 그는 88여단을 관장하던 소련 극동전선군 정찰국장 나움 소르킨 (Naum Semyonovich Sorkin, 1899~1980) 소장의 비밀 정보원(KGB 전신인 NKVD 요원)이 되어[60][61][62][63] 동료 빨치산들의 동태를 감시하여 소르킨 소장과 극동전선군 사령관 막심 푸르카예프 (Maxim Alekseevich Purkayev, 1894~1953) 대장에게 보고하는 프락치 역할을 하였다.[31][64][62][65] 이러한 프락치 역할로 상관들의 신임을 얻어 그들의 강력한 추천을 받은 것이 그가 스탈린에 의해 북한 지도자로 발탁된 배경이다.

소련의 고려인 출신으로 소르킨 소장 밑에서 정보사업에 관여했고, 해방 후 김일성과 함께 북한으로 와서 인민군 창설 초기부터 6.25때까지 정찰국장을 지냈고, 총참모부 군사과학국장으로 있다가 숙청당한 최원(崔元)은 88여단에서 김일성의 비밀스런 역할을 누구보다 잘 알던 사람인데, 아래와 같이 증언했다.[31]

최원(崔元)(소장·총참모부 군사과학국장)의 증언
(崔元(최원)은 본래 蘇聯(소련)군 상위로서 원동사령부 솔로킨 소장 밑에서 정보사업을 했었다).
"소련 원동방면군 사령부에서는 중국 만주 항일연군 사람을 믿지 않았지요. 사령관 부르가예프(Purkayev) 대장이나 솔로킨(Sorkin) 소장도 그랬소. 솔로킨 소장은 베리야(1899~1953)의 신임을 받는 사람이었고 소련 국가안전위원회(NKVD, KGB전신)의 원동방면 책임자였는데 자주 항일연군 사람은 믿을 수 없다고 투덜거리면서도 金日成(김일성)은 믿을 수있는 우리사람이라고 합디다. 솔로킨은 88여단의 내부 상황을 金(김)장군을 통해 손금보듯 파악하고 있었던 겁니다. 솔로킨 소장이 金(김)장군을 우리사람이라고 한 것은 국가안전위원회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金(김)장군이 88여단에 있을때 모스크바에 두 번 갔는데 그것은 솔로킨 소장이 소련 수뇌부에 金(김)장군을 추천했기 때문입니다"

위와 같은 최원의 증언을 듣고 기록으로 남긴 여정(呂政, 본명 강수봉)은 인민군 소장으로 사단(師團) 정치위원을 지내다 숙청, 투옥되어 10년 형기를 마치고 중국으로 탈출했는데, 1991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수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66]

소련인들은 어찌하여 金日成(김일성)을 그토록 어여삐 보았는가. 그것은 언제부터인가. 항일연군이 소련에 건너가기 전부터 두 군대 사이에는 크고 작은 마찰이 계속돼 왔다. 항일연군 전군이 소련으로 건너간 뒤에도 이런 마찰은 그칠 사이가 없었으며 항일연군 내부에서도 소련에 대한 불만이 커져가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소련을 조국으로 여기고 소련에 충성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金日成(김일성)이었다.
反蘇(반소)독립군 蘇(소)에 密告(밀고)

중국말을 아는 솔로킨 소장은 이런 상황에서 金日成(김일성)과 손을 잡고 그에게 의지했다. 金日成(김일성)은 反蘇(반소) 경향을 가진 자신의 전우들을 솔로킨에게 고해 바쳤다. 金日成(김일성)은 소련 안전위원회(비밀경찰 KGB前身(전신))의 정보원이 된 것이다. 소련안전위원회는 金日成(김일성)과 기타 정보원을 통해 항일연군 내부 상황을 손금보듯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솔로킨과 金日成(김일성)의 관계는 88여단을 편성하기 전인 1941년 후반부터 이미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金日成(김일성)을 88여단의 대대장으로 임명하는데는 솔로킨의 간섭이 있었다는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항일연군을 통솔했던 중국 공산당 측에서 보자면 혁명사업에 앞장서왔고 지도자로서 나무랄데 없는 재질을 갖춘 조선인 동지는 崔庸健(최용건) 金策(김책) 許亨植(허형식)이었다. 함께 싸웠던 항일 빨치산들도 모두 이를 긍정하고 있었다. 이들 세 사람은 또 모두 金日成(김일성)을 지도했던 金日成(김일성)의 상관이었다.

소련인들은 이 모든 것을 무시했다. 그들의 관심의 초점은 소련이 시키는대로 할 사람은 누구이며 소련에 끝까지 충성할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소련 비밀경찰의 정보원인 金日成(김일성)이 선택됐던 것이다.

88여단 당시 김일성이 소련 NKVD 비밀 정보원이었다는 것은 1985년 영국으로 망명한 KGB 요원 Oleg Gordievsky(1938~ )가 공개한 KGB 문서에서도 밝혀졌다.[60][61]

스탈린이 북한 지도자를 결정할 때 참고한 것은 NKVD와 극동군 사령부의 보고서였다. NKVD 총책임자 라브렌티 베리야(1899~1953)는 NKVD 비밀 요원인 김일성을 밀었다. 극동군 사령부에서 북한지도자 후보로 김일성을 면접한 사람은 그에게 우호적일 수 밖에 없는 제2 극동전선군 사령관 막심 푸르카예프 (Maxim Purkayev, 1894~1953)와 극동군 사령부 군사위원 이오시프 쉬킨이었으므로[67] 당연히 김일성에 대해 좋은 평가가 올라갈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면접에서 오간 문답은 아래와 같았다.[52]

◇지도자로 선택된 과정: 45년 9월 모스크바는 승전의 축제분위기속에서 병력을 대폭 축소키로 함에따라 金日成은 아주 곤란한 입장에 빠졌다. 그가 소속된 88특수저격여단이 해체될 운명에 놓여 있는데다 고등교육도 받지 못한 그로서는 다른 부대로의 전출이나 진급을 바라보지 못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金은 "특별인터뷰를 위해 즉각 하바로프스크로 돌아가라"는 돌연한 명령을 받았다. 하바로프스크에서 당시 극동군 전선사령관 푸르가예프와 군사위원 슈킨을 면접했는데 이 자리에 참석했던 소련군 통역관은 후일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갔다고 나에게 말했다. 金에게는 질문에 답변만 하도록 허락되었는데 간단하고 명료하게 대답했다는 것이다.

[金 -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은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로 시작됐다.]

--귀관은 한국인인가?

▲ 그렇다.

--남평양에서 태어났는가?

▲그렇다.

--공산당원인가?

▲그렇다.

--가족은?

▲결혼했고 아들이 하나 있다.

--붉은 군대에서 계속 근무하고 싶은가?

▲그렇다.

--그렇다면 북한에 가서 일하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세계혁명에 도움이 된다면 어디든 가겠다.

(여기서 소련장군들은 "좋아. 대답 잘했어"라고 칭찬)

두 장군은 이어 몇가지 경력을 물은 후 金에게 "소련정부의 결정에 따라 한국국적을 가진 전문가들이 북한에 보내지고 있다. 현재 북한은 새 조국을 건설할 전사들이 필요하다. 귀관은 가장 빠른 시일내에 특별임무를 받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 이들의 이같은 발언은 金日成이 이미 북한의 지도자로 결정돼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스탈린은 1945년 9월초 88여단의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불러 면접시험을 본 후 북한지도자로 낙점하였다.[68][69][70]

극동군 총사령관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원수는 하바로프스크 군용 비행장에 수송기를 대기시키고, KGB 극동본부 요원 2명에게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안내하도록 했다고 한다.[69] 당시 바실렙스키 원수의 부관이었던 이반 이바노비치 코발렌코(Ivan Ivanovich Kovalenko, 1919~2005)[71][72]는 후일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68]

바실레프스키 원수의 부관 이반 이바노비치 코바렌코씨의 증언

코바렌코씨에 따르면 극동군 총사령부가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 후보로 추천한 이유는 그가 3년여 동안 소련 군대에서 정치 · 군사 훈련을 받았고, 이 과정에서 그의 리더십과 계략이 뛰어나다고 판단됐으며, 30년대 중국과 만주 국경 지대에서 중국공산당원으로 항일활동을 했을 뿐 조선공산당 등 종파 투쟁에는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코바렌코씨의 증언은 이어진다.

"[45년 9월 초순]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보내라는 스탈린의 지시를 받은 바실레프스키 사령관은 하바로프스크 인근에 있는 군용 비행장에 수송기를 대기시켜 놓고 88정찰여단의 김일성 대위를 불러온 후 KGB 극동본부 요원 2명에게 모스크바로 안내토록 했습니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김일성은 스탈린의 전용 별장으로 직행, 그곳에서 한참동안 대기하다 스탈린의 면접시험을 받은 것이지요. 스탈린은 극동군과 KGB 극동본부에서 올린 김일성에 대한 평정서를 검토한 후 평정서 내용대로 조목조목 질문을 하더라는 겁니다. 간단한 식사를 곁들인 이 면접은 4시간 동안 진행됐습니다. 소련군 대위 견장을 단 김일성은 자리가 자리인만큼 너무 긴장해 "예" "예" 만 연발할 뿐 한마디도 못했다고 훗날 중앙당에서 이 자리에 배석했던 고위 간부에게 들었습니다. "
코바렌코씨는 "김일성을 면접한 스탈린은 배석했던 군 고위 책임자에게 '주목할 필요가 있는 사람이다. 소련군은 이 사람에게 적극 협력하라'고 지시, 북한 정권의 주역이 결정됐다"고 회고 했다.

해방과 입북 - 소련군정기

소련은 1945년 8월 9일 만주 침공을 단행하며 대일본전을 개시하였다. 소련군의 북한 침공은 1945년 8월 9일 웅기 지역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전의를 상실해 있던 일본군을 파죽지세로 격파하며 소련 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가 평양에 도착한 날은 8월 26일이다. 북한 점령은 많은 일본군 사상자를 낸채 소련군은 최소한의 피해만 입고 단기간에 이루어졌다. 김일성을 비롯한 하바로프스크 88여단의 조선인들은 소련군의 대일전에 단 한명도 참전하지 못했다.

평양에 처음 도착한 치스차코프는 상부로부터 아무 지침이 없어 당시 북한주민들의 지지가 높던 조만식을 조선인 대표로 인정하고, 여러가지 일을 진행한다. 그러나 연해주군관구 군사위원 스티코프 - 25군 군사위원 레베데프 라인으로 소련 군정 지휘체계가 갖추어지면서 조만식에게도 많은 압력이 가해지기 시작한다.

원산항으로 비밀리에 입북

김일성을 비롯한 88여단 조선인들은 1945년 9월 중순 육로로 입북을 위해 하바로프스크를 떠나 만주 무단장(牡丹江) 역에 도착했으나 일제가 기차 터널을 파괴하여 북한으로 가는 철길이 끊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당시 역에서 서성거리는 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던 만주군관학교 출신 이기건(李奇建, 1919~ ?)이 그때의 대화에 대해 증언했다.[73][74]

다음은 蘇聯軍(소련군)의 포로취급을 받다 탈출, 歸還途中(귀환도중) 滿州(만주) 목단江驛(강역) 構內(구내)에서 金日成(김일성) 일당의 入北(입북)을 우연히 목격하게된 李奇建(이기건)씨(五三(오삼)·현內外問題研究所長(내외문제연구소장)·예비역준장)의 얘기.
......「하루빈」가는 기차를 타려고 목단江驛前(강역전)을 서성거릴 때입니다. 그때가 아마八月(팔월) 하순경이 아닐까요. 驛構內(역구내)에 소련군장교 三(삼), 四十(사십)명 가량이 몰려있어요. 가까이갔더니 中國(중국)말로 얘기들을 하고 있었는데 그 어투로 봐서 韓國人(한국인)임이 틀림없었읍니다. 나는 中國語(중국어)에 능했지요. 그래서 그중 인상이 좋아보이는 자에게 다가가 우리말로 "당신 朝鮮(조선) 사람 아니요" 하고 반갑게 말을 붙였더니 그 말엔 대꾸를 않고 "당신은 누구요" 하고 우리말로 되물어요. 그래서 "나도 조선사람이요"했더니" 우리가 급히 조선으로 들어가려는데 왜놈들이 기차터널을 폭파해서 못 가고 있소"라고 대답합디다. 당시 목단江(강)에서 韓國(한국)의 청진 회령으로 들어가는 철도가 있었지만 咸鏡道(함경도)에서 가까운 老松嶺(노송령) 터널을 日軍(일군)이 폭파해서 막히는바람에 교통이 두절됐었지요. 그리고는 이어 "지금 朝鮮內部事情(조선내부사정)이 어떻게 됐느냐"고 캐물어요. 그래서 목단江市(강시)에서 "朝鮮(조선)에 東震共和國(동진공화국)이 탄생됐다"【注(주) : 해방직후인 八(팔)월하순 東震共和國(동진공화국)이라는 벽보내각이 나붙었으나 그 출처는 모른다】는 放送(방송)을 들은 기억이 떠올라 그 말을 전했더니 그 소련軍上尉(군상위) 복장을 한 韓國人(한국인)은 "金九(김구)요, 李承晩(이승만)이요" 하고 물읍디다. 모른다고 했읍니다. 한참있다 그 소련군 장교는 "우리는「블라디보스독」으로 일단 가서 거기서 배타고 朝鮮(조선)으로 들어가겠소"라고 말한 일이 있읍니다. 그런데 그 일당이 누구인지 모르고 헤어졌다가 내가 四七(사칠)년 북한에가서 소위 人民軍(인민군) 창설에 관여하면서 보니까 그때 목단江驛(강역)에서 보았던 그 蘇聯軍上尉(소련군상위)가 바로 北傀(북괴) 괴뢰軍總參謀長(군총참모장)으로 올라앉은 安吉(안길)이었읍니다. 安吉(안길)이와 함께 있던 中尉(중위)에서 소좌에 이르는 三十(삼십)여명의 소련군 장교중엔 나중에 北韓(북한)을 틀어쥔 金日成(김일성) 金策(김책) 金一(김일) 崔賢(최현) 林春秋(임춘추)등도 서있었다고 봅니다. 아마도 金日成(김일성) 일당이 韓國(한국)으로 나오고 있던 한 장면이었다고 여깁니다.

김일성 일행은 귀국길에 올라서도 자기들끼리 중국말로 대화할 정도로 중국에 동화된 사람들이라는 증거이고, 또한 그들도 오랜 외국생활에도 불구하고 국내 정세가 이승만, 김구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는 증거도 될 수 있다. (이기건은 해방 직후 서울로 와서 여운형의 비서관을 했으나,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이 암살되자 월북하여 인민군 창설에 참여한다. 그러나 북한은 도저히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월남하여 국군에 들어갔다. 이기건이 위와 같은 증언을 한 1972년에는 김일성의 해방 후 입북 과정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김일성 일행은 안길이 말한대로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소련 군함 푸가초프호로 출발, 9월 19일 오전 11시 원산항에 입항한다. 항구에 출영나온 인사들에게 김일성은 자신을 "김성주"라는 본명으로 소개했다.[75] 9월 22일에 기차로 평양에 도착한 이후로는 한동안 비밀리에 잠행하며 김영환(金英煥)이라는 새로운 가명을 사용하였다.[76][77][78]

평양에 온 김일성은 레베데프 소장에게 자신들도 일본과의 해방전쟁에 참전한 것으로 해 달라고 졸랐으나 거절당했다.[79][80]

○ 일군 격퇴”는 날조
『조선인민혁명군 각 부대들은 도처에서 정예를 자랑하던 일제의 조선 주둔군을 격멸,소탕하면서 진격해 드디어 일제를 패망시키고 조국을 반세기에 미치는 오랜 일제 식민지 통치의 굴레에서 해방시켰다….』

그러나 이같은 북한의 주장은 여러 증언자에 의해 즉각 부인된다. 레베데프 장군은 이 부분에 대해 명백하게 증언하고 있다.

『김일성이 부관 문일을 앞세우고 소련 카피탄(대위) 계급장을 단채 45년 9월 하순 우리 사령부를 처음 찾아왔을 때의 일입니다. 그는 몇마디 인사를 나눈 뒤 「사령관님,우리 항일 빨찌산도 해방전에 참전한 것으로 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하는 것 아니겠어요. 나는 그의 요구를 거절했지요.』

레베데프는 『당시는 그의 항일투쟁 경력을 감안, 애교로 돌렸지만 훗날 평양방문시 그들이 사실을 왜곡한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고 회고했다. 전 북한 외무성 부상 박길용 박사의 증언은 차라리 「희극적」이다.

『북한의 그 역사책은 소련 과학아카데미 동방학연구소가 발간한 「조선의 해방」이라는 책의 내용을 변조한 것이죠. 구체적으로 말하면 「조선의 해방」에 수록된 치스차코프 25군 사령관의 회고록 「제25군의 전투행로」에 나오는 내용중 「소련군 25군」을 「조선인민혁명군」으로 바꾸어 옮겨 적은 것에 불과합니다.』

북한은 1963년까지도 북한을 해방시킨 것은 소련군이라고 하였으나, 이후로 소련군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이 김일성이 이끄는 조선인민혁명군이 북한을 해방시켰다고 조작한 내용을 교육시키고 있다.

비공개 활동

김일성이 평양에 와서 처음 맡은 직책은 평양지구위수사령부(平壤地區衛戍司令部) 부사령관(副司令官)이었다.[81] 북한 각 지역의 위수사령관은 소련군이 맡고, 부사령관은 김일성과 함께 귀국한 88여단 출신자들이 임명되었다.[82]

처음에는 김영환(金英煥) 또는 김동환이란 가명으로 비공개 활동을 하는데, 가장 급선무가 공산당을 만드는 것이었고, 그 일환으로 원산으로 가서 공산당원을 모집하다 그 지역 터줏대감 이주하(李舟河, 1905~1950)의 부하들에게 체포된 적이 있다 한다. 박갑동(朴甲東, 1919~ )은 아래와 같이 증언한다.[83][84]

해방 후 이주하는 원산에서 조선공산당 원산시당과 강원도당을 조직해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김동환(金東煥)이란 자가 난데없이 나타나 공산당을 조직합네 하고 돌아다니더라는 것이었다. 새파란 청년이 하룻강아지 범무서운 줄 모르는 격이라 웃어 넘기려 했으나 그의 측근들이 김동환이란 자가 너무 설친다고 하기에 하루는 부하들을 동원해 그를 잡아 가두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자 곧 소련군부대에서 그 청년을 풀어주라는 지시가 왔고 그대로 한 뒤 알고 보니 그 김동환이란 자가 김일성이었다고 했다. 이 얘기는 실로 잘 알려지지 않은 얘기이지만 나는 우연한 기회에 이 사실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1국 1당의 원칙 때문에 북한에 따로 공산당을 만드는 것에 논란이 많았다. 비밀리에 방북한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과 회합을 가지고 격론 끝에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만들게 되는데, 분국은 원칙적으로는 박헌영의 조선 공산당 하부기구였으나 현실적으로는 북조선 5도당을 장악하게 되었다. 1945년 10월13일 이북 5도 당 열성자 대회를 개최하고, 결정서에 『서울의 당 중앙에 충실히 복종할 것을 맹세한다』고 명기하였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84] 북한은 1945년 10월 10일을 당 창건일로 하고 있다.

해방 직후 김일성 수행 기자를 하다 1959년 남한으로 귀순한 한재덕(韓載德, 1911~1970)은 “조선공산당 북부조선책임자 및 열성자 당원회의”에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창설하던 과정을 증언했다.[85]

“당시 김일성은 서툰 조선말 인사를 읽어 내려갔다. 이 인사 연설문은 소련군과 함께 북한에 들어온 소련 태생 조선인 이른바 카레이스키들이 러시아어 원문을 서툰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어서 연설문으로나 문법상 전혀 맞지 않는 문장이었다. 이 연설문을 김일성이 읽으려 하자 오기섭(吳琪燮)이 손을 들고 질문했다. ‘김일성 동무는 무슨 권한으로 그 의장석에 앉았는가?’ 그러자 김일성은 창 밖을 가리키며 회의장을 둘러싸고 있는 소련군을 보면서 ‘위대한 소련해방군 영도자가 나에게 이 회의를 주도하라고 명령해서 이 자리에 앉았다’고 했다. 즉 스탈린의 명령으로 그 자리에 앉았던 것이다.”

북한의 공산주의자들도 누군지도 모르는 새파란 젊은이가 모든 일을 주도하니 불만이 많았던 것 같다. 처음에는 김일성 본인도 자신이 소련의 대리인이 되어 소련이 시키는대로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당시 스티코프 등 소련군정 요인들은 박헌영보다는 국내 기반이 전무하여 100% 소련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만드는 것을 선호했지만 그의 교육 수준이 너무 낮아 당과 정부 운용 방침을 따로 교육시켜야만 했다.[86]

1945년 10월 14일 오후 1시 평양 기림리 공설운동장에서 개최된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소련군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Jing Zhichen) 대위"가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처음으로 대중들 앞에 나선 모습. 가슴에 소련군 적기훈장을 달고 있다. 김일성의 왼편은 소련군 강미하일 소좌 (소련의 고려인)이고, 뒷줄 소련군 장성들 중 맨 오른 쪽이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이다.
스티코프 당시 연해주 군관구 정치위원이 보낸 보고서에는 김일성은 "골수부터 뼛속까지 소비에트 사람이며, 자식들이 우리나라(소련)에서 태어난 빨치산"이라고 적혀 있다. 당시 박헌영과 같은 남로당 지도자들은 남한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소련군 관계자들의 신뢰를 받지 못했던 반면, 김일성은 당시 자신의 관저 바로 길 건너편에 있는 소련 대사관에 자주 놀러와 술을 함께 마시고 당구를 즐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의 교육 정도가 낮은 것이 문제가 돼 소련 군정은 재소 한인들을 불러 김일성에게 당과 정부 운용 방침을 교육시켰다.

전설의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을 사칭

해방 당시 국내에는 소련군 88여단에 조선인 빨치산들이 다수 있고, 특히 진지첸(김일성) 대위와 같은 인물이 있는 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이들에 대한 지지세력도 있을 수 없었다. 조선인들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생소한 인물을 지도자로 내세우기 위해서는 특단의 방안이 강구되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 고안된 방법이 조선인들 사이에 김일성 장군이란 이름이 유명한 것을 알고, 그 이름을 사칭하는 것이었다. 소련군 문서에는 1945년 10월 1일까지 김일성의 이름을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Jing Zhichen)으로 적다가 10월 2일부터 김일성(Ким Ир Сен, Kim Ir-sen)으로 바꾸어 적기 시작했다.[87][88]

이렇게 해서 소련군 진지첸 대위는 1945년 10월 14일 오후 1시 평양 기림리 공설운동장(현 김일성 종합경기장)에서 열린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전설의 항일 영웅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대중앞에 처음 나서게 된다. 물론 집회 자체도 소련군이 김일성을 데뷔시키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한 것이었고, 김일성은 소련군이 작성한 연설원고를 번역하여 읽었다. 아래는 1945년 10월 15일자 평양민보 창간호에 실렸던 연설문의 요지이다.[89]

김일성 장군(金日成 將軍)의 연설요지(演說要旨)
우리의 해방(解放)과 자유(自由)를 위하여 싸운 붉은군대에게 진심(眞心)으로 감사를 드린다.
36년간(三十六年間) 우리를 압박하던 일본제국주의(日本帝國主義)는 쏘련(聯)을 비롯하여 연합국(聯合國)에게 멸망을 당하였다. 우리 민족(民族)은 36년간(三十六年間)의 암흑생활(暗黑生活)에서 광명(光明)을 맞나 해방(解放)과 자유(自由)를 얻고 또 삼천리강산(三千里江山)은 찬연한 아침 햇발과 같이 희망에 빛나게 되었다.
조선민족(朝鮮民族)은 이제로부터 새 민주조선건설(民主朝鮮建設)에 힘을 합하여 나가야하겠다. 어떠한 당파(黨派)나 개인(個人)만으로 이 위대(偉大)한 사명(使命)을 완수(完遂)할 수는 없는것이다. 돈있는 者는 돈으로, 지식(知識)있는 者는 지식(知識)으로, 노력(勞力)을 가진 者는 노력(勞力)으로 참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민주(民主)를 사랑하는 전민족(全民族)이 완전(完全)히 대동단결(大同團結)하여 민주주의(民主主義) 자주독립국가(自主獨立國家)를 건설(建設)하자 !
조선독립만세(朝鮮獨立萬歲) !
쏘련(聯)군대와 쓰딸린 대원수(大元帥) 만세(萬歲) !
조선민족(朝鮮民族)의 굳은 단결(團結) 만세(萬歲) !

그러나 33세의 그가 1920년 경부터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이 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가 연설을 시작하자 청중들 사이에서 가짜라는 소동이 일어났다. 당시 김일성 지도자 만들기 정치공작을 진두 지휘했던 레베데프 소장의 후일 증언이다.[90]

김일센의 연설이 끝나자 군중들이 주석단 앞까지 몰려와 「가짜 김일성이다」며 소동을 벌였지요. 조금은 난감했습니다. 주최측은 군중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몽둥이를 휘두르기까지 했으니까요. 이같은 분위기를 잠재우기 위해 대회 후 기자들을 만경대 김일센 생가로 데리고 가 그의 조부모·숙부와 숙모 등 친·인척 모두를 소개했지요. 그랬더니 인민들의 여론이 가라앉는 듯했습니다.』

연설할 때 우리 말도 서툴고 잘 하지 못한다는 것이 드러나[91][92][93] 그는 데뷔 첫 날부터 가짜라는 꼬리표를 달게 된다.

하지만 오늘날의 한국 학계는 종북화되어 수많은 가짜라는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이 진짜가 맞다는 주장이 대세가 되어 있고, 소련군 무력의 도움으로 인민의 주권을 강탈해간 김일성 미화에 열심이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장

김일성은 1946년 2월 8일 북조선 임시인민위원장으로 선출되며, 이날 김일성은 중앙주권기관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연설을 하는데, 이는 사실상 북한 단독의 정부수립을 의미한다.

p.5 목전 정치형세(目前朝鮮政治形勢)와 북조선인민위원회(北朝鮮人民委員會)의 조직문제에 관한 보고(組織問題에 關한 報告)

이 연설문은 1963년판 "김일성선집"에 수정된 채 실렸다가, 이후 모두 회수 폐기되었다.[94] 북한이 먼저 단독정권을 수립했다는 증거를 없애기 위한 것이다.


2월 9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공식 출범하며, 이로서 북한에는 사실상의 정부가 수립되었다.[95][96][97] 물론 세세한 일 하나하나까지 소련군 민정청의 지시 감독을 받고, 주요 사항도 민정청이 결정했지만, 대외적으로는 주민을 상대로 임시인민위원회가 정부 기능을 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 이를 두고 친북학자들은 북한의 소련군정은 조선인을 전면에 내세워 간접통치를 했지만 남한의 미군정은 직접통치를 했으니 더 나쁘다는 식으로 주장한다. 소련과 김일성은 무슨 짓을 해도 정당하고 올바르지만, 미국은 하나같이 나쁜 일만 골라서 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소련이 이런 방식을 택한 것은 대외적으로 북한은 소련군 아닌 조선인이 통치한다는 인상을 심어주는 것도 있지만, 자신들이 대리인으로 내세운 김일성이 국내 기반이 취약하여 소련군정 기간 동안 권력기반을 충분히 다질 수 있도록 해 주는데에 주안점이 있었다. 김일성은 북한 주민들이 선택한 지도자가 아니라 소련이 권력을 쥐어준 꼭두각시 대리인이었다. 북한도 남한처럼 자유 경쟁구도로 갔더라면 북한지도자는 김일성 아닌 조만식이 되었어야 한다.


김일성이 북한 지도자로 선임된 데 대해 불만을 가진 박헌영 측이 소련에 집요한 이의를 제기하여 스탈린은 1946년 7월 초순 김일성과 박헌영 두 사람을 함께 모스크바로 불러 다시 지도자 면접 시험을 보지만 김일성을 그대로 최고 지도자로 정하고, 박헌영에게는 격려의 말만 해 준다. 처음부터 박헌영의 불만을 달래기 위한 요식행위였다.


1947년 2월 23일에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임시"라는 말을 떼어내고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출범하면서 김일성이 여전히 위원장을 맡는다.

남북분단의 현실화 과정

스탈린이 1945년 9월 초에 김일성을 북한지도자로 결정했다는 것은 이미 이때 북한을 분할 점령하여 통치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또 스탈린이 9월 20일에 극동군 사령부와 평양의 소련 25군 사령부에 "북한에 부르조아 민주국가를 건설하라"비밀 지령문을 내려보낸 것은 당시 북한 분할 통치를 확실히 결정하고 있었다는 명시적 증거이다.

  • 1945년 9월 20일 북한에 부르조아 민주국가를 건설하라는 스탈린의 비밀 지령[98]
  • 1945년 12월 25일 쉬킨 보고서 : 소련군 총정치국장 쉬킨(Iosif Shikin, 1906~1973)이 북한에 스탈린의 지령이 잘 이행되지 않고 있으므로 토지개혁 등 실행해야 할 구체적 방안제시[98][99]
  • 1946년 1월 5일 반탁입장을 굽히지 않고, 소련과 타협을 거부하는 조만식 선생을 고려호텔에 연금
  • 1946년 2월 9일 사실상 북한 정부인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출범
  • 1946년 3월 5일 소위 "무상몰수·무상분배"라는 토지개혁 단행 - 남북한의 이질화가 상당히 진행되어 통일정부 수립은 불가능해짐.

분단은 스탈린의 뜻에 의해 해방 직후 결정되어 있었고 1945년 말에는 돌이킬 수 없게 됨. 모스크바 3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이나 찬탁 반탁 운동, 미소공동위원회 등은 미군정과 남한 사회를 흔들어 놓기 위한 소련의 전략이나, 미국은 스탈린의 속셈을 알지 못해 말려들었음. 소련은 북한에서 일체의 반대 세력을 허용하지 않고 제거 또는 무력화 시키고 김일성을 내세워 공산화를 착실히 진행하고 있었음. 남한도 공산화를 수용하지 않는한 남북한 통일정부를 세울 수 있는 길이 없었음. 1948년 봄의 남북 협상은 김구, 김규식등 남한 인사들이 소련과 김일성에 놀아난 것임.

북한 정권 공식 출범

소련은 스탈린이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결정한 1945년 9월 초부터 북한 지역에 단독의 공산국가 수립을 계획하고, 소련군정 기간 동안 1945년 10월 10일 북조선 공산당 창설,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출범, 3월 토지개혁 등을 거치며 여러 가지 법령을 만들어 시행하는 등 국가의 형태를 갖추어 나갔다. 남한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부터 법령과 제도가 만들어지기 시작하나, 북한은 이미 군대와 헌법까지 만들고 국가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9월 9일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자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식 출범하지만[100][101], 이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일본 법정대(法政大) 교수 시모토마이 노부오(下斗米伸夫, 1948 ~ )는 저서 『아시아 냉전사(冷戰史)』(2004년)[57][58][59]에서 당시 공개된 러시아 문서를 많이 인용하면서 북한정권의 탄생이 철저하게 스탈린의 시나리오에 의한 것임을 밝혔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란 국호(國號)도 소련에서 작명한 것을 직역(直譯)한 것이고, 북한의 헌법도 1948년 4월 24일 모스크바 교외에 있는 스탈린 별장에서 스탈린, 몰로토프(1890~1986), 즈다노프(1896~1948)가 참석한 가운데 결정했으며, 이 자리에는 북한 요인은 한 사람도 참석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현대(現代) 러시아 역사가 안드레이 란코프는 '북한정권은 소련 제25군이 만든 괴뢰국가'라고 단정했다. 그는 동구(東歐) 공산국가를 만들 때보다도 소련의 역할이 더 절대적이었다고 분석했다.[58][102]


'국토 完整' 내세우며 무력 적화통일 공언 조선일보 2018.09.05


헌법도 스탈린이 제정. 초대 내각 각료 선정도 소련이 주도

6.25 남침

김일성은 북한 정권 공식 출범 6개월 후인 1949년 3월초 박헌영(朴憲永), 최용건(崔庸健), 홍명희(洪命憙) 등을 대동하고 모스크바를 방문한다. 그는 당시 스탈린에게 남한 적화를 위한 남침 전쟁의 승인과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 당한다.[103][104][105][106][107]


이후 48차례나 스탈린에게 전문을 보내 전쟁 승인을 요청한 끝에 마침내 허락을 얻어낸다.[108][109] 이를 두고 6.25는 김일성이 주도하여 일으킨 전쟁이라는 평가도 있는 반면에, 어린애가 위험한 놀이를 하게 해달라고 부모를 졸랐다고 해도 막상 사고를 당했을 때 책임은 이를 허락해준 부모에게 있지 어린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비유로 남침 전쟁을 주도한 인물은 스탈린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남한의 요인 납북

實錄(실록) 拉北(납북)인사들의 最後(최후) 前(전)북한정무원 부부장 申敬完(신경완)씨 증언 (1) 1991.10.01 동아일보 5면
實錄(실록) 拉北(납북)인사들의 最後(최후) 前(전)북한정무원 부부장 申敬完(신경완)씨 증언 (2) 1991.10.02 동아일보 5면
實錄(실록) 拉北(납북)인사들의 最後(최후) 前(전)북한정무원 부부장 申敬完(신경완)씨 증언 (3) 1991.10.03 동아일보 5면
實錄(실록) 拉北(납북)인사들의 最後(최후) 前(전)북한정무원 부부장 申敬完(신경완)씨 증언 (4) 1991.10.04 동아일보 5면
實錄(실록) 拉北(납북)인사들의 最後(최후) 前(전)북한정무원 부부장 申敬完(신경완)씨 증언 (5) 1991.10.05 동아일보 5면
「拉北(납북)인사들의 最後(최후)」책나와 1991.10.07 동아일보 10면 : 망명申敬完(신경완)씨「압록강변의 겨울」


정적 숙청과 김일성 유일체체 확립

김일성은 자신의 유일체제를 확립해가는 과정에서 직계인 만주 빨치산 출신자들만 제외하고 엄혹한 일제시대에도 살아남았던 독립운동가, 항일투사들을 거의 모두 처형한다. 처형을 면한 사람들도 투옥되거나 오지로 추방되어 비참한 말년을 보낸다. 해방 후 북한으로 간 이름있는 항일운동가 중에는 살아남은 사람이 거의 전무하다. 남한의 저명한 독립운동가들도 6.25 때 납북되어 비참한 운명을 마친 분이 많다. 그가 죽인 항일투사들은 일제가 죽인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친일파라도 도움이 되면 기용하고, 항일투사는 대부분 숙청했다. 이것이 그가 '친일파 청산을 철저히 했다'는 남한 좌파들 주장의 내막이다.

조만식 선생과 민족 진영 인사들 처형

김일성은 6.25 남침전쟁에서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왔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UN군과 국군이 평양으로 진격해오자 평양을 점령 당하기 직전에 1946년 1월 5일부터 고려호텔에 연금했던 조만식 선생과 다른 민족진영 인사들을 모두 총살하고, 달아난다.

박헌영과 남로당파 숙청

8월 종파 사건과 연안파, 소련파 숙청

1990년 동아일보에 『비화(秘話) 김일성(金日成)과 북한(北韓) : 전(前) 북한군(北韓軍) 사단(師團) 정치위원 여정 수기(呂政 手記)』를 연재 (총 18회).
비화(秘話) 김일성(金日成)과 북한(北韓) : 전(前) 북한군(北韓軍) 사단(師團) 정치위원 여정 수기(呂政 手記) <1> 1990.04.22 동아일보
비화(秘話) 김일성(金日成)과 북한(北韓) : 전(前) 북한군(北韓軍) 사단(師團) 정치위원 여정 수기(呂政 手記) <2> 1990.04.29 동아일보
비화(秘話) 김일성(金日成)과 북한(北韓) : 전(前) 북한군(北韓軍) 사단(師團) 정치위원 여정 수기(呂政 手記) <18> 1990.07.22 동아일보


갑산파 숙청과 김일성 유일체제 확립

1967년에 마지막 남은 파벌인 박금철 등 갑산파(甲山派)를 숙청하고 김일성 유일체제 확립하여 장남 김정일로의 후계 구도의 장애물을 모두 제거하였다.

폭압 통치와 연쇄적 대남 도발

갑산파 숙청으로 김일성 유일체제를 확립하고, 장남 김정일 후계 구도를 굳히는데 성공한 김일성은 군사력 강화를 위한 중공업에 치중하여, 민생 경제를 붕괴시키고, 잇다른 대남 무력도발로 남북간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월남전이 격화되고 한국이 월남 파병을 하자 북한군도 비밀리에 월맹에 파견하였다.

주요 대남도발 사건

평창 오대산 일대까지 북상하여 이승복 소년 일가 살해. 베트남에서와 같은 게릴라전을 시험해본 것으로 보임.
  • 1974년 8.15 기념식 행사장에 조총련 문세광이 침투하여 박정희 대통령 살해 시도 : 영부인 육영수 여사 피살
  •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 1977년 7월 백건우-윤정희 부부 납치 미수 사건[110]
  • 1978년 1월 신상옥-최은희 납북 사건[111]
영화광이었던 김정일이 주도


장남 김정일의 권력 강화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장남 김정일이 점차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여 김일성은 명목상의 지도자로 전락해 간다.

1983년 버마를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 살해를 시도한 소위 아웅산 사건을 일으켜 수행원 17명을 폭사케 한 것도 김정일이 주도한 것이다.

1984년 여름 남한이 큰 수해를 당하자 북한은 남한이 당연히 응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고 대외적인 생색용으로 쌀과 옷감 등 물자를 지원하겠다고 제안했으나, 예상과 달리 남한이 이 제안을 수용하자 크게 당황하여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지원을 거부하려다 입장이 옹색해지자 할 수 없이 상당량의 쌀과 옷감을 지원하게 된다. 당시 한국은 이미 수해 정도는 어렵지 않게 극복을 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북한의 지원을 받을 필요도 없었지만 이를 수용하여 북한의 허를 찌른 셈이되었다. 북한이 지원한 쌀은 싸래기가 많고, 옷감의 질도 좋지 않아 남북간의 경제 격차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리게 되자 김정일은 여러 국가들의 올림픽 참가를 방해하기 위해 김현희 등 2명의 공작조를 보내 귀국하는 중동 파견 근로자를 태운 KAL기를 폭파시켜 국제적인 공분을 샀다.

서울 올림픽에 대응하여 1989년 세계청년학생축전(世界靑年學生祝典, World Festival of Youth and Students)을 평양으로 유치하였으나, 별 중요성도 없는 행사에 과도하게 외화를 낭비하여 북한 경제는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기울어져 간다.

1994년 사망

김일성은 1994년 방북한 카터 전 미국대통령을 만나고, 김영삼 당시 대통령과 회담을 결정하고 이를 준비하던 중 7월 8일 심근경색으로 돌연 사망하였다. 그가 사망에 이른 것은 남북 정상회담 준비하느라 무리한 때문이라는 주장, 정상회담을 반대하던 김정일과의 불화로 김정일이 쓰러진 그에게 의료진의 접근을 고의로 막아 죽도록 방치했다는 설 등이 나돌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김일성의 처

1940년 4월 체포된 김일성의 처 김혜순으로 보이는 인물.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 사진과 함께 춤 잘추고 노래를 잘 불렀다는 김혜순으로만 나온다.

북한에서 공식적으로 내세우는 김일성의 처는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金正淑, 1917~1949)과, 후처 김성애(金聖愛, 1924 ~ ?) 둘 뿐이다. 그러나 다른 여자들과 결혼했던 사실도 확인 되며, 정식 결혼이 아닌 복잡한 여자 관계도 많았다.


한성희(韓聖姫)

김일성의 첫번째 처로, 김일성의 유격대 동료 한흥권(韓興權, 1912~1938)의 동생이라는 주장이 있다.[112][113]


김혜순(金惠順)

김혜순(金惠順)은 만주 유격대 시절의 처로, 1940년 4월 일본군에 체포되어 김일성과 헤어지게 되었다[114]. 나중에 다른 사람과 결혼하여 북한에서 살았다.[115] 1994년 김일성 사망 때까지 평양에 생존해 있었다.[116]


김정숙(金正淑, 1917~1949)

김일성이 만주서 소련으로 도주하기 직전인 1940년 가을에 결혼하였다. 장남 김정일(유라), 차남 슈라, 장녀 김경희의 생모이다. 김정숙(金貞淑)으로도 쓴다. 김일성은 김정숙 생전에 나중에 후처가 된 김성애와 바람을 피워 가정 불화가 심했다고 하며, 김정숙의 사인은 병사라는 설[117], 아기를 낳다 난산으로 죽었다는 설, 임신 중 김일성에게 배를 차여 죽게 되었다는 설[118] 등 여러 주장이 있으나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다.


홍영숙(洪永淑, 1923~?)

부수상 홍명희(洪命憙, 1888 ~ 1968)의 딸이며, 김정숙 사망 후 1950년 1월에 김일성과 결혼했으나[119][120], 결혼 초에 일찍 사망하여 김일성과의 결혼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홍명희는 월북하기 전에 쌍둥이 딸 주경(姝瓊), 무경(茂瓊)과 3녀 계경(季瓊)을 두고 있었다고 하므로, 김일성과 결혼한 사람은 쌍둥이 딸 중 한명일 것이나, 신문에 보도된 이름과는 왜 다른지 이유는 미상이다. 월북한 문인들이 대부분 숙청 당해 처형되거나 비참한 말로를 맞았지만 홍명희와 그 일가가 고위직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것도 그가 한때 김일성의 장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김성애(金聖愛, 1924 ~ ?)

처음 이름은 김성팔(金星八)이며, 김일성 타자비서 출신으로[120], 3남 김평일의 생모이다.[121]

김일성 연보

김일성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나 북한 간행 전기들이 조작이 많아 정확한 진실을 알기 어렵고, 아직도 잘 모르는 부분이 많다. 아래의 김일성 연보도 작성자에 따라 상당한 편차를 보이고, 잘못된 것들도 있다.

각주

  1. 이 날은 타이타닉(Titanic)호가 빙산에 부딪혀 침몰한 날이며, 북한은 이를 또한 김일성 우상화 선전에 이용하고 있다. 김일성 출생은 타이타닉 침몰보다 더한 재난이다.
  2. 2.0 2.1 「조선공산청년회 조직의 건(朝鮮共産靑年會 組織ノ件)」 1929년 5월 14일자 길림 총영사의 보고문
  3. 최형우(崔衡宇),《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海外朝鮮革命運動小史)》 제1집(第一輯) (漢城 : 東方文化社, 1945년 12월 10일) p.28
  4. 金日成은 나의 弟子다? 三八線 넘는 崔東旿氏談 민중일보(民衆日報) 1948/04/22
  5. 김응우와 샤만호격침기념비 자유아시아방송 (RFA) 2017-06-20
  6. 새전기「세기와 더불어」 허동찬씨의 분석 (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 : 20) 서울신문 1992. 12. 10
  7. 長白縣 檔案館 所藏 韓國史 關聯 檔案資料 槪況 대외 열람이 불가능한 자료이기는 하지만 金日成이 어린 시절 장백에서 학교를 다닐 때 학사기록부가 남아 있다.
  8. 北, '광복의 천리길' 답사 시작 dailynk 2005-01-23
  9. 김일성저작집1 p.361
  10. 한재덕(韓載德),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 빗나는 혁명가(革命家)의 집을 찻어서」, 『문화전선(文化戰線)』 창간호 (북조선예술총연맹, 1946.07.25) p.81
  11. 한재덕(韓載德),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 빛나는 혁명가(革命家)의 집을 찾어서」,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평양, 민주조선출판사, 1947.11.20) pp.67~68 ; p.110.
  12. 한재덕(韓載德),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21회) : 〈金日成(김일성) 直屬記者(직속기자)의 手記(수기)〉 동아일보 1962.05.24, 2면
    한재덕(韓載德), 『김일성을 고발한다』 (내외문화사, 1965) p.96
  13. 화성의숙 숙장 최동오(崔東旿, 1892∼1963)는 6.25때 납북 당했는데, 박정희 정권 때 외무장관을 지내고 1986년 월북한 최덕신(崔德新, 1914~1989)의 부친이다. 최덕신의 월북에는 부친과 김일성의 인연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14.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新文化社, 1974) pp.96~97.
  15. 허동찬(許東粲), 《조선전사》 現代篇의 分析·批判 > Ⅱ. 抗日武裝闘爭史(16〜22권)批判 > 1. 金亨稷 國史館論叢 第4輯 (국사편찬위원회, 1989)
  16. 허동찬(許東粲, 1932~ ), 《새전기 「세기와 더불어」의 분석 (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 : 39)》 서울신문 1993-02-23 5면
  17. 허동찬(許東粲, 1932~ ), 『김일성 평전 (金日成 評傳) - 허구와 실상』 북한문제연구소(北韓問題硏究所), 1987, pp.94~95
  18. 이명영, 《김일성 열전》 (신문화사, 1974) pp.97~98
  19. 19.0 19.1 김학규(金學奎, 1900~1967), 《백파 자서전(白波 自敍傳)》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집 (1988. 11) 부록(附錄) 자료 I(資料 I),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8년) p.7 (p.589)
  20. 이명영, 《김일성 열전》 (신문화사, 1974) pp. 107~108
  21. 東省朝鮮人農民總同盟組織에 관한 件 1930-06-25 일자로 길림(吉林) 주재 일본 총영사(總領事)가 외무대신에게 올린 보고서
  22. 朝鮮革命軍 吉江指揮部 宣言 口號 : 1930-09-20 일자 관동청 경무국장(關東廳 警務局長)이 작성한 보고문.
  23. 세화군(世火軍) 군정위원회(軍政委員會) 위원 김성주(金成柱) 외사경찰보(外事警察報) 제124호(1932년 11월)의 기사.
  24. 이종락(李鍾洛) 부하 김일성(金一成)이 체포 동아일보 1931-03-26 일자 2면기사.
  25. 이종락(李鍾洛) 부하 김일성(金一成)이 체포, 길림성 정부로 호송 동아일보 1931-05-04 일자 2면기사
  26.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新文化社, 1974) pp.122~124.
  27. 최형우(崔衡宇, 1905~1950),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海外朝鮮革命運動小史) 제1집(第一輯)》 (漢城 : 東方文化社, 檀紀 4278[1945]년 12월 10일 발행) p.31 : 동지들은 그의 장래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일성(一星)」이라는 아호(雅號)의 선물을 주었다.
  28. 國史館論叢 第4輯 > 《조선전사》 現代篇의 分析·批判(許東粲) > Ⅱ. 抗日武裝闘爭史(16〜22권)批判 > 4. 抗日遊擊隊 한국사데이타베이스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列傳) [新文化社, 1974]" pp.143~145
  29. 匪首, 金日成의 生長記 (二) 匪名『金日成』을 襲名 滿鮮日報 1940/04/18, 6면
  30. 이명영(李命英), 眞僞 金日成 列傳 (13) | 양세봉의 관용을 저버린 김성주 중앙일보 1974.04.24 종합 3면
  31. 31.0 31.1 31.2 秘話(비화) 金日成(김일성)과 北韓(북한) : 前(전) 北韓軍(북한군) 師團(사단) 정치위원 呂政(여정) 手記(수기) <1> 1990.04.22 동아일보 : 솔로킨 소장이 소르킨 정찰국장이고, 부르가예프 대장은 극동전선군(원동방면군) 사령관 Maksim Purkayev 대장이다.
    여정(呂政, 본명 강수봉), 『붉게 물든 대동강 : 前 인민군 사단 정치 위원의 수기』,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 1991.07.01
  32. 허동찬(許東粲), 『김일성 평전 [속] (金日成 評傳 [續])』, 북한문제연구소(北韓問題硏究所), 1988년 4월 1일.
  33. 33.0 33.1 33.2 동북항련 제1로군 월경인원 통계표(东北抗联 第一路军 越境人员 统计表), 《동북지구혁명역사문건회집(东北地区革命历史文件汇集) 1942年 - 1945年7月》 甲65卷, p.117 ;
  34. 34.0 34.1 34.2 (다시쓰는한국현대사) 38.만주서 소련으로 金日成의 越境 중앙일보 1995.08.01 / 종합 10면
  35. 항일군 3인 왜 일왕에 충성맹세 했나 오마이뉴스 2007.09.13
  36. 김창영(金昌永)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자료 (반민특위 조사 기록) 1949년 4~5월 / 김창영(金昌永, 1890-1967)
  37.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생장기(生長記)」 (전5회) 만선일보(滿鮮日報) 1940년 4월
  38. 《抗聯 第一路軍 略史》, 『東北抗日聯軍 史料(下)』, 東北抗日聯軍 史料 編寫組, 中國共産黨史 資料出版社, 1987, pp.665~679
  39. 중국어 원문 보기 : 《抗联第一路军略史》 东北抗日联军史, 哈尔滨市人民政府地方志办公室 (哈爾濱市人民政府地方志辦公室)
  40. 자료발굴 1942년에 김일성이 육필로 쓴 항일연군 제1로군 약사》 역사비평 1992년 여름호(통권 19호), 1992.5, 403-414 : 중국어 원문의 번역
  41. 《金日成의 自筆 빨치산 日誌》 金贊汀 新東亞. 390('92.3) pp.380-393 /東亞日報社
  42. <다시쓰는한국현대사>7.東北항일聯군활동기 金日成자필보고서 중앙일보 1995.02.20
  43. 유순호, 김일성 평전 (상) (지원출판사 2017.01.25) p.224
    해방되면 안도현장이 꿈이던 김일성 자유아시아 방송 (RFA) 2017-04-14
  44. 國境의 匪賊首魁 金日成 會見記 《삼천리(三千里)》 제9권 제5호 1937년 10월 01일
  45. 歸順한 女黨員과 金日成, 그의 運命은 장차 엇더케 될가 《삼천리(三千里)》 제10권 제11호 1938년 11월 01일
  46. 三千里 緊急 揭示板, 金日成 匪中에 武裝 女群, 拉致된 二十五名 無事히 돌아오다 《삼천리(三千里)》 제12권 제4호 1940년 04월 01일
  47. 金日成 중국에서 약탈,도둑질 일삼아 연합뉴스 1993-04-19 18:04
  48. 장해성, 인간의 운명 : (김일성의 여자, 김정숙 그리고 김혜순의 이야기) NK-PEN 2014-06-28
  49.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8권(계승본 2편, 1998년 출간): 1940년 3월 ~ 1945년 8월 / 제22장 혁명의 기치를 끝까지 고수하자 / 4. 1940년 가을
  50. (기행문)연해주 독립운동 발자취를 따라서 -4 대전 투데이 2015.09.09
  51. 고려인의 강제 이주 위키백과
  52. 52.0 52.1 金日成-한국전 관련 舊蘇비밀문건 요지 연합뉴스 1992-06-16
  53. Gavril Korotkov (1925~ )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동아일보사, 1993) 권1 p.162.
  54.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한울아카데미, 2008) pp.61~63, 제3장 제88정치여단
  55. 해방전 김일성은 소련에서 살고 싶어했다는 김씨 일가의 호위총사 리을설의 증언 자유아시아방송 (RFA) 2016-11-01 : 김일성은 낙후한 북한에 돌아오기보다 그나마 자본주의를 거친 소련에 남아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합니다.
  56. 가브릴 코로트코프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권1, 권2 (동아일보사, 1993) [권1 p.175~176]
    金日成-한국전 관련 舊蘇비밀문건 요지 연합뉴스 1992-06-16 : 45년 9월 모스크바는 승전의 축제분위기속에서 병력을 대폭 축소키로 함에따라 金日成은 아주 곤란한 입장에 빠졌다. 그가 소속된 88특수저격여단이 해체될 운명에 놓여 있는데다 고등교육도 받지 못한 그로서는 다른 부대로의 전출이나 진급을 바라보지 못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57. 57.0 57.1 下斗米伸夫, 『アジア冷戦史』 (中公新書, 2004年)
  58. 58.0 58.1 58.2 시모토마이 노부오(下斗米伸夫, 1948 ~ ) 저, 이혁재 역, 《기밀 해제된 구(舊)소련 공산당 정치국 사료로 본 북한 정권 탄생의 진실》 (기파랑, 2006년 01월 10일)
    (기밀 해제된 구 소련 공산당 정치국 사료로 본) 북한 정권 탄생의 진실 국립중앙도서관
  59. 59.0 59.1 시모토마이 노부오 저, 정연식 역, 『아시아 냉전사』, 경북대학교출판부, 2017년 10월 27일
  60. 60.0 60.1 美(미)정보전문 간행물 발표 "金日成(김일성) 항일투쟁은 조작" 1994.06.09 동아일보 5면
    KGB 비밀문서, 金日成 抗日투쟁 경력 일축 연합뉴스 1994-06-08
  61. 61.0 61.1 Christopher M. Andrew, ‎Oleg Gordievsky, More Instructions from the Centre: Top Secret Files on KGB Global Operations 1975-1985, (Psychology Press, 1992) pp. 78~79
  62. 62.0 62.1 김충석, 소련 극동군 제88여단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 북한 정치에서 제88여단파의 기원과 형성 역사연구 제30호, 2016.6, pp.50~55.
  63. 김일성은 소련 비밀경찰(NKVD)의 요원이었다! NewDaily 2015.12.02
  64. ◇金日成, 그는 누구인가 [수정보완] 연합뉴스 1991.03.21 (목) 오후 4:04 : "중국.소련등지로 망명한 北韓의 일부 고위간부들은 그가 KGB요원이었으며 蘇聯에 있을때 동료한인들의 言行을 蘇聯당국에 고해바쳐 소련인들의 신임을 얻었다고 전하고 있다."
  65. 김충석, 제88여단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연구 (북한대학원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6. 2)
  66. 秘話(비화) 金日成(김일성)과 北韓(북한) 前(전) 北韓軍(북한군) 師團(사단) 정치위원 呂政(여정) 手記(수기) <2> 1990.04.29 동아일보
  67. 가브릴 코로트코프(Gavril Ivanovich Korotkov)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권1, 권2)≫ (동아일보사, 1993) : 1권 pp.175~176.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 <1부> ⑤ 김일성은 소련군의 심사를 받았다 동아닷컴 2004-09-12
  68. 68.0 68.1 비록(秘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상, 하 2권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중앙일보사, 1992) - 하권 pp.202~204
  69. 69.0 69.1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한울 아카데미, 2008) pp.72-73
  70. 평양 소련군정 요원이었던 그리고리 메클레르(Grigory Konovich Mekler, 1909~2006)도 김일성이 귀국전 스탈린의 면접심사를 받은 것을 증언했다 : 김일성정권 내가 만들었다; 소련군 정치장교 G .메크레르의 증언 <對談> / 메크레르,G·惠谷治 極東問題. 159('92.5) pp.48-58. 極東問題硏究所
    Kim Il Sung's Soviet Image-Maker Moscow Times 07/22/2004
  71. Stanislav Levchenko / Ivan Kovalenko wikipedia
  72. [obituaries] Ivan Kovalenko, overseer of Soviet-Japan postwar relations, 87 2005.08.11
  73. 南北(남북)의 對话(대화) <46> 괴뢰 金日成(김일성)의 登場(등장) (5) 蘇軍(소군)과 金日成(김일성) 1972.01.25 동아일보 4면
  74. 曺圭河, 李庚文, 姜聲才, 「남북의 대화」 (서울, 고려원 1987) p.176"
  75. "나도 북침인 줄 알고 6·25 참전했어" 2009년 6월 20일 조선일보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상, 하 전2책,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편, 중앙일보사, 1992년) 상권 pp.72~74
  76. 한재덕(韓載德), 金日成將軍 凱旋記 : 빗나는 革命家의 집 p.84 - 『문화전선(文化戰線)』, 창간호, 북조선예술총연맹(北朝鮮藝術總聯盟) 1946.7.25 ; 이듬해 간행된 한재덕의 저서 『金日成 將軍 凱旋記』 (平壤, 民主朝鮮出版社, 1947.11.20)의 같은 글에는 김영환이란 가명을 썼다는 말이 삭제됨.
  77. 한재덕(韓載德), 김일성(金日成)을 고발(告発)한다 (27) 1962.06.01 동아일보 2면 [1959년 한국으로 귀순 후 쓴 글]
  78. 황장엽, 북한의 진실과 허위 (시대정신, 2006.04.15) p.134.
  79.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한울아카데미, 2008) p.77 : 레베데프와의 인터뷰 (모스크바, 1991. 6. 11)
  80. 김일성 대일 해방전 참가 못했다(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4) [중앙일보] 입력 1991년 08월 26일 종합 5면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상, 하 전2책,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편 중앙일보사/1992년) 상권 pp.77
  81. 이상조(李相朝)씨 - 신일철(申一澈)교수 대담(對談) : 8월 종파(宗派)사건 「반김(反金)세력」 제거 조작극(造作劇) 1989.09.18. 동아일보 5면
    김일성 정권의 수립과정: 소련군 첫 입성 자유아시아방송 2013-05-14
  82.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 > 1) 해방 후 북한 각 지역의 인민위원회 수립과 소련군 주둔 > (1) 소련군의 북한 진주 우리 역사넷
  83. 박갑동, 『박헌영 ─ 그 일대기를 통한 현대사의 재조명』, 인간사, 1983, p. 144~145
  84. 84.0 84.1 (49) 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 - 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 대립 중앙일보 1989.12.22 종합 5면
    『통곡의 언덕에서 : 남로당 총책 박갑동의 증언』 (서당, 1991년) p.136
  85. 개인숭배사상으로 청년, 지식인을 바보취급하지 말아야 RFA 2018-10-22
  86. [붉은왕조 증언요약] 소, 김일성에 강제로 북한 떠맡겼다 조선닷컴 : 1997/06/29
  87. 蘇(소),「6.25南侵(남침)」비밀文件(문건) 공개 1992.06.17 동아일보 2면
  88. 金日成-한국전 관련 舊蘇비밀문건 요지 연합뉴스 1992-06-16 18:15
  89. 金日成 將軍 凱旋記 / 韓載德 著. (平壤, 民主朝鮮出版社, 1947.11.20) : p.106
  90. 김일성 환영대회(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6) 중앙일보 1991년 09월 05일 종합 5면
  91. 金日成(김일성) 政權(정권)수립앞서「ML 주의」학습 / 당시 김일성大(대) 부총장 朴一(박일)씨가「교육」 동아일보 1991.08.14. 4면
  92. 金日成, 정권수립 앞서 ML주의 교육받아 연합뉴스 1991-08-14
  93. 김재순(金在淳, 1923~2016) 전 국회의장의 증언 : 南北(남북)의 對话(대화) (13) 老革命家(노혁명가)들의 꿈과 좌절 (13) 南北協商(남북협상)과 나 (上) 1971.10.30 동아일보 4면 / "曺圭河, 李庚文, 姜聲才, 남북의 대화 (서울, 고려원 1987), 초간은 (한얼문고, 1972)
  94. 김일성, 1945년 말부터 북한 단독 정권 준비했다 최영재 기자, 아시아 투데이 2015. 04. 20 : 1946년 2월 8일 임시인민위원회 출범일날 김일성의 연설 - 회수 폐기.
  95. 임시인민위원회 구성원 : 북한연표 해설목록 국사편찬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96. 北朝鮮臨時人民委員會 조직, 인민정부 진용 자유신문 1946년 02월 20일
  97. 북선위원회진용(鮮委員會陣容) 공업신문 1946.02.21 1면
    北朝鮮 臨時人民委員會 樹立, 委員長 委員二十五人等 部署決定 중앙신문, 1946.02.20
  98. 98.0 98.1 <제40회 이승만 포럼> 원문으로 본 그 비밀의 정체 : 스탈린 지령문 "북한에 소련체제 이식은 이렇게 하라" New Daily 2014.06.24
    <제40회 이승만 포럼> 북한의 소련 체제이식은 동유럽의 경우와 어떻게 달랐는가? New Daily 2014.06.21
  99. 구소 북 장악음모 “결정적 자료”/쉬킨중장 비밀보고서 내용·의미 한국일보 1995.08.14
  100. 北韓人民共和國(북한인민공화국) 首相(수상)에金日成氏(김일성씨) 1948.09.10 동아일보 1면
  101. 北韓組閣完了(북한조각완료) 동아일보 1면 1948-09-11
  102. 조갑제, 소련에 충성했던 김일성 : 김일성은 抗日무장투쟁을 했지만 조선독립운동은 하지 않았다. 2008-09-06
  103. 北(북), 南侵(남침) 48년부터 준비 1992.08.19 동아일보 1면
  104. "南侵(남침)준비는 48년부터" 1990.06.23 경향신문 13면
  105. March 05, 1949 Meeting between Stalin and Kim Il Sung Wilson Center Digital Archive
  106. 北韓代表(북한대표)의 名簿(명부) 1949.03.06 경향신문 1면
  107. 蘇(소)에 借款要求(차관요구) 北韓代表派遣(북한대표파견) 1949.03.06 동아일보 1면
  108. Kathryn Weathersby, “New Findings on the Korean War”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Bulletin, 3 (Fall 1993), p.14: This was Kim Il Sung’s war; he gained Stalin’s reluctant approval only after persistent appeals (48 telegrams!).
  109. 소련, “남침 준비 부족, 게릴라전 주력하라”, KBS 2010.06.24 (22:03)
  110. [안치용 大기자의 발굴특종] 백건우-윤정희 북한납치 미수 사건 외교문서 단독 공개 Sunday Journal USA 2017/07/20
  111. [단독] 최은희 신상옥 납치 경위 담은 1984년 안기부 문건 월간조선 2018.04.17
  112. 증언 김일성을 말한다 : 유성철(俞成哲)·이상조(李相朝)가 밝힌 북한정권의 실체, (한국일보 편, 한국일보사, 1991) pp.69~70
  113. 유순호, 『김일성 평전 (상권)』, (지원출판사, 2017)
  114.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처 김혜순이 체포되어 전향했다는 1940년 7월 5일자 조선일보 기사.
  115. 장해성, 인간의 운명 : (김일성의 여자, 김정숙 그리고 김혜순의 이야기) NK-PEN 2014-06-28
    [생생토크 평양수다] 北, 크리스마스 어떻게 보내나? TV조선 2013. 12. 25 : 김일성 전처 김혜순에 대한 장해성의 이야기가 나옴.
  116. 문명자(1930 ~ 2008), 《항일무장투쟁 여전사 박정숙, 김혜순 인터뷰 : 나의 사령관 김일성 장군》 월간 말 1994년도 9월호(통권 99호), 1994.9, pp.46-48
  117. 6.25北(북)에서 본 證言(증언) <16> 제4부 開戰準備(개전준비) 진행 (1949년) 1980.07.03. 경향신문 3면
  118. 김일성에게 배를 걷어차여 숨진 본처 김정숙 premium.chosun 2014.09.24
  119. 홍명희(洪命熹) 맏딸과 김일성(金日成) 재혼(再婚) 연합신문(聯合新聞) 1950.01.25
    김일성(金日成)이 재혼(再婚), 홍명희(洪命熹) 맏딸 영숙(永淑)과 자유신문 1950년 01월25일 2면 10단
    김일성(金日成) 재혼(再婚) 한성일보(漢城日報) 1950.01.25
    깨여지는 괴뢰(傀儡)의 백일몽(白日夢) 치열화(熾烈化)한 반소반공운동(反蘇反共運動) 1950.01.25. 경향신문 2면
    History of the North Korean Army U.S. Army Far East Command, July 31, 1952; 원문 pp.90~91 (pdf pp.144~145) : In January 1950, he (KIM Il Sung) is said to have married a daughter of HONG- Myong Hui, a Vice Premier of the North Korean Regime.
  120. 120.0 120.1 金日成 전속 간호부 趙玉姬, 체포 후 기자회견 부산일보 1951년 03월 01일
  121. 통일부, 김정일 의붓어머니 김성애 사망설에 "동향 있다" 경향신문 2018.12.12